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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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다잉 아이>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세계는 그만의 독특한 플롯이 있다. 전통적인 권선징악에 모티브를 두고 있지만 악에 대한 징벌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절대자 내지는 설계자에 의한 징벌 보다는 작품속에서 필연적으로 내제되어 있는 요소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결말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다른 추리작가들의 작품세계와는 다른 맛이 존재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 전작인 <탐정 갈릴레오>에서도 구나사기와 유가와를 통해서 직접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모든 사건의 해결과 그에 상응하는 일종의 권선징악이라는 테마는 내러티브의 흐름에 그냥 묻혀서 독자들의 판단으로 남겨 두었듯이 이번 <다잉 아이>역시 이러한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죽어가는 눈'을 통한 감정이입이라든가 인간을 닮은 인형등의 소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풍부한 상상력과 추리력을 대변하는 요소들이다. 

잊혀졌던 기억이 예기치 않는 사고로 인해 서서히 밝혀지면서 그 진실이 들어나는 순간까지의 이야기 진행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과 예측을 하게끔 약간은 허술하게 내러티브를 엮어 놓았다. 그래서 읽는이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하고 책장을 넘기면서 새삼 확인하게 한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 수록 이러한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또 다시 새로운 얼개를 엮게 만드는 것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일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개입 없이 물흐르는듯한 내러티브에서 독자들은 오히려 더 심연으로 빠져들게 되고 결국 작품세계속에서 다잉 아이의 정체에 대해서 신스케만큼이나 혼란에 빠지게 되버린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디텍티브 픽션의 요소들인 미스테리, 서스펜스, 스릴, 트릭을 내러티브 전반에 걸쳐 골고루 적당하게 분배하고 있다. 미스테리한 사건 배경과 등장인물들 그리고 '죽어가는 눈'이라는 서스펜스와 사건의 진상과 비밀이 서서히 들어나는 과정에서의 스릴 그리고 일대 반전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기대에 적극 부응한 반전과 곧바로 이어지는 트릭 그야말로 긴장과 불안을 한순간이라도 놓지 못하게금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작가 자신도 "다시는 이렇게 쓸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표현했듯이 모처럼 작품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걸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번 작품 역시 일본 추리작가들의 전형인 사회파 비정 추리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일년에 만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오히려 인적사고를 낸 가해자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절도자보다 형량이 가볍고, 그저 운이 나빠서 생긴일이라는 에지마의 생각에서 작가는 현재 일본이 안고 있는 물질만능과 인명경시라는 일본사회의 모순점을 작품에 담고 있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단순한 퍼즐형,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보다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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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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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계는 분명 지금보다는 아주 느리게 돌아같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 보다 더 많은 기이한 일들이 벌어 졌고 그에 대한 반응도 지금의 사람들 보다 훨씬 강도가 큰 놀라움으로 다가같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풀어갈 수 없다고 여겨진 기이하고 놀라운 일에 대해서 기적을 바랬을 것이다. 놀라움이 많고 클수록 기적도 자주 일어나는 것이니까. 이에 반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놀라움이나 기이한 일에 대해서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다. 이제 사고로 몇십명 정도 죽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충격으로 와닿지도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기적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난센스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그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혜성처럼 나타난 영국의 신예 작가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 동안 정통 문학에 다소 식상 했던 독자들을 위해서 자구책이든 문학장르의 혁신이든 간에 추리,에로,호러,SF등 다양한 장르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던 문학계나 독자들에게 소설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제 독자들은 왠만히 상큼하고 기발한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러티브로 어필이 되지 않는 이상 작품에 대한 기이함이나 놀라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던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적같은 작품을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 도 없게 되어 버렸다. 너무나 극성스러운 플롯에 중독되어 왠만한 충격은 그저 그렇게 묻혀갈 뿐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동안 스팩타컬한 내러티브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겐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내러티브의 연속뿐이다. 영국의 어느 빈촌의 다세대같은(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발생한 한 소년의 교통사고와 사고 이후 화자이자 3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그날 오후에 있었던 거리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는 그렇고 그런 내러티브이다. 추리나 반전의 요소도 없고 충격적인 장면 하나 나오질 않는다. 심지어 작가는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서 구어의 표현인 따옴표 조차 생략해 버렸다. 사실 한번 읽어 보다가 턴테이블의 카세트를 되 감듯이 몇 번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고약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영국을 휩쓸고 각종 리뷰어지에서 찬사를 받게 된 계기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조금씩 다가오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뇌리에 깊이 오버랩 되는 작품이다. 

흔히 쉽게 잊혀져 가고 지나쳐 버리는 소재를 이토록 유심히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특히 거리의 모습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겉 모습과 심리묘사는 마치 CCTV를 통해서 리얼타임으로 현장을 중계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에서 소소하면서도 세밀했던 묘사들이 불현듯 생각나는 작품이다. 전혀 생각할 가치 조차 없다고 여겼던 일에 대해서 작가는 시와 같은 문체를 동원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의미는 소설을 읽는 내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무엇인가에 의해 잃어버렸던 감정의 순수함과 떨림을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되찾아가는 기분마져 들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런 묘사력은 교통사고 당시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순간을 다음과 묘사함으로써 그 극치에 이른다. "운전자의 입장 뇌세포들 사이에서 전기 신호들이 뉴스 통신 본부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처럼 좌충우돌하다 하나의 신호로 수렴돼 터져 나오눈 의지가 척추를 항해 곤두박질치고 가장 짧은 경로를 찾아 건너뛰고 방향을 틀며 길을 잘못 든 자전거 배달부처럼 발목 근육에 도착해서 브레이크를 바닥 끝까지 밟아, 보통의 제어 행위를 벗어나 브레이크 폐달을 너무 세게 밟아서 며칠 후 근육이 노랑과 보랏빛으로 붓게 돼서야 뇌의 작용이 멈춘다" 이렇듯 이 소설은 작가의 이런한 세밀하면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읽는 당시에는 그저 눈요기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뇌리에 오래토록 남아있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린 기적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정형화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러티브 그리고 상상을 초월해 버리는 플롯으로 점철된 현대 소설이라는 아름다운 꽃밭에서 한쪽 구석에 이름모르는 야생화를 발견하고 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야생화의 향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그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지만 야생화가 내뿜는 향은 오래토록 은은하게 우리의 후각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이 바로 이런 야생화 같은 작품이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고 나면 그 파동이 서서히 밀려왔다가 다시 잔잔 해지는것 처럼 이 작품은 이렇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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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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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꿈(夢)이란 현실과는 정반대의 현상 즉 현실에서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몽짜로 끝나는 구운몽이나 옥루몽같은 작품들을 한번쯤이면 누구나 꿈꾸어왔던 세상을 그리고 있고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꿈을 각자 나름대로 키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은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 아니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유쾌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꿈 이야기와 다른 또 다른 꿈 이야기가 펼쳐진다. 황석영의 <강남夢>은 꿈은 꿈인데 그리 달콤한 꿈이 아니다. 한국 굴곡의 근현대사를 메타포로 다룬 가슴 아픈 꿈 이야기이다. 대한민국 강남특별시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강남은 이미 일반적인 행정구역의 개념을 넘어선지 오래되었다. 각종 인프라와 더불어 경제의 중심이자 대한민국 교육의 선도적인 위치 그리고 부동산시장의 리더라는 거대한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누구나 다들 그런 강남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강남 입성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이렇게 거대한 공룡처럼 변해버린 강남의 변화를 우리 근현대사의 왜곡된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조명하고 있다. 각종 비리와 금권의 결합이 낳은 기형적인 도시 강남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일지 모른다. 자본주의시스템을 누구보다도 철처하게 완벽하게 몸에 익힌 우리가 꿈꾸어 왔던 세계가 바로 현실로 재탄생한 곳이 바로 강남인 것이다. 꿈은 잠에서 깨어나는 일장춘몽처럼 느껴져야 하지만 강남이라는 꿈은 사실상 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만큼 강남은 이미 우리들에게 꿈일수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겉으로 들어난 화련한 스포트라이트는 우리의 진짜꿈을 모두 덮어 버린다. 아니 진짜 자신이 꿈꾸어 왔던 희망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게 잊혀지길 강요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요의 흐름을 마치 하나의 트랜드로 받아 들여 버리고 동상이몽이 아닌 플롯과 내러티브가 동일한 꿈만을 꾸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이런 시니컬한 강남몽는 모두가 인지하면서도 왠지 꿈꾸지 않으면 안될 것 처럼 만들어 버린 그동안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뭇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비장감마저도 느껴지게 하는 사회구조가 이제는 왠지 다반사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강남몽의 힘인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우리 근현대사를 마치 봄날의 꿈속처럼 빠른 속도로 다루고 있다. 비뚤어진 강남의 절정판인 대성백화점(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강남의 인간상을 대표하는 박선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지만 나이트메어의 악몽처럼 강남몽은 그자리에 마천루같은 고급주택을 건설하면서 굳건하게 이어가고 있다. 마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꿈처럼 말이다.

그러나 허물어진 콘크리트 잔해에서 생존한 정아를 통해서 작가는 강남몽이라는 악몽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언제가는는 강남은 한차례 거쳐야하는 호된 악몽으로 기억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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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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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이라는 자연 현상은 우리 인간들에겐 자연 현상을 넘어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눈을 살아 생전 직접 보지 못하는 적도지방의 사람이나 일년에 몇달을 제외하곤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에게나 눈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대기중의 수증기가 낮은 온도에서 얼어 강하 하는 현상이라는 극히 상식적인 내용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는다. 이말은 눈에는 그 만큼 인간의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눈을 상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하얗다, 순결, 희망, 따뜻함, 포근함, 사랑등의 극히 긍정적이고 푸근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하지만 눈을 자연 현상 그대로 보면 차가운 성질인데 우리는 이와 반대로 이런 눈을 따뜻하게 받아 들이는 특이한 자연선택과정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눈을 모티브로한 다양한 설화와 문학작품들에 우리는 익숙해 있고 이런 작품들로 인해 우리의 감정의 나날이 풍성해지고 눈과 귀는 그저 호강을 하고 있으며 눈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작품속에 반영할 경우 대게의 경우 적어도 실패는 보지 않는다는 안도감 마저도 가지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눈>도 바로 눈을 모티브로한 작품이다. 십중팔구 대게의 작품에서 보이듯이 눈 덮인 도시를 배경으로 우연치 않게 찾아 드는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슬픈 사랑 이야기(그리고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끈끈하고 매혹스럽기까지한 우정 이야기, 한발 더 나아가면 각양각색의 등장인물들을 출연시켜 내러티브를 신파조로 끌고가는 스토리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고 설령 그러한 플롯이 사실이더라도 눈이라는 모티브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에 그렇게 심한 자책을 하지 않는다. 파묵의 <눈> 또한 이러한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오게 된다. 무엇보다 제목이 <눈>이지 않는가?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눈>에 대해서 얼마나 독자들의 심정을 자극해 올까라는 기대를 갖기 마련이고 비록 앞에서 접한 그렇고 그런 내용일 것이라는 범주의 범위에 들어 오더라도 실망을 크게 하지 않는다. 말했듯이 그저 <눈>이라는 자체가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장에서 시작한 눈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나올 정도로 눈이 많이도 나온다. 아마도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눈을 보게 되니 더 이상의 눈에 대한 부차스러운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제까지 살펴 보았듯이 이렇듯 우리의 뇌리 속에 똬리 트고 있는 눈에 대한 관념과 그 배경들에 대해서 파묵은 이번 기회에 아주 작심을 한 듯 새로운 읽을 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터키 근현대화 과정에서 빚어 지는 정치적인 갈등, 신과 종교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 하면서 내면화 시키는 과정과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의 차이, 언론과 군부, 일반 민중들의 모순된 삶 그리고 파묵 자신도 거역할 수 없었던 사랑에 빠진 남녀 이야기들이 3일간 내리는 눈속에서 적절한 속도와 긴장감을 던져 주면서 내러티브 전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파묵 자신의 화신인 카의 시를 플롯으로 작품 전체에 서사적인 느낌의 장엄함 마져도 보여주고 있다.

눈이라는 극히 개인적인 모티브를 다소 무거운 정치적인 모티브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분명 파묵만의 능력일 것이고 이로 인한 읽는 즐거움은 독자들만의 행복으로 다가 온다. 작품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3일 천하로 이어지는 국지적인 쿠테타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은 눈의 육각형결정체 고스란히 묻혀 겹겹이 쌓이고 잊어지고 그러면서 다시 되살아나 영원히 멈추지 않는 수레바퀴처럼 내리는 눈속에 투영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즐겁고, 안타깝고, 내러티브속에 끼어 들어가고 싶어지면서도 한편으로 슬퍼진다. 터키 격동의 시기 정치종교적으로 이방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파묵 자신을 대변하고 있는 주인공 카의 죽임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기억되고 싶지 않는 존재로 그러면서도 내리는 눈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은 아픔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묵은 <눈>을 우리의 이성,상상,기억의 저장 매체로 재탄생시켰다. 눈을 통해서 우리의 유치할 정도의 작은 이성,상상,기억들이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겹겹이 쌓여있는 눈속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고 세월이 흐른뒤에도 이런 이성,상상,기억들은 대기가 순환 하듯이 항상 우리곁을 맴도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이번 작품 역시 읽는 즐거움과 동시에 생각해야하는 괴로움을 만끽하게 하는 파묵만의 작품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하는것 같다. 일상의 사랑에서 부터 정치, 종교, 혁명등의 무거운 소재에 이르기 까지 파묵만의 소소한 묘사는 한 없이 내리는 눈만큼 포근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면서 겹겹히 쌓여 잊혀지지 않은 추억으로 독자들에게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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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도전 2 - 하늘을 버리고 백성을 택하다 정도전 2
이수광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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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덕수출서물(君德首出庶物)  임금의 덕은 만물 위에 뛰어나야 한다.""
"" 인군지성임현이성기공(人君至誠任賢以成基功) 임금은 정성을 다하여 어진 인물을 발탁해야 공을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조국가는 군주 일인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군주를 중심으로 군주을 위하여 모든 정책이 결정되고 시행되는 정치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세계사의 대부분의 왕조국가들이 이러한 시스템을 견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민본주의라는 패러다임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속의 국가들 대부분이 그 수명이 길지 못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나, 수나라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단명한 왕조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에 비해 조선이라는 왕조국가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장수를 누렸다. 그럼 왜 조선은 왕조국가인데도 장수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이러한 생각을 가져봤을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철저한 신분사회를 유지했다? 집권층을 제외한 나머지 민중들의 역사적소명 내지 의식이 철저히 사장되었다? 글쎄 절로 갸우뚱해지지 않는가. 한마디로 미스테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시리즈>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바로 그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바로 <정도전>이름 석자에 조선의 장수의 비결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삼봉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모 방송국의 대하드리마 방영과 때를 맞추어 대한민국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었던 내각책임제가 이슈화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에 들어 왔다. 그동안 역사는 정도전을 어린 세자를 옹립하여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착하다가 분연히 일어난 이방원에게 제거된 간사한 소인배 정도로 기억되어 왔다. 또한 조선시대 정조와 고종대 이전까지도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자는 역모에 준하는 금기사항 그 자체였던 것이 사실이다. 왜 조선은 정도전에 대해서 500여년 동안 금기시해 왔던 것인가? 그가 그렇게 죽을 죄를 범했던 것일까? 끝까지 고려의 충심을 위해 죽은 정몽주는 향후 조선의 문묘에 배향이 되었는데 오히려 조선개국의 1등 공신인 정도전은 역적의 수괴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아마도 그 해답은 왕조국가라는 조선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방석등을 제거한 사건을 역사에서 우리는 정변이라고 부르지 않고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는 난이라는 개념을 反이 正에 대해 도전할 때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난으로 규정한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은 이율배반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사가들의 정확한 역사적 기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역사적 비중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분명 타이틀은 역사소설이 맞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보다는 역사에세이 혹은 정도전 평전을 접하는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 역시 팩트에다 약간의 픽션을 가미한 소설이라고 밝혔지만 왠지 픽션의 부분마져도 팩트로 받아 들여지게 하는 작가의 필력이 놀라울 정도이다. 특히 신권정치를 표방했던 정도전의 사상을 반영하듯이 이 작품의 무게중심은 이성계나 정도전의 반대측에 있었던 이방원에게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도전을 비롯하여 정몽주, 이숭인, 하륜등의 신권에 가까이 있는 인물들의 내면과 사상을 부각시켜 자칫하면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기존의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방향을 흘러갈 수 도 있었던 구도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것이다. 마치 정도전이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처럼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굵직한 사건들 보다는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토록 빛을 발하는 달빛처럼 은은하고 무덤덤하게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그래서 더욱 더 소설 같지 않는 소설인 것이다. 여말선초와 정도전에 대해서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꼼꼼하게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아마도 조선건국에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라면 조선은 그 수명이 길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계나 그 후임인 이방원의 능력이나 성격을 보더라도 답은 뻔하게 도출된다. 정도전은 비단 자신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사라졌지만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자가 조선왕조를 장수의 길로 접어들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줄다리기를 통해서 왕조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중에 하나가 바로 정도전의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삼봉은 살아서 60년를 채 살지 못하고 갔지만 죽어서 500년을 조선과 함께 살았다. 그가 당초 설계했던 조선의 밑그림은 요동정벌 하나만 제외 하고는 거의 다 반영되어 조선의 뼈대를 이루었고 이러한 정책들을 바탕으로 장수를 누리게 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의미가 없지만 간혹 이러한 책을 접하게 되면 한번쯤은 해보기 마련이다. 삼봉이 살아서 요동을 정벌했으면.... 

모처럼 픽션과 팩트를 넘아들면서 재미있게 읽어 나간 소설이다. 또한 한편으로 지금 이나라의 위정자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으로 보여진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  라는 삼봉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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