중국혁명 삼국지 1
김정태 지음 / 일월서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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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국의 의미는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쌍방간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문명의 태동에서 고대국가시기를 거치면서 중국과 요동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을 지배했던 우리와 관계는 사실상 근대라는 시기가 도래하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삼국시대이전의 시기는 강역적인 면에서 모호한 관계를 형성했고 그 이후론 사실상 문화적으로 그 경계를 구분짓기가 모호하다면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에게 친근하다. 특히 중국역사를 우리만큼 잘알고 있는 외국인들도 중국입장에서 보면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본토인 중국보다 대한민국에서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고 이런한 삼국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비교검토하는 책자만 해도 엄청나게 출간되고 읽혀지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중국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을 필두로 하는 역사왜곡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 역사와 중국역사 바로알기라는 명분이 많은 사람들을 자극시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중국역사의 최종점을 찾으라고 하면 청조의 멸망까지를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 좀더 나아가면 장제스와 마오쩌뚱의 국궁합작과 분열로 인해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나뉘는 과정까지일 것이다. 그나마 이 부분은 우리의 독립항쟁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라 교과서를 비롯한 공식적인 주입이 있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이후의 과정은 냉전이라는 절대이데올로기시대를 거치면서 알아서는 안되는 금역으로 간주되었고 그러나 영향이 고스란히 지금까지 이어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물론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뒤을 이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시대에 도래해서야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혁명 삼국지>는 다름 아닌 청말시대부터 문화대혁명직전시기까지의 비화를 다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에 한제국의 멸망과 그에 따른 조조,유비,손권,제갈량,원술등의 걸세출의 영웅들이 천하을 할거했다면 이 시기에도 쑨원,위안스카이,장제스,마오저뚱,린바오등의 영웅들을 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역사의 공통점인 것 같다. 단지 한말의 삼국지는 전제국가에서 전제국가로 실질적인 왕조의 명칭만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되지만 청조말의 시대에는 천하가 개벽할 새로운 사조가 이런 영웅들의 패권집착에 한층더 탄력을 받게 한다. 그간의 절대전제국가 시스템의 종말과 동시에 민주와 평등 그리고 인민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중국은 그야말로 열광과 절망이 뒤섞인 도가니속으로 접어들게 된다.  

변증법적인 역사발전과정의 가장 대표적예가 근현대사의 중국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이들 영웅들을 대표하는 중국의 치열한 근현대사는 많은 점을 안고 있다. 그 땅덩어리에 비례한 어마어마한 민중의 희생을 기반으로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지만 역시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민의 위상이 과연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 했는가에 대해선 향후 전개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권력다툼을 보면 의구심이 가기 마련이다.
여하튼 이번 책은 중국의 근대국가의 탄생과정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상당한것 같다. 여기저기 나오는 각종인물들과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화들 그리고 최고층사이의 권력암투등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점을 보여주고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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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참하라 - 하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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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사학자인 필자의 <<왕을 참하라>>는 조선통사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통사와는 사뭇 다른 시각에 저술된 역사서이다. 그동안 조선사를 군주내지는 권력층의 시각에 바라봤다면 이번 시각은 조선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조선통사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왕을 참하라>>를 읽고 느끼는 감정은 통쾌함과 서글픔이라고 해야겠다. 
우선 통쾌함이란 학창시절 역사 시간을 통해서 배웠고 각종 역사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조선사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사유를 송두리채 흔들었다는 점(그렇다고 필자가 말하듯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신화나 소설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과 그 어느 역사서에서 볼수 없는 필자만의 거침없는 언어선택(죽일놈의 왕, 견공지자제분등)나 역사서에는 일종의 금기로 여겨지는 필자의 감정이입등이 마치 읽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의 기쁨을 주고 있다. 물론 조선시대이래로 당당한 양반가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들이 보기엔 무척 당혹스럽고 소위 말해서 열이 받게지만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는 정말 통쾌함을 감출수 없다.

두번째는 서글픔이다. 이점은 필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조선사 500여년을 통틀어 27명의 군주중에 세종과 정조를 제외한 세월은 일반 민중에겐 암흑같은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역사를 인식하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고는 고정된 관념에서 역사를 보아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면보다는 부각되는 부분을 더 조명하게 되고, 군주와 사대부층을 중심으로 보는 역사적 관념이 거의 도식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일반민중에 대한 역사적 배려나 인식은 소홀히 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 이번 책을 읽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이 서글프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측면에서 <<왕을 참하라>>는 책 제목처럼 상당한 반향을 불러 오리라 여겨진다. 조선의 역대 군주 27명에 대한 평가나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들의 무능과 부패등 그들의 치부를 고스란이 들어내고 있고, 민란등을 통한 일반 백성들의 삶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필자의 집필의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단지 몇가지 점에서 필자의 의도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은 절대군주의 나라인 왕조국가이다. 군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층 일부가 국가전체를 이끌어 가는 구조이다. 이는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역대 왕조국가의 공통된 특징이다. 이러한 구도를 부정하고 소위 우리가 말하는 만인이 평등한 국가라는 개념은 최근래에 들어선 국가개념일 뿐인 것이다. 사회구조가 이러하다 보니 역사적인 서술방식에서 일반 백성의 반영비율을 떨어질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일부 권력층의 시각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후대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행간을 읽을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필자의 집필의도는 아마도 이 책을 대략 몇페이지 만 읽어봐도 알수 있을 만큼 그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뉘양스(그러니까 군주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민중과의 관계 설정에서 너무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설정했다는 점)와 필자 개인의 감정이입이 책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이 실려있다는 점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조선사를 읽고 있노라면 입에서 좋은 소리나올 경우는 드물다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 만큼 안타까운 장면도 수없이 많고 필자의 표현처럼 입에서 개거품물고 싶은 장면 또한 많은 것이 조선사이다. 오죽하면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만큼 가정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필자가 평가하는 세종이나 정조에게도 적지 않는 부분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담지 못했던 면을 총대를 메고 만천한에 고한점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자칫하면 오류의 함정에 빠질수도 있다는 점이 심히 걱정된다. 특히 역사에 대해 아직까지 제대로된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 청소년이나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편협된 시각의 역사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좌,우 두눈의 균형감각으로 통해서 봐야함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우리가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은 과거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미래의 바탕이 되고함임을 잊이 말아야 할 것이다.

조선사는 필자의 말대로 수탈의 역사라고 해도 틀린것은 아니다. 왕조국가에서 당연히 민중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구조인 것이다. 세계사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 유지되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생하였겠는가 이는 말안해도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조선사 또한 엄연한 우리의 역사라는 점에서 이제는 더이상 감출 필요 없는 성숙된 역사인식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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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1 - 문종에서 소현세자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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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법률용어중에 미필적고의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가 왕을 죽인것이다.
왕을 죽이고도 안죽인척 하는 이들, 뻔히 왕을 죽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들, 역사에 그런적은 없다는 가르치는 이들, 그말을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잊어버린 이들. 바로 이들 모두 우리가 왕을 죽인것이다. 아니 역사를 죽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말안듣는 이단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님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그동안 항간에 떠돌던 야담수준이라고 일축했던 조선왕들의 독살설혐의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의 그동안 저술행위으로 보아선 이들 정통학자들에겐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저술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의 역사적 사초에 의거하여 어느 왕이 어떻게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야사나 야담수준의 내용을 좀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하면는 오산일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저작에서 일관되게 피력하고 있는 사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역시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암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얼마전 정조대왕의 어찰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이 나라의 강단학계는 또다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네들의 주장은 바로 발견된 정조어찰이 정조독살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증거이고 정조독살설은 산간시골에서 떠돌던 야담이었다고 일축했다. 정조독살설 부정함으로서 재야학계의 연구자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는 한바탕의 해프닝을 결론지어 졌지만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해방된지 60년인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식민사관에 대한 그 뿌리가 대단함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라고 본다.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부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중기부터 내려온 노론적인 입장에서의 역사관과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식민사관이 만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금까지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정통사관에서 보면 당연히 조선시대에 국왕의 독살설은 부정된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었도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관을 우리는 그대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번 <조선왕 독살사건>의 완결판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런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강요하게 하는 그 이면을 엿볼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독살의혹을 뛰어넘어 우리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는 큰 숙제인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조선왕 독살사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유독 군왕의 독살설이 많은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500여년을 넘게 장수한 왕조이다. 역대 군왕만 태조를 시작으로 27명이 제위에 올랐던 국가였다.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군왕과 차기 대권주자가 독사설에 휘말려 있는 왕조 또한 세계사를 통틀어 조선왕조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과반수에 가까운 독살설 음모속에서도 500여년이라는 기간을 유지한 왕조 또한 눈을 씯고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면에서 조선왕조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정권교체의 불안정속에서도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자연히 든다. 바로 이점이 군왕의 독살설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여말선초시대에 부패한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뭉친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둘은 권력창출을 위해서 이와 잇몸 같은 존재였고 상호간에 확실한 대의명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이라는 국가는 시작부터 왕권과 신권에 대한 상호간에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태종의 왕권이 정도전의 신권에 판정승하게 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군주에게 이러한 일련의 왕권강화조치는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선초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등의 독살설 의혹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가장큰 시각차이는 다름 아닌 사대부는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사대부중의 제1일자로 간주했고 국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정치적 여건이 안정적일 때는 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으나 약간의 흔들림(이는 사대부에서 공신으로 둔갑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 질 경우)이 있을때는 국왕을 배제한 사대부들의 강력한 단결력을 이끌어 낸 신조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택군론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대권을 노리는 정치세력과의 결탁도 한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멸망때 까지 계속된다. 차이점이라고는 신권의 중심세력이 공신, 훈구세력에서 배제되었던 또 다른 사대부들(사림들)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심세력의 권력이동은 많은 점에서 조선초기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사림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성리학의 기수들이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정신무장한 그들의 대의명분은 그동안 훈구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비해 많은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의라는 큰 범주내에서 보다 확실하면서 적극적으로 왕권을 견제하였던 것이다. 

훈구세력의 몰락이 가져다 준 정치판은 사림들의 분당과 당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이제는 대놓고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많은 국왕과 차기대권주자가 독살설 이나 반정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들은 국왕보다 같은 당파 당수의 의견을 절대시하였다. 그런 당파성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대군주까지 교체해 버릴 정도로 대범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보듯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군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 어떠한 정책이나 인물(그가 비록 군왕이라고 하더라도)은 철저히 제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면에 그들의 정신적 모태인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대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태조 이성계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지하에서 목놓아 후회를 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힘이 클 수 밖에는 없는 태생적 구조를 가졌던 것이 국왕에 대한 많은 독살설 의혹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이후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더욱더 독살설에 대한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효종의 경우 치세기간 동안 캐치플레이었던 북벌의 잔재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행위나 정조의 개혁정치 역시 정조 사후의 반동정치에서 보듯이 국왕사후에 철저하게 선왕의 치세를 지우는 작업을 최우선시 했다는 점이 다름 아닌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조선멸망의 근본원인이 무능한 몇몇의 군주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는 100%로 신뢰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보왔듯이 조선의 군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유일하게 태종 이나 숙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왕도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가 없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은 세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종도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정책실현에 길게는 18여년이 걸린적이 있을 정도?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왕권과 신권의 줄달리기가 성립해서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단일왕조로 장수를 했던 비결중에 하나라고 하면 그나마 위안거리일 것이다.  

<조선왕 독살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조선왕 독살사건>을 통해서 통찰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각론적인 역사적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정조대왕의 어찰(편지)이 발견되면서 학계와 언론은 흥분의 도나기속에 빠졌다. 그동안 재야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정조 독살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근거가 어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모처럼 재야에 대한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뒤로 저자의 주장에 의해 독살설이 더욱더 힘을 얻게 되므로서 지금은 아주 조용한 때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점이 아주 큰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각론적인 관점에서 부터 시작된 왜곡된 사관이 결국 한국사라는 크나큰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에게는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국사교과서를 봐도 알 수 있고, 한나라의 역사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국립박물관에 가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통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잘못된 점을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지적해 왔다.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에서 부터 작게는 여인열전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식민사관의 제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저작 역시 저자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독도의 영유권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할때면 나라전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시간만 지나면 언제그랬냐듯이 조용해진다. 그러는 동안 역사왜곡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왜곡은 다름아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사에 대해서 일가견 있다는 학자들이 자국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역사를 과연 세계의 그 어떤 나라가 인정해 주겠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왜곡에 대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에 대한 위해사건은 얼마든지 있었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감이 커지는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행간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바로 그 행간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그동안 가려왔다고 하면 이는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관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저서임에 틀림없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창공을 나는 새에게는 오른쪽날개와 왼쪽날개가 있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어느 한쪽 날개로는 날수없는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를 재단하는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한쪽 날개에 의존한 역사비행을 했다면 이제는 정말 올바른 역사비행을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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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 독살사건 2 - 효종에서 고종까지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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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법률용어중에 미필적고의라는 말처럼 우리 모두가 왕을 죽인것이다.
왕을 죽이고도 안죽인척 하는 이들, 뻔히 왕을 죽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이들, 역사에 그런적은 없다는 가르치는 이들, 그말을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잊어버린 이들. 바로 이들 모두 우리가 왕을 죽인것이다. 아니 역사를 죽인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말안듣는 이단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님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그동안 항간에 떠돌던 야담수준이라고 일축했던 조선왕들의 독살설혐의에 대해서 많은 점을 시사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의 그동안 저술행위으로 보아선 이들 정통학자들에겐 상당히 눈에 거슬리는 저술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타의 역사적 사초에 의거하여 어느 왕이 어떻게해서 독살설의 가능성이나 개연성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야사나 야담수준의 내용을 좀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생각하면는 오산일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저작에서 일관되게 피력하고 있는 사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역시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암시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 독살사건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얼마전 정조대왕의 어찰이 새로이 발견되면서 이 나라의 강단학계는 또다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네들의 주장은 바로 발견된 정조어찰이 정조독살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증거이고 정조독살설은 산간시골에서 떠돌던 야담이었다고 일축했다. 정조독살설 부정함으로서 재야학계의 연구자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는 한바탕의 해프닝을 결론지어 졌지만 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해방된지 60년인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식민사관에 대한 그 뿌리가 대단함을 보여 주는 사례일 뿐이라고 본다. 

저자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사관에 대한 부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중기부터 내려온 노론적인 입장에서의 역사관과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식민사관이 만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금까지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정통사관에서 보면 당연히 조선시대에 국왕의 독살설은 부정된다. 아니 있을 수도 없고 있었도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관을 우리는 그대로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번 <조선왕 독살사건>의 완결판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런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강요하게 하는 그 이면을 엿볼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독살의혹을 뛰어넘어 우리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는 큰 숙제인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조선왕 독살사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유독 군왕의 독살설이 많은 나라가 조선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500여년을 넘게 장수한 왕조이다. 역대 군왕만 태조를 시작으로 27명이 제위에 올랐던 국가였다.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거의 과반수에 가까운 군왕과 차기 대권주자가 독사설에 휘말려 있는 왕조 또한 세계사를 통틀어 조선왕조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과반수에 가까운 독살설 음모속에서도 500여년이라는 기간을 유지한 왕조 또한 눈을 씯고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면에서 조선왕조는 대단히 아이러니한 국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정권교체의 불안정속에서도 긴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자연히 든다. 바로 이점이 군왕의 독살설과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이라는 국가 태생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여말선초시대에 부패한 왕조에 대한 반동으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뭉친 신진사대부들과 이성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둘은 권력창출을 위해서 이와 잇몸 같은 존재였고 상호간에 확실한 대의명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이라는 국가는 시작부터 왕권과 신권에 대한 상호간에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태종의 왕권이 정도전의 신권에 판정승하게 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군주에게 이러한 일련의 왕권강화조치는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선초기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등의 독살설 의혹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가장큰 시각차이는 다름 아닌 사대부는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사대부중의 제1일자로 간주했고 국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동상이몽을 꿈꾸면서 정치적 여건이 안정적일 때는 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으나 약간의 흔들림(이는 사대부에서 공신으로 둔갑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 질 경우)이 있을때는 국왕을 배제한 사대부들의 강력한 단결력을 이끌어 낸 신조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택군론에 의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게 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차기대권을 노리는 정치세력과의 결탁도 한 몫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멸망때 까지 계속된다. 차이점이라고는 신권의 중심세력이 공신, 훈구세력에서 배제되었던 또 다른 사대부들(사림들)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심세력의 권력이동은 많은 점에서 조선초기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다. 사림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정통성리학의 기수들이었다. 성리학으로 철저히 정신무장한 그들의 대의명분은 그동안 훈구세력의 정치적 행보에 비해 많은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의라는 큰 범주내에서 보다 확실하면서 적극적으로 왕권을 견제하였던 것이다. 

훈구세력의 몰락이 가져다 준 정치판은 사림들의 분당과 당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고 이제는 대놓고 왕권에 대한 위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수많은 국왕과 차기대권주자가 독살설 이나 반정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들은 국왕보다 같은 당파 당수의 의견을 절대시하였다. 그런 당파성에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대군주까지 교체해 버릴 정도로 대범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저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보듯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군왕의 나라가 아니라 노론의 나라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 어떠한 정책이나 인물(그가 비록 군왕이라고 하더라도)은 철저히 제거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면에 그들의 정신적 모태인 성리학의 왕도정치 실현이라는 대의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태조 이성계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지하에서 목놓아 후회를 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힘이 클 수 밖에는 없는 태생적 구조를 가졌던 것이 국왕에 대한 많은 독살설 의혹을 낳게 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이후의 정치적인 행보를 보면 더욱더 독살설에 대한 혐의를 둘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효종의 경우 치세기간 동안 캐치플레이었던 북벌의 잔재를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행위나 정조의 개혁정치 역시 정조 사후의 반동정치에서 보듯이 국왕사후에 철저하게 선왕의 치세를 지우는 작업을 최우선시 했다는 점이 다름 아닌 그들의 행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조선멸망의 근본원인이 무능한 몇몇의 군주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는 100%로 신뢰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앞서 보왔듯이 조선의 군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유일하게 태종 이나 숙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국왕도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갈 수 가 없었다. 한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군주로 추앙받은 세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종도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정책실현에 길게는 18여년이 걸린적이 있을 정도?정적으로 보면 이러한 왕권과 신권의 줄달리기가 성립해서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단일왕조로 장수를 했던 비결중에 하나라고 하면 그나마 위안거리일 것이다.  

<조선왕 독살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조선왕 독살사건>을 통해서 통찰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각론적인 역사적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정조대왕의 어찰(편지)이 발견되면서 학계와 언론은 흥분의 도나기속에 빠졌다. 그동안 재야에서 줄기차게 주장했던 정조 독살설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근거가 어찰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 하면서 모처럼 재야에 대한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뒤로 저자의 주장에 의해 독살설이 더욱더 힘을 얻게 되므로서 지금은 아주 조용한 때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점이 아주 큰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각론적인 관점에서 부터 시작된 왜곡된 사관이 결국 한국사라는 크나큰 정체성에 대한 위기로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통사학계에게는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국사교과서를 봐도 알 수 있고, 한나라의 역사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국립박물관에 가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장해도 통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잘못된 점을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서 지적해 왔다. 우리의 잃어버린 상고사에서 부터 작게는 여인열전에 이르기 까지 그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식민사관의 제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번 저작 역시 저자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독도의 영유권문제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대할때면 나라전체가 들썩거린다. 그러다가 시간만 지나면 언제그랬냐듯이 조용해진다. 그러는 동안 역사왜곡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왜곡은 다름아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자국사에 대해서 일가견 있다는 학자들이 자국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역사를 과연 세계의 그 어떤 나라가 인정해 주겠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은 이러한 역사적 왜곡에 대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에 대한 위해사건은 얼마든지 있었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떠한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은 하늘과 땅차이만큼 거리감이 커지는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행간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바로 그 행간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그동안 가려왔다고 하면 이는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올바른 눈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관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저서임에 틀림없다. 

누가 왕을 죽였는가? 왜 그들은 왕을 죽였는가?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창공을 나는 새에게는 오른쪽날개와 왼쪽날개가 있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지만 어느 한쪽 날개로는 날수없는 것이다. 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를 재단하는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한쪽 날개에 의존한 역사비행을 했다면 이제는 정말 올바른 역사비행을 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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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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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정확히 27명의 군주가 그 명맥을 이어온 세계사 유래 없는 단일 장수 왕조이다. 이 비결에 대해서 후대의 평가는 다양하다. 절대왕권국가가 아니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논거 그러니까 왕과 사대부가 적절하게 권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는 설, 또한 타왕조 국가에 비해 철저한 세자교육이 있었고 그로 양성된 군주에 의한 치세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첫번째 논거에는 수긍이 가지만 두번째 세자제도에 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확히 왕의 숫자만큼 왕의 후보라고 할 수 있는 세자 역시 27명 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이들 세자중 자연사할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올랐야 했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중 15명만이 최고의 권좌에 등극하였을 뿐 나머지 12명이라는 많은 이들이 보위에 등극하지 못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 병사가 그 원인이었지만 그중에 반정으로 폐세자된(연산군 아들과 광해군 아들) 경우와 독살의혹이(소현세자와 효명세자) 있는 경우 그리고 의문의 죽음(사도세자)을 당해서 보위에 오르지 못한 경우도 있다.  
<왕이 못 된 세자들>은 바로 보위에 오르지 못한 12명의 세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엇 때문에 이들은 보위를 잇지 못했던 것인가? 조선시대의 세자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차기의 지존이라는 뜻에서 國本이라고 지칭했고, 세자의 교육을 위해서 별도의 독립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주도하에 철저하게 제왕수업을 받아야 했다. 왕비나 후궁의 임신에서 부터 지존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까지 조선최고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씽크탱크에 의해서 차근차근 제왕의 자질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성리학에 근간을 둔 조선사회의 왕도정치 이념의 실현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과정이었고 세자인 이상 이러한 절차는 필수요건이었다. 그만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자의 지위는 과연 부왕의 다음 자리에 해당할 정도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이 가는 점이 있다. 세자라는 제도가 결국 제왕수업을 얼마큼 제대로 습득하느냐에 따라 언제든지 흔들릴수 있는 가변적인 위치였던 것이다. 때론 부왕의 정적으로 때론 신하들의 들러리로 이용될 소지가 많았던 것이다. 어찌보면 세자의 자리는 권력이라는 최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태풍의 눈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들이 보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조선이라는 제도적 모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도정치실현을 위한 철저하게 성리학으로 무장하지 못하는 대권후보는 자연도태되었던 것이다. 비록 이러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보위에 올랐다 해도 생활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자를 거치지 않거나 그러한 기간이 짧았던 군주들의 치세가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너무 일찍 권력의 진실을 알아버린 탓에 신경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니였을까 싶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역사는 그 시초부터가 불행하다. 조선 최초의 세자(이방석)부터가 권력파워에서 밀려나 비명횡사 하면서 조선은 세자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길한 징조는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들의 공통점은 마지막 영친왕양녕대군을 제외하고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혹은 자연적인 병사이든 타살의 의혹이든 제명을 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최대의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이 뒤받침하는 세자양성과정에서 그 낙오자의 비율이 이처럼 높았다는 것은 바로 세자의 지위가 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 그리 튼실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 자체로서 조선왕실은 대단히 불행한 왕실이었다는 뜻도 된다. 조선은 내내 세자흔들기를 하였다. 이방석의 죽임, 앙녕의 중도하차, 계유정난을 통해서 보위에 올랐으나 정작 자신의 아들(의경세자)은 단명을 하게 되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반정에 성공하였으나 아들(소현세자)을 죽음으로 몰고, 선왕의 독살설에 연루되어 보위에 오르고도 부족하여 아들(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치하는 등 끊임없는 잡음과 소란속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 조선왕실의 역사이다. 불교의 인과응보처럼 그러한 정당성을 결여한 보위계승은 끝내 자손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 결말이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종반정 이후 왕실의 손이 갑작스럽게 귀해지는 부분(이점은 이후 조선의 폐망까지 이어진다)이나 부자간의 권력대립이라는 극한상태를 연출하는 것을 볼 때 한낮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다. 그나마 의경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의 경우는 후에 왕으로 추존되는 것으로 그 울분을 달랬을까... 

이들 세자중에서 주목받는 이가 바로 소현세자효명세자일 것이다. 특히 이들은 타살이라는 의혹이 후대에 이르기 까지 의견이 분분하여 그 안타까움을 배가 시킨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그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이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조선의 중흥을 이끌수 있는 어찌보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현세자나 효명세자의 역사적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았을때 성군의 자질이 충분하였다는 점이 더욱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보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이미 물이 새기 시작한 배의 침몰을 멈출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래도 침몰하는 배만 바라볼 수 는 없는 것 아닌가.  

이처럼 조선은 세자들의 수난시대였다. 물론 세자가 아닌 왕자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하지만 세자 또한 그 자리가 그리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 병사한 몇몇의 세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세자들이 그 한을 가슴에 안고 이승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폐세자 되고 나서 죽게되는 이황이질의 경우는 더 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의 세자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었다. 차기대권후보라는 공인의 신분으로 철저히 감내하기엔 그 댓가가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이점은 세자(세손포함)라는 교육을 제대로 완수하고 보위에 올라 제대로 된 정사를 이끌어간 군주가 정조가 유일할 정도라고 보면 세자들은 꽃이 만개하기 전에 시들었던 것 아닐까... 결국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몬것은 조선특유의 세자양성제도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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