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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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자동차를 비롯한 제품의 사용 설명서 내지는 사양을 뜻하는 단어인 스펙(specification)이 대한민국 청춘남녀의 표준을 척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지금도 불철주야로 학교에서 학원에서 타인보다 좀 더 다양하고 강력한 사양을 장착하기 위해 오늘도 대한민국 청춘남녀들은 24시간이 부족하리만큼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스펙들이 어느날 갑자기 뚝딱하고 하늘에서 떨어진것은 분명 아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속에 살아가는 이상 스펙의 필요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기본적인 기능이 장착되지 않는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하듯이 자연히 이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지속되는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갖추고 있는 수많은 스펙이 한 종의 진화에 유효한 최적의 효용가치를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없이 그저 높이만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아주 작은 시간적인 배려도 없이 스펙의 숲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시점에서 <철수 사용 설명서>는 또 다른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철수 사용 설명서>는 바로 이러한 스펙과 관련된 대한민국 청춘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사양이 외견상으로나 성능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되어 지는 철수를 통해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회 고발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대표적인 사회고발소설인 조정래의 <허수아비춤>,  황석영의 <강남몽>, 그리고 박범신의 <비즈니스>등을 통해서 비뚤어진 자본주의 시스템 정착으로 인한 현상태를 무겁게 그리고 근원적인 물음과 고민하게 했다면 이번 <철수 사용 설명서>는 기성세대가 인지하고 있는 거대한 패러다임에 대한 반기보다는 소소하고 극히 개인적인 성향에 대한 화두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작가의 작품답게 기존 사회고발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무슨 무슨 담론같은 무거운 메세지를 삭뚝 제거해 버리고 활기발랄하게 작품를 끌어 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회 고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읽는 내내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절로 '그래 맞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상존하고 있기도 하다. 일종의 르포르타주같은 설정들로 인해 가독성을 높여 주기도 한다. 

소설인지 아니면 제목 처럼 무슨 가전제품 사용 설명서인지 헷갈리게 하는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도입하여 왠지 픽션보다는 팩트에 가깝게 느끼도록 독자들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가 그동안 고착화된 문단의 틀에 신인작가의 새로운 도전으로 보여지는 신선함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순수하게 작품 내러티브만을 놓고 보게 되면 그 힘은 반감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철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남녀에게 동질감을 제시하면서도 특히 애를 키우고 있는 기성세대에게 정곡을 콕 찌르는 멘트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신문의 가십란을 훌터보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지만  내러티브(내러티브라 표현할 수 있다면) 전반이 주는 이미지는 상당히 시니컬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이 기성세대의 올바르지 못한 사고에서 변질되었다는 생각에 씁슬함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러한 작품의 구조가(구조적 특성에 기인한 점이 클것으로 판단되지만) 전체적인 내러티브의 포스를 다소 반감되게 하여 문학적인 깊은 인상은 기대하기 힘든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문학계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철옹성에 과감하게 도전했고 형식적인 파괴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눈에 거슬리지만 신인작가라는 점과 스프레드식의 소재을 감안할때 수긍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다음 작품이 기대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이 가는 점은 그동안 표준, 정상, 불량이라는 산업자본주의적인 확정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에게 개개인의 특성(사용 설명서)에 대한 작가의 접근의도와 이를 풀어내는 작품적 기법들(주절주절 하면서도 사건별로 특징화하는 르포형식)이 가슴에 와닿다는 것이다. 세탁기를 냉장고로 사용할 수 없듯이 확정사고의 틀에 도전한 작가의 정신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바로 이러한 점이 외모도 훈남인 작가 전석순의 매력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향후 작품활동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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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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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은 <런던 스케치>를 통해서 각계각층의 런던 사람들의 삶을 모자이크화 하는 방식으로 불협화음 같은 래퍼토리를 한편의 내러티브로 통일화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퍼즐의 조각들이지만 마치 성당의 그림처럼 각 퍼즐간의 일련의 규칙성이 내제하는 것 처럼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불협화음 같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바로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을 통해서 현대대인들의 삶과 일상 그리고 그 족적들을 엿보게 된다.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토머스와 토니부부를 중심으로 토머스 형제 그리고 부모의 일상적인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뿐 각각 구성원에 관한 이야기가 액자구조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딱히 그런 스트럭쳐라고 지칭하기도 힘든 한마디로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나드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토머스-토니부부  2)하워드-클로디어부부  3)레오-수지 부부  4)토니의 시부모  5)올가-스페판커플 이렇게 5가지 큰틀속에서 각각의 래파토리가 전개되고 시간의 흐름속에 일련의 순서와 무관하게 각각의 영역을 고수하면서 전체적인 흐름이 전개된다. 하지만 액자소설의 전형적인 구조처럼 각각의 내러티브와 더불어 전체적인 하모니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니크하게 다가온다. 물론 중심에는 남편과 아내의 역활을 바꿔서 생활하는 토머스-토니부부가 놓여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 부부의 내러티브가 중심으로 부각되지도 않는다. 마치 음악회 시작전에 화음이나 역활분담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맡은 음율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의 악단과도 같은 느낌이 강하게 전해진다. 바이올린은 바이올린대로 피아노는 피아노대로 관악기는 관악기대로 자기 본연의 音만 확인하겠다는 듯이 청객의 귀는 뒷전으로 사정없이 불어대는 음악회 시작전의 그런 분위기이다. 처음 음악회를 접하면서 그래도 내심 한번쯤은 상호간의 화음을 조율해보는 리허설 비슷한 것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지게 한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토머스-토니부부의 역활분담에서 기인한 첫 스타트가 왠지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리고 다른 화음들(하워드-클로디어부부등)의 등장으로 뭔가 내러티브의 반전 내지는 작은 충격이나마 존재할 것 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면서 책장을 따라 눈길을 진행시키 보지만 이들 악기(등장인물들)들은 정말 자기만의 음만을 보여줄뿐 더이상의 발전된 화음을 보여주지도 않고 그럴 의사 역시 없어 보일 뿐이다.(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엿보인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 처럼 말이다) 토머스와 클라라 엄마 헬런의 부분도 그렇고 토머스의 피아노 선생 동성커플의 경우도 그렇고 뭔가 다른 전개감을 기대하지만 작가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시종 일관한다. 마치 그 부분의 내러티브는 독자들이 알아서 적당하게 맞는 화음으로 조율해 보라는 듯이... (일면 상당히 무책임한 뉘양스를 남기면서...) 전체적으로 뭔가 더 있을것 만 같은 아니 꼭 있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작가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심지어 음악회가 끝나고 러브콜을 받는 지휘자의 작은 즐거움마저 가져가 버린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경우 상당히 곤욕스러운 읽을거리를 접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딱히 명확한(최소한의 기준으로 보아도)내러티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각각의 악기들이 발현하는 음의 특색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뭐 여기까지도 대충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스트럭쳐나 내러티브 확정성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음악회 시작전의 불협화음의 시간속에 어쩔수 모르는 불안감의 연속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느낌은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도 명확한 정리가 되질 않고 계속 가물거릴 뿐이다. 마치 큰 숲을 통과해서 나왔지만 정작 그 숲에 대한 생각보다  소나무 가지가 걸친 피걸러위의 햇살의 묘사나 마당으로 넘어오는 벚나무 가지를 통한 내면의 심리적 묘사를 하는 부분등의 상당히 시크한 일련의 문장과 단어들이 뇌리에 더 깊게 각인 되어버리고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로싼 전체에 대한 특징적인 기억의 끄나풀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마치 작가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끌어가는 변주곡에 자연스럽게 넘어간 느낌처럼 말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특정한 유명 정치인, 유명 연예인들의 삶이 하나의 표본이 되고 또 그렇게 인지되도록 매스미디어는 은근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마치 나 자신의 삶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보여지는 착각속에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럴려고 열심히 노력아닌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것이 진정한 나의 삶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도 없고 찾을 필요성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레이철 커스크의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아니 정확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토머스-토니부부를 비롯하여 등장하는 커플들의 삶, 부부나 커플의 공통적인 삶, 그리고 각각 개인들의 삶은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주목받지 않는 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그리고 있지만 이러한 불협화음같은 삶들이 하나둘씩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변주곡을 형성하듯이 우리네 인생 역시 별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뭐 특별할 것도 없고 튀는 음정이나 박자가 다소 있더라도 결국 거대한 관현악곡에 묻혀서 표시나지 않게 흘러가는 음악회처럼 보여진다. 음악회가 끝나고 난 뒤 뜨거운 감흥보다는 오히려 허전함이 더 크게 남는 현실을 반영한 듯 하여 자뭇 씁슬한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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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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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이라는 현생과의 이별은 어쩌면 공식화된 룰과는 사뭇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적인 개념의 장단의 유무를 떠나 항상 품에 안고 있는 죽음은 마치 최고 의사결정자의 시각에서는 제거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거대한 리스크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투자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미비한 아니 결정요인자체로 상정하지 않고 싶은 요인이라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는 혹자의 말처럼 우리는 매시간 죽음이라는 최종 종착점을 향해 브레이크없는 기차처럼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에 있어 죽음이라는 명제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가? 인류사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삶의 연장선이라는 거대한 메타포적인 관념으로 인지되었고 이에 기반하여 종교와 신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이 탄생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을 다른 출구로 돌려놓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불안과 공포는 인간인한 진행중에 있다. 특히 그 죽음이라는 것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잣대에 놓이게 되면 그 어떠한 철학적 의미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 독일문학계의 주목받는 여류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알리스>라는 작품은 죽음을 소소하면서 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알리스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죽음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기복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상당히 유니크한 작품이다.  

옛 연인, 나이를 초월한 지인, 지금 현재의 연인의 죽음을 겪으면서 받게 되는 일련의 감정상태를 별개의 이야기 처럼 다루면서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죽음과 그 뒷이야기라는 형식의 구조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어둠, 공포, 피의 향연, 부정, 두려움등으로 대변되는 통상적인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끌어 가는 내러티브의 큰 맥락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태양계의 행성을 이루고 있는 9개의 별중에 어느날 부터인가 명왕성이라는 별이 행성의 지위를 상실했듯이 죽음도 어쩌면 이런 명왕성의 상실처럼 어느날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런 상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죽음이라는 화학적인 종결보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는 상실감으로 인한 혼돈이 더 크게 느껴질 수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실감과 그 후유증은 자신이 태어나기전 얼굴한번 보지 못한 말테 삼촌의 죽음에 대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시크한 접근에서 더 명확하게 보여진다. 죽음을 직접 목격했거나 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를 떠나서(죽음의 시점이 현재이거나 과거이거나를 떠나서) 나와 관련있는 일련의 죽음들은 상실과 더불어 아픔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러한 극히 평범한 과정의 되풀이가 어쩌면 삶이지는 아닐까라는 무거운 철학적 의문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흥미본위의 호기심를 주안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큰 낭패감을 갖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번 작품에는 스펙타클한 속도감이나 내러티브의 대반전, 모티브인 죽음에 대한 시니컬한 시각적 표현등 뭔가 숨겨진 장치적인 요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니크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 까지도 이런 일말의 기대감을 저버릴만큼 상당히 건조한 문장의 연속으로 남는다. 다섯남자의 죽음과 이를 대면하게되는 주인공의 입장차는 왠지 모를 엇박자의 연속처럼 보여 당혹감을 주기고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엇박자 내지는 불협화음이 죽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근원적인 접근방식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작가의 의도된 장치적 연출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역자는 이러한 표현 기법들이 작가만의 매력포인트라 논평하고 있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고 치명적인 리스크지만 왠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죽음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한다. 죽음(상실)에 대한 장대하고 거대한 사고의 담론을 일상적인 삶의 한복판으로 녹아낸 작가의 담론만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을 보게 된다면 다소 무미건조하게 만 다가오는 문장들이 새삼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면서 잔잔한 수면을 흔드는 파장으로 가슴속에 오래토록 남게 될 것이다.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막연했던 상념들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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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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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 역시 마거릿여사 자신의 말처럼 "믿을만한 거짓말"의 향연을 우리 독자들은 맞딱뜨리게 되고 이러한 해후가 결코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작품속에 스프레드된 일련의 사실들이 또 다시 팩트와 픽션이라는 경계선에서 그야말로 언제 땅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바라보게만 하는 관중의 설레임과 동시에 불안감(이번만큼은 왠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리라는 그런 심정)준다. 뭐 개인적으로 여류작가의 작품을 선호하지 이유가 다름아닌 지엽적인 세계관이나 과도한 미학관에서 표출되는 표현들과 이를 다양한 미사여구로 이끌어가는 다소 무리하다 싶은 내러티브에서 오는 표준화 비슷한 정형화라고 변하고 싶다면(물론 극히 개인적인 소견임을 다시한번 밝혀 둔다) 마거릿여사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느낌들 보다 랜덤하면서도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고 정련되지 못한 단어들이 한데 모여 미학적인 전체를 발하는 그녀만의 필력이 왠만한 남자작가 이상의 힘이 보여서 유독 애독하게 하고 매력적으로 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도둑신랑이라는 동화에서 모티적인 영감을 얻어 탄생한 <도둑 신부>는 <눈먼 암살자>의 스트럭쳐와 비슷한 액자소설의 구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팜므파탈의 화신인 지니아와 그녀를 둘러싼 세여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전제로 토니,케리스,로즈의 각자의 삶이라는 별도의 또 다른 내러티브를 각각의 축으로 진행되는 구조이다. 마치 지니아와 세인의 이야기를 거실이라고 한다면 토니와 지니아의 이야기는 거실을 통해서 드나드는 룸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는 토니, 케로스, 로즈의 독립된 래파토리가 각자 유년시절의 추억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다루는 별개의 작품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지니아라는 공통분모와 또 다른면서도 동일성 있게 연결된 구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니크한 스트럭쳐가 독자들로 하여금 팩트와 픽션의 경계점에서 독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면서 작가 자신의 세계로 유혹하기도 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공공의 적인 지니아와 막달라 마리아에 비견되는 토니,케리스,로즈와의 관계가 일방적인 가해자와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지만 막상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사적인 삶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시각은 송두리채 흔들리면서 애매모호한 불연속면에 다다르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자체가 우리 인간들의 삶과 극히 다를바없다는 작가의 또 다른 메시지는 아닐까 싶다.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작가는 종교에 대한 촌철살인적인 견해를 맘껏 표현하고 있으며 토니라는 전쟁학자의 입를 통해 전쟁과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어 또 다른 생각거리를 던져주면서 팩트적인 설정에 기여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작가는 토니, 케리스, 로즈의 서로 다른 성격과 삶속에 또 다른 거울속의 개인들의 모습을 상정하여 예정된 지니아의 만남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자아의 이면에 대한 성찰을 갖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작품 군데 군데 나열되어 있는 거꾸로 표현된 문장이나 단어들이 거울속에 반영된 또다른 자아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한다. 이번 작품 역시 자아의 재발견이나 전쟁 그리고 종교에 대한 심오한 주제에서 부터 남녀간의 애정, 삼각관계라는 전통적인 래퍼토리를 통해서 경중이 적절하게 믹스된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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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 더 리퍼 밀리언셀러 클럽 115
조시 베이젤 지음, 장용준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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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일단 재미있고 봐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라면 <비트 더 리퍼>는 독자들에게 일단 합격선에 들어오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특히 추리/호러/스릴러가 적절하게 분배되어 있어 읽는 내내 손에서 책을 놓기 힘들며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만든다. 그렇다고 시간적인 부담으로 다가오는 분량이나 내용들도 아니여서 볼가심으로 읽어 내려가기엔 상당히 적절한 작품이다. 게다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훈남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한다고 하니 주인공 피에트로 브라우나(코드명: 베어클로)의 특이한 이력과 활약상을 오버랩해 보면서 읽어나가면 한층더 흥미를 배가시킨다. 우선 작가의 심상치 않는 이력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작품의 배경과 주인공의 직업을 이입시켜 엄청난 양의 의학전문용어가 등장하면서(비록 하단의 주를 매번 심도깊게 읽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주기도 하지만 대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왠지 픽션에 대한 흐릿함을 깔아주면서 사실감을 더 높여주는 장치 역활을 하기도 한다) 메디컬 장르를 방불케 하지만 정작 이러한 설정들이 독자들을 일종의 기대심리를 배가 시키기도 한다. 

아놀드슈왈제네거 아저씨가 출연했던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다룬 영화 이레이저의 모티브를 살짝 가져온 느낌도 들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현대판 대부을 보는 듯 한 인상을 강하게 전달 한다. 마티아의 최정예 어쌔신인 베어클로의 삶, 사랑, 배신 그리고 새로운 삶의 탈바꿈을 현재와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빠른 전개로 지루함을 없애 버렸다. 딱히 정확하게 호러,스릴러,추리라는 일정한 잣대를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시의적절하게 이들 요소들이 적재적소에 가미되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다소 이런 장르에 선입관을 가진 독자들이라도 거부감 없이 읽어갈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특히 킬러와 의사라는 이미지가 서로 상충하는 듯하지만 작중 주인공이 내뱉는 미국의료계의 전형적인 관행에 대한 냉소적인 표현들을 통해서 작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점(킬러=의사=상어)등이 새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전체적인 플롯의 설정이나 내러티브의 유약함 없이 시차를 두고 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이 보이는 작품으로 메디컬과 킬러라는 어울리지 않는 앙상블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재미있다는 항목과 대중성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미국블록버스터 소설의 진가를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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