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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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정확하게 로마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정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로마라는 제국이 남긴 족적은 지금의 대부분의 서양 근대국가에 남아있을 만큼 문화,정치,종교,제도적인 측면에서 사실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민법이 법체계만 보더라도 로마법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정도로 로마라는 제국이 전세계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 한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가 그 뼈대를 만들고 오현제 시대에 이룩한 Pax Romana는 단지 역사적 기간만을 의미한 협의의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광의의 팍스 로마나라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우리가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사에 굵직 굵직한 영향을 끼친 제국들을 보게 되지만 로마제국 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제국 또한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동로마제국까지의 역사적 기간만을 놓고 봐도 대략 1500여년이라는 산술적인 기간에서 부터 여타 제국의 수명과 비교가 될 수 없지만 무엇 보다도 최고 권력자의 특수한 권력계승관계(특히 동방의 군주국에 있어 피한방울 안섞인 남에게 제위를 이어 받게 한다는 발상자체가 어리둥절하게 보이지만)나 황제와 원로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정치제도, 특히 국적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없는 수용과 그 자체의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 들였던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적 다양성과 선진성을 보더라도 지금의 왠만한 근대 국가보다 뛰어남 성숙함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적인 구조나 문화, 철학, 종교는 그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자연의 법칙을 로마제국 또한 비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한마디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다룬 계몽시대이후 최초의 역사서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양의 방대함과 본문의 양에 맞먹는 주석의 양등의 형식적인 내용보다는 근대에 와서 저술된 유일무이한 로마제국의 역사서라는 점일 것이다. 기번 이후 로마제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에게 그의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일종의 바이블같은 존재였을 만큼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번 로마제국 쇠망사의 완역본은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때 일본 작가였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면서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역사에세이가 아닌 정사적인 입장에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좀더 깊이 있는 역사적 시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번은 첫 출발점을 오현제의 한명인 트리이아누스 황제시대부터 시작함으로써 모든 제도나 문물의 가장 성황기가 다름 아닌 쇠망기의 시작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카이사르에 의해 은밀히 진행된 제정시대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마황제중 가장 연기력이 뛰었났던 아우구스투스의 절묘한 포장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고 네르바, 트리이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오현제시대을 거치면서 팍스 로마나를 구현했다. 기번은 바로 팍스 로마나의 절정인 서기 98년을 시발점으로 로마라는 제국은 그 쇠망의 뒷안길로 접어 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팍스 로마나 시대중에도 네로등을 비롯한 실정의 황제들이 있었지만 큰틀에서 보면 로마제국은 큰 흔들림 없는 항해을 했다. 하지만 오현제를 거치면서 황위에 대한 도전과 반목, 그리고 황위를 둘러싼 내전등은 게르만,고트,프랑크,페르시아등 외적인 위협보다 더 큰 내부적인 갈등으로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내부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몇몇 황제의 치세동안 반짝 호황기를 누리지만 죽음이라는 대명제는 거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마라는 제국이 오래기간 동안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정치제도적의 측면을 비롯한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 보다도 관용과 포용,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로마인들 특유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로마인이라는 경계 또한 후대에 갈수록 무의미해 지겠지만 로마제국은 모든 문화와 문명 그리고 심지어 나중에 제국을 쇠망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종교에 이르기 까지 모든것에 대한 개방 정신이 방대한 로마제국을 지켜 주었던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연구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로마제국은 형식상 로마라는 이름하에 모인 범지구적인(당대의 기준으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 팍스 브리타니아를 외친 대영제국이나 현대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부하고 있는 미국과 비교해 봐도 그들의 시스템적 우수성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의 특징중에 하나는 트라이아누스에서 시작하여 동서로 분활된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한 콘스탄티누스황제시기 까지의 역사적 서술을 보통의 사서 집필과정을 따르면서도 출간 당시 상당한 저항을 받게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논의를 기재함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종교 특히 서구의 경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입장정리가 자유로울수 없는 시대에 기번의 종교관 표현은 상당히 불순한 시도였던 것이다. 당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기번의 편협한(?) 종교관과 그런 오만불순한 종교관이 역사서라는 미명하에 활자화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 방대한 저서는 각종 이유로 저평가 되고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은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물론 기번의 개인적인 종교관을 무시할 수 없지만 대단한 사자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에 관심이 있던 없던간에 필히 한번은 읽어 봄직한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상 로마제국을 떠올리게 되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한 존재가 있다.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이다. 로마와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양립할 수 없는 존재만큼 그 거리감이 커지고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로마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지위를 정당화는 입장에서 각각 로마와 그리스도교의 불편한 진실은 바로 이러한 각기 다른 로망들에 의해서 묻혀져 왔다고 해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리한 이가 바로 기번이다.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받아들기 싫던간에 역사가 말하는 것은 당시의 사실임을 기번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대로 그의 저술에 담고 있다.

대체로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제국 특히 콘스탄티누스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더 많이 불리지만) 이전의 로마 역사는 생각하기 싫은 역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예수의 사형집행에서 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박해로 인해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악의 축으로 오인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번은 그동안의 오해와 추측으로 난무한 역사를 고증을 통해서 바로 잡고자 했다. 그의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어마 어마한 박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황제들에 의한 조직적인 박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라도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박해와 순교로 이어지는 과장된 요인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로마제국의 가장 근간은 모든것의 통합과 조화 그리고 수용, 그리고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의 근간을 뒤흔든 맹목적인 일신교의 숭배과 여타 종교와 문화의 극단적인 배척은 그 어떠한 권력자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도의 대부분이 노예나 로마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 속주민들 그리고 로마시민중에서도 하층민들에게 집중되었던 이유가 낮은곳에서 부터 성령이 일어난다는 논거가 아닌 어느 시대나 이런 계층의 불만은 새로운 로망으로 충분히 번질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시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번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이교도(그 중심에 로마가 있고)의 박해보다 같은 종파의 박해가 오히려 더 많았다는 점을 고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클 것이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국교로 성장한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로마 제국의 쇠망사에 대한 아이너리를 엿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로마인들이 향락과 사치 그리고 그들의 오만, 외부의 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실상 그리스도교라는 일률단편적인 사상체계가 로마제국의 다양성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라는 제국은 쇠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초와 유물을들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성황으로 인해 그동안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아테네, 동방의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을 볼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다양성의 상실은 야만족을 대하는 정치제도의 측면에서도 강변일변도로 바뀌면서 그야말로 앞만 보고 질주하는 기관차같은 존재로 남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성황만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거대한 담론적인 입장에서 견지하더라도 그 멍에를 벗어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성이 상실한 세상이 얼마나 해독스러운지는 유럽의 중세나 조선시대, 그리고 가까이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제국주의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못하는 시대는 그야말로 악이고 어둠만이 존재하는 우울한 세상임을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인 것이다. 어찌보면 다양성의 소멸과 유일성의 대두는 역사라는 바퀴를 뒤로 돌리는 반동적인 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마는 오현제 시대를 거치면서 그 정점을 지나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획기적인 제국 분활통치와 부황제라는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다시한번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게 된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과연 팍스 로마나를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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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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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개봉한 한국영화 <해운대>를 보면 자연재해에 노출된 우리 인간의 한없이 나약하고 오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동안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의 지배자인양 살아오면서 수 없이 많은 자연상태를 고갈시켜왔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그 오만함은 가히 극치를 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매번 이렇게 자긍심 강한 인간들에게 혹독한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물론 자연은 아무런 예고 없이 무자비하게 들이치지는 않는다. 자연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메세지를 전하지만 한껏 기고만장 해진 인간들은 그런 자연의 재해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자연재해는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도 그 피해가 막심한 것이다. 하물며 자연재해를 그저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했던 시대에는 오죽했겠는가...  

<운명의 날>은 1755년 11월 1일 당시 세계 곳곳을 지배했던 해양 제국인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을 강타한 전무후무한 대지진으로 인한 리스본의 운명을 다룬 책이다. 만성절인 그날 오전 9시를 넘긴 시간에 들이닥친 지진으로 인해 리스본은 그야말로 성경의 요한 계시록을 그대로 재현했다. 아비귀환 그 자체였다. 왕궁과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 그리고 하느님의 안식처인 성당을 비롯한 수도원, 일반 백성들의 집들까지 순차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지진 이후 2차적으로 들이 닥치는 화재는 그나마 남아있는 잔해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버렸다. 대략 이날의 재앙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도시인구의 20%이상으로 추측될 정도로 처참했다. 지진의 특성상 단 3분이라는 시간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육지는 지진과 화재로 붕괴되었고 바다에서는 그 후폭풍으로 3미터이상 높이의 쓰나미가 강타하여 해양제국을 과시하던 포르투칼의 심장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지금기준으로 대략 진도 9정도로 예상되는 리스본 대지진은 이렇게 당시 최고의 문명이라고 자부하던 리스본을 무장해제 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인류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던 리스본 대지진은 또 다른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왔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운명의 날은 지진으로 그동안 최고의 자리를 누려왔던 리스본과 포르투칼에게 몰락의 날이었지만 새로운 변혁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주사조인 계몽주의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바티칸보다 더 카톨릭국가였던 포르투칼에는 정말 운명의 날이었다. 포르투칼은 항해술의 발달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식민지에서 들여온 엄청난 양의 황금으로 인해 그동안 내수산업은 거의 기반이 사라지고 소비재를 주종으로 하는 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사실상의 식량수입이 없으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산업구조를 가진 국가였다. 그나마 리스본의 영광을 명맥한 것은 다름 아닌 식민지의 수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카톨릭이라는 종교에 더 집착하게 되고 신정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폐지된 종교재판이 성황을 이루고 종교인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실과 일부 사제층과 귀족에게는 천국같은 나라였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던 것이다. 

이렇게 계몽의 시대를 거역한 포르투칼은 리스본의 대지진으로 인해 운명의 날을 맞이하게 되고 그 개혁의 중심에는 주제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수상 카르발류가 있었다. 대지진 직후 리스본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시기에 카르발류는 일대의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외형적으로 도시전체에 대한 재개발을 착수함과 동시에 그동안 정치 깊숙히 관여했던 종교인들의 권력을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수산업의 부활을 기획하고 진행시켜 나간다. 물론 개혁의 와중에 종교계의 거두인 말라그리다의 저항은 강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그동안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일부 귀족층을 반역협의로 몰아 일대 정치개혁을 단행하면서 서서히 리스본은 대지진의 악몽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침내 리스본 도시계획이 완성되면서 리스본의 새로운 계몽의 시대에 부합하는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주제1세의 사망과 그동안 억눌려왔던 반동보수주의의 대두로 인해 카르발류는 실각하게 되고 그가 추진했던 모든 개혁은 백지화되면서 카르발류의 죽음과 동시에 리스본은 또 다시 중세의 암흑으로 회귀하게 된다. 

<운명의 날>은 비록 역사적 자연재해를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포루투칼의 전반적인 역사를 동시에 고찰하고 있다. 역사는 일대의 충격으로 그 터닝포인트를 잡아가는 경우가 왕왕있다. 특히 리스본의 대재앙은 그동안 포르투칼이 가지고 있었던 각종 패악에 대한 일대 개혁의 단초가 되었고 카르발류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나마 그가 있어기에 지금의 리스본이라는 도시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카르발류의 정책은 자연재해로 인한 복구의 귀감으로 남게 된다. 운명의 날은 자연과 인간의 처절한 사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계몽과 신권과의 한판승부였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카르발류는 자연을 극복했고 종교를 극복한 위대한 정치개혁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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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실제 위치 연구 - 한반도를 식민지배해 온 것으로 왜곡되어 온, 김종서의 한국사 복원서 5
김종서 지음 / 한국학연구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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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학의 아버지라 추앙받은 독일의 랑케에 의해 주창된 실증사학은 기존의 철학이나 신학에 의거한 역사 인식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근대화라는 크나큰 패러다임속에 새로운 역사 인식의 툴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랑케가 주장하는 실증사학 표현 그대로 역사 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사조가 조선의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 민족에 지극히 불행했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 일본 식민사학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한국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이병도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일본유학을 통해 처음으로 실증사학을 접하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조선총독부산하에서 한국사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우리에게 뼈아픈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에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가 없다. 일반인들은 의아해할 수 있지만 강단 학계에서는 고조선에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실증사학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사실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기존 몇몇 청동기유물에 대한 방사성 연대 측정등을 이유를 들어 부정적 견해가 통설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들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자체 또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통설에 의해 고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에 대한 우리의 역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의 시조라고 하는 이병도는 일본식민학자들과 손잡고 연구한 한국 고대사에서 일본의 식민주의정책에 적극 찬동한 인물이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정당화를 위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고대 한반도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끼어 넣으므로서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였던 것이고 이에 맞장구 친 이가 바로 지금 강단 학계에서 추앙받고 있는 이병도이다.    


해방이후 이러한 상고사에 대한 재정립이 필수적이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지상주의로 인해 친일청산이 이루어지못하였고 단재 신채호선생을 비롯한 민족사관 사학자들의 주장이 위험스러운 사상으로 치부 받는 바람에 왜곡된 역사관이 그대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이제서야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재인식문제가 대두되었고,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사군의 실재 위치 연구>는 그동안 줄기차게 왜곡된 우리 상고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한 재야 사학자 김종서 박사의 의미 있는 연구서이다. 아마 기억을 학창시절로 되돌려 보면 고조선이 BC 108년에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나서 한나라는 다시는 고조선의 재기를 막는다는 이유로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진번군의 4군을 설치 하였고 그 위치가 한반도내에 있는 것으로 학교에서 배웠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켰던 선생이나 그런 사실을 배웠던 학생이나 그게 사실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역사왜곡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보게 되면 한반도내에 이러한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은 거로 주장하고 있다. 이병도는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한나라 유적과 중국역사서에 명기된 패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함으로서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병도는 랑케의 실증사학에 입각하여 원사료와 발굴된 역사적유물을 근거로 부끄럽지만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설은 이후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역사서가 대게 춘추필법의 방식으로 기술 되었다는 점과 당시 지명과 후대의 지명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되었다는 유물의 조작성이 대두 되면서 이러한 통설에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김종서의 박사의 논거는 그동안 재약 사학자들의 막연하고 자기중심적인 학설에 비해서 상당히 과학적 근거를 가진 학설로 주목받고 있다. 굴곡지수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서 새로운 강역연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당시의 거리는 지금의 지도상의 거리개념인 수평직선 거리가 아니였다 당시에는 어떤 지점에서 오르막 내리막등의 있는 구불구불한 거리를 실제 거리로 기록해 전하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의 거리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조선의 강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연나라의 강역을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착안에서 만든 것이 굴곡지수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격파하여 2천리밖으로 밀어 냈다는 기록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나라의 강역확정에 의해 요동이냐 아니면 한반도내냐로 고조선의 강역이 고무줄처럼 늘고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굴곡지수등을 통한 필자의 연구는 한마디로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존재할 수 도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동안 평양 지역에서 나온 고고학적인 유물에 대한 설명도 쉬워진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우리는 원사료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였고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식민학자들의 유물조작사건도 있었지만 근시안적인 우리 학자들의 판단이 한 몫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망설이고 있다. 기득권의 영유와 그동안 자신들이 설파한 통설에 대한 전면부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들 입으로 마르고 닳도록 주장한 실증사학에 크나큰 흠집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자국의 역사는 자국이 지키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재도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손들어 주는 국가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다. 그만큼 자국이 나서서 지키지 않는 역사는 그나라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하물며 그나라의 대표적인 사학자들이 나서서 자기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고조선, 고구려, 부여등의 역사를 자국의 지역역사로 편입시키는 이유가 장래에 있을 한반도 통일에 대한 사전포석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한 역사왜곡의 차원을 넘어선 한반도의 정략적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이제라도 제대로된 우리 상고사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기존 강단 학계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고 일반인들의 역사인식도 새롭게 정립 시켜야 할 때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종서박사의 한사군 실제 위치 연구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서이다. 물론 우리도 중국과 일본에 맞서 역사왜곡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정말 실증사학에 입각한 역사를 바로 잡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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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를 리뷰해주세요.
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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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바로 어제가 6.10민주항쟁 2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한획을 긋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고 다시 찾아오는 듯한 서울의 봄은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세력에 의해 광주에서 많은 피를 보고 결국 다시 중세 암흑의 시대로 시계의 바늘은 거꾸로 돌려 버렸다. 마치 4.19혁명으로 잠시 누렸던 민주화의 열망이 군사쿠 테타로 무산되었던 30여년전의 악몽을 재현했던 것이다.  

이 책은 나와 같은 386세대(지금은 486이라고 해야 할까)에게는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아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불러온다. 대학생활 처음을 최류탄의 메케한 냄새와 화염병의 신나 냄새를 밥짓는 냄새보다 더 자주 맡아야 했고, 책가방에는 항상 이념서적과 학교 유인물 그리고 얼굴전체를 가릴 수 있는 커다란 수건이나 마스크를 상비약처럼 휴대해야 했으며 서울역, 시청앞, 종로의 뒷골목을 지금의 GPS보다 더 자세히 알아야 했던 기억(백골단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신문과 TV는 스포츠기사외는 다 거짓이라고 알았던 기억들이 지금처럼 낭만적이고 개방적인 대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억으로 나에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의 잔상은 시간이 훌쩍 지나 공자께서 말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무게 중심의 추가 요동치기 때문이다. 그 만큼 내 청춘의 정점인 시기에 맞이한 1987년 6월의 그날은 가슴 시리도록 아팠다. 오히려 집시법위반이라는 딱지보다 가슴속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더 큰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통틀어 그때 만큼 순수하고 자발적으로 민주를 염원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그 만큼 지금에 비해 덜 자본화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순수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 현장에 있었던 없었던 간에 온 국민의 가슴속에 희망의 메세지를 안겨준 그야말로 극본없는 드라마였던 것이다.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로 시작된 열기는 4.13호헌조치와 이후 연세대 이한열군의 혼수상태를 정점으로 민주화 열기에 불을 붙였다. 결국 국민의 위대한 힘 앞에 독재정권은 두손을 들었지만 제도권내의 정치가들은 이런 염원을 무시하는 바람에 많은 퇴색을 가져왔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염원은 그 어떠한 힘으로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6월의 함성이었다. 학생중심으로 시작된 시위는 상인,회사원,주부,택시기사,어린학생,어르신등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위가 아닌 하나의 축제마당으로 민주를 외쳤다. 그 만큼 너무도 간절히 원했고 너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알지 못했던 것이고 쉬쉬하면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6월민주항쟁은 어느날 갑자기 전자렌지에 몇분 돌려 물을 끓게 한 것이 아니다. 4.19혁명으로 시작해서 5.18을 거치면서 아주 서서히 끓었기 때문에 그 열기가 오래토록 이어온 것이고 한번 끓기 시작한 물은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멈추지 못했던 것이다. 물이 100도씨에 끓은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서서히 그 열기 끓어 올라 100도씨를 정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형성과정과도 흡사하다. 어느날 갑자기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주화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봐야 한다. 그 진행되는 과정에서 돌출되는 다양한 열기들을 빼기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서 100도씨까지 가야하는 여정인 것이다. 넘치는 것 보다 부족한 것이 미덕이라고 하지만 민주화 만큼은 넘쳐야 한다.  

우리는 OECD가입국으로 엄연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OECD가입 조건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적 부나 제도적 현대화가 민주화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자본주의 시스템속의 하부구조로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여건은 아주 많이 다르다. 그 당시는 독재라는 정치적 모순에 항거 하였지만 지금은 금융자본이라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담론들에 대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한 대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 알기 쉽게 설명한 민주주의 대한 개념은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가 쳐해 있는 현실을 가장 적절히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더이상 한국형 민주주의를 운운해서는 그 해답이 없다. 민주주의는 깨끗한 백지 한장과도 같다. 어떻게 백지를 채워나가야 하는가는 우리의 몫인 것이다. 

지금의 물의 온도를 100도씨라고 말할 수 있는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아직 우리는 물을 끓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6월민주항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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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 읽기 (합본)
김운회 지음 / 삼인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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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삼국지연의라는 역사소설은 본고장인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 인기가 더 높다고 한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지역에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앞지르는 인기를 한 몸에 안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도 아니고 이러한 인기는 나관중이 집필했다는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으니 스데디셀러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문학계의 거두들이 앞다투어 자신 이름 석자를 걸고 편역에 나설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 왜 그토록 삼국지에 열광하게 되는 것인가? 아마도 그 해답은 삼국중 가장 작은 땅덩어리(사실 삼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의 주인인 유비와 그의 씽크탱크이자 장자방인 제갈량의 돋보이는 활약상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일 것이다. 특히 영원한 간자인 조조와의 대결에서 제치를 발휘하며 조조에게 일격을 가하는 모습에서 독자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명제를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삼국지는 뻔한 스토리지 않는가? 하지만 나관중(이도 역시 역사적으로 확실히 검정된 것은 아니다)이라는 마술사의 손을 거치면서 화려한 변신을 하였다. 나관중은 대중이 무엇을 원하지를 정확하게 꽤뚤어 보고 그 가려움증을 시원하게 긁어줌으로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고 당분간 앞으로도 그런 대세를 이룰 것으로 보는게 정확한 추측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현상이 있다보니 마치 삼국지라는 역사소설이 정사를 대신하게 되는 주객전도의 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역사에 대한 청소년들의 잘못된 인식의 폐해는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삼국지는 소설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허구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삼국지를 통해서 가장 혜택을 본 인물은 누구일까? 대체로 제갈공명을 들 수 있으나 그나마 제갈량은 사초에 몇번의 흔적이라도 보이기라도 하는 편이라서 최고의 수혜자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 최대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단연코 관우이다. 관우의 활약상은 실제 역사에서는 거의 미비한 편에 속하지만 나관중은 의형인 유비와의 신의를 지키는 영웅(여기서 나관중은 철저한 중화사상의 가미를 보여준다. 북방 오랑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정신문화적인 아주 고귀한 충에 관한 개념을 마치 필부인 관우정도도 몸소실천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을 탄생시켜 일약 후대에 신으로 추앙 받게 된다. 이는 우리의 무속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관우신을 모시고 있는 실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더욱더 삼국지을 제대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인물을 누구인가? 이 대답에 지금은 많은 이들이 조조를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는 그나마 사정이 많이 나았졌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 지므로서 새로운 조조관이 성립되어 조조에 대한 인식이 사뭇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가장 큰 피해자는 여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이유없이 참혹하고 배은망덕한 인물로 묘사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여포의 출신성분이 한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로도 여포는 그렇게까지 욕을 들어먹을 행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한말당시 시대상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세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로 배신과 반목을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인 것이다. 인자함에 대명사인 유비가 오히려 여포보다 더 많은 신의를 저버리면서 제 살길을 찾아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는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 아니가.
하지만 나관중은 자신이 당시 살던 시대상황을 삼국지에 상당한 부분 녹여 놓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공산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김산(장지락)이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었던 이유나 다른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비록 김산은 복권되었지만 여포는 항변조차 할 수 없이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것이다

오랑캐에 수모를 겪은 자기시대의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 대상이 바로 여포로 결정되었을 뿐이다. 세세히 역사적인 사실과 비교해 보면 한도 끊도 없는 것이 바로 삼국지의 내용들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인 학자가 나서서 <삼국지 강의-이중텐->라는 책을 출간할 정도로 삼국지의 역사 왜곡은 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삼국지가 아닌 바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는 삼국지이다. 특히 삼국지를 탐독하더라도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해서는 한번 짚어보자는 의도로 저자는 삼국지에 대해서 매스를 가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측면으로는 아니 역사소설인 삼국지에 대해서 굳이 학술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단지 문학작품인데라는 견해도 있겠지만 삼국지가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지켜보면서 역사라는 것은 충분히 그 왜곡이 가능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오히려 이런 동북공정은 그 피해가 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국지처럼 오랜시간 동안 자신들의 한족우월주의와 중화사상을 은연중에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주입시키는 것이 더 무섭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지금 삼국지를 이런 비판의식을 가지고 읽는 독자층이 얼마나 있을지, 더욱이 역사적 판단이 미비한 이들에겐 마치 삼국지연의가 정사로 인식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점을 지하의 나관중은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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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냥 2022-12-0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국지 연의에서 한족 중심적 관점의 폐해가 왜 이 책의 평가의 기준이 됐는지? 정작 이 책도 춘추필법의 폐해에 대해 지적하는 것 같은데, 같은 의견을 얘기한 책에 0점을 준 이유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