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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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예상을 하고도 남았지만 막상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왜 하루키의 작품에 매료되는지에 대한 적당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소설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전작인 <상실의 시대>에서 가졌던 몽환적인 플롯은 여전히 이번 <1Q84>에도 녹아들어 있다. 달(MOON)은 예로부터 태양과 반대의 개념을 우리 인간들에게 각인 시켜왔다. 태양이 밝음, 힘, 남성성을 상징하는 반면에 달은 어둠, 나약함, 여성성등을 상징하여 마치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으로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들 한켠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달은 모성을 비롯한 순수한 여성의 사랑을 상징하듯이 몽환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오기도 한다. 이번 소설의 모멘트 역시 달이 표방하는 몽환적인 분위기 상징성인 아오마메와 그녀의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사랑 덴고라는 두 화자를 통해서 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말하고 동시에 사라짐 아니 정확히 상실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다소 SCIENCE FICTION적인 플롯이 가미되어 현존하는 1984년과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현존할 수 없는 1Q84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산재하므로서 독자들의 시선을 더 끌게 한다. 특히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인 <공기번데기>에 대한 궁금증은 마치 아오마메와 덴고가 언제쯤 해후할까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궁금증만큼이나 더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하루키 특유의 세세한 묘사가 일품으로 꼽히는 작품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묘사에서 외모적인 묘사는 1장과 2장을 읽으므로서 두 주인공에 대해 독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머리속 깊이 각인시켜 버린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나 상황변화에 따르는 묘사들 역시 하루키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고 지루하지 않다. 마치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마저 같게 해버린다. 특히 남녀간 섹스의 묘사는 하루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일 것이다. 하루키의 섹스는 에로틱한 느낌보다는 자신 작품속을 관통하는 몽환적이 느낌의 표출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보기에 따라 다소 민망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섹스의 묘사는 에로시즘과는 별개로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만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곳곳에 음악이 녹아있다. 특히 아오마메를 상징하는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예정된 삶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아오마메나 덴고 그리고 후카에리등 주요 등장인물을 묘사할때 곳곳에 이런 장치를 곁들어 놓아 인물이해를 문자라는 단어와 음악이라는 음률로 동시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 인물들에 대한 애착을 한결 더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상실에 대한 작가 나름의 가치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별, 분실, 사라짐, 제거등 우리는 현실속에서 나에게 귀속 되었던 것이 나를 이탈하는 순간에 다양한 단어로 이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이 과연 적절한가라는(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에는 그 어떠한 의문도 가져보질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상실'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되어 진다. 상실이라는 모멘트는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자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기꺼이 다가가기엔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작중 덴고 아버지의 말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줘도 모른다" 처럼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 같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잔잔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이어지는 내러티브 역시 많은 추측을 낳고 있지만 그것 역시 읽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기다려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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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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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만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예상을 하고도 남았지만 막상 작품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왜 하루키의 작품에 매료되는지에 대한 적당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마저 들게 하는 소설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전작인 <상실의 시대>에서 가졌던 몽환적인 플롯은 여전히 이번 <1Q84>에도 녹아들어 있다. 달(MOON)은 예로부터 태양과 반대의 개념을 우리 인간들에게 각인 시켜왔다. 태양이 밝음, 힘, 남성성을 상징하는 반면에 달은 어둠, 나약함, 여성성등을 상징하여 마치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서 보편적이고 일반론적으로도 선과 악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들 한켠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달은 모성을 비롯한 순수한 여성의 사랑을 상징하듯이 몽환적으로 우리들에게 다가 오기도 한다. 이번 소설의 모멘트 역시 달이 표방하는 몽환적인 분위기 상징성인 아오마메와 그녀의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사랑 덴고라는 두 화자를 통해서 작가는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말하고 동시에 사라짐 아니 정확히 상실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다소 SCIENCE FICTION적인 플롯이 가미되어 현존하는 1984년과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현존할 수 없는 1Q84년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산재하므로서 독자들의 시선을 더 끌게 한다. 특히 소설속의 또 다른 소설인 <공기번데기>에 대한 궁금증은 마치 아오마메와 덴고가 언제쯤 해후할까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궁금증만큼이나 더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하루키 특유의 세세한 묘사가 일품으로 꼽히는 작품일 것이다. 인물에 대한 감정묘사에서 외모적인 묘사는 1장과 2장을 읽으므로서 두 주인공에 대해 독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머리속 깊이 각인시켜 버린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나 상황변화에 따르는 묘사들 역시 하루키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고 지루하지 않다. 마치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마저 같게 해버린다. 특히 남녀간 섹스의 묘사는 하루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문구들의 향연일 것이다. 하루키의 섹스는 에로틱한 느낌보다는 자신 작품속을 관통하는 몽환적이 느낌의 표출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보기에 따라 다소 민망한 표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섹스의 묘사는 에로시즘과는 별개로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만의 메세지가 담겨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곳곳에 음악이 녹아있다. 특히 아오마메를 상징하는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는 서두에서 부터 그녀의 예정된 삶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아오마메나 덴고 그리고 후카에리등 주요 등장인물을 묘사할때 곳곳에 이런 장치를 곁들어 놓아 인물이해를 문자라는 단어와 음악이라는 음률로 동시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어 인물들에 대한 애착을 한결 더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상실에 대한 작가 나름의 가치관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별, 분실, 사라짐, 제거등 우리는 현실속에서 나에게 귀속 되었던 것이 나를 이탈하는 순간에 다양한 단어로 이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이 과연 적절한가라는(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에는 그 어떠한 의문도 가져보질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소설을 통해서 이러한 일련의 표현들이 '상실'이라는 하나의 표현으로 압축되어 진다. 상실이라는 모멘트는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자 삶 그 자체인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기꺼이 다가가기엔 다소 무거운 작품이다. 작중 덴고 아버지의 말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은, 설명해줘도 모른다" 처럼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 것 같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잔잔하게 가슴에 와닿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후 이어지는 내러티브 역시 많은 추측을 낳고 있지만 그것 역시 읽어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더 기다려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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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2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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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이 마치 땅위에서 한 발자국 붕 떠있는 몽롱한 상황을 자아내게 하고 그러한 상황을 플롯의 기본 틀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왠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몽환적인 면과 '나'라는 자아와 동떨어진 느낌이 오히려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읽을때는 마치 소설이라는 픽션을 마치 팩트로 받아 들이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현실이라는 눈앞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해 질 뿐이다. 그동안 김탁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역사소설가(물론 작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는 분명하게 그리 비쳐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라는 공식이 들어 앉아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여타의 역사소설가와 다른점은 픽션과 팩트의 조화로운 설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러티브를 제시함 으로서 역사소설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투철한 작업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치밀한 고증 즉 탄탄한 팩트가 결국 상상력 넘치는 픽션을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인기 역사소설가가 <눈 먼 시계공>이라는 SF초현실 소설을 선보였다. 왠지 생뚱 맞다는 느낌마져 든다. 제목도 진화론의 전사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키슨의 저작과 같을 뿐 아니라 그동안 그의 작품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르라서 더욱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더욱이 문학작품을 공저로 출간한다는 점에서 한번 더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묻어 있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에 투영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준거를 마련했다면 이번 작품은 역으로 미래에서 그 준거를 제시함으로서 내용적인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작품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재현 했다면 이번 소설은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재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눈 먼 시계공>의 시대적 배경인 2049년은 로봇과 절대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일부 신체를 기계로 대처한 인간)등 그리고 뇌적출과 뇌이식, 자동운행 자동차등 이론상으로 가능할 것라는 과학적 상상이 그대로 재현된 시대이다. 가사로봇을 비롯한 로봇들이 인간들의 시중을 들고 정치적인 구조로도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 조직에 대한 집착이 흐릿해지면서 특별시 단위의 보다 낮은 단계로의 구성체가 대세로 받아지면서 이 시대는 그야말로 과학문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작가들은 주인공 은석범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부딛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고민거리를 소설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지금 연애계를 비롯한 일반대중에까지 널리 퍼져버린 성형수술의 붐을 생명연장이나 근력 강화등에 현혹되어 무분별하게 인간의 몸을 기계화로 대처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집단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과학기술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정체성의 정립 및 회의에 대한 고민거리를 독자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쳐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총화를 보여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속에서 과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과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문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SF소설이나 미래과학 상상소설이 짧은 라이프 사이클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것은 작가들 개인의 역량적인 한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게 인문학이나 문학쪽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환경들에 의해서 작가의 상상력은 그자체로 한계성을 갖게 마련일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점은 극히 개인적인 시각의 편차이고 모든 SF소설을 다아우르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하지만 <눈 먼 시계공>은 전문작가와 과학자의 공저로서 작가적인 섬세한 작품성과 과학자의 팩트가 한데 어울러져 정말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를 통해서 진화론적으로 상고했을때 학문의 종착점은 각분야의 학문들간의 지적인 통섭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의 사회는 각분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풍토는 특히 우리에게 편협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면 인간미 없고 딱딱한 사고의 집합체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과학영역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작품속에서도 과학발전과 생태보존이라는 두 집단의 끊임 없는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과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학과 문학이 서로 통섭되었을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내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학과 과학이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울어 진다면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플롯과 더불어  과학적인 팩트가 뒷받침이 되어 펼처지는 내러티브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마치 미래에 발생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앞당겨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현대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유행를 타고 있는 성형수술의 붐과 미디어천국을 방불케 하는 광고의 홍수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구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로봇에게 집착하는 모습들은 왠지 모르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에 근거한 뇌과학분야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모티브는 이 소설이 막연한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적인 SF소설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문학이나 과학이 다른 분야와 어우러지 못하고 한방향으로만 나아 간다면 미래는 분명 고통스러운 현실의 연장일 뿐임을 비단 소설속이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차기 한국문학의 대표주자 김탁환과 과학의 미래인 정재승이 던지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화두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발상을 계기로 문학과 과학의 두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분야가 상호간에 통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미래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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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시계공 1
김탁환.정재승 지음, 김한민 그림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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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그 공간적 배경이나 시대적 배경이 마치 땅위에서 한 발자국 붕 떠있는 몽롱한 상황을 자아내게 하고 그러한 상황을 플롯의 기본 틀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는 왠지 몽환적이기도 하다. 그러한 몽환적인 면과 '나'라는 자아와 동떨어진 느낌이 오히려 독자들의 관심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들은 읽을때는 마치 소설이라는 픽션을 마치 팩트로 받아 들이다가도 막상 책을 덮고 현실이라는 눈앞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해 질 뿐이다. 그동안 김탁환이라는 이름 석자가 일반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서 역사소설가(물론 작가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세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에는 분명하게 그리 비쳐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라는 공식이 들어 앉아 있다. 무엇보다 작가가 여타의 역사소설가와 다른점은 픽션과 팩트의 조화로운 설정을 통해서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내러티브를 제시함 으로서 역사소설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투철한 작업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인 치밀한 고증 즉 탄탄한 팩트가 결국 상상력 넘치는 픽션을 창조해 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인기 역사소설가가 <눈 먼 시계공>이라는 SF초현실 소설을 선보였다. 왠지 생뚱 맞다는 느낌마져 든다. 제목도 진화론의 전사를 자처하는 리처드 도키슨의 저작과 같을 뿐 아니라 그동안 그의 작품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장르라서 더욱 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더욱이 문학작품을 공저로 출간한다는 점에서 한번 더 갸우뚱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이성도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설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묻어 있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미래라는 시대적 배경에 투영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작품들은 과거에서 준거를 마련했다면 이번 작품은 역으로 미래에서 그 준거를 제시함으로서 내용적인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이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일맥상통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 작품이 흘러간 과거의 역사를 재현 했다면 이번 소설은 다가올 미래의 역사를 재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눈 먼 시계공>의 시대적 배경인 2049년은 로봇과 절대인간 그리고 사이보그(일부 신체를 기계로 대처한 인간)등 그리고 뇌적출과 뇌이식, 자동운행 자동차등 이론상으로 가능할 것라는 과학적 상상이 그대로 재현된 시대이다. 가사로봇을 비롯한 로봇들이 인간들의 시중을 들고 정치적인 구조로도 국가라는 거대한 중앙 조직에 대한 집착이 흐릿해지면서 특별시 단위의 보다 낮은 단계로의 구성체가 대세로 받아지면서 이 시대는 그야말로 과학문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는 시대이다. 작가들은 주인공 은석범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면서 부딛치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이 시대의 고민거리를 소설속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지금 연애계를 비롯한 일반대중에까지 널리 퍼져버린 성형수술의 붐을 생명연장이나 근력 강화등에 현혹되어 무분별하게 인간의 몸을 기계화로 대처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집단과 다를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인간이 과학기술발달과 그로 인한 인간정체성의 정립 및 회의에 대한 고민거리를 독자들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산업혁명을 거쳐 디지털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의 최첨단 총화를 보여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속에서 과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정립과 과학기술의 산물들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대한 고민은 결국 인문학이나 과학의 한 분야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SF소설이나 미래과학 상상소설이 짧은 라이프 사이클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것은 작가들 개인의 역량적인 한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게 인문학이나 문학쪽에서 교육을 받아왔던 환경들에 의해서 작가의 상상력은 그자체로 한계성을 갖게 마련일 것이고 이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이점은 극히 개인적인 시각의 편차이고 모든 SF소설을 다아우르는 말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하지만 <눈 먼 시계공>은 전문작가와 과학자의 공저로서 작가적인 섬세한 작품성과 과학자의 팩트가 한데 어울러져 정말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를 통해서 진화론적으로 상고했을때 학문의 종착점은 각분야의 학문들간의 지적인 통섭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지금의 사회는 각분야의 전문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풍토는 특히 우리에게 편협적인 시각과 더불어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문학의 영역에서 과학을 보면 인간미 없고 딱딱한 사고의 집합체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과학영역에서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도로 폄하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작품속에서도 과학발전과 생태보존이라는 두 집단의 끊임 없는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다.  

이번 작품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과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학과 문학이 서로 통섭되었을 경우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훌륭한 답을 내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문학과 과학이 서로 만나 하나로 어울어 진다면 이처럼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탄탄하면서도 섬세한 플롯과 더불어  과학적인 팩트가 뒷받침이 되어 펼처지는 내러티브는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마치 미래에 발생하게끔 예정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앞당겨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을 SF소설이라고 칭하고 싶지 않다. 현대처럼 아무런 의식없이 유행를 타고 있는 성형수술의 붐과 미디어천국을 방불케 하는 광고의 홍수 그리고 이를 정점으로 구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와 돈에 노예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모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로봇에게 집착하는 모습들은 왠지 모르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에 근거한 뇌과학분야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모티브는 이 소설이 막연한 상상력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일반적인 SF소설이 절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문학이나 과학이 다른 분야와 어우러지 못하고 한방향으로만 나아 간다면 미래는 분명 고통스러운 현실의 연장일 뿐임을 비단 소설속이지만 가슴에 와닿게 한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차기 한국문학의 대표주자 김탁환과 과학의 미래인 정재승이 던지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화두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러한 발상을 계기로 문학과 과학의 두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분야가 상호간에 통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과 동시에 미래는 이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밝을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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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네이얼 웨스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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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언저리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와 더불어 20세기 미문학의 3대 거봉으로 알려져 있는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4작품중에서 첫 작품인 <거금 100만 달러>는 세계 대공항이라는 경제적 침체기에 미국 젊은이들의 삶과 희망 그리고 좌절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주인공 레뮤얼 피트킨을 통해 제3자적 관찰자의 시각으로 당시 미국 전반에 깔려있는 사조들을 냉소적으로 이슈화 하였다. 경제대공항이라는 시대적 배경속에서 하루아침에 거리로 밀려난 대다수의 민중들의 삶과 그리고 이러한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파렴치한들 거기에 패배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분노를 자양분으로 재기하려고 하는 정치인등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당시 미국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자본주의의 확장을 대세로 생각했던 이들에게 경제적 대공항은 그야말로 그동안 팽창이라는 발전에 묻혀있었던 각양각색의 부조리와 비리 그리고 비합리성을 한꺼번 분출하게 하는 탈출구역활을 해버렸던 것이고 이러한 아노미상태에서 일반 대중들은 자아와 가치관의 해체를 뼈저리게 몸소 겪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의 신체적 경제적 시련을 통해서 당시 미국사회에서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던 부조화를 마치 무성영화의 연사처럼 무덤덤하게 나래이션하고 있지만 이를 읽는 독자들은 오히려 작가의 냉대와 무감각에 더 소설속으로 빠져들게 하는것 같다. 미국개척기의 골드러쉬와 인디언의 학살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시대를 거슬러 적당히 혼합한 플롯과 내러티브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책 속의 또다른 작품인 <발소 스넬의 몽상>은 트로이 목마속을 여행하면서 발소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속에서 앞의 거금 100만달러와 사뭇다른 그로데스크한 풍의 작품이다. 아마도 작가의 자전적인 고백형식을 발소라는 주인공의 눈을 빌려 글을 쓰는 작가들의 고뇌를 그로데스크하게 표현한듯 하다.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은 1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공방전을 벌렸고 결국 목마라는 다소 우스광스러운 계기로 트로이는 함락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작가는 글을 쓰는 어려움을 그리스인들이 해변가에 버리고 간 목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했던 트로이인들의 고뇌, 그리고 승리했다는 성취감 끝으로 목마를 성안으로 운반하고 나서의 당혹감과 좌절감을 작품이 나오는 과정에 맞추어서 오버랩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 소설을 접하기 전까지 사실상 작가에 대한 이력이나 작품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이 없었지만 단지 2작품을 읽어보더라도 왜 헤밍에이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풀릴 정도로 그의 작품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단지 <거금 100만달러>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인 시각을 볼 수 있으나 아마도 어쩌면 이러한 시각은 대공항이 한창이었던 1930년대에 미국사회의 보편적인 정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를 그대로 여과없이 지면에 옮긴 작가의 또 다른 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거금 100만달러>가 거시적인 시대적 상황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에 <발소 스넬의 몽상>은 작가내면이라는 미시적 상황을 그로데스크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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