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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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적 : 다양한 모습의 사탄/옆집/여러 가지 형태의 섹스/민달팽이

친구들 : 하느님/우리집 강아지/마지 이모/샬럿 브론테의 소설들/민달팽이 퇴치용 알약/그리고 나.

또 하나 첨가하면 과일은 오렌지뿐이다. 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는 어머니와 그리고 그녀의 수양딸이자 작가와 동명인 지넷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눈치있는 독자들이라면 작가 자신의 이름을 여주인공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일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작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지만 꼭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사춘기를 맞이한 소녀가 철두철미한 침례교 신봉자인 어머니와 그리고 모든 세상의 잣대를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주변인물들 틈에서 性 사랑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문제는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동성간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흔히 지금시대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진부하다면 진부한 소재이지만 소설이 발표된 1985년도만 하더라도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왔을 만큼 포스트모던적인 소재였음에 틀림없다. "가정의 미덕, 교회의 세력, 정상적인 이성애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로 작가는 이 소설을 말하고 있다. 그 만큼 단순하고 짧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소설속에 내포된 담론은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렌지이외의 과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일신교 원리주의자이자 제2의 성모마리아인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가정의 미덕, 종교의 힘,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실은 너무도 확고하다. 적과 친구들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그녀는 그 어떠한 가치관에 대한 한점 흔들임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상이 비록 자신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종교적인 신앙과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면 그 마저도 외면해 버리는 여인이다. 딸을 자신이 만든 세계에 철저하게 고착시키려 하지만 결국 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갈등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어쩌면 어머니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길을 나서게 되는지도 모른다... 

대충의 스토리만 봐서는 왜 작가를 21세기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지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다. 단지 약간은 도발적인(사실 소설속에 도발적인 묘사는 전혀 있지도 않다)동성애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포스트모던적인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에 그녀를 울프에 비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독특한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다. 본 소설 속에 아더왕와 원탁의 기사, 마법사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고대도시를 찾아 떠나는 위닛에 관한 이야기등 몇몇의 동화들이 같이 산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러티브중에서 위닛의 이야기는 소설과 그 맥락을 같이 하지만 나머지 내러티브는 별개의 줄거리로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들은 하나로 묶어 커다란 내러티브로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도 없고 독자들도 굳이 그렇게 이해할 필요성도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오렌지이던 사과이던, 맛이 있던 없던 간에 과일은 과일인 것이듯이. 히야신스의 꽃색깔이 여러가지 있더라도 우리가 히야신스라고 부르듯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러티브로 받아 들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바로 진실에 대한 작가의 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소설속 어머니에게도) 진실이라는 것은 절대적 개념이다. 뭐 다소 유연하게 표현하더라도 상대적 절대성을 가지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러한 절대적 개념에 돌을 던진다. 종교인들의 이중성 가치관, 가정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가치관,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가치관에 대해서 작가는 과격하거나 힘이 있는 필치가 아닌 아주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필치로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그 감흥이 크게 다가오게 한다. 오렌지 만큼 상큼하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아마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지넷 윈터슨의 작품일 것이다. 다소 낯설은 소재와 독특한 스토리텔링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왜 그녀를 포스트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는 찬사에 대해 절로 수긍이 갈 것이다. 성과 진실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그녀만의 화창한 내러티브로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하게 가슴한쪽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한다. 요즘처럼 추워지는 계절에 곱은 손을 녹여주는 주머니 난로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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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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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달에 물이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양이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동안 아폴로 프로젝트와 마리너 프로젝트를 통해서 인류는 지구이외의 행성에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장 근접한 위성인 달에 최초로 인류의 족적을 새겼고 각종 데이타를 근거로 가장 확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화성으로 많은 위성과 탐사 로봇을 착륙시키면서 또 다른 생명체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반대론적 입장에서는 인류의 숨겨진 야심이 또 다른 지구 식민화를 염원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낳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우주라는 대양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인류를 닮은 생명체에 대한 본능적인 호기심이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호기심은 SF라는 장르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이끄는 분야로 발달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SF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인간의 이러한 상상력은 서서히 공상이 아닌 실현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반증이 바로 달에서 물이 발견되었고 혹시 아나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머지 않은 미래에 톱뉴스로 지면을 장식할지... <올림포스>는 흔히들 통칭하는 SF소설이다. 하지만 여타의 SF소설과는 스토리의 소재나 전재방식 그리고 전체적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물론 세속적으로 시대적 배경은 아주 먼 시간적 정량화의 감을 잡기 힘든 40세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 공간적인 배경(굳이 공간적으로 함축한다는 것 자체가 SF소설에서는 의미가 없지만)은 지구화된 화성, 그리고 미래의 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현생인류의 후손이라 불릴만한 호켄베리박사와 고전인류,후기인류와 모라벡이라는 유기체등의 출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결코 부족함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인 SF소설의 요소들로 이 소설이 진행되었다면 아마도 그저그런 또 하나의 SF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작가가 각종 단체의 상을 수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아주 독특한 소재와의 조우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이라는 존재이다.

팩스로드와 프리팩스 그리고 QT를 통해서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자재로 공간이동 혹은 양자이동이 가능하고 자가복제와 다양한 검색기능을 갖추고 있는 40세기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 신들 그리고 아킬레스, 오디세우스, 헥토르,파리스로 대변되는 트리이전쟁을 한데 묶어버린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인 것이다. 도무지 조화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이한 두가지의 존재를 찰떡궁합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제치있는 스토리 전개가 바로 이 소설의 방대한 분량을 금새 잊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곳곳에 담겨져 있는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통해서 SF소설과 문학작품 사이를 혼돈케 하기도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와 트로이전쟁을 살짝 각색해 버려 소설을 읽는 동안 다시 신화와 트로이전쟁에 대해서 검색해보게 하는 등 작가로 하여금 여러종류의 책을 다시 펼처보게 하는 재미 또한 숨겨져 있다. 소설에서 보듯이 신화와 40세기 첨단과학이 과연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고 알아왔던 모든 신화(그리스로마신화를 포함해서) 그 자체가 일종의 SF물이라고 보면 너무 비약적일까?
제우스의 번개, 변신술, 헤파이스토스의 제련술, 이카루스의 날개, 헬레오스의 하늘을 날으는 마차, 키르케의 마술 그리고 신들이 즐겨 먹고 마시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의 재생력은 지금 현재 과학의 힘으로 이루어졌고 향후 첨단과학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화 그 자체가 다름아닌 신화를 창조했던 당시에 SF였고 지금도 SF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 이런 발상자체 역시 상당히 SF적 공상에 지나지 않는가? 그래서 소설속의 공간이동이나 다양한 전투신보다 신화속의 신들의 힘을 약간더 업그레이드한 묘사가 오히려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이슈로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생각의 전환일 것이다. 첨단과학의 발달로 인해 재생능력을 획득한 인간들의 신에 대한 생각과 태도(물론 40세기에 이르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를 고대 신화의 주인공인 아킬레스와 헥토를 통해서 신이 아닌 단지 복수의 대상으로 전략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적극 호응이라도 하듯이 신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신이라는 자체를 스스로 부인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소재나 스토리전개가 여타의 SF장르의 작품들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 떼우기식으로 쉽게만 읽어나갈 만한 소설은 아닌 것 같다. 신화적인 머리와 SF적인 감각이 동시에 필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읽을수록 흥미를 더하는 작품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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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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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2/3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 물이라는 존재는 생명의 필수요소이다.
역시 한반도는 삼면이 물(바다)에 의해 감싸져 있는 형국이다. 우리주변 지천에 흔하디 흔하게 있는 것 또한 물이다. 그 투명도나 깨끗함을 떠나 물이라는 존재는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또 다른 우리자신인지도 모르다. <공무도하>는 바로 이런 물의 이야기이다. 집중호우로 인해 침수되고 제방이 붕괴된 창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서해안의 작은 갯펄인 해망의 이야기와 더불어 물로 끝을 맺는다. 등장인물들의 삶 또한 물과 관련지어진다. 해망에서 장철수와 바다밑 고철수거를 하는 베트남 여인 후에도 자신의 고향은 해망을 닮은 바닷가의 어촌이었고, 미호의 죽음으로 고향땅을 등진 방천석 역시 9대를 갯펄에서 살아온 바다 사나이였다.

또한 고향 청야을 등지고 해망에 새로운 둥지를 튼 장철수 또한 다시 물이 지천인 해망으로 삶의 연장선을 찾게 되고, 또한 불을 진압하기 위해 물을 쏟아 부었던 소방관 박옥출 역시 해망에서 새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기자인 문정수 역시 이러한 인물들과 뒤 엉겨 물의 흔적을 찾아 다니게 된다. 온통 물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물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을 담기 위한 용기의 모양에 따라 그리고 물을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마련이다. 특히 물이 휩쓸고 지난간 자리는 과거의 그 어떠한 기억도 깨끗하게 지워버린다. 청야의 저수지가 버람해서 장철수의 과거를 지워버렸고, 박옥출은 백화점화재 진화과정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지워버렸고 방천석은 자식의 죽음을 개펄의 매립으로 지워버렸다.  

<공무도하>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렇게 자신만의 아픈 기억들을 물로 지워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샤워를 한다. 우리 몸에 남아있는 더러움을 남김없이 덜어내기 위해 소설속 노목희가 자신의 생리혈을 씯어내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난뒤 몸에 나는 물냄새는 왠지 뒤끝이 남는 듯 하기만 하다. 몸의 더러움이 아닌 우리 삶속에 담겨져 있는 슬픔, 더러움 그리고 희망 역시 아무리 물로 씯어내더라도 그 흔적만큼은 여전히 남는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날 수 있으나 상처받은 영혼만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듯이 해망을 떠난 방천석이나 다시 창야로 돌아가는 장철수나 모든 것을 남기고 유학길에 오르는 노목희의 내면은 결코 자신들의 상처를 물로 씯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퍼런 물을 건너 저편의 양안에 도달하면 나아지겠지라는 기대는 좀처럼 그 해답을 보여주질 않는다. 어찌보면 당초부터 물건너 저 편에는 그런곳이 없는 지도 모른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한두번쯤은 있을수 있는 일이 벌어져 버린 것처럼 모든 아픔과 상처를 물길에 따라 흘려보내더라도 우리에겐 항상 그 앙금은 남아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앙금을 작중 작가인 타이웨이 교수의 <시간의 넘어>라는 제목처럼 나마의 시간속 넘어에 남겨 두고 싶을 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쉽게 손에 들고 또 속도감있게 읽어나간 작품이었지만 그 내용은 생각하면 할 수록 어려운 소설이다. 특히 <칼의 노래>나<남한산성>처럼 그의 역사소설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또 한번 작가의 새로운 변신에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가게 될 것 같다.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사랑하는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다, 물에 빠져 죽으니 이제 임을 어찌할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간 물보다 더욱 가슴저린 것은 물과 함께 님을 떠나 버렸다고 그리고 모든게 다 끝나버렸다고 여기는 이쪽 편의 남아 있는 사람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같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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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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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 훌륭하게, 이토록 아름답게 쓰는 작가는 없다", "눈부시다...놀랍다...우리들 인생을 페이지 갈피갈피에 옮겨놓고야 마는 콘로이의 열정은 한계가 없다"... 거의 대부분이지만 새책이 시중에 쏟아질때 마다 속칭 전문 비평가라는 사람들의 미사여구가 책을 돋보이기 위해서 그럴싸한 문구들로 도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러한 얄팍한(매번 속으면서도) 문구에 현혹되어 무심결에(이번만큼은 속지 말아야지 하면서도)책을 픽업해서 천금같은 시간을 탕진해가면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 감동의 물결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씁쓸한 상술과 그에 편승한 서평가들에게 세속적인 욕한마디로 그 책에 대한 불쾌감을 들어 내는 것이 보통의 일이 된 것이 다반사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인가? 

하지만 <사우스 브로도>를 읽고 난 순간(아니 읽어가면서 바로) 다른 생각이 든다. 그토록 미사여구와 환상적인 단어조합에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사람들이 왜 이모양의 찬사밖에 던질줄 모를까라고 갸웃뚱해질만큼 팻 콘로이의 <사우스 브로도>는 환상적인(그저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깊이가 작아서 이말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작품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외곽 해안도시 찰스턴에서 벌어지는 열명의 청춘들이 겪는 삶과 사랑 그리고 우정. 보통 이러한 이야기거리는 아주 단순하고 전통적이고 다소 식상한 느낌마져 주는 소재이지만 존 콘로이를 만나는 순간 한편의 서사시로 변해버린다는 것을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금새 느낄 수 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는 유사한 예를 정말 귀가 따갑고 눈이 아프도록 많이 겪어 봤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아니 아름답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은 아마 내 기억엔 없었던 것 같다. 미국 특히 개성 강하고 보수적인 남부지방에 대한 그 어떠한 경험이 없는 이국의 독자라도 소설을 읽고나면 찰스턴이라는 도시는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내 기억속에 가까이 남아 존재하고 있는 도시로 탈바꿈해 버리고 만다. 마치 1969년에서 20년간 찰스턴에 살았다는 강렬한 느낌을 충분히 받게 할 만큼 작가의 레이아웃에 대한 묘사는 마음에 푸근한게 다가온다. 

성격으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인종적인 문제로 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친구들이 소중하게 키워 나가는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 인생이라는 화두를 만나게 된다. 태어나면서 왠지 모르게 그 방향성이 정해져 버린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리고 그럴거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전혀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진 청춘들을 통해서 작가가 바라보는(아마도 레오라는 분신으로 통해서) 인생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레오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친구들 주변에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 심지어 허리케인의 기습으로 생과 사의 문턱에 도달했던 순간까지도 그저 인생에 한두번 정도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냥 주어진 아니 어떤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인생을 한번즘 살아가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일종의 철학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인 레오의 형인 스티브의 자살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때 마저도 잔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그저 네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중 하나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치 그냥 길을 걷다가 우연히 죽도록 보기싫은 사람을 만난것 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개인적은 레오와 시바의 첫 사랑나눔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작가의 언어묘사에 다시금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남녀간의 사랑행위가 이처럼 아름답게 묘사했던 이가 과연 있었을까 할 정도 마치 서쪽 수평선으로 저무는 태양을 바라 보고 있는 느낌을 가질 만큼 강렬하면서도 한편으론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구었을때의 편안함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은 극적인 반전을 가지고 있는 추리소설이나 대하 역사소설에서 나오는 방대함과 애틋하고 짜릿한 로맨스를 느낄 수는 없는 내용들이다. 그저 레오를 중심으로한 젊은이들의 인생을 다룬 정말 재미없는(여타소설에 비하면 그소재의 진부함이) 내용을 가득차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광적인 소아이성애자의 집착과 허리케인이라는 자연재해 그리고 레오형의 자살의 비밀등이 약간의 긴장감을 갖게는 하지만 이러한 약간의 충격들 역시 찰스턴이라는 무대에 그냥 한번쯤 일어날 수 있는 일인것처럼 묻혀서 지나간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가의 엄청난 포스을 느끼게 한다. 소설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그저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이 뿐이라고...
그렇지만 이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묘사했던 작가는 없었다는 점에 그 어떠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1,2권 합쳐서 천여페이지에 육박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소설의 후반부를 갈수록 이야기의 결말에 다가가야만 한다는 아쉬움에 책장을 넘기기가 절로 주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문학작품의 개성강한 주인공들의 삶을 동경하게 마련이다. 그들 삶을 통해서 꿈을 꾸고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잠시만 현실로 눈을 돌리면 모든것은 변한게 없다. 언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더라도 있을수 있는 것이라며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굳이 인생에 틀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더라도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팻 콘로이는 <사우스 브로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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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금서
김진명 지음 / 새움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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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來로부터 禁書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대중에게 보여서는 안되는 기록들 즉 집권계층에게는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책을 말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 민족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리고 그 민족의 역량이 대범치 않다면 금서는 영원히 금서로서만 남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 한민족의 근원의 비밀을 담고 있는 금서의 행방과 그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천년의 금서>이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일본보다 중국측이 더 못된 짓을 자행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으면서는 낯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웠다. 아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도 이런면에서 작가는 <천년의 금서>를 집필하는 동안 수 많은 고뇌의 바다속을 허우적거리지 않았나 하는 상상을 갖게 한다. 우리상고사의 뿌리인 고조선 이전의 "韓"이라는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과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비밀과 음모, 마침내 금서의 비밀을 풀고 역사의 실마리를 찾게 되지만 왠지 통쾌하다는 생각은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저 가슴 깊은 곳에서 한심하고 부끄러운 심정만이 눈 앞을 가로 막는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되고, 공식적이면서 현존하는 역사서인 三國史記를 보면 B.C 56년경 박혁거세에 의해 신라가 건국 되고 이어서 고구려, 백제가 고대국가로서의 출발을 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정체성에 대해선 역사학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이런 신빙성에 대한 의혹을 보내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삼국사기는 우리의 뿌리는 고조선 및 고조선이전의 국가형태에 대해서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작성할 시기에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인 유기, 신집, 서기가 유실되었고 또한 신라를 정통으로 역사서를 서술하다 보니 초기 3국의 연대부터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후 일제감정기시대에 실증사학을 모토로 이병도를 비롯한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굳어진 우리의 상고사는 그야말로 오류와 허점 투성이로 점철되어 왔다. 지금도 우리학생들의 교과서엔 이러한 자취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한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들은 어찌 보면 이미 우리들 자신들의 뇌리속에 각인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도국가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수많은 외침과 불안정한 정세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는 식으로 자기폄하식 자조가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식민사관속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왔다. 한국가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립박물관의 역사연대표에 고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 정통강단학계에서 고조선을 고대국가로 인정하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실증사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우리의 강단학계(랑케의 실증사학을 우리만큼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 곳도 없으리라)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 어떠한 고고학적 증거로 고조선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발상은 지금 사학계의 거두로 알려진 이병도의 역사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일본학자들의 영향으로 우리 상고사를 한반도내로 확정해 버린 어처구니없는 행태가 지금도 우리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단재 신채호선생을 필두로한 좀 더 나이브한 재야사학자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서서히 우리상고사의 실체가 하나둘씩 들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통설에 밀려있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영유권주장에 분개하면서도 실상 그 대처방안에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중국의 동국공정확정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의 뿌리인 상고사마저도 중국변방의 역사로 편입되어버렸다는 자체가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국의 유명한 역사학자들도 부정해 버린 역사인데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일반적인 국민적정서와 학계의 학문적 정서는 상당한 괴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실증사학에 근거해 문헌이나 고고학적 유물로 그 확정을 지울 수 없는 현상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북공정프로젝트에서 발견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 유적발견에서 우리의 뿌리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 학자들도 인정한 한민족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우리학계의 입장은 그리 명쾌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이제는 이러한 유물의 발견과 동시에 과학적 입증방법을 통해서 현실화되어 있지만 여전히 고전적인 논거에 집작하고 있는 것이 그저 서글픔만이 남는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 강단사학계의 폐단을 사학자인 여주인공이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역사적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네들이 강조하는 실증사학적 접근방식이 어떤 것이며 또한 실증의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요 몇 년 사이 새롭게 발굴되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요동땅의 우리 유물들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항변일 것이다. 마치 이렇게까지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인정 못하냐는 식의...

책의 말미에 한은원교수와 보수 정통학자들간의 논쟁 과정을 보면 <시경>편의 해석과정과 <단군세기> 오성취루, 남해조수퇴삼척의 과학적 증명을 둘러싼 논쟁들이 바로 우리 학계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정말 사학자들이 꼭 한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학문이라는 대의의 달성이라는 것 역시 사소한 부분을 무시하고선 그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사라는 것은 我와 非我와의 투쟁이다” 라는 단재 선생의 일갈처럼 결코 우리 스스로 찾지 않는 역사는 그 어느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속 주인공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도 일본이나 중국처럼 역사를 왜곡하자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단지 최소한의 자기의 정체성 그 뿌리에 대한 인식은 저버리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뿐이다.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역사적 자취를 후대에 이르러 외면하고 폄하해서야 되겠는가 각 가정에서 족보를 신성시 여기듯이 우리 민족이 근원인 상고사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뿐이다. <천년의 금서>를 통해서 작가는 또다시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성과 자각의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역사서 한권의 의미가 어떤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  이는 앞으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미완의 숙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역시 김진명이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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