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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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인들은 조선시대 군주중에서 선조와 더불어 인조를 가장 못난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 못난 군주라는 평가는 조선시대를 거쳐 이 두 군주시대에 각각 일본과 청으로부터 내침을 당했고 덩달아 도성을 버리고 아들인 세자를 버리고 마지막 보루인 백성마저 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 몽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나 자신이외에는 그 어떠한 사람도 믿지 못하는 의심병이 깊었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지존이라는 자리는 그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들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했다는 것이다. 선조가 이순신과 광해군을 의심했듯이 인조는 자신의 적자인 소현세자를 권력의 라이벌로 여겼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빌미로 반정을 일으킨 그가 결국 죽어가는 명의 머리채라도 잡을려고 하는 동안 청은 조선을 정복했고 오랑캐라고 폄하했던 그들에게 삼두구두배를 당하는 유일무이한 군주가 되었고 이것도 모잘라 세자를 비롯한 대군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전쟁에서 패한 댓가라고 위안할 수 있지만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행보에서 후대인들은 인조라는 군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해버리게 된다. 물론 실록이나 여타의 기록에 자신의 아들을 사사한 군주는 영조이외에는 없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이를 믿는 후대인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 하고 머리속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왠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장면들이 있다. 많은 후대인들이 소현이 제명을 살아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면 향후 조선이라는 배는 새로운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잡았을 것이라는 점에선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리학의 본고장인 명보다 더 성릭학에 빠져있던 조선은 청에게 굴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교조주의적 성리학 시스템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리고 정조때 잠시 회생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이마저도 정조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정조와 더불어 조선이라는 배는 사실상 침몰했기 때문이다. 

김인숙의 <소현>은 이처럼 온몸을 받쳐 조선을 사랑했던 소현세자가 죽기전까지의 볼모생활을 한 심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팩션이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점은 그동안 소현세자나 세자빈이었던 강빈 그리고 인조등을 소재로 나왔던 작품들과 비교해서 독특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병자호란으로 비롯된 비극의 시작과 그리고 볼모생활 , 환국후 인조와의 갈등을 주제로 다룬 작품들이 많았다면 작가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일체의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에 그 비중을 두지 않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따. 이는 어찌보면 역사소설이라는 기존의 인식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첨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현과 그의 아비 인조 그리고 동생 봉림, 심양에서 자신을 압송한 섭정왕 도로곤등과의 치밀한 심리적 구도를 플롯으로 설정하여 소현자신 그리고 상대역을 맞은 등장인물들의 관점 마지막으로 작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적국에 볼모로 잡혀와서 적국의 감시보다 자국 아버지인 인조의 의심스러운 눈빛속에서 갈등하는 소현의 심리묘사가 일품이라 할 수 있다. 흔이나 만상의 입을 빌려 소현의 심중을 대신 말하고 있는 장면을 설정하므로서 격양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역사적 소현의 심정을 보는듯 하여 책을 이로 하여금 가슴저리게 한다. 

소현이 살아 보위에 올랐다면, 차라리 인조가 좀더 일찍 죽었다면등의 역사적 가정이나 사실들을 바라보게하던 기존의 시각보다 오히려 소현이라는 개인 물론 여기서는 개인이라고 불릴 수 도 없는 공적인 개인이지만 그의 내면상태와 심리적인 변화를 마치 살아있는 소현을 보는듯이 작가의 심리적인 표현들이 생생하게 다가오는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오히려 여성작가라서 세밀한 심리묘사가 뛰어났다는 표현보다는 작가만의 독특한 필치였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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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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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지적했듯이 혹시 손에 땀을 쥐게 하거나 흥민진진한 속도감을 기대하고 이 책을 손에 드는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 소설이다. 이런 스릴감이나 속도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나를 보내지 마>를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때 까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인간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 즉 '죽음'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만큼 무덤덤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그저 평범한 기숙학교 헤일셤 출신인 간병사 캐시의 유년, 학창시설의 회고로 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유년시설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숙학교라는 특징상 숙식을 같이 했던 동창생들과 학교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던 환경들에서 독자들은 새롭고 이채로운 특징을 엿볼 수 없다. 단지 중간중간 기억하기 쉽지 않게 흘러 가는 기증,완결,근원자등 이 소설의 내러티브의 핵심을 담고 있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캐시와 토미, 루스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성장과정을 관통하듯이 흘려보내고 만다. 물론 독자들에게 왠지 심상치 않는 소재를 다루고 있을거라는 예감을 갖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 소설의 진면목은 그냥 그대로 화면에 영상이 뿌려지듯이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클론, 복제인간이라는 SF적인 소재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약간은 어울리기 불편한 소재를 작가는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서로의 영역을 혼합해서 구성해버렸다. SF소설과 성장소설이라는 혼화될기 힘들것 같은 양대 장르가 작가의 상상력과 맞물려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한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은 이러한 상상을 해봄직하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타인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선택된 일반인의 생을 연장시키기 위해 또다시 선택된 기증프로그램의 희생양인 클론들의 삶을 죽음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비해 아주 냉철하면서도 타자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비록 복제인간이라는 SF적인 소재를 담고 있으나 전혀 SF적인 뉘양스를 담고 있지 않다. 기증이나 복제에 관한 그 어떠한 세부적인 표현도 없거니와 그 흔한 과학적 태크니션에 대한 묘사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소설을 읽는 동안 성장소설적인 분위기를 감지했던 독자들로 하여금 왠지 일반적인 성장소설과 사뭇다른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러한 느낌 역시 캐시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암시를 확인하면서 책의 페이지를 다시 되돌여 군데 군데 숨겨져 있는 암시물들을 찾는 고통을 감내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이 내러티브가 다소 괴기하게 느껴질 수 도 있으나 이야기 후반부에 에밀리선생님과 마담으로 지칭되는 일반인 그리고 캐시와 토미로 대변되는 클론들의 토론을 통해서 인간 존엄성의 가치와 삶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잣대로 제단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 내면에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작가의 통탈력은 대단하게 보여진다. 인간에게 가장 불편한 진실인 죽음에 대해서 이처럼 무덤덤하게 그러면서도 사고의 확장을 펼쳐주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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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1 - 제국의 부활
박문영 지음 / 평민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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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노론일색이었던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개혁적인 정치를 추진하던 중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후대를 위해 규장각 비밀금고에 숨겨둔 금괴, 천문학적인 환산비용의 가치를 가진 금괴를 고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왕조사상 최초로 생존한 대원군 이하응의 꿈속에서 그 비밀의 단초를 계시 받아 마침내 황금의 정체를 찾게되고 이 황금를 발판으로 경복궁의 재건과 왕실의 위엄 그리고 망국이후 이어지는 독립항쟁의 거름이 될 수 있었다는 소설의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내게 할 만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사중에서 특히 근세사인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는 한민족에게는 아무래도 아킬레스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즉 이 말은 그 만큼 이시기에 대한 애환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서구기독과학주의를 근대화의 이정표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이시기의 갈팡질찰하게 보였던 정책의 혼선들이 아쉽게만 보일지 모른다. 항상 역사에 가정이라는 없지만 만약 이 시기에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빨리 조선이 근대화를 적극 수용했다면 과연 이후의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가정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가정을 외면해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가정 보다는 미래에 대한 바램이랄까 작가는 이 소설에 마지막에 <제국의 미래>라는 짧막한 내용으로 소설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추구한 플롯을 고스라히 담아내고 있다. 204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재미교포 후손이 당선되고 중국땅에서도 조선족 후손이 총리로 선출되는등 전세계 주요국의 지도자가 한민족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사람들 그야말로 제국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픽션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도 없는 일임을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하였을까? 작가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고종에 대한 현대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그 실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냉정한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중 선조만큼이나 부정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자신의 재위기간에 나라를 거들냈다는 점 그리고 왕후민씨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는 점 무엇보다 망국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고종은 역사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러한 모든 멍에를 고종에게 짊어지게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점을 느낀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조의 죽음인해 뇌사상태에 빠진 시한부인생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기간동안 몇몇 절호의 기회가 있긴 하였지만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서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근대국가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호모에렉투스에게 현생인류의 지적능력을 바라는 것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변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모든 역사적 책임을 고종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고종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 아니다라는 것은 알 것이다. 단지 작가가 설정한 내러티브는 지금같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고종과 그 시대 그와 함께 했던 인물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 보다는 대한제국에 대한 미련이 많다 그래서 더 제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내러티브가 독자들 가슴에 와닿길 바라는 마음이 이 소설 전반에 묻어나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조선을 집어삼키고 대동아건설 일보직전에 무너진 일본은 아직도 천황이라는 존재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의 경우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지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한제국 황실들의 비참한 가족사를 보면서 과연 이들을 비판한 우리는 무엇했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대한제국의 비애는 그들 황실사의 비애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비애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것이다. 그 시대에는 소설에서 보았듯이 황제도 신민도 없었던 그야말로 이권다툼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국가보다 개인의 사리사욕이 크게만 느껴졌던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했던 이들에게는 천운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민족이나 국가는 뒷이야기였을 것이고 결국 망국의 책임은 지도자 한사람에게만 뒤집어 씌우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당시를 살았던 모든일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더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와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같이 싸잡아 매자는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동안 고종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노파심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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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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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도시, 동로마제국의 황도,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수도 지금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풀의 역사는 그 오래된 시간적 기원만큼이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색적이고 복잡한 문화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그리스도의 성전과 이슬람의 성전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는 겉으로 들어나는 풍경만큼이나 내재적으로 복잡하고도 미묘한 그 옛날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 자신이 밝혀듯이 작가의 작품중에 색깔이 가장 돋보이게 살아있는 작품으로 빨강색과 검정색등 비롯한 다양한 색감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비잔티움제국을 몰아낸지 150여년이 지난 1591년 술탄 무라트 3세의 제임기간을 역사적 배경으로 전개되는 역사소설이자 추리소설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또 한편으로 당시 이슬람문화의 절정기를 구가했던 세밀화를 다룬 예술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술탄의 밀명을 받아 은밀하게 진행되는 작업도중 살해된 세밀화가 엘리강스의 죽음을 시발로 이를 둘러싼 또 다른 죽음과 절세미인인 세큐레의 사랑을 얻기 위한 구애자들의 질투, 그리고 당시 유럽으로부터 거세게 불어닥친 문화적 충격을 겪어 나가는 과정을 추리소설의 플롯을 가져와 전제적인 내러티브를 긴장감 있게 끌어가고 있다. 빨강색이라는 색감자체에서 유추되는 정열적이고 역동적이면서도 왠지 죽음의 전초전을 암시하는듯한 불안한 구도를 덧씌우면서 작품속에서 한눈을 팔지 못하게 한다. 특히 동양적인 관점에서 빨강색이 주는 느낌은 서양의 관점과는 사뭇다르다. 스페인 투우에서 보여지는 정열적인 생동감 보다는 핏빛과 죽음을 암시하는 불안하면서도 생명의 근원에 다가가게 하는 신비로움을 동시에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작품전반에 걸쳐 빨강이라는 색감을 뿌려놓고 있어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는듯한 불안함과 동시에 끝모를 속도감을 주고 있다. 

16세기는 유럽에서는 일대 변혁의 시기였다. 중세라는 암흑의 시대를 청산하는 인본주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동안 세상의 모든 관점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관점 즉 인간이 아닌 신의 관점이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시작은 예술작품 회화에서 유독 강하게 표현되었다. 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신이 중심에 서다 보니 인간의 시각은 불손하고 비종교적인 이단을 상징했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멀리있는 사물은 작고 흐릿하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고 선명하게 보인다는 극히 작은 진실이 원근법이라는 화풍을 통해서 서서히 들어나면서 세상은 변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원근법이 중세를 고하고 르네상스라는 시대를 열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특히 이러한 발상자체가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위험스러운 것이였다. 그러나 인간은 서서히 자신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이러한 시각이 전혀 불경스럽고 이단적이 아니라 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유럽의 이러한 사조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세계는 아직도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길 거부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전환기적 시점을 작품의 배경으로 기존화풍을 수호하기 위한 세력과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기 위한 세력의 한판승부는 결국 구세력의 승리로 매듭되지만 이러한 시도가 남긴 여운의 여파에서 이슬람세계 역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내 이름은 빨강>의 특색중 하나가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내러티브 화자들의 다양성이다. 주인공 카라와 세큐레, 세밀화가 엘레강스,나비, 황새, 올리브 그리고 말, 개, 빨강, 죽음등의 비인격체등을 통해서 릴레이 게임을 연상시키듯이 한 화자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바로 다음 화자가 네러티브를 풀어가는 플롯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이 사건이 종결되고 먼훗날 세큐레의자식인 오르한을 화자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대단원에서 암시하는 독특한 구성방식을 가지고 있다. 작품 전개상 살인과 그 추적 그리고 신과 인간의 대결, 사랑의 쟁취등 다양한 대립구조를 보여주지만 그 결말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러한 대립구도를 통해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 보다 대립적인 입장을 이해시킬려고 하는 의도가 이야기 전반에 묻어 있다. 이는 동서양 양측의 문화적 이질감의 부각보다는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융합할 수 있는방안을 그저 무덤덤하게 다양한 화자들의 시각에 담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여성에게 많은 제약과 굴레를 안겨주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이슬람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제공하고 있다. 여주인공 세큐레를 통해서 수동적인 여성상이 아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이슬람 여성상을 보여준다. 자신의 생각대로 연인을 선택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이끌어가는 세큐레를 통해서 작가는 신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인간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과 그런 세상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그저 빨강색을 빨강색으로 보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는 색감을 떠나서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제 목소리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빨강색에 담겨져 있는 다양한 의미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 거부하고 있다. 아니 그러한 명명 그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전해준다. 빨강은 빨강일 뿐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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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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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유무를 떠나 비단 유물론적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가끔은 내세에 대한 두루뭉실한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경우 좀더 구체적인 자기네들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내세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각종 종교가 선사하는 내세와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체득한 알량한 지식의 편주를 마치 쓰레기 분리수거하듯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내세를 꿈꾸고 있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현세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미로서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내세가 있다면 그러한 나의 내세는 어느 특정의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을 받고선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이라 지칭되는 제3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나의 의지로 펼쳐지는 아주 달콤한 내세이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비록 그러한 내세의 유무는 제쳐두고서라도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이다. 

<달콤한 내세>는 뉴욕주 북부의 어느 작은 산간마을에서 발생한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벌어지는 산간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 등교시간에 벌어진 사고를 각각 다른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각 화자들의 객과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 사고와 무관한 각 개인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고버스의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 매일 아침 쌍둥이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우고 스쿨버스를 뒤따라서 자신의 직장인 정비소로 향하는 빌리 안센, 그리고 그날의 끔직한 사고로 인해 구사일생하는 니콜 버넬을 통해서 과연 그날 그곳에서 어떤일 벌여졌는지 그리고 사고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후폭풍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보여준다. 여기에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 변호사인 미첼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마을 전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스쿨버스의 전복과 그로인한 어린학생들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게 흐르는 마을의 분위기를 각 화자들에 의해서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작품의 마지막장을 덮게되면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독자들로 하여금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달콤한 내세>에 대한 그 어떤 결말없이 서둘러 작가는 끝을 맺어버리는것 같은 인상마저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달콤한 내세인가 대한 그 어떤 암시를 남기지 않은 것 처럼... 

이 작품은 1989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음료수 트럭과 스쿨버스의 정면충돌로 어린학생들이 20명넘게 사망한 사고를 모티브로 차용하고 있다. 이 사건이 화재에 올랐던 것은 어린 학생들의 허무한 죽음이나 사고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과실소송으로 화재에 올랐다. 자그만치 손해보상금이 1억 5000만달러에 달하고 소송계류건수만 350건에 달하는등 그야말로 소송의 틈바구니속에서 온세월을 허비했지만 정작 세인들을 더 깜짝놀라게 한것은 사고발생의 책임자인 트럭운전사에 대한 형사소송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달콤한 내세>역시 사고 이후 유가족들의 소송과정을 보여준다. 소송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술렁이게 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들의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일들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소송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사악한 생각들이 전면으로 대두하게 된다.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그전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라는 느낌이 급격하게 퇴색되고 자신에 좀더 유리한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기억의 왜곡까지도 강요받게 된다. 그러한 왜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니콜 버넬의 진술을 통해서 이러한 소송의 벗없음을 마감해 버린다. 결국 모든 책임은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과속으로 결정나게 되면서 과실 소송은 중단되고 마을 일시에 죽은자들의 도시처럼 고요만이 남게 된다.  

▣ 작가는 실제사고와 작품을 통해서 비록 사고로 인한 보상금으로 금전적인 도움이 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작은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영혼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그들의 내세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죽은이들의 역활이 소소한 보상금으로는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달콤한 내세를 꿈꾸왔던 이들에게 그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내세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감정이나 욕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줌으로서 현세를 살아가는 이유는 또 다른 세계인 달콤한 내세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콤한 내세는 현세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인 것이다. 이러한 꿈은 그 어떤 물질적인 댓가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무의미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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