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아저씨 1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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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디론가 떠난다. 다람쥐 체바퀴 돌듯 틀로 짜여져 한치의 오차도 없을것만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저 떠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희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이던 그리고 어떤 교통수단을 동원하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갈 것인가등의 방법론은 다음 문제이다. 마냥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심장의 박동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이나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떠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간다면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지 않을까. 

<자전거 아저씨>의 저자는 바로 누구나 한번쯤을 꿈을 꾸었던 갈망을 현실로 실현한 사람이다. 자전거로 한반도의 곳곳을 심지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자전거로 하나로 전국을 누빈 현대판 김삿갓이자 김정호라고 해야할 정도로 한두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전거를 끌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듯이 아니면 자전거 바퀴처럼 한곳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굴러가듯이 그렇게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굴러다녔다. 지금이야 웰빙의 수단 정도로 전락한 자전거이지만 이 나라에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들어온 자전거는 일반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보편화되기전까지 자전거는 우리 아버지들의 출퇴근 시간을 돋보이게 했고 학교 등교길에 아버지등을 두팔로 감싸안고 등교했던 아련한 기억들까지 자전거는 이동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게체로써의 역활도 톡톡히 했다. <자전거 아저씨> 에서 저자는 바로 이렇게 정이 묻어나는 자전거를 통해서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이정표로 표현되고 있다. 낯선길을 찾을때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하듯이 자전거는 닫혀있었던 삶을 열린 공간속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단 그 이정표를 잘못보아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더라도 그곳에도 역시 열려있는 세상이 있음에 저자는 네비게이션을 찍듯이 굳이 정확하게 찾아가야할 필요성 조차 제거해 버렸다. 아마도 이런게 자전거 여행의 참맛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독자들 스스로 공감하게끔하고 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제주도 자전거가 발닿는(?)곳 어디에도 수수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제대로된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만 제외하고는 모든 삶들이 평온하고 친근하고 정이 넘쳐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진다. 의도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속에 여행자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버린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고 하듯이 여행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자나 독자들에게 희망이고 삶 그자체로 다가온다. 

집을 나선다면 지도, 먹거리, 입을거리, 이동수단, 기타 등등 챙겨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막상 나서지만 한두가지는 빼먹게 마련이다. <자전거 아저씨>는 우리의 의도되고 계획된 여행과는 사뭇 다른다. 즉흥적이고 준비되지 않는 다소 생뚱맞는 여행의 연속이다. 중량천변에서 낚시줄에 물고기가 아닌 들쥐 한마리가 걸려던 광경이 황당하고 우습지만 바로 이런 의도되지 않는 모습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모처럼 마음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가슴찡한 감동적인 문구나 단어를 찾을려면 눈을 씻고 들여다 보아도 그 행방이 묘현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행간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는 강력하게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이 역시 전혀 의도되고 계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다가온다. 거의 매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저자의 작품들과 사진들이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반영하고 있어 더 돋보이는 책이다. 올여름 상영되었던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넌 정체가 뭐냐라는 대답에 원빈이 그저 "옆집 아저씨" 라고 답한다. <자전거 아저씨>는 마치 옆집의 수수하고 푸근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정말 깊어가는 이 가을날 어딘론가 목적지도 없이 계획도 없이 떠나게끔 하는 책이다. 그렇게 도달하는 곳엔 옆집 아저씨같은 소박한 우리의 이웃들이 있을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덩달아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을것만 같다. 아니 인식하지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그게 다 사람살아가는 과정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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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아저씨 2
남궁문 지음 / 시디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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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디론가 떠난다. 다람쥐 체바퀴 돌듯 틀로 짜여져 한치의 오차도 없을것만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저 떠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희일 것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이던 그리고 어떤 교통수단을 동원하고 어떻게 목적지까지 갈 것인가등의 방법론은 다음 문제이다. 마냥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심장의 박동수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이나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떠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간다면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지 않을까. 

<자전거 아저씨>의 저자는 바로 누구나 한번쯤을 꿈을 꾸었던 갈망을 현실로 실현한 사람이다. 자전거로 한반도의 곳곳을 심지어 바다건너 제주도까지 자전거로 하나로 전국을 누빈 현대판 김삿갓이자 김정호라고 해야할 정도로 한두번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그는 자전거를 끌로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역마살이라도 낀듯이 아니면 자전거 바퀴처럼 한곳에 오래 서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굴러가듯이 그렇게 자전거와 한몸이 되어 굴러다녔다. 지금이야 웰빙의 수단 정도로 전락한 자전거이지만 이 나라에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들어온 자전거는 일반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와 권력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보편화되기전까지 자전거는 우리 아버지들의 출퇴근 시간을 돋보이게 했고 학교 등교길에 아버지등을 두팔로 감싸안고 등교했던 아련한 기억들까지 자전거는 이동수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게체로써의 역활도 톡톡히 했다. <자전거 아저씨> 에서 저자는 바로 이렇게 정이 묻어나는 자전거를 통해서 세상과 그리고 그 세상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이정표로 표현되고 있다. 낯선길을 찾을때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하듯이 자전거는 닫혀있었던 삶을 열린 공간속으로 안내하는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비단 그 이정표를 잘못보아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더라도 그곳에도 역시 열려있는 세상이 있음에 저자는 네비게이션을 찍듯이 굳이 정확하게 찾아가야할 필요성 조차 제거해 버렸다. 아마도 이런게 자전거 여행의 참맛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독자들 스스로 공감하게끔하고 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그리고 제주도 자전거가 발닿는(?)곳 어디에도 수수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제대로된 삶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만 제외하고는 모든 삶들이 평온하고 친근하고 정이 넘쳐난다. 오히려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진다. 의도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속에 여행자가 아닌 구성원으로서의 안도감을 느끼게 해버린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모든 중생이 다 부처라고 하듯이 여행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자나 독자들에게 희망이고 삶 그자체로 다가온다. 

집을 나선다면 지도, 먹거리, 입을거리, 이동수단, 기타 등등 챙겨할게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막상 나서지만 한두가지는 빼먹게 마련이다. <자전거 아저씨>는 우리의 의도되고 계획된 여행과는 사뭇 다른다. 즉흥적이고 준비되지 않는 다소 생뚱맞는 여행의 연속이다. 중량천변에서 낚시줄에 물고기가 아닌 들쥐 한마리가 걸려던 광경이 황당하고 우습지만 바로 이런 의도되지 않는 모습이 진정한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모처럼 마음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가슴찡한 감동적인 문구나 단어를 찾을려면 눈을 씻고 들여다 보아도 그 행방이 묘현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행간에서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는 강력하게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이 역시 전혀 의도되고 계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다가온다. 거의 매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저자의 작품들과 사진들이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반영하고 있어 더 돋보이는 책이다. 올여름 상영되었던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넌 정체가 뭐냐라는 대답에 원빈이 그저 "옆집 아저씨" 라고 답한다. <자전거 아저씨>는 마치 옆집의 수수하고 푸근한 웃음을 짓는 아저씨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정말 깊어가는 이 가을날 어딘론가 목적지도 없이 계획도 없이 떠나게끔 하는 책이다. 그렇게 도달하는 곳엔 옆집 아저씨같은 소박한 우리의 이웃들이 있을것이고 그 속에서 자신도 덩달아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을것만 같다. 아니 인식하지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그게 다 사람살아가는 과정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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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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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지난 세월을 회상하기보다 한번쯤은 앞으로 살아가야할 할 세월의 무게를 제단 하고픈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즉 누구에게나 살아온 날들보다 길수도 있고 짧을수도 있는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기 마련이고 한편으로 줄어들는 나날들을 겪으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맡기도도 한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어떤 의미이며 또한 어떤 의미로 지금의 삶을 지배하고 있을까...

장기기증과 관련된 복제인간들의 슬픈 운명과 사랑을 그리며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을 진지하게 성찰한 소설 <나를 보내지마>로 이미 국내 독자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는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또 다른 삶에 대한 리뷰이자 보고서로 다가온다. 35년간 달링턴 홀이라는 대저택에서 집사로 근무한 주인공 스티븐스의 회록을 중심으로 인생을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야지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그 어떠한 해답을 던져주지 않고 있지만 스티븐스가 지내온 삶의 궤적보다 그에게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남아 있는 날들에 대한 희망섞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한평생 집사라는 직업(특히 최고 일등급 집사)으로 자신의 삶보다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의 삶을 살았던 그는 아버지의 운명의 순간도 같이 못했고 자신을 바라보던 한 여인의 시선마저도 철저히 외면했던 오로지 집사라는 직책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감정도 매마른 사람은 아니지만 항상 그에게 개인적인 삶보다는 주인을 모시는 공적인 삶이 우선이었고 그런 삶에 대해서 다 한순간도 의심해본적이 없는 완벽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스티븐스의 철저하고도 규치적인 삶을 나레이션하면서 오히려 책 제목과는 상반된 지나 온 나날에 대한 비중을 강하게 표현하는듯 하다. 그리고 내러티브의 전반적인 비중 역시 과거의 시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과거의 지난 온 날들 속에서 암시적으로 미래의 삶인 남아 있는 날들의 모습을 군데 군데 심어놓고 있다. 주인공 스티븐스의 집사라는 직업처럼 겉으로 화려하게 들어나지 않고 항상 그늘 아래서 있는듯 없는듯 그러나 꼭 있어야 하는 자리처럼 작가는 지난 날들 속에 앞으로 남은 날들을 그렇게 보일듯 말듯 묻어놓고 있다. 이것은 스티븐스이 대저택의 집사라는 임무에 충실하여 빡빡한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과의 마무리인 시점이 저녁의 나레이터에서 작가는 남아 있는 나들에 대한 암시의 덫을 깔아놓았다. 특히 작가는 덫을 깔아놓고 독자가 걸려들든 그냥 지나쳐 버리든 염두에 두지 않고 무던하게 내러티를 완성해 나간다. 어쩌면 이런 점이 독자들에게 오히려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을 증폭시키지도 모른다. 난생처음 6일이라는 여행을 떠나 이제 다시 달링턴 홀로 복귀해야하는 시점에서 바라본 저녁하늘은 그동안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대저녁에서 바라보던 그 저녁하늘과 다를게 없는 똑 같은 풍경이었지만 지나온 날의 저녁과는 사뭇다른 느낌으로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그 자신이 지켜왔던 신념들에 대한 회의감 보다는 오히려 희망적인 삶의 한 귀퉁이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지난온 날들 그리고 남아 있는 나들에 대해서 무슨 거창한 메타포를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지나온 날보다 남아 있는 나날들이 더 소중하고 의미있을거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잣대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집사라는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스티븐스의 삶과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일을 충실히 해 나갈거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차별성을 제거해 버렸다고 해야 겠다. 

지난 세계대전속에서 영국정치무대의 모든 것을 보고 겪어왔던 스티븐스의 삶이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살아야할 나날에 비해서 결코 더 비중이 있고 소중했다는 생각자체에 대한 수정은 있을만정 이 세가지 삶의 중요도는 결코 다를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좋고 나쁜점을 정량화한 수치로 기억한다. 그러나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 그러한 상념들이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란 마치 집사들의 삶처럼 보일듯 말듯 하면서도 항상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그리고 과거에도 물론 남아 있는 날들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심 작품을 읽으면서 스티븐스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로 안소니 홉킨스와 프리 모건 프리먼을 연상케 하였다. 홉킨스의 카리스마와 고집스러운 자기확신과 프리먼의 어리숙한 자애로움의 이미지가 집사로서의 역활에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막상 확인해 보니 홉킨스가 주연했고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수준급의 영화였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그 만큼 원작의 작품성이 뛰어났다는 반증일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이라는 거대하면서도 웅장한 메타포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거품을 확 걷어 내고 마치 가장 소소한 일상이 삶의 축이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매력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물론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로 계급과 문화와 사회의 부조리등 다양한 흥미거리도 제시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내일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잠시 쉬어 가는 오늘 저녁이야말로 진정한 남아 있는 나날의 시작임을 깨닫게 하는 잔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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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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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더운 8월날 한 남자는 편도표만 끊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 사구로 무작정 떠난다. 동료교사들이나 지인에게 목적지를 밝히지 않은것은 딱정벌레목 길앞잡이속의 좀길앞잡이라는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여 그 학명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떠나게 되고 그 남자가 도착한 사구는 좀길앞잡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곤충 만큼이나 아주 색다르고 특이한 부락이었고 그 남자는 결국 모래 구멍속에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감금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의 카프카라 칭송받는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내러티브의 시발점에서 부터 상당한 허구성을 미리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마치 소설이니까 더 읽어나가든 아니면 뻔한 이야기 같으면 이쯤에서 책장을 덮어버리든 독자들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듯이 작가만의 허구의 세계를 펼쳐나간다. 오히려 이러한 대범성, 아니 솔직담백한 작가의 허구설정 자체가 책장을 계속 넘기게 하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쉬지 않고 돌을 굴려야 하는 신화속의 시지프를 연상케하는 알레고리 기법을 동원하여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모래 구멍속의 갇힌 세상과 밖의 열린 세상을 마치 뫼비우스의 띄처럼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올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를 도는 개미는 항상 같은 면을 돌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항상 새로운 면을 돈다고 생각하듯이 우리 인간사 역시 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면에서 작가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내러티브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를 손바닥에 한 움쿰 쥐어보더라도 결국 손가락 틈새로 빠져 나가듯이 인생은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성없는 생활을 뜻하는 편도표와 같다는 표현에서 새삼 우리의 인생살이를 되돌아 보는 계기를 준다. 작품의 발표시기가 1960년대로 일본사회가 정체성의 혼란과 이데올로기의 격변속에서 이중의 삶 내지는 특이한 삶을 지향했던 젊은층에게 그러한 외형적인 삶이 결국 띠만 따라서 도는 개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은 아니였을까 싶다.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조차 생소한 곤충들의 학명과 그들의 생활 습성 그리고 모래, 사구, 사막에 대한 남다른 나레이션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막 한복판에 서있게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작가는 한 남자의 모래구멍속의 감금과 치밀한 탈출계획과 감행 그리고 실패, 더불어 증오, 분노, 허탈, 욕정등 인간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감정의 표출을 보여주면서도 결국 이러한 감정자체에 무목적성을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는 표현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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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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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오르페우스는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금기인 저승 즉 지옥으로 아내를 찾아 떠난다. 그리고 지옥의 神인 하데스를 감복시켜 죽은 아내의 영혼을 데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 받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오르페우스의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결말 짓게 된다. <세상의 마지막 밤>은 바로 오르페우스의 신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아버지의 지구지순한 사랑과 대을 이은 복수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대판 오르페우스인 피포의 아버지 마테오 역시 오르페우스처럼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린 아들 피포를 잃게 되고 삷을 방황속에 허비하다가 마침내 살인자를 찾아 복수에 나서지만 결국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더 없는 나락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마침내 소아성애자 교수의 도움으로 저승으로 통하게 되는 문을 통과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들 피포를 다시 이세상으로 데려오지만 정작 자신은 아들 목숨의 댓가로 지옥에 남게 된다. 그리고 지옥에서 다시 돌아온 아들이 성장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복수를 완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얼피보면 그저 그런 소설로 다가올 수 도 있다. 모성애 못지 않는 극단적인 부성애의 표출과 그 사랑에 대해서 복수로서 마무리하는 되갚음이라는 평범한 구도와 지옥과 현실을 오가는 다소 SF적인 플롯으로 약간의 신비감을 더한 작품정도로 보일 소지가 다분히 존재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돋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를 획일적으로 단순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마테오 역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을 떠나서 대승적으로 작가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죽음과 삶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우리시대에 어쩌면 죽음도 삶의 일부 내지는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작중에서 지옥의 통로를 찾아 인생을 매진했던 교수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은 죽음이 우리 내부에서 살며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넘추지 않고 계속 자라난다는 것을, 즉 죽음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우리 내면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암시한다. 삶과 죽음의 세계가 서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비의 날개 한쌍처럼 서로 포개져 있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거나 혹시 잊어버린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원제 지옥의 문(La Porte des Enfers)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쩌면 우리가 흔히 출입하는 하나의 작은 문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나폴리의 지진(역사적으로 1980년 11월 나폴린 인근인 메쪼죠르노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차용했다)으로 죽은자와 살아있는자의 경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진이라는 형식을 빌려 죽은자가 다시 산자들의 틈에 뒤섞이고 산자 역시 죽은자들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발상자체가 매우 유니크한 플롯이라고 해야 겠다. 또한 작가는 마테오가 아들을 구해 지옥의 문을 나서는 순간을 재치있게 처리했다. 죽음과 삶을 구분했던 오르페우스는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삶과 죽음은 단지 문의 이편과 저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진 마테오는 과감하게 자신 목숨의 댓가로 아들을 문밖으로 밀쳐내는 설정에서 작가는 죽음과 삶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영화나 소설하면 대게 독자들이 떠올리는 것은 예술성이다. 미디어의 색감이 아름다운 영상과 주옥같은 빛의 향연 그리고 작가의 예술성이 극에 달한 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보통의 프랑스문학과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왠지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와 복수를 감행하는 내러티브 자체가 프랑스적이라고 하기엔 어색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폴리 거리의 묘사나 죽음과 삶에 대한 묘사 그리고 심지어 복수를 향한 증오의 증폭이나 그 과정에서의 심리적인 묘사는 극히 프랑스적인 예술감이 그대로 베어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카론의 배를 타고 아케론(비통의 강,눈물의 강), 시름의 강(코퀴토스), 불길의 강(플레게톤), 망각의 강(레테), 증오의 강(스튁스)을 건너면서 죽음의 세계를 확실하게 삶에서 분리한다. 하지만 작가는 영혼들이 사라지는 것을 산자들의 기억에서 차츰차츰 잊혀져 갈때야 비로소 죽음이 당연시 됨을 말하고 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연결고리라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잃었듯이 그리고 마테오가 아들을 사고로 잃었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삶의 작은 일부분처럼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 오는 것이고 이러한 죽음은 세월이 지나면 삶의 한부분속에 녹아 들듯이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혹시 아나 지하의 공동구와 연결된 우리 주변의 멘홀뚜껑이 실은 지옥의 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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