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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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은 한마디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특히나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명성과 더불어 그 동안 그의 몇몇 작품을 대했던 가슴 깊은 곳의 울림만으로 보게 되면 더욱 더 당혹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상당한 분량까지 더해져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과연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고 작가의 내러티브를 제대로 추적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몇번씩이나 가지면서 앞으로 나갔던 작품이기에 솔직히 지금도 머리속이 혼란스럽네요.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일까라는 생각 달라도 변신해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들 정말 작중 화자인 라이더 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작품이라면 침소봉대같은 생각일까요.

 

   자 첫 스타트 그러니까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피아니스트 라이더가 낯선 도시의 초청강연을 받고 호텔에 도착해서부터 대면하게 되는 포터 구스타프와의 만남은 그래도 봐줄만한 설정으로 출발합니다. 뭐 물론 여기에서부터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왠지 이 작품 만만치 않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죠. 쉴세없이 정말 숨도 안쉬는 것 처럼 주절주절대는 구스타트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에서 대충은 감이 오지만요(그리고 이 놈의 엘리베이트는 왜그리 늦는지 모르게 한없이 올라갑니다). 그래도 작품의 특성상 하나의 장치적인 설정이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을 향해 갈수록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처참하게 그런 희망이 무너져 버리죠. 하지만 그 이후 등장하는 호텔지배인 호프만(솔직히 이 인간은 정말 말이 많아도 너무 많죠 이부분에서 전 약간의 짜쯩스러움을 느꼈으니까요), 소피와 보리스(이 둘이 등장하면서 독자들은 또 다른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뭐 일종의 기시감 같은 그런 심리학적으로 몽환스러운 분위기를 접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혼란속으로 빠져들죠.), 브로즈키 등등등(정말 쉴세 없이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를 반복하면서 무슨 미로속에서 보물찾기 마냥 내러티브 전체가 꼬여 버립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 하나 출현하면서 이와 걸맞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버리는 묘하디 묘한 설정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쯤오게 되면 플롯이고 내러티브고 뭐고 개의치 않고 그냥 책장을 넘기게 되어 버리죠.

 

   여기에 등장인물들의 성정 자체에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면을 볼 수 있죠(참 뻔번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이 들면서 왠지 이러한 뻔뻔함을 무채색으로 덧칠하는 서사가 오히려 더 얄밉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개인적으론 남의 말은 귀퉁으로 듣는 안하무인격인 성정들로 인해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고 특히나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우리의 주인공 라이더의 애매모호하고 우유부단한 행동들이 이런 감정들을 더 가중시킨다는 점입니다. 뭐갈까 등장인물들 모두다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그 세계만을 보고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죠. 물론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전기공 사내는 제외하고요. 그러니까 도시민 등장인물들의 한결 같은(정말 시종일관 한결같다는 미덕을 보여줍니다) 비정상적인 언행을 보여주므로써 그리고 화자인 라이더가 여기에 살짝 동조하는 분위기인 입장표명을 불명확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혼란을 독자들에게 이입시키는 현상마저 불러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2% 부족함(아마도 이게 바로 그 결정적인 2%가 될 것 같은데요 바로 '위로' 이지 않을까 싶네요) 뭔가에 매달리는 부분들이 우리 고전인 구운몽의 몽환적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작품 저변을 흐르는 그로데스크한 색체에 블랙코미디를 능가하는 해학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실하게 하면서 그냥 눌러앉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작품의 결말을 기대했던 희망마저도 산산히 부서버리면서 내가 뭘 읽었을까라는 허탈감을 사정없이 부여해버리죠.  

 

   뭔가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 나아지겠지라는 안도감이 내러티브를 따라가면서도 오히려 계속해서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약간의 추리기법을 차용에서 독자들의 불안감을 유도하죠. (독자들은 라이더씨 입장과 시각을 따라가게 되고 왠지 그를 자기도 무르게 두둔하면서 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되고, 한편으로 생뚱맞는 처지에 놓이는 라이더씨를 위로 하면서 스토리를 밟아가게 되는 아주 묘한 설정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이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의 교묘한 장치적 설정으로 또한 이번 작품은 누굴 위로해야하는지 아니 독자들 스스로가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정말 헷갈리게 하죠. 사실 이러한 설정들이 화두인 '위로' 라는 개념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역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 전반은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된 위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제대로 위로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설정이지만 결말부분에 전기공 사내가 한 말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일어날 당시에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처럼 여겨지게 마련이죠.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리 나쁜 일도 생각했던 만큼 나쁘지는 않습니다. 기운을 내세요" 외에는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판단여부를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난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구요.

 

   사족으로 작품 전반을 흐르는 음악이라는 부수적인 소재가 훗날 <녹턴> 이라는 작품의 모티프 역활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을 위로의 형식으로 삼을려고 한 취지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그런데 이부분도 재미있는게 그런 음악이나 음악가가 마치 존재하는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죠. 물론 소설이지만 상당히 허탈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그동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대면했던 독자들이라면 그 충격파가 더 클것으로 보이네요. 그래도 저 개인적으론 모던 클래식이라는 뉘양스와 가장 걸맞는 작품중에 하나이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고요, 카프카의 현신이 보이는 작품인 것 같았습니다. 비록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인내력을 시험받게 되지만 이 또한 작품을 통한 '위로' 보다는 독자들 스스로 '위로' 라는 담론에 대해서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는 거 같았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약간 서정적이고 여성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네요(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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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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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농담을 한낱의 조소나 우스개 소리 정도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고 세인들에게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네는 별의미 없는 소일거리의 일종으로 받아 들여지는게 보통이죠. 그래서 농담이 가지는 질량적 위치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가벼움으로 남기에 어디에서 누구와 부담없이 발설할 수 있는 가벼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농담>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일반 보편적인 뉘양스와는 사뭇 다른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엄청난 차이를 주는 또 다른 농담을 접하게 됩니다. 오히려 '농밀하다', '걸쭉하다' 라는 표현이 가져다 주는 의미에 더 가까울 정도의 질량적 무게감을 한 없이 극대화 시키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왜 밀란 쿤데라는 이러한 작품에 <농담> 이라는 현판을 걸었을까? 이번 작품을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이고 작품을 다 읽고 머리속으로 한번 정리하면서 <농담> 이라는 현판의 제의미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농담> 은 체코사회주의 시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밀란 쿤데라의 파토스이자 분신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강해게 전해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별로 접해보질 못해서 그의 작품세계나 사유 그리고 서사적인 부분에 대한 왈가불가를 할 입장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이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 더 뇌리속을 파고드는 질량적 부담감을 주는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네요.

 

   잘나가던 한 남성이 어느날 갑자기 연인에게 던진 농담같은 지극히 가벼운 멘트하나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고 끝내 보장된 인생에서 강제적으로 일탈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복수와 증오를 다룬 치정극 정도로 마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죠.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일련의 사유들을 덮어놓으므로서 새로운 스토리극으로 탈바꿈시켜 버립니다. 극히 질량적으로 가벼운 스토리를 끝없이 무거운 스토리로 돌변해버리는 것이죠. 붙임이 많았던 체코의 역사와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작가의 견해 그리고 이로 인해 구속되고 연결될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부가하면서 내러티브 자체를 걸쭉하게 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번 작품이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점은 밀란 쿤데라가 극히 개인적인 문제(사랑,애정,증오,복수)와 체코사회주의등을 비롯한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장치적 설정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측면을 서사하면서 단순한 연대기식이나 사건중심적 서사방법이 아닌 체코 전통음악이나 '왕들의 기마행렬', '전통 결혼식' 등 상당히 부드럽고 가벼운 소재를 통해서 체코의 역사를 현대(사회주의 공화국체제)에 이르기까지 서사하면서 질량적 가벼움의 형식으로 무거움을 멋지게 소화해내는 설정이 가히 압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각부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화자들을 통해서 전자와 정반대의 기법으로 개인들의 삶을 서사하는 방식이 서로 대립되면서 또한 융합되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농담처럼 가볍게 하고 동시에 걸쭉하게 끌어간다는 점에서 밀란 쿤데라가 아니면 어느 누가 창작할 수 있을까라는 감타사가 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서사적 기법자체가 독자들에게 <농담> 이라는 제목을 이해하는데 일견 도움이 될 뿐더러 작품 전반에 대한 애착을 같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읽어던 몇몇 작품에서도 그 특유의 섬세한 서사들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한번 엿 보게 합니다. 옷걸이, 책상, 탁자, 침대,의자등 거의 무시해도 될법한 소품들에 대한 표현들이 엄청나다는 것이죠. 그냥 지나가도 될법한데도 밀란 쿤데라는 이들 소품에 상당히 깊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눈과 머리가 아플정도로 꼼꼼하게 챙기게 합니다. 물론 결국 이러한 소품들에 대한 서사가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절묘하게 화합하면서 작품 전체를 더 감칠맛나게 하는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죠. 또한 성애의 묘사부분 역시 노골적인 표현이 일반화된 요즘같이는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을 파고드는 야릇한 애로시티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절재된 노출수위가 가져오는 패티시즘적인 성애적 표현이 많이 인상에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루드비크,헬레나,야로슬라프,코스트카 라는 화자을 통해서 당시 자신이 처해있던 체코사회주의 국가의 이율배반적인 국가정치체제, 그 체제속에서 갈등하는 지식인들의 삶 그리고 사랑과 애정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이르는 전반적인 문제들을 열거하고 상당히 위험한 수위의 사유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화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자전적 사유를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죠.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와 정치적 갈등이 아마 이번 작품속에 그대로 예견되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구요. 하지만 달리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독자들은 작품속을 관통하는 큰틀을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로 파악할수 있으나(작품속에서도 작가를 대변하는 등장인물들이 바라보는 시각도 얼핏 그렇게 비쳐지구요), 이러한 비판적 사유속에 은근히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담고 있다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야로슬라프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가는 붙임심한 체코역사에서 나름의 자부심을 되찾고자 했으며 코스트카를 통해서 종교와 사회주의라는 양립할 수 없는 구도를 재정립하는등 상당부분에 걸쳐 체코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앞선 서사기법과 매칭되면서 언뜻 들어나지 않는 사유로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이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도 들게 하구요. 마치 철저하게 작정하고 기획되고 설정되고 연출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가벼운 스탠딩 농담을 보는 듯 하다가도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장중한 대서사시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게 하죠. 

 

   참 그리고 헬레라의 등장이라는 묘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수없는 문제이죠. 다소 헤퍼보이면서 열정적이고 메조히스트적인 성향의 극단의 성격 소유자(농담으로 대변되는 가벼움과 그 이면의 또 다른 무거움)로 묘사되고 있는 부분 즉 뭐랄까 작가는 헬레라라는 인물들 통해서 이번 작품에 서사되고 있는 상반된 개념들을 한데로 모아 표출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제목의 농담처럼 그 끝맺음이 딱 어울리게 보이는 묘사들 변비약을 한통 다 먹고 변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 엉거주츰한 걸음걸이 등등  작가는 헬레라의 죽음 일보 직전의 과정을 통해서 뭔가 커다란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혁명)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한다."

   아마도 이 두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작품 전반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적인 의미의 공간과 공적인 의미의 공간 모두 다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 강하게 다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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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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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전역을 아노미 상태에 빠지게 했습니다. 1941년 진주만 습격이후 미국이 외부세력에 의해 공격받은 적은 없었고 특히 미국 본토에서 그런일이 발생할 것이란 상상은 할수조차 없었기에 그 충격을 더 컸던 것이었죠. 물론 이 9.11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충격의 도가니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십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민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는 행동들이 뚜렷하게 남아있죠.(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파렴치한 행동을 묵인하는 행태등) 그리고 전 세계는 강요되었던 자발적이던 혹은 연출에 의거해 연기를 하던 9.11사건에 대한 시각이 극명하게 갈리게 되죠. 뭐 아직도 이런 이분법적인 시각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고, 엄밀하게 말한다면 미국측(혹은 제1세계 선진산업국을 주연으로 하고 기타 떨거지 조연국들 앙상블로 하는) 시각이 좀더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미국측 시각으로 인해 이슬람 전반에 대한 시각 자체가 부정적으로 점철되었고 호의적이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대세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뻔한 사실이니 굳이 언급치 않겠습니다. 대체적인 이러한 시각들이 실상은 우리의 눈에 백태를 씌우게 되었고 우리는 이런 백태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에 익숙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죠.

 

   이런 면에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바로 제대로 말 못한 9.11에 대한 담론 (이슬람을 포함한 제3세계와 일부 지각있는 자들의 시각) 을 풀어놓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품고 있는 폭발력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히 어디서 세계경찰국가가 정의를 내렸고 집행이 완료된 사건 (미국을 추종하던 추종할수 밖에는 없는 분위기에 들러리를 하던 간에요) 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하는 행위를 아무리 곱게 봐줄려고 해도 그리 녹녹치 않는니까요. 또한 그동안 우리 눈을 가려왔던 백태가 벗겨지고 제대로된 시력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절로 눈길이 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선 작가는 작품의 제목에서부터 약간의 트릭을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자' 라는 뉘양스가 가져오는 의미가 남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이슬람 과격분자라는 부정적인 뉘양스가 지배적으로 떠오르지만 막상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굉장히 월가적인 스탠다드에 가까운 근원적인 느낌으로 살짝 변질되면서 제목이 가져다 주는 이중성에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죠. 특히 전자의 뉘양스로 받아들인 독자들이라면 내러티브의 밋밋함에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작가는 바로 또 다른 트릭을 설치해서 밋밋하게 흐를수 있는 내러티브에 밑간을 칩니다.


   바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동서양 남녀 러브스토리를 깔아 놓은 거죠 (참 이부분이 전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서사라고 보여집니다.) 얼핏보면 작품의 성격이 너무 정치적 색깔이 짙다보니 다소 딱딱한 플롯에 에리카와 찬게즈라는 동서양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덧대어서 분위기를 다소 가라 앉혔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전 개인적으로 에리카와 찬게즈의 사랑이야기가 본 작품의 숨겨진 결정적인 부비트랩같은 설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찬게즈라는 동양적 담론이 에리카라는 서양적 담론에 손을 내밀지만 응답없는 메아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현세계의 정치적 구도에 빗대어 놓은 대단한 서사로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달리 볼 수 있는 내용이지만 왠지 이들의 사랑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처음부터 불행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강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스트럭쳐로 인해서 상당히 도발적이고 딱딱한 느낌을 완화하긴 하지만 결국엔 찬게즈(동양적 담론을 대표)에게 고통을 안겨주긴 마찬가지인 것이죠. 작가는 오히려 찬게즈의 9.11사건을 화면을 통해서 보면서 측은지심이 아닌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는 직접화법보다 찬게즈와 에리카의 러브스토리가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가 오히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가 정치적 담론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순수정치 소설로 보기 힘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신 하미드의 절제되면서도 유니크한 서사들이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푸근한 향이 느껴질 정도로 살아 숨쉬고 있어 전체적인 모티브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그 경계성을 무너뜨리면서 로맨스 (정치적 담론과 무관한 부더러움이라고 해야할까요) 를 상상케하는 묘한 느낌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정말 독자들의 판단의식을 주저하게 하는거죠. 


   전반적으로 모신 하미디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는 읽는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이 느낌을 가져올 작품으로 보입니다.(저 개인적으로는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제대로 까발렸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지네요) 좀더 우측의 프리즘을 가진 독자층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불쾌한 느낌을 가져올 것이고 이와 반대측면에 있는 독자들에게는 심년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것이 때문이죠. 아마도 이래서 더 주목받는 작품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뭐랄까 추리스릴러 장르와 전혀 무관하지만 작품이 끝날때 까지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들뜨게 한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불안증세도 양측의 시각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것으로 보입니다. 한쪽은 이 놈의 찬게즈가 결국 미국 정보요원에게 제거될 것 같은데 언제쯤일까라는 그리고 다른 한측은 찬게즈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는 미국인이 그저 여행객이길 바라는 심정, 결국 작품이 엔딩을 고할때 까지도 독자들의 불안증세를 제거해 주지 않는 스릴러 기법이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설정이 지금 현재 동서양의 불안한 정세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한층 더 작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도 하죠. 작가는 물론 어느측의 시각이 옳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죠. 그저 이렇게 달리 볼 수 있는 시각도 있다는 점을 보다 직접화법으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직접화법이 상호의 상처를 빨리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도 보여주고 있고요.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는 작품이지만 번역가의 표현처럼 미니멀리즘의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네요.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면서도 정제된 서사 하나 하나가 정곡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모신 하미디의 작품세계가 왠지 국내 독자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강하데 들어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이 동서양이 충돌하는 담론을 소프트하게 융화시키고 있는 서사의 대표라면 모신 하미드의 작품은 동서양의 충돌자체를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서사라는 점에서 묘한 대비와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파묵은 어린아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하미드는 강한 악력으로 악수하는 듯한 서사들이 상당히 대조적이면서도 결국 파토스를 끌어낸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아마도 오르한 파묵에 뒤이어 동서양문화권의 화합을 대변하는 작가로 자리 매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족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책의 뒤편에 표기된 '시카고 트리뷴' 등의 유명한 서평들이 왠지 의아한 느낌을 줍니다. 그네들의 가식인지 아니면 이런 도발적인 근본주의자를 보란듯이 품에 안을수 있다는식의 포용력인지 아리송하지만 제 눈에는 왠지 가식으로만 보여진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저부터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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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 밀란 쿤데라 전집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은미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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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왈츠> 는 얼마 읽어보질 못했지만 밀란 쿤데라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막간의 즐거움을 느껴 봤지만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진정으로 알게 해 주는 작품은 다름아닌 <이별의 왈츠> 이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드네요.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그리고 <정체성> 이라는 작품에서도 이미 한번 겪어 봤듯이 쿤데라는 남녀간의 사랑, 애증, 증오, 배신 등의 극히 평범한 소재를 자신의 작품속에서 뭔가 색다르게 변모시키는 대가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구요. 이번 작품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벋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트럼펫 주자 클리마가 작은 온천도시를 방문하고 난 후 벌어지는 루제나의 임신소동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클리마의 노력 그리고 아이를 낳기 위한 루제나의 집념이라는 극히 세속적이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내러티브가 주를 이루는 애정소설같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하나 둘씩 등장 (사실 독자들은 그저 소설의 완성을 위한 등장인물이거니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이 또한 쿤데라의 주도면밀한 장치적인 설정임을 책을 읽어 갈수록 실감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설정들이 전혀 억지스럽다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쿤데라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면서 내러티브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인간 내면 특히 남녀 간의 이질적인 감정의 변화와 그 원천에 대한 서사가 작품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해 버리기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슈크레타의 친구인 야쿠프의 등장과 파란 독약과 루제나의 신경안정제가 뒤섞이면서 내러티브 자체가 극적인 반전을 향해서 돌진하게 됩니다. 사실 그 동안 클리마와 악단 단원들의 음모(낙태) 루제나와 동료 간호사의 도발(출산) 이라는 다소 밋밋한 대립구도가 갑자기 클라이막스를 향해 돌진 하는 3' 브라더스의 콘서트 연주곡의 진행처럼 청중과 독자들의 호흡을 가쁘게 몰아가는 것입니다. 자칫 극히 천박스럽고 세속적이면서 통속적인 연애소설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쿤데라는 여기에 인물심리묘사라는 히든 카드를 제시하면서 급반전을 시도하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묘사가 가희 일품이라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뭐 남성들이라면 (아니 여성들 입장에서 바라본 입장도 매한가지겠죠) 충분히 공감이 갈 수 있는 일련이 행위와 심리적 면피 발언과 자기 합리화등를 솔직 담백하게 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고 작품을 읽으면서 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닐수도 있다는 뭐 그런 생각들이 이번 작품을 다시 들여다 보는 동기가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히든 카드는 "매일까이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하나의 작은 전기쇼크 같다" 는  혹은 "기독교 신자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자기 남편의 부정을 믿는다" 등의 표현등을 통해서 정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쿤데라만의 서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혹자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당시 체코라는 사회주의국가라는 정치적 담론등을 내세워 보다 폭넓게 그리고 무게있게 그 비중을 격상시켜려고 하는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크게 동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쿤데라는 작품을 통해서 문학적 한계성에 부딛치는 정치적 딜레마를 작중에 묘사하고 있긴 하지만 굳이 이 부분을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그 자체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뿐, 어떤 설명도 동기도 없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는 표현에서 이번 작품 역시 가장 근원적인 인간 특히 남녀간의 애정과 사랑 배신에 집중해서 작품을 인식하는 것이 타당할듯 합니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아주 단순하기 그지 없습니다. 뭐 정말 특별하게 내세울 것 없이 티각티각대는 정도의 강도로 진행되지만 중반부에 들어서면서 상당히 분위기가 변화를 겪게 되죠. 처음 일대일 남녀간의 문제가 그 범위를 확장해 나가면서 보편적인 담론으로 확산되면서 내러티브 자체에도 다소 무게감이 들어가고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남녀간의 특수문제에서 인간 본연의 감성을 다루는 일반적인 모토로 전환되면서 남녀 성대결의 구도가 아닌 인간성 본연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죠. 참 단순한 남녀간의 스토리를 이처럼 철학적 차원으로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킬수 있을까라는 의아심도 생기지만 이 또한 쿤데라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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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구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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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대중 독자들에게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성녀의 구제> 를 접하게 되면 절로 그 이유에 대해서 수긍이 가게 됩니다.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도 많은 매니아를 가지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일부 한정된 독자층을 형성하면서 국한된 장르속에서 명맥을 유지해왔고 특히 문학적 완성도를 우선시 하는 국내문단에서는 거의 외면받아왔던 것이 사실이죠) 추리스릴러장를 확산시킨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단순한 사건과 그 해결방식에 포커스를 맞추던 기존의 툴에서 벗어나 작품 내러티브 전반에 독특한 자기만의 사유를 깔아서 이를 설득력 있고 독자들과 호흡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 바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만큼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회문제와 인간문제에 대한 나름의 천착이 대중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 준 것이겠죠.

 

   <성녀의 구제> 사실 책 표지를 보면 왠지 수녀원를 배경으로 종교적 색체가 강하게 풍기면서 종교집단에서 발생하는 비밀스러운 사건을 키로 잡은 듯 하게 보여집니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을 얼핏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죠. 하지만 막상 책속으로 들어가면 이와는 전혀 상반된 스토리를 만나게 되면서 약간의 당혹감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하지만 결말부분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긍이 가게 되네요. 이번 작품은 과학적 추리의 대명사 유가와 교수도 당혹하게한 치밀한 계획과 과학적 지식을 갖춘 범인이 등장하면서 수사반 전원을 오리무중상태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동안 유가와 교수와 콤비로 활약한 구사나기 형사가 약간의 삐딱선을 타면서 사건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트릭이 있습니다. 금기사항인 용의자에 대한 사적감정이 발동하면서 사건 해결이 난항을 겪지만 결국에 가서는 사건 해결에 지대한 역활을 하게 되네요. 또한 가오루라는 신참 여형사가 등장하여 구사나기 일변도의 역활에 제동을 겁니다. 이 부분이 이번 작품의 또 다른 별미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록 여성이지만 냉철한 논리와 끈질긴 의욕을 보이면서 사건의 핵심을 제대로 집고 있다는 점이 구사나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고 이 둘의 신경전 역시 볼만한 장면을 연출해 주고 있어 독자들이 눈을 즐겁게 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이번 작품은 추리기법중에 '소거법' 를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이지 않을까 싶네요. 초장에 이미 독자들은 미망인과 불륜의 애인을 유력한 용의자로 주목하게 되면서 서서히 하나 하나의 요인들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용의자를 압축해 나가고 있는 기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사건 해결을 위해서 구사나기를 비롯한 경시청 형사들의 추리와 유가와의 은밀한 추리가 서로 오버랩되는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고 나름대로의 추리를 머리에 그리면서 내러티브를 쫒아가게 되는 거죠. 물론 중간 중간에 트릭과 힌트가 있지만 사실 추리소설에 매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쉽사리 알아보기 힘들고요 나중에 유가와 교수의 설명을 듣고 서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죠. 이러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거법' 은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단순화 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는 복잡한 구도로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죠. 전반적으로 갈릴레오 시리즈중에서 가장 유가와의 진가를 알게 하는 작품으로 신참 여형사 가오루의 감짝 출현은 새로운 긴장감과 흥미를 배가시키는 활력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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