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볼타 사건의 진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4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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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어 아우를 수 있는 것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문학작품이다. 특히 세계 유명 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이야 말로 언어와 사상의 장벽을 뛰어넘어 인류애를 느끼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역활을 수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고 그 중심엔 세계문학이 버팀목으로 다가온다. 영미대륙계열의 작품에 익숙해져 있던 독자라면 이번 에두아라도 멘도사의 <사볼타 사건의 진실>이라는 스페인소설은 색다른 느낌으로 눈과 가슴을 즐겁게 한다. 열정과 투우 그리고 제국시대 무적함대로 머리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나라 스페인, 하지만 이번 작품으로 이러한 외관상의 화려한 면도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계층간의 치열한 투쟁 그리고 인간군상들의 혐오스러울 정도의 각축장을 엿보면서 결국 그네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는 삶속에서 한가닥 희망의 빛을 잡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이 여느 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세계는 하나라는 다소 거대한 코스믹한 자괴감 마저 갖게 한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닿고 있었던 191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지명도없는 <정의의 목소리>라는 진보신문에 실린 기사로 인해 사볼타라는 스페인 최고의 무기제조회사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시작되는 소설은 왠지 서두부터 독자들로 하여금 거대한 음모와 스릴러가 있을것라는 암시를 가지게 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10년후 미국 법정의 판사와 한 증인이 좌담하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뚱하게 만들면서 다시 1917년으로 돌아가고 화자인 나(미란다)의 목소리와 나와 사볼타사를 둘러싼 짧은 패러그랩들이 두서 없이 질주한다. 독자들에게 그 어떠한 추론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 살짝 길을 벗겨나게끔 유도하는 식으로 시컨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한 문단을 읽고 이어지는 문단은 마치 앞 문단의 연속선상에 있을것 같지만 읽다보면 전혀 다른 객체로 옮겨가면서 <사볼타 사건의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1부는 이렇듯 나라는 화자가 사볼타 사건에 대해서 10년후 미국 법정에서 그 진실을 진술하는 뉘양스를 남기면서 그리고 독자들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진행된다. 그러나 2부와 소설의 정점에 이르서야 기막힌 반전과 더불어 서서히 들어나는 사볼타 사건의 진실은 그동안 열심히 소설을 따라온 독자들에게 상당한 보답아닌 보답을 하고 끝맺게 된다.  

마치 콜라주 기법을을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전반적인 플롯은 추리소설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냄새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짜여진 각본에 의해 연출되는 대하 역사드라마를 보는듯 하는 장치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 이르기 까지 1부에서 화자가 왜 법정 증언을 하는지에 대한 그 어떠한 실마리를 찾을 수 도 없거니와 마지막에 가서야 제3의 인물인 바스케스반장의 추론으로 전체적인 맥락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빈틈없이 철저하게 독자들을 우롱해 버린다. 특히 읽는 중간 중간에 나름대로의 추론으로 미리 결말을 예측했던 독자라면 그 배신감은 극에 달하게 된다. 어떤면에서 작가는 이러한 배신감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가져보게 한다. 작중 소토가 "가끔 진보는 한 손으로 줬던 것을 다른 손으로 뺏어 버리지 오늘은 말(馬)이겠지만 내일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네"라는 표현처럼 작가는 독자들에게 힌트를 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상상의 모든것을 뺏아가 버린다. 

대게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로 출간되는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중에 하나가 상당히 문학성과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일색인면이 많고 그렇게 느끼게 마련이다. 즉 이말은 현실적으론 상당한 곤역을 거치면서 읽어야하는 의무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멘도사의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선입견을 단번에 걷어버리는 한마디로 참 재미있는 작품이며서도 재미에 비례하여 많은 생각을 남기게 한다. 플롯과 내러티브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제의 선택과 예측불허의 결말 이어지는 대반전등 전반적인 흥행요소를 골고루 다 갖추었다. 그 만큼 작품 구조가 튼튼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이 세계문학전집에 채택된 것은 다른아닌 이 작품속엔 그 시대를 살아갔던 스페인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가면서 시작되는 경제공황과 이어지는 스페인내전을 미리 암시라도 하듯이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생적인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 그리고 이런 혼돈의 시기를 살아가야만 했던 인간들의 삶이 작품의 주제와 맞아떨어져 한층 더 작품의 깊이를 뒤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오래동안 잔상에 남을 작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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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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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 백탑파 시리즈 종결 작품 <열하광인>으로 김탁환이라는 작가의 이름 석자는 독자들의 뇌리속에 역사추리소설의 한 획을 긋는 족적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동안 김성종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접해왔지만 역사적 사실 즉 팩트가 가미된 더욱이 시대적 배경자체가 근현대를 뛰어넘는 역사추리소설분야에 대한 맛깔나는 작품을 거의 접해보질 못했다. 이는 아무래도 역사적 고증등을 비롯한 전문적인 접근과 더불어 추리소설이라는 서스펜스한 플롯과 등장인물의 정교한 심리묘사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칫 밥도 죽도 아닌 그런 요상스러운 정체불명의 작품이 탄생할 소지가 많은 장르이기 때문에 작가들이나 독자들이나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그닥 많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방각본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으로 이어지는 백탑파 시리즈는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신천지의 서막을 올리는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열하광인>은 정조 후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전 작품에 이어 의금부도사 이명방과 규장각 서리 김진 그리고 연암과 청정관등 백탑파 서생들이 총출동하면서 당시 문체반정을 모토로 왕권을 공고히 다지려던 정조와의 갈등구도를 플롯으로 설정하고 있다. 알려지다시피 정조는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노론일색의 정권구조에 변화를 주기 위해 남인과 서얼을 등용하면서 권력균형의 추를 맞추고자 하였지만 실상 정조는 북학파라 불리우는 이들과는 동상이몽을 꿈꾸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긴 호를 자칭했던 정조에게 君과 師는 동격이었고 이는 자신의 지향하는 권력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일갈이었다. 물론 정조 치세에 북학(실학)에 대한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으나 실학이 주가 될 수 는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것 역시 사실이다. 작가는 스토리 전반을 이처럼 양자간 신구세력의 갈등을 구도로 잡고 세부적으로 이명방과 김진을 비롯한 백탑파서생들의 갈등구조로 내면화 시켜 당시 정조가 추구했던 파워게임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동안 전편에서 정조와 백탑파가 이용후생을 프로파간다로 공유한 모드로 설정되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정조와 백탑파간의 프로파간다의 괴리를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다소 급작스러운 반전은 이미 <열녀문의 비밀>에서 이덕무의 적성현감 발령을 그 신호탄으로 후작에 대한 뉘양스를 깔아 놓은 장치를 마련하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조선후기 그나마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정조시대의 개혁을 이율배반적으로 파악하고 있는듯 하다. 이는 조선의 몰락이 개혁군주인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백탑파의 몰락으로 이미 예견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이명방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도 내러티브의 전개 역시 속도감을 가속시켜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의 추를 놓지 못하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당시 통용되었을 정감있고 맛깔스러운 언어들의 선택(대부분 주석으로 현대적 의미를 정리해서 다소 가독성에 혼란을 주기도 하지만 나름 일독을 한다는 측면에선 그다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으로 인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전편과 동일하게 액자형식의 책이야기가 유니크한 구조를 덧대어 주고 있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속 내용들이 자주 소개되어 있어 곁다리라도 열하일기의 막간을 엿볼 수 있는 보너스도 준다. 특히 역사와 추리소설에 관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순식간에 빠져들게 하는 디텍티브 픽션의 요소들인 미스테리, 서스펜스, 스릴, 트릭을 내러티브 전반에 걸쳐 골고루 적당하게 분배하고 있는점 그리고 역사적 팩트와 이에 대한 시대적 패러다임의 공유라는 점에서 역사와 추리소설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이번 시리즈가 <열하광인>으로 마무리 짓게 되지만 내심 홈즈 시리즈 처럼 이명방과 김진의 귀환을 기대해봄직 하게 한다. 서양에 추리탐정의 대명사인 홈즈와 왓슨이 있다면 우리에겐 이명방과 김진이라는 캐릭터를 보편화해 볼 필요성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많은 아쉬움과 흥미를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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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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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처럼 유니크한 주제를 다룬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는 생물학적으로 INPUT과 OUTPUT이라는 극히 단순한 구조에 의해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명체보다 인류라는 종인 우리는 이제 더이상 INPUT에 대해서 만큼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조와는 달리 살아가고 있다. 즉 음식, 먹거리는 인간에게 있어 더 이상 기본적인 생명유지의 수단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렵과 채집의 시대와 기초적인 농경시대의 먹거리의 개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있다. 그 만큼 과학기술의 발달과 획기적인 재배방식 및 그에 따른 파생 조리법의 출현으로 이제 먹거리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는 해결되었다고 봐야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아직도 먹거리에서 해방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덕 시티>는 바로 이런 먹거리를 다룬 작품이다. 먹거리를 다루면서도 이 작품속에는 조지 오엘의 <1984>를 방불케하는 거대한 음모 그리고 페스트푸드와 정크푸드로부터 야기되는 비만과 그를 바라보는 시각등 다양한 볼거리를 담고 있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대게 정치적인 무거운 소재를 플롯으로 절대권력인 국가나 자본이 인간의 심성까지 지배한다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소설들은 상당수 접할 수 있고 대부분의 래퍼토리가 상당히 심오한 정치적 이슈를 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덕 시티>는 이러한 국가나 자본의 거대한 음모가 우리일상 특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어야만 하는 먹거리에서 부터 시작한다는 약간은 무게감이 떨어지는 듯한 발상이지만 실상은 지금 풍요로움에 흠뻑 젖어있는 현대사회를 그로테스크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디딕>의 등장인물의 괴기함과 디지니 만화 도널드 덕의 우스꽝스러운 소재를 차용한 작가는 현대인들의 빼앗긴 먹거리, 나아가 자유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대량생산과 자본의 급격한 지배력은 한때 풍족한 먹거리를 제공했지만 이제 사회는 작중 도널드나 데이지처럼 뚱뚱한 사람을 루저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비만에 치명적인 정크푸드를 마치 풍요로움과 권력의 상징처럼 열심히 기계에서 찍어내고 있고 강요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손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들고 다른 손에 코카콜라를 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자유의 여신상과 비견되는 풍요로움과 자유를 대변하듯이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천편일률적으로 짜맞추고 있다. 그리고 마치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으로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선택을 좀먹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웰빙바람과 더불어 먹거리에 대한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이어트에 광풍이 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중독된 환자처럼 정크푸드에 집착하는 현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 마저 앗아가버리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먹고싶은 것을 먹지 못한고 있다는 강한 자괴감을 가지게 한다. 결국 자본과 결탁된 식품에 대한 선태권을 상실한 우리에게 무엇을 먹어야 하는 점보다는 과연 우리는 식품에 대한 진정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스웨덴 작가라 하면 <말괄량이 삐삐>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이나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 정도를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레나 안드레손은 깊은 각인을 세겨준다. 그녀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이번 작품은 애사롭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현실고발적인 플롯과 작품 전반에 흐르는 내러티브는 독작들에게 마치 거대한 음모를 하나씩 파해쳐나가는 일종의 성취감마저 불러 일으키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의 가슴에 돌하나를 던져준다. 그러면서 소설속 가상의 도시 <덕 시티>가 과연 픽션속에나 존재하는 상상의 도시일까라는 의구심에 대해서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덕 시티로 변해가는 과정이지는 않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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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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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신시가지라는 단어는 어느듯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는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뉴스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국토를 신도시와 구도시로 구분하고, 도시내에서서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획하는데 전혀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행정법상이나 지적법상에 이러한 용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법정 동명으로만 존재하지만 실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법규상의 구분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우리자신들이 정해놓은 신시가지나 신도시가 더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新이라는 개념에도 모호한 정의가 뒤따른다. 언제부터인가 新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를 뛰어 넘어서서 새롭다는 뜻보다는 "좋다" 혹은 "남들과 다르다"라는 의미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增이라는 뜻이 있건만 이제 우리는 "좋다"는 의미로 新을 사용하는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신도시나 신시가지라는 말은 그 본연의 개념인 새롭다는 뜻을 희석해버리고 "좋다"라는 의미로 굳어져 버렸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속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재화에 좋다는 의미로 항상 新을 덧붙이면서 타인과 조금이라도 차별화 자신의 모습에 자위를 삼는게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모습이다

<비즈니스>는 한마디로 소설임에 틀림 없지만 왠지 소설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래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 석연치 않은 점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 작품속의 내러티브와 등장인물 그리고 그들의 삶이 바로 지금 이 시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마치 리얼타임으로 찍어내는 듯한 한편의 다큐를 보는듯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고발 프로를 시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작중 여주인공이 뇌깔리이듯 성토한 "이 이 도시에서의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윤리, 안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라는 말에서 이 작품의 플롯이나 그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개발발전주의와 빗나간 자본주의의 정점인 ㅁ도시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축소판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매춘)를 하는 어머니, 자신을 등진 세상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도둑질)을 하는 전직 경찰, 오로지 선거와 발전만이 지상과제인양 열을 올리는 시장이 속해 있는 신시가지는 겉으로는 좋다라는 의미를 부여잡고 있지만 그 내막은 그야말로 낭떨어지 위를 외줄타는 아슬아슬한 인생들의 집약판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서로가 알면서 속이고 속는 과정의 되풀이가 바로 신시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임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타잔의 자폐아 아들 여름이와 여주인공의 남편을 통해 신시가지에 입성할 수 없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또 다른 어둠의 영역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구시가지는 惡을 대변하는 곳으로 비쳐진다. 좋다라는 개념에 비견 되어서 실패했다는 인생들의 도피처가 바로 구시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 어떠한 희망도 정열로 없는 죽은 시가지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악의 근원은 다름아닌 다리 건너 신시가지라는 좋은 곳에 있었던 것이었고 이를 누구나 알면서 속이고 속고 그러게 스스로를 자위하게 되는 것이 신시가가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일 것이다. 

전국토가 부동산투기장으로 돌변하고 급속한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마지막 끈이라도 잡을려고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엔 신도시나 신시가지의 新자만 접두어로 붙게 되면 모든것이 다 양해되고 용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어느 그룹 총수는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야지 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듯이 우리는 舊라는 글자를 이제는 오래되고 고풍스럽다는 의미보다 나쁘고 뒤떨어진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정말 모든 것을 바꿔 나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을 행위들을 <비즈니스>라는 그럴싸한 용어로 탈바꿈시켜 전국민의 비즈니스맨, 비즈니스우먼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공간적 신시가지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처럼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곳이 다름 아닌 우리가 오매불망 바라고 그 속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입하고 싶어하는 신시가지의 참 모습인 것이다.  

대체로 사회고발적인 소설의 취약점은 플롯이나 내러티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이 한쪽으로 과도하게 편협될 수 있는 우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비뚤어진 인간 군상들의 빗나간 행태보다 그들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상태와 그에 따른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격분된 감정에 휘말리는 것을 자제토록 한다. 우리주변의 이야기이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을 눈살 찌푸리지 않고 읽어 나가게 하는 안전장치를 인물들 각각의 가슴속에 녹아 놓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소재의 작품이 시니컬한 뒷맛을 자아내게 하지만 영화 <폭풍속으로>에서의 엔딩장면처럼 모든 것을 품고 삼킬 것 같은 파도속으로 떠나는 이와 이를 지켜보면서 살아 숨쉬는 듯한 파도 소리를 듣는 남겨진 이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하고 新의 진정한 의미인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의 가슴속에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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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불꽃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4
톰 울프 지음, 이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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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촉발된 제1차 석유파동은 종교적인 문제와 더불어 자원의 무기화라는 이슈를 탄생시키면서 향후 한번의 오일쇼크를 야기시키면서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았고 세계는 다시 세계대공항이 대두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라는 신자유주의 기치하에 양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는 엄청난 부의 폭발을 이룩했다. 신자유주의는 그동안 실물파트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경제패턴을 단숨에 금융경제위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금융경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미국 뉴욕의 월가는 바로 거위목장으로 탈바꿈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쥐고 흔드는 우주의 지배자로 우뚝서게 된다. 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는 바로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인해 부의 패권을 손에 거머쥔 이들과 이에 반해 철저하게 소외 받은 흑인들 그리고 이민자들의 삶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기자 출신인 작가는 아주 정말 우연히 흑인들의 세계인 브롱스에서 벌어진 뺑소니 교통사고로 인해 미국의 정신이라고 대표되는 뉴욕의 정서를 마치 신문기사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소설로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허영의 불꽃>은 제목 그 자체에서 어느 정도 작품의 플롯이나 네러티브를 감지할 수 있듯이 당시 미국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왠만한 문제를 거의 다 다루고 있는 사회고발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주인공 셔면 메코이를 통해서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아킬레스건인 빈익빈 부익부의 괴리감, 앵글로색슨계열과 흑인들 그리고 이민자들간의 인종문제, 특종과 선정주의 대박만을 노리는 옐로/블랙저널리즘의 병폐, 미국 사법시스템의 폐악, 정치권과 종교인의 비리, 그리고 무너져 내려가는 개인들의 가치관을 기자가 기사를 투고하듯이 세세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속이 시원하다는 대리만족도 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치 작품속 등장인물들이 상상의 픽션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수 없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이 돋보이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회고발적인 내용이나 이를 추적하는 르포형식을 띄어 넘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진행상황에 대한 철저한 배경 묘사가 마치 엑스선을 투과하여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 못해 참석하게 되는 디너파티에서 참석자들의 핵핵핵, 허허허, 호호호, 후후후, 흑흑흑, 하하하 등으로 묘사되는 웃음소리는 사건에 쫓기고 있는 셔면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들어내주고 있다. 또한 셔면의 집 내부 인테리어 장식에서 그의 정부 마리아의 옷차림과 브롱스교도소 건물의 묘사등은 마치 그곳을 직접보지 않았다면 지면에 담을 수 없을 만큼 현장감과 생동감을 불어 넣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로 인해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사회고발장르를 섬세한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견인할 수 있는 것은 작가만의 역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허영의 불꽃>은 불편한 진실을 내제하고 있기도 하다. 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인 와스프이자 정통지배계층 가문의 출신으로 예일대을 나온 우수한 채권딜러인 주인공 셔면의 몰락을 마치 흑인들과 이민자들의 인종주의 희생양처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보수적인 이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옥에 티라고 하면 비약적인 발상일까? 흑인들과 이민자들이라는 미국사회의 비주류계층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그리 곱지 못한점이 아쉬움으로 남는 불편한 진실이다. 

초화주택과 명품과 파티의 연속인 삶 그리고 이러한 화련한 치장과는 별개로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는 또 다른 이면, 죄수와 증인들과 협상하면서 여성 배심원을 흠모하는 검사, 종교인으로 종교적인 영적삶을 포기하고 군중선동과 비리를 저지르는 목사, 정치라는 허영심을 위해선 거짓말을 서슴치 않는 시장과 검사장, 특종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영역조차 확대 포장하는 저질 언론인과 언론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너무나 쉽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배신하는 사람들 작가는 그야말로 미국사회에 현존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군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미합중국내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왠지 작품을 읽고 난 후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씁쓸한 느낌과 더불어 독자 자신도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패러독스에 빠져들게 하는 시니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에드가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에 등장하는 붉은 죽음이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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