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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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찌르는듯한 마천루의 숲(불과 한두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성전이라는 건축물 이외에 지금처럼 높다란 건물을 축조한다는 발상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그리고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닿는 풍부한 먹거리(이 또한 불과 몇세기전에는 왕족이나 귀족들 속칭 선택받은 자들이외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로 상징되는 현대라는 산물은 인류에 축복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인류역사에서 보상받지 못한 부분을 확실히 보상받기 위해서 더욱더 이런 혜택에 천착하고 손에서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혜택 소위 말하는 첨단문명은 새로운 종교가 되었고 모든 이들에게 모토로 그리고 롤모델로 의심의 여지 없는 하나는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전 인류가 가졌던 가치관이나 삶의 이정표를 속도가 느려터진 구세대 PC보다 못한 취급을 하게 되고 애써 기억에서 하나둘 씩 지워나가는 작업을 당연시 하고 있다. 마치 새로운 정보와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뇌를 깨끗하게 포멧하는 것 처럼...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정말 소중한 삶과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볼 여유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라 해야겠다. 특히 팍스아메리카로 명명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모든 가치관과 삶의 척도를 미국식에 정조준하고 그를 향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치킨런 게임에 참가하여 종착점을 향해 앞만 바라보고 뛰어가는 주자들에게 바로 뒤에 뛰어오는 주자와 한참 뒤에 뒤쳐저 있는 주자들을 아주 잠시나마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그늘막같은 쉼터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총 12편의 단편들을 묶어 자칫 지루함을 가져올 리스크을 헤치하면서도 각 단편들 하나만으로도 정제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책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준다. 무엇보다 각각의 작품들의 등장인물이나 시대적 지역적인 배경들이 서로 상이하면서 단편들 전반을 흐리고 있는 플롯은 아프리카 정확하게 나이지리아인들의 삶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아프리카 문학을 접할 수 없는 국내독자들에게 반가운 작품일 수 밖에 없다. 기꺼해야 아웃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나 각종 다큐를 통해 접하게 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어찌보면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프리카일 수 밖에 없음을 이번 작품을 접하면서 새삼 느끼게 한다. 나이지라아 출신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남다를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문화적 이격감으로 인한 아프리카의 몰이해를 걱정할 필요성을 제거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한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다는 점(물론 수박 겉핧기 식이지만 그래도 기존 서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던 아프리카에서 장족의 발전을 기대할만하기도 하다)에서 상당한 반향을 가져 오기도 한다. 

12편의 단편을 통해서 우리는 저발전 상태에서 고도로 발전된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이들의 삶 그리고 축북받은 사회에서 다시금 바라보게되는 자신이 거쳐왔언 족적들을 통해서 과연 어떠한 삶이 진정한 삶일까라는 무거운 주제를 접하게 된다. 단지 아프리리카(여기서는 나이지리아로  한정되었지만)가 대변하는 피폐한 물질문명의 사회가 자본주의 최상층에 자리한 미국을 위시한 서구자본주의 사회보다 떨어지는게 무엇일까라는 극히 간단명료한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게 한다. 이는 비단 작가의 고향인 나이지리아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뭐라 확정적인 언급을 회피하게끔 하는 동변상련의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글로벌시대을 맞이하여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바이블같은 문구가 각인된 우리에게 <숨통>은 왠지 모르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정답이 아닐 수 도 있다는 속사임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러한 속사임은 아주 작고 시간의 흐름속에 묻혀지겠지만 여전히 귀가에서 맴도는 작가의 속사임에 귀기울려지는 이유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본성에 가까운 것임을 간파하게 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즐거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작중 유령편에 나오는 가짜 장티푸스약을 파는 사람의 "제 약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단지 병을 고치지 않을 뿐이지요"의 말을 건강을 해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진단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제도화된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지 못할뿐 사람을 죽이지 않는 약과 병을 고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반대급부로 원하는 약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 세상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는 지금 <숨통>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그나마 숨쉴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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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시 no.6 #1 무한도시 no.6 1
아사노 아쓰코 지음, 양억관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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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탄생에서 진화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고달픈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유인원에서 분파되어 사람속으로 진화하면서 인류는 자신의종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종의 번영을 감내하지 못하였고 그들종의 희생으로 자연계를 점령하고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경쟁자가 없는 세상은 이제 인류라는 같은 종을 대상으로 목적이동이 되었고 그 게임은 제로섬 게임과 같이 전부다 획득하던지 전부다 내어주어야 하는 브레이크없는 기관차의 질주를 하고 있다. 과학혁명에 근거한 산업혁명은 지구상에 사는 인류에게 거대한 희망을 던져준 동시에 또 다른 어둠을 드리우고 불과 몇십전 부터 시작된 디지털 혁명은 세상을 다른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질주는 언젠가 그 종착점에 다달을수 밖에 없지만 그 누구도 그 종착점이 어떤 곳인지 대해선 장담할 수 없기도 하다(아니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유토피아소설보다는 디스토피아 픽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인간의 불안정한 감정 표출의 일부분일 것이다. 한때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미래소년 코난>이나 마거릿 애트우드의 <인간종말 리포트>는 화려한 과학문명의 끝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작품들이다. 억제되지는 못하는 소비와 그에 따른 욕망 그리고 권력욕은 결국 인류라는 자체를 불행으로 초대하는 특별 초대장인지도 모르고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그 초대장을 손에 쥐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아사노 아츠코의 <무한도시 NO.6>는 이러한 결코 받고 싶지 않는 초대장을 거머쥔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미래소설이자 디스토피아계열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만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이다. 핵전쟁과 이어지는 기상이후로 황폐화 된 지구에서 그동안 반목과 질시를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재출발하는 여섯 신성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디스토피아소설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상상력의 한계성을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의 미사여구도 없고 화려한 인물의 설정이나 미학적인 배경도 엿 볼 수 없다.(다소 거대한 반전이나 교묘한 추리구조 그리고 화려한 배경묘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약간은 시큰둥한 작품으로 비쳐질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요소들이 통상의 미래소설이나 디스토피아소설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현실을 최대한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무한도시 NO.6는 미래상에 존재하는 특별한 도시가 아니라 어쩌면 현재 거대하게 성장하고 있는 매트로도시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감을 높여주고 있다. 거대한 도시의 성장이 주변지역을 낙후시키듯이 서쪽구역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NO.6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마치 시나리오를 접하는 듯한 구조로 내러티브를 끌어가고 있어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장면 하나 하나 촬영하듯이 써내려가는 내러티브에 속도감을 가하고 있어 한번 손에 잡으면 그 끝을 보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끝을 향해서 가다보면 끝이 조금이라도 늦게 오길 바라는 그런 느낌마저 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가 단지 먼 미래가 아닌(배경을 2017년으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무언의 의미가 존재한다)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해주는 작품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대변해주고 있다. 굳이 작중 흥미를 배가시키기 위해서 자극적인 소재를 첨가하지 않더라도 작품을 이처럼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또다른 매력이기도 하다.(이는 현실과 괴리된 막연한 미래상이 아니라 마치 현실을 재현한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여 현실감을 증폭시키므로서 미래를 독자들 스스로가 상상하게 하는 재미가 가미되어 있다) 재미와 흥미본위를 넘어 이번 작품에는 강렬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 그 메세지는 다름 아닌 우리가 상상하는 유토피아적인 미래가 어쩌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덫에 의해 산산조각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비단 작가의 눈에만 그려지는 현상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어쩌면 마지막일 수 도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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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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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 아랍 아니 이슬람문학을 귀동냥하고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들에게 이번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획득한 시아파 이슬람의 본산이라 할 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여기서 호기심이란 그동안 무슬림세계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기대감이란 파묵의 작품이 터키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계열의 좀 릴렉스한 문화사상적 소산이라면 만다니푸르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의 작품배경이란 점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가장 노른잔 땅위에 테헤란로가 버티고 있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존재하고 있듯이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극히 단순한 측면에서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햇살 가득한 테헤란의 어느 봄날 차도르를 쓴 여학생이 대학 정문앞에서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피켓팅 시위로 시작되는 소설은 왠지 그 제목에서 말하는 사랑이야기보다는 정치색이 상당히 감미될 것 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희와 기영이라는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이러한 이름의 상징성이 픽션과 팩트(마치 있을법한 사실) 사이를 교묘하게 줄다리기 하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작품과 이와 병행하여 사랑이야기에 대한 부연설명과 검열관 페드로비치의 시각으로 바라본 올바른 작품의 타당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때론 자포자기식으로 변명하는 작가의 또다른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면이라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작가 본인을 포함한 인물들이 마치 자기만의 의식을 가지고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는 듯 보여지는 솔솔한 재미를 더해 준다. 마치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이 무게 중심이 제대로 서있지 못한다면 어디로 휘둘리지 모르는 부비트랙을 요소요소 배치해놓고 마치 그 덫에 걸리기만 기다리는 고약한 포식자와 같은 시선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런점들이 파묵의 사랑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오묘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심리상태의 섬세한 묘사(특히 사라에 대한 다라의 상상력) 압권으로 다가온다. 로멘스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면 의당 한두번의 야릇한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대게 그동안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실상 포로노그래픽 수준의 강도가 아니면 그저 내러티브의 연속상 불가피하게 삽입되는 장면정도로 밖에 인지될 수 없을 만큼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게 실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신비의 베일을 한거풀씩 벋겨 나가는 묘사들(소설시작전에 벌써 사전적으로 이란과 이슬람이라는 다소 폐쇄적인 정보가 주입된 상태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묘사들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감정이입에 몰입하게 된다. 가히 패티시즘의 화려한 승화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작가의 심리묘사는 말줄임표를 통해서 다소 앞서가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하고 있다. 또한 이란 민중들의 숨김없는 목소릴 대변하는 딱따구리의 소리를 통해서 기저에 깔려있는 이란 사회성을 들추어 내고 있다. 작가는 극히 사적인 영역의 로멘스와 공적인 영역의 사회성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이 두 요소가 별개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와 검열관의 날카로운 신경전 그리고 시대상을 풍자한 유머러스한 자조와 조롱은 얼마전 무대에 올린 <웃음의 대학>과 비슷한 플롯을 엿 볼 수 잇게 한다. 웃음의 대학이 문학작품에 대한 검열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작품은 이란이 처해 있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자조적인 목소리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국가를 대변하는 페트로비치와 이에 항거하지만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다라 그리고 또 다른 이면에 정치와 무관할 수 밖에 없지만 가장 소외받고 있는 여성상을 대변하는 사라를 통해서 이란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차도르를 입고 있지만 차도르를 벗는 순간 로멘스에서 한단계 격상된 사회소설로 둔갑해 버린다. 이러한 플롯은 소설속에 두가지 나레이션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전체 내러티브에 반영되어 있는 유니크한 구조와 맞물리면서 색다른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책들, 영화들, 그리고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서 차도르속에 숨겨진 욕망들인 자신의 조국 이란의 모든것을 벋겨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이러한 사전적 인센티브(이란작가의 작품, 이슬람문화 배경등)와 더불어 전문 리뷰지의 "페르시아 문학과 쿤데라,칼비노,요사의 감수성을 지닌 현대 이란의 대표작가의 작품으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라는 미사여구는 실상 페르시아 문학를 접해볼 기회도 자주 없거니와 문학적 전문성마저 떨어지는 일반독자들에겐 그저 무의미한 표현일수도 있지만(이는 찌든 빨래를 깨긋하게 빨아주면 더할나위 없는 세탁기에다 최첨단의 부가기능을 붙여놓고 마치 이 부가기능이 세탁기 본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카달로그에 혹해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그래도 이런 저런 부가기능이 장착되어 있는게 세탁기를 돋보이기 한다라는 자족감을 가지게 할 만큼의 안도감 내지는 속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다소 억측스러운 표현 같지만 이 작품을 다 읽더라도 페르시아 문학의 진수를 맛볼순 없지만 그래도 내러티브의 탄탄함과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절묘하게 버무린 작가의 필력만으로도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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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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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처와 내러티브를 선사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작품의 필력만을 보면 여류작가(물론 여류 작가들을 싸잡아 폄해하거나 도외시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큼 시원, 시원스럽게(반면에 세세한 상태묘사나 심리묘사에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수도 있다)작품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눈에 확들어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타이포 그래픽 형식으로 신선한 반향을 선사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저자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가 남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만큼이나 유니크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생각, 역시 부창부수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아니 다른 한편으론 남편인 조너선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더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부부둘다 형식적인 쇼크를 바탕으로 작품 스트럭쳐를 재구성하였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조너선의 작품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 오히려 니콜의 작품은 세밀화 보다는 뭔가 큰 풍경화를 보는듯한 뉘양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는 십수개의 크고 작은 서랍이 내장되어 있는 마호가니풍의 책상을 두고 전혀 연결성 없는 것 같지만 미세한 아니 강렬한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들의 비밀과 삶을 투영해놓고 있는 작품으로 얼핏 보기엔 서로 전혀 연관 없는 액자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을 읽어 갈수록 옴니버스식의 이야기처럼 각자의 이야기들의 큰틀의 내러티브속에서 그 역활을 다하고 있고 상호 끊을수 없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다소 난해하다면 난해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게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이 구조적인 측면에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내러티브의 완성도나 문학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한 면들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스트럭쳐와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좋아하는 독자나 문학적인 면을 강조하는 독자 양측에게 환영받을 만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전혀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네가지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인 책상과 나디아, 레아, 바스키라는 인물의 매게로 연결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전혀 시간과 공간의 이격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동일인물이 동일시간과 동일공간속에서 모노드라마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다음 이야기로 접어들면 다시 앞의 이야기를 재생하지 않으면 왠지 이번 이야기를 읽어도 별 효과가 없을것 같다는 학습효과도 부여하고 있는 패러독스 같은 작품이다. (분명히 시간과 장소적 배경이 상이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뭔가 명확히 확정지을 수 없는 연결고리에 의해 동일 선상의 내러티브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하는 매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라는 작품 제목 상징성이 강하게 각인된 상태에서 출발하여 상징성이 해체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전개 자체가 바로 패러독스를 증폭시키는 구조적 역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대저택을 방문해서 문을 열고 집안의 상이한 분위기의 여러 방들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다시 대문을 닫고 나왔을때 느끼게 되는 묘한 감정과도 같다고 해야 겠다. 분명 다른 분위기와 컨셉의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집안 구조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저택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들어갈때 막연히 낯설은 두려움과 기대감들이 그리고 이방 저방을 둘러볼때 더욱 증폭되지만 막상 저택을 다 둘러보고 나왔을때 막연한 안도감을 바뀌듯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소설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남편인 조너선의 작품만큼이나 반향이 클 것으로 기대된다. 구조적인 독특함과 내면의 심리묘사나 문체의 선정등에서 신선함과 더불어 심도 깊은 철학적 요소들이 독자들을 자극하고 있고, 약간의 추리적인 부가서비스까지 적절하게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까지 배가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서 아무리 눈씯고 찾아봐도 집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나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왜 작품제목을 그레이트 하우스라 명명했을까라고 의야해 하는 독자들(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모르겠지만)이 있을만 하다.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의 의도는 범유대인적인 관점에서 부다페스트로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전이된 책상이 마치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 자신들 자체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유대인풀(pool)이라는 견지에서 십수개의 서랍이 각각의 유대인들 해당된다면 책상은 유대민족을 그리고 책상 소유권의 변경은 디아스포라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억측마저 들게 한다. 이는 작품전반에 들어나는 강한 유대  뉘양스적인 요소들로 인해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의무를 부여 받았고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니콜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의무에 충실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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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레드 라인
제임스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희범 감수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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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고, <고지전>에서 신대위는 "살아 남아서... 모두 집에 가자"라는 의미 있는 멘트를 날렸다. 결국 이말은 고대전쟁이나 현대전에서나 똑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말해주고 있다. 인류가 식량의 재생산 방법을 터득하면서 이와 동시에 전쟁이라는 신개념이 생겨났고 인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단한시도 멈춤없는 전쟁의 수레바퀴속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규모나 잔혹성을 차치하더라도 인류와 전쟁은 다른 종이 보기엔 정말 잘맞아 떨어지는 앙상블이라 할 정도로 우리는 전쟁을 달고 살았고 전쟁을 통해서 성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전쟁불감증 환자들 처럼 여차하면 전쟁, 전쟁하는 끔직한 발상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고 이를 듣는 이들 또한 거의 무감각한 위트정도로 밖에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최고 유일의 전쟁 진행중인 국가에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전쟁는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처럼 무감각하고 때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전쟁이지만 이 테마가 영화나 소설로 일반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면 이상하리만큼 흥행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 이유 또한 아마도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일련의 폭력성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일례는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광폭한 전투신이나 피의 향연이 결들어지면 그야말로 롱런을 하게 되는 대박작품으로 남게 되니 더 이상 말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까지 전쟁소설의 일련의 성공방정식은 제2차세계전을 주 배경으로 특히 유럽지역에서 벌어지는 나찌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략전술 과정 그리고 약간의 분위기 전환을 위한 에로장면들과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대단원의 결말을 거두는 라스트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면에서 전쟁소설은 어찌보면 식상하면서도 이러한 작품의 스트럭쳐만 제대로 지켜 준다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반타작을 하는 셈이었다. 

제임스 존스의 <신 레드 라인>은 이러한 일련의 정형적인 전쟁소설의 틀에서 벗어난 소설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제외하곤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전쟁이란 유럽에서 마지막 구원투수의 요청으로 참전했던 2차세계대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느끼는 미국인들에게 정 반대편의 또 다른 전쟁을 다루면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이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많은 부분들을 공감하게 되었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무대를 미국인들에게도 생소한 남태평양의 작은 섬 과달카날으로 선정하고 전투의 대상을 유럽의 독일이 아닌 동양의 일본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존 전투소설의 성공보장 카드를 슬그머니 포기해 버린다. 거기에다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나 에로신하나 없이 그야말로 시커먼 사내들의 이야기(문제는 동성애적인 장면을 첨부함으로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일지감치 손을 놓아라는 암시도 던져주고 있다)로만 가득 채우는 우를 범하므로써 알량한 기대감 마저도 날려 버린다. 또 이 작품에는 그 흔하디 흔한 작품의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주인공 마져 없애버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래파토리가 흘러감에 따라 과연 누가 살아남을지(뭐 이게 공식이라면 공식이겠지만)에 대한 어슬픈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작품의 구조나 배경의 선정 그리고 내러티브의 진행등에 있어 기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보는 도식화된 형태를 찾기 힘들다. 또 그렇다고 이 작품이 무슨 반전 평화 등의 일련의 고상한 담론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전쟁소설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찬사는 과연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작품 전반은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시작하여 차분하게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가 본 궤도(물론 수송선에 실려 과달카날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군인들의 심리묘사나 행동등에 있어 일부 엿보이고 있지만)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마치 영화의 한 컷 한 컷 처럼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심리묘사나 그들의 둘러싸고 있는 상황 그리고 행동범위 내지는 절실해 보이는 작은 절규에 이르기까지 각 개인들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는 1인칭시점 같은 기법을 혼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과달카날섬 전투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장치적 기법은 전쟁 영화의 단면을 보는 듯한 스펙타클을한 긴장감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인해 현장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고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섯부른 결과에 대한 어렴풋한 예측이나 기대 혹은 바램등의 모종의 종결샷을 머리속 한편에 그리면서도 지금 당장 연출되고 있는 장면들에 대한 각각의 장면들을 실사로 처리하여 한결 내러티브속으로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영화를 지배하는 감독이나 작가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주어진 역활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촬영조감독의 단편적인 컷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엇박자 같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유니크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러한 기법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자 동시에 이방인 듯한 묘한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 내면서 전쟁에 대해서 알게모르게 어렴풋한 담론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이 <신 레드 라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각 개인의 시점에서 전쟁과 자신의 미래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시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이러한 각 개인의 관점들이 한데 뭉쳐 또 다른 거시적인 전쟁을 말하는 혼용적인 시점 구조는 마치 전쟁에 대한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상념들이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있지만 결국 내러티브 전반을 관통하고 있고 작가가 보여주는 상념들은 바로 이런 개개인 상념들의 합일 수 밖에 없다는 극히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소 번거스럽더라도 등장인물들 하나 하나가 생각하고 있는 상념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위들과 욕설담긴 말들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게 한다. 이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굳이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필요성이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들 개개인의 행동과 생각의 합은 결국 하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라는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고 이를 알리고자 하는 그런 고상한 종류의 작품은 결코 아니지만 <신 레드 라인>은 각 개인의 극히 개인적인 심리적 묘사를 사실적으로 이끌어내므로서 오히려 거시적인 담론들을 무색하게 해 버린다. 생사가 코앞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본국에 두고온 아내의 외도만을 생각하는 벨, 어떻게 하든 진정한 카우보이임을 증명하고 싶은 돌, 전리품 수집에 혈안인 데일, 진급이외는 관심없는 밴드,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후송되고 싶어 하는 파이프.... 이런 인간 군상들의 솔직 담백한 묘사야 말로 진정으로 전쟁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 내 거짓말을 믿어 주면 네가 하는 거짓말도 믿어 줄께"라는 말로 작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단순화 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 간단한 문장처럼 전쟁에 대한 의미는 단순화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거시적이고 고상하고 약간은 애국적인 그런 가시적인 담론을 담고 있길 거부한다. 그저 전쟁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거짓말의 향연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거짓말은 상호 묵인하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각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전쟁소설 특유의 담론을 그리는 작품은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징집되어 투입된 전선에서 느닷없이 생사의 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무수한 젊은이들의 진솔하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서 전쟁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상당한 여운을 남기면서 오래토록 전쟁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상념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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