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 1 - 의협의 나날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이야 다른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불과 몇십년전 군부정권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거의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의 롤 모델 0순위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아니 그냥 장군만으로도 부족해서 구국의 영웅인 성웅 이순신이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낙마했지만 부러진 다리를 동여메고 끝까지 과업을 완수한 불굴의 의지력과 일본과의 7년전쟁 동안 단한번의 패배도 없었던 전승의 신화를 기록한 탁월한 리더십과  전략,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 앞바다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그 피날레를 날렸던 그의 삶은 한국사 역사상 그 어떠한 위인에게 찾아볼 수 없는 모델로서 유소년기의 남자아이들에겐 그야말로 다른 대안이 있을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화된 현상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정학적 요인이나 정권 홍보적인 요인등으로 인해 이순신은 상당히 왜곡되기 시작했고 이순신 그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뿌연 안개속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이 세상과 동떨어진 인물로 말들어 버렸다. 국가공인 교과서나 위인전 그리고 정보홍보용 자료(현충사를 비롯한 각종 기념유적물등)등 마치 똑같은 활자체에서 찍어내는 인쇄물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말 일맥상통하게 같은 점만을 들어내고 있고 우리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 왜곡된 이순신의 형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의 형식으로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조그만한 부정적인 요인이라도 제기된다면 발끈하게 되고 그런 제안자는 사회속에서 공공의 적으로 매장되기 일쑤였고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국민적인 정서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순신은 인간을 뛰어넘어 신으로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순신을 다루는 문제는 국민제인들의 어느정도 똘레랑스와 더불어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은 김훈의 <칼의 노래>와 더불어 인간 이순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로 만나게 되는 이순신이지만 역사적인 고증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순신의 삶과 그가 살았던 당시 에포크상을 그려보는데 이만한 작품도 드물 것으로 보여진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불멸의 이순신>은 평전에 가까울 정도로 이순신 일대기 전반을 다루고 있어 성장배경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선조와 유성룡,원균등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의 사유와 더불어 심리적인 묘사가 심도깊게 펼쳐져 있어 수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正과 反, 善과 惡의 구도로 각인 되었던 원균과의 관계를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경직되어온 사고에 유연성을 가미해 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면에서 허균이라는 인물을 비중있게 다루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작가의 후작이 될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펼치질 허균의 사유를 프롤로그하는 형식으로 미리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보너스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절대왕권을 꿈꾸는 선조(광해군)와 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허균 그리고 무엇보다 민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이순신의 3자구도를 통해서 정치가 가져야 정도가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 설정은 그동안 독자들의 뇌리속에 깊숙히 각인된 이순신과 그외 인물들이라는 극단적인 구도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당시대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의 논리와 사유가 존재했고 그러한 사유들을 선과악, 정과반이라는 시각으로 볼수 없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구도설정이 인간 이순신의 삶을 제대로 고찰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고 그러므로서 인간 이순신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적 인물간의 대립구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가공의 인물간의 절묘한 매칭으로 한결 맛깔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일종의 심리물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범주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소설이라는 커다란 메타포속에 담겨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과 묘사가 역사적 배경과 시의 적절하게 연결되어 한층 내러티브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속에 내제되어있는 '불멸'이라는 뜻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영원토록 멸하지 않는 영생하는등으로 직역될 수 있는 불멸의 메타포는 아마도 이순신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이는 그동안 성웅, 구국의 영웅등으로 비쳐진 이순신의 공적 내지는 겉모습의 상징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투영한 표현으로 이순신 그 자체를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순신이 시종일관 지켜왔던 중용(중도가 아닌)이라는 사유의 기반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내부의 편가르기, 왜라는 적군과 아군, 통제영 내부의 갈등, 군주와 군주의 명에 대한 갈등... 이순신에게 수많은 갈등과 고뇌가 부여되지만 이순신은 이쪽 저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이 바로 불멸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광화문사거리에 표호하고 있는 추상적인 상징요소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영생하고 있는 실제적인 이순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최대한 완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역사적이든 비역사적이든간에)을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절묘하게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부각으로 인해 자치하면 사건중심으로 편중될 수 있는 역사소설의 한계를 말끔이 걷어내고 사건과 인물(내면적 심리구도)을 유효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내러티브를 한결 더 깔끔하게 끌어가고 있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이순신과 동시대를 살았을법한 역사라는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초들(임천수,박초희,날발...)을 거의 조연급 이상으로 발탁함으로써 이순신의 가치를 더 부각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민초들의 삶을 어깨에 지고 가야하는 불멸의 당위성을 표출하게 하는 스트럭쳐가 인간 이순신을 적확하게 바라보는 시각임을 넌즈시 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하드웨어적이고 국가 공식적인 이미지로 봉인되어 정체되어버린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기억들이 새롭게 재탄생하는 계기가 충분히 되리라 여겨진다. 공이 추구했던 불멸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순간 이순신은 영생불사하는 진정한 불멸의 영웅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자리잡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의 이순신 - 전8권 세트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이야 다른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불과 몇십년전 군부정권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거의 대부분의 남자 어린이의 롤 모델 0순위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아니 그냥 장군만으로도 부족해서 구국의 영웅인 성웅 이순신이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낙마했지만 부러진 다리를 동여메고 끝까지 과업을 완수한 불굴의 의지력과 일본과의 7년전쟁 동안 단한번의 패배도 없었던 전승의 신화를 기록한 탁월한 리더십과  전략,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노량 앞바다에서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그 피날레를 날렸던 그의 삶은 한국사 역사상 그 어떠한 위인에게 찾아볼 수 없는 모델로서 유소년기의 남자아이들에겐 그야말로 다른 대안이 있을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화된 현상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정학적 요인이나 정권 홍보적인 요인등으로 인해 이순신은 상당히 왜곡되기 시작했고 이순신 그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뿌연 안개속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이 세상과 동떨어진 인물로 말들어 버렸다. 국가공인 교과서나 위인전 그리고 정보홍보용 자료(현충사를 비롯한 각종 기념유적물등)등 마치 똑같은 활자체에서 찍어내는 인쇄물처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말 일맥상통하게 같은 점만을 들어내고 있고 우리는 그런 필요성에 의해 왜곡된 이순신의 형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하나의 형식으로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그래서 이순신에 대한 조그만한 부정적인 요인이라도 제기된다면 발끈하게 되고 그런 제안자는 사회속에서 공공의 적으로 매장되기 일쑤였고 아예 그런 발상 자체가 국민적인 정서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순신은 인간을 뛰어넘어 신으로 자리매김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 이순신을 다루는 문제는 국민제인들의 어느정도 똘레랑스와 더불어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은 김훈의 <칼의 노래>와 더불어 인간 이순신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로 만나게 되는 이순신이지만 역사적인 고증과 사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순신의 삶과 그가 살았던 당시 에포크상을 그려보는데 이만한 작품도 드물 것으로 보여진다. <칼의 노래>가 임진왜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불멸의 이순신>은 평전에 가까울 정도로 이순신 일대기 전반을 다루고 있어 성장배경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선조와 유성룡,원균등을 비롯한 동시대인들의 사유와 더불어 심리적인 묘사가 심도깊게 펼쳐져 있어 수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正과 反, 善과 惡의 구도로 각인 되었던 원균과의 관계를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게 함으로써 그동안 경직되어온 사고에 유연성을 가미해 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면에서 허균이라는 인물을 비중있게 다루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작가의 후작이 될 <허균 최후의 19일>에서 펼치질 허균의 사유를 프롤로그하는 형식으로 미리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보너스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절대왕권을 꿈꾸는 선조(광해군)와 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허균 그리고 무엇보다 민의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이순신의 3자구도를 통해서 정치가 가져야 정도가 어떤 것인가를 독자들에게 슬그머니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 설정은 그동안 독자들의 뇌리속에 깊숙히 각인된 이순신과 그외 인물들이라는 극단적인 구도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당시대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의 논리와 사유가 존재했고 그러한 사유들을 선과악, 정과반이라는 시각으로 볼수 없다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구도설정이 인간 이순신의 삶을 제대로 고찰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고 그러므로서 인간 이순신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적 인물간의 대립구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가공의 인물간의 절묘한 매칭으로 한결 맛깔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일종의 심리물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범주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소설이라는 커다란 메타포속에 담겨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과 묘사가 역사적 배경과 시의 적절하게 연결되어 한층 내러티브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제목속에 내제되어있는 '불멸'이라는 뜻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영원토록 멸하지 않는 영생하는등으로 직역될 수 있는 불멸의 메타포는 아마도 이순신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이는 그동안 성웅, 구국의 영웅등으로 비쳐진 이순신의 공적 내지는 겉모습의 상징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내면적인 모습을 투영한 표현으로 이순신 그 자체를 지칭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순신이 시종일관 지켜왔던 중용(중도가 아닌)이라는 사유의 기반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내부의 편가르기, 왜라는 적군과 아군, 통제영 내부의 갈등, 군주와 군주의 명에 대한 갈등... 이순신에게 수많은 갈등과 고뇌가 부여되지만 이순신은 이쪽 저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이 바로 불멸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광화문사거리에 표호하고 있는 추상적인 상징요소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영생하고 있는 실제적인 이순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최대한 완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작가는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역사적이든 비역사적이든간에)을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절묘하게 오케스트레이션을 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부각으로 인해 자치하면 사건중심으로 편중될 수 있는 역사소설의 한계를 말끔이 걷어내고 사건과 인물(내면적 심리구도)을 유효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내러티브를 한결 더 깔끔하게 끌어가고 있는 점이 눈에 돋보인다. 특히 이순신과 동시대를 살았을법한 역사라는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초들(임천수,박초희,날발...)을 거의 조연급 이상으로 발탁함으로써 이순신의 가치를 더 부각시키고 동시에 이러한 민초들의 삶을 어깨에 지고 가야하는 불멸의 당위성을 표출하게 하는 스트럭쳐가 인간 이순신을 적확하게 바라보는 시각임을 넌즈시 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그동안 하드웨어적이고 국가 공식적인 이미지로 봉인되어 정체되어버린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기억들이 새롭게 재탄생하는 계기가 충분히 되리라 여겨진다. 공이 추구했던 불멸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순간 이순신은 영생불사하는 진정한 불멸의 영웅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자리잡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처녀들 자살하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상당히 곤혹스러운 작품이다. 소설의 스트럭쳐나 내러티브가 지향하는 방향성 또는 작품속에 담겨져 있을법한 작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두등 일반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인 범주내에서 살펴보더라도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자살 ,(소녀들 특히 한 집안의 자매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다섯이라는 집단 자살)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로데스크하면서 어두운 잿빛 요소를 충분히 던져줄 것 이라는 예견된 느낌을 가지고 이 작품을 접하는 독자 일반에게 작품을 읽는 내내 곤혹감 마저 들게 할 정도로 소재인 자살이라는 암울한 시발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해학스럽다는 느낌을 뛰어넘어 지극히 냉정하는 느낌마저 불러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작품속에 등장하는 리즈번 자매들의 성향이나 자살에 대한 특별한 동기 그리고 리즈번 자매들을 자살로 몰고갈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등 그녀들의 자살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도덕적 혹은 문학적인 접근 자체를 차단해 버리고 마치 CCTV에 녹화된 영상만(무성영화같은)을 보여주는 듯한 시선 자체에 또 한번 곤혹감을 감출수 없게 한다. 여기에다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과 디트로이트 시 외각의 소도시인 장소적 배경을 어떤 방식으로던 연관시켜 그녀들의 자살과 도시의 쇠락을 연결시켜봄으로서 대승적인 뉘양스라도 끄집어 내고 싶지만 이 또한 상당한 억측과 더불어 무리수를 둔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특히나 화자인 십대 소년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리즈번가와 그를 둘러싼 지역사회에 대한 묘사부분은 정말 번잡스러울 정도로 구석구석까지 화자들의 레이다망에서 벋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세밀화를 보는듯한 묘사를 작품이 끝나는 시점까지 끌어 가면서 독자들을 한층 더 미로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행여나 이쯤이면 화자의 작품에 대한 총평내지는 감정이입정도가 나오겠지라는 독자로서 최소한의 기대감과 그런 기대감으로 읽어온 인내심을 아주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이는 생물학적 나이가 더 많을 수록 더 크게 다가 오게 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일면은 무미건조함으로 혹은 무덤덤함으로 진행되는 저인망식 서술들이 은연중에 독자들 개개인들의 의식과 교묘하게 동화되어 작품과 별개의 또 다른 상상력이나 과거의 경험등을 믹스해서 묘한 상태로 이끌어 간다. 예를 들어 리즈번 자매들을 스캔하는듯한 시선들에서 어린시절 옆집 여학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면서 느꼈던 당시의 야릇한 희열이 되살아나 자살이라는 모티브와 소도시의 쇠락이라는 암울한 감정보다는 훔쳐보기에 대한 감출수 없는 기쁨을 앞세우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들면서 왠지 도덕성에 상처을 입었다는 죄스럼마저 갖게 한다. 이러한 묘사가 작가의 의도된 장치인지 아니면 그저 나레이션의 하나에 불과한지에 대한 판단 역시 모호하게 해버린다.  

그럼 이처럼 애매모호한 작품이 굳이 영화로 재탄생하고 모던클래식의 반열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면 다름아닌 특정화 내지는 확정화에 대한 나름의 반기를 들었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비추어보게 된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화를 도출하고자 한다. 그 특정화가 도덕적이든 감정적이든 좀더 확장하여 사회적이든간에 문학작품 그리고 작가가 암시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독자들 나름대로의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나 생각을 마치 공통적인 연대감으로 이끌어 내고 그러한 사회적 연대감을 하나의 형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련의 안도감을 자위하게 하는 것이 통상의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특정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고 무엇을 특정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하지만 <처녀들 자살하다>는 그동안 독자들이 가지고 있던 바로 이런 특정화에 대한 관념을 흔들어 놓고 있는 작품이다. 역자의 표현대로 아마도 이 작품을 읽는 연령층 내지는 세대간에(혹은 개개인의 성향등에) 따라 이 작품은 아주 많은 편차를 가지고 독자들 개개인에게 다가올 것이다. 구세대에 가까운 나에겐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과 한 소도시의 쇠락이 동체로 느껴져 마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대한 동질감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또다른 독자들에겐 이런 느낌이 많이 희석될 법하게 교묘하게 다중적인 분위기가 작품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이번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번쯤은 문학작품의 홍수속에서 주제나 작품이 내비치고 있는 어떤 특정화에서 벋어나 무위속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냥, 컬링 (양장) - 2011 제5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그러지 않는 삶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또한 목표가 부재한 삶에 대한 의미부여성이 설득력을 잃듯이 이에 반한 목표지향적이고 명확한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미사여구의 찬사들은 즐비하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고래적부터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성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을뿐 아니라 그러한 삶을 인생의 지고지순한 가치로 판단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요즘처럼 미래에 대한 불명확성과 변화무쌍한 미래의 삶에 대해서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삶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라고 여겨지는게 세상 풍토이기도 하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더욱더 '목표의식'이 필요하며 청소년기에 정해진 목표의식이 어떤것이냐에 따라 나머지 삶의 척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SKY, 서성한, 중경외시 무슨 고사성어 같은 말이지만 실은 대한민국 대학들을 서열화 하여 나타낸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열화를 기반으로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목표의식을 알뜰하게 햠양시키고 있고 이에 순응하여 청소년들의 목표의식 또한 정해져 버렸다고 하면 너무나 지나친 비약일까...

 

컬링는 동계스포츠 종목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는 종목중에 하나로 가끔 올림픽경기시즌때나 TV방송을 통해서 한번쯤 스쳐가는 낯선 운동종목으로 비인기 종목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경기의 규칙이나 그 기원등 컬링전반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거니와 굳이 인기있는 종목도 많고 많은데 굳이 이런 종목에까지 신경써야할 당위성 또한 없는 종목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자면 여타 인기 스포츠 종목에 비해서 참여자나 관전자 양측 모두에게 별다른 목표의식을 부여하지 못할 소지가 다분한 그저그런 종목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컬링>는 생소한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우정과 가치관 그리고 삶에 대한 깨달음을 다루고 있는 흔한 표현으로 성장소설에 분류되는 청소년 소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게의 플롯이 대동소이하듯이 이번 작품에도 친구들간의 끈끈한 우정 그리고 가정과 학교생활의 갈등과 해소등 성장소설이 갖추어야할 덕목은 거의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영화 <국가대표>컨셉을 방불케 하는 내러티브는 스키점프를 컬링으로 대치한 것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어 겉으로 표출되는 내러티브의 급반전등을 기대하기도 힘든게 사실인 평범한 스터럭쳐와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성장소설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구조적 표현적 내면적 평이성보다 끌리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목표의식'의 부재라는 점에서 여타 성장소설과는 차별화 되면서 눈에 확 띄인다.

대게의 문학작품 특히 독자층을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작품의 경우 그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교훈적인 요소나 도덕적 가치관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서 청소년층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만드는 구도가 정형화되어 있다는 면에서 이번 <그냥, 컬링>는 이러한 상식적인 구도를 벗어난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매력적인 면으로 다가온다고 해야겠다. 아무도 신경쓰지않고 아무도 처다보지 않는 심지어 웃음마저 자아내게 하는 이상하고 어리버리하게만 보이는 컬링이라는 운동을 통해서 작가는 요즘 우리 청소년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왜곡된 '목표의식'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컬링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가고 적어도 게임을 통해서 승부욕이라도 고취할 수 있는 그런 목표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단지 컬링을 하고 빠져드는 이유가 '그냥'이라는 표현으로 그동안 기성세대에 의해 획일화된 목표의식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고차원적이고 자기희생을 통해서 인류애를 고취하는 틀에 박히고 이율배반적인 그러한 목표의식을 우리는 그동안 우리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음세대인 청소년들에게 강요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표의식으로 인해 과연 인류의 삶이 고차원적이고 자기희색적이며 인류애를 고취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냐는 물음에 과연 누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으라차,며루치,산적,박카스처럼 흐릿한 목표의식을 가지면 대학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그 이후 이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리라는 예측은 절로 가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올바르다고 맹종하고 있는 '목표의식'이 과연 정말 정답일까라는 점과 뭐 특별한 이유없이 그냥 좋아서라는 미덥지 않게 보이는 사고가 틀렸다고 단정해야만 하는 현실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번쯤은 그냥 좋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필요한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특히 미래의 축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청소년들에겐 더욱더 절실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이트 하우스>를 접할때만 하더라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배우자라는 후광정도의 유명세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남편인 포어와는 사뭇 다른 뉘양스(조너선이 타이포 그래픽이라는 유니크한 표현형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면 니콜은 외형적 형식보다는 플롯 내부의 형식변화로 새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를 느끼면서 상당한 매력을 가진 작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출간된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사랑의 역사>를 읽고 그녀의 새로운 매력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기쁨을 갖게된 점이 무엇보다 책읽기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준다.(특히 개인적으로 내러티브의 결말을 뻔히 예측할 수 있는 기존 여류작가들의 작품이나 붓끝같은 섬세함으로 일관된 표현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취향에서 본다면 마거릿 애트우드에 비견해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니콜 크라우스의 작품에는 색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다-이는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폄하하는 뜻이 아니라 그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의 역사>역자 역시 지적했듯이 상당히 난해한 작품이다. 마치 비슷비슷한 색감을 정해진 프레임없이 맞춰가야하는 직소퍼즐 같은 작품이다.(역자의 이런 표현은 정말 책을 읽는 내내 공감을 갖게 할 만큼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상당한 인내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왠만한 소설을 이삼일안이면 독파하지만 그녀의 소설은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마치 직소퍼즐을 맞추면서 내가 보는 색감이나 모양대로 맞춰나가다가 어느정도 아웃라인이 보이기 시작하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듯이 그녀의 작품은 이런 퍼즐 맞추기와 흡사한 장고의 시간과 인내력을 요구한다. 얼핏 의도된 장치적 트랩들을 요소요소에 숨겨놓고 독자들의 곤욕을 즐기기라도 하듯 쉽게 그 결말을 예측할 수 없게 한다. 단지 소설이라는 문학장르가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야한다는 덕목으로 따지자면 상당히 불량한 작품들 중에서 최상위의 반열에 자리잡고도 남을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내부적인 뒤틀림이 그저 외부 형식적 파괴로 인한 신선함을 능가하도 남을 만한 그녀 특유의 매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순간 이러한 곤욕과 인내는 그저 퍼즐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 불과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의 역사>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작품이다.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정형적인 영역을 무시하고 상호 내러티브가 삼투압의 현상과도 같이 넘나들면서 전체적인 스토리를 지배하는 독특한 구조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이 내러티브 전반을 장악함으로서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레퍼토리하에 잘게 풀어놓은 알갱이 같은 이야기라는 점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을 맛볼수 있기도 하다. 

<사랑의 역사>는 그야말로 극히 개인적인 인물들의 제 각각의 사랑을 담고 있다. 레오와 알마, 즈비와 로사, 다비드와 샬럿 그리고 아이작과 레오와 알마로 이어지는 연인간의 사랑, 부자부녀간의 사랑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전체적인 맥락은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과 비견될 만큼이나 길고 깊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다소 진부하게 그리고 뻔하게 느껴질 사랑 이야기를 한 차원 새로운 단계로 업그레이드 시킨점이 눈에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장치적, 화자시점적 난해함으로 가독성에 지장을 주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오히려 이번 작품을 미스테리하게 비쳐지도록 함으로써 단순한 사랑이야기를 한 단계 승화시켰다는 점이 마음에 와닿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