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1945년 8월 일본의 항구도시 나카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화되면서 일본은 질주 없는 기관차의 제동을 걸게되고, 세계는 다시 평화로운 상태로 환원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특히 한반도의 우리 민족에겐 지금까지도 많은 트라우마를 안겨준 근원이었고 지금도 일제강점기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뒷처리로 이웃나라와 녹녹치 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원폭투하)은 엄청난 파장을 가져온 비극적인 현실(특히 일본인들에게는 더할나위가 없겠죠)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2발의 원자폭탄과 그로 인한 또 다른 피해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밖의 영역으로 남아있기도 하죠. 뭐 솔직한 표현으로는 그네들이 행한 행위를 생각한다면 2발만으로도 속이 시원찬지 않지만요... 그 동안 이러 저러한 여러가지 반일적인 감정이 녹녹치 않는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작가의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중에 하나가 출신배경을 떠나서 편협적이지 않는 작품의 서사와 전혀 일본적인 느낌을 받지 않게했던 필체등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 양반의 작품에 대해서 상다한 매력을 느꼈던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처녀작품인 <창백한 언덕 풍경> 이라는 작품은 사실 많이 망설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왜 작가로서 첫 발을 딛디게 되면 아무래도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등이 많이 깔리게 마련이고,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소개란에 '나카사키 원폭과 그 후에 대한 ㅇㅇㅇ ' 표현을 보고 이래저래 자신의 뿌리인 일본에 대한 일종의 화해의 제스쳐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기에, 그리고 혹여 모를 면피성적인 미화가 있으면 어쩌나라는 불편한 심정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할까요. 그나마 그 동안 이시구로의 작품을 대하면서 전혀 일본적인 색체나 냄새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더 이 작가의 작품들이 마음에 들어왔는데 이번 작품으로 통해서 그런 감정들이 송두리채 사라지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최근래 들어 아니 소설 작품을 대한 이후로 처음으로 주저주저했던 작품이었습니다(이러한 선택을 한 자신에게 저주아닌 저주도 내려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의 선입관들은 그저 우려의 작은 목소리였고 그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마치 학창시절 긴가민가 했던 시험답안을 확인했을때의 안도의의마음으로 확인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네요. 그리고 한편으로 영향력 있는 리뷰에서 다소 요란스럽게 과장한 것은 아닌가라는 일종의 배신감도 들더라구요. <창백한 언덕 풍경> 은 미리 알려진 것 보다는 약간은 싱거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음 작품 전반에 걸쳐 원폭과 전쟁 이후에 대한 서사들이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 하네요.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전쟁의 상혼을 치유해 나간다는 통속적이고 뻔한 스토리가 없다는 점이 이번 작품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네요. 아니 그저 종전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서사 방식대로 서사 되다보니 이러한 하나의 거대한 이슛거리가 주목받지 못하고 그저 강물이 흘러 가듯이 덤덤하게 흘러가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서사방식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하고요. 뭐 이런거죠 작품을 대면하는 동안 내내 도대체 그 핵심코어를 캐치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 아!~ 라는 느낌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몰려온다는 것이 이 양반의 주 특기이고 그런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창백한 언덕 풍경>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즈오 특유의 무덤덤함을 정말 제대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비록 생애 첫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뒤늦게 접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강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요. 이번 작품으로 그 동안 소개되었던 작품들을 갈무리해 보면 전 개인적으로 無爲的인 그러니까 뭔가 억지로 끼워 맟추는 인위성이 없는 그저 물이 흘러가고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듯 삶의 한쪽을 무덤덤하게 서사하는 방식이 가장 절묘하게 묘사된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들을 보게되면 하나 같이 이런 느낌을 받게 하죠. 참 매력적인 작가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원류를 이번 작품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카사키 원폭 이후 강제 해체된 일본제국과 패전국에서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그 얼마나 많은 가치관들이 서로 상충했을지에 대해선 그저 어림짐작으로도 이해할수 있는 상당한 임펙트였을텐데도 가즈오는 그러한 세기나 강도에 대해서 뭐랄까 철저하게 무시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언제 전쟁을 겪었고 심지어 언제 원폭을 맞았냐 하는 식으로 철저하게 외면해버리는 서사로 일관하면서 에츠코(상당히 작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은 그래서 어쩌면 작가 자신으로도 비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죠)와 사치코, 마리코 등 개인들의 극히 사소한 부분으로 격하시켜 버린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충격이 심해서 외면해버릴수 밖에 없는 굳이 기호화된 문자나 언어를 빌려서 말로 표현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더 전쟁의 상혼을 어필해 버리는 가즈오 특유의 문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번 작품의 주된 코어는 전쟁의 상혼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있지만 독자들로서는 상당히 애매한 설정을 만나게 되고 마치 남의 집 이야기를 듣듯이 별 관심 없이 주목의 이유도 없이 스쳐가는 일회성의 멘트처럼 다가오는 것 같지만 왠지 모를 동일성을 하나씩 맞닥뜨리게 되면서 심연 깊숙한 곳으로부터 안타깝고 애잔한 감정이 솔솔 피어 오르게 하는 작품인 것 같네요. 무엇하나 이슈가 되는 논거나 극적인 반전에 독자들의 뇌리를 강타하는 임팩트한 서사(단 한 곳이에 있긴 하죠. 사츠코가 고양이를 익사 시키는 장면은 상당히 소름끼치지만요 뭐 여타의 작품이라면 그다지 눈에도 띠지 않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상당히 강한 임팩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전 일종의 과거의 단절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같은 장면은 없는 아주 밋밋한 내러티브이지만 손에서 놓지 못할만큼 끌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의 하나같은 왠지 비현실적인 성정들(이 역시 철저한 설정으로 보입니다)이 어쩌면 전쟁의 상혼이라는 트라우마를 에둘러 녹여 놓은것 같다는 느낌도 들게 하고요. 작품 전체적에서 풍기는 뉘양스가 아마도 원폭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했더라면 오히려 그 감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작가는 전쟁의 상혼이 가져다 준 등장인물들의 성정이나 말투, 행동, 시대의 변화상, 도심 거리의 묘사등 놓치기 쉬운 아주 소소한 부분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므로서 작품 전체의 생기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에츠코 자신의 과거 회상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는 결국 현재의 시점까지 그 끈을 끊을 수 없는(딸 게이코와 과거의 마리코)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만 게이코의 자살이 어쩌면 전쟁의 상혼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리고 특별한 것 하나없는 행복한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하죠. 참 교묘하게 트라우마를 어필하는 작품으로 왜 가즈오 이시구로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신예 작가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 은 굳이 장르로 말하자면 성장소설쪽에 들여놔야할 것 같습니다(저 개인적으론 100% 수긍할 수 없지만요). 사실 성장소설이라는 분야의 장르는 저 개인적으로는 그 다지 익숙치 않는 장르이고 약간의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청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본 게임에 들어가기전에 한 두번쯤 경험하게 하는 데모버전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해서 읽지도 않았고(아 참 물론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와 같은 해당사항이 없지만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구원> 이라는 작품도 성장소설이라는 자체를 모르고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왜 굳이 이 작품에 대해서 성장소설이라고 칭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을 리바이벌 하는 느낌이 들면서도 인생의 쓴맛, 단맛, 쾌감, 죄책감, 스릴, 감추고 싶었던 욕망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쯤은 겪어봤을듯한 그런 일련의 사태들을 이처럼 농밀하게(열한살의 눈에는 더욱더 농밀하게 보였겠죠) 서사해 놓은 부분들이 절로 수긍가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우리에겐 다소 낯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배경이 접목 되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더해 간다는 것입니다. 우선 작가의 출신과 성장배경에서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희망봉, 아파르트헤이트와 넬슨 만데라 그리고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산출지로 알려진(아참 얼만전 개최되었던 월드컵도 있네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에겐 상당히 낯선 나라이죠.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하고 있지만 왠지 유럽(백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고 팽창 제국주의의 피해 산물로만 인식되고 있기에 가해자의 시선보다는 피해자인 아프리카 흑인들의 시선에 더 심정적으로 팔이 굽기 마련이죠. 그래서 책에 나오는 다소 모호한 표현이나 흑인 하녀들의 삶과 흑인에 대한 비하적인 용어들을 보면서 씁슬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킬레스건이 다름 아닌 이번 작품을 더 빛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작가인 자크 스트라우스의 솔직 담백한 서사들이 위로 차원이나 대충 넘어 갈려고 하는 그런 어슬픈 화해의 손짓이 아니라 정말 화해의 장으로 소설을 구상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주인공 '잭' 과 잭이 바라보는 또래와 성인들, 남성과 여성, 백인(영국계, 아프리카너계), 흑인, 종교, 죽음, 性, 가치관등 삶의 모든 면에서 부딛혀야 하는 쟁점들에 대한 서사들이 하나같이 독자들 가슴속을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성독자들이라면 잭과 같은 사춘기를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되면서 뭐 지금이야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면서 웃음으로 마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 무엇보다 심각했던 그런 행동들에 대한 데자뷰를 맛보게 된다는 점이 또 다른 위안거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음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문서를 통해서 면책을 받았다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또한 여기에 남아공 전반에 대한 역사까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뭐 보어인이나 아프리카너라는 친근하지 않는 용어와 인종적 갈등이나 종교적 갈등등에 대한 남아공 특유의 가치관이 오버 랩되면서 종합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장면을 대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점은 원작의 "dubious salvation" 라는 부분들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던 점입니다. 구원이면 구원이지 의심스러운 구원은 무엇일까 뭐 딱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나름의 느낌으론 작가의 일종의 면피성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흑인과의 갈등에 대한 나름의 사과와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이 역시 피해자의 시선에서는 완벽하지 못한 뭐랄까 마지못해 아니면 떠밀려서 혹은 세계가 바라보는 따가운 눈총 때문에 ,,, 그리고 또는 사춘기의 돌발적인 사고나 행동이 성인이 된다고 해서 100% 면제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등 다양한 각도에서 완벽하게 단절된 느낌이 아닌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개인들과 남아공의 현주소를 지칭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더 솔직담백한 맛을 느끼게 하는 제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하면서도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잭이라는 주인공을 통한 두 단계의 시선 처리라는 점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정말 사춘기 소년의 시선으로 아기자기 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표현 기법들이 왠지 독자들을 과거속으로 끌고 가서 주져않혀 버린다는 것이죠.(할머니의 죽음, 페트뤼스와 19금의 그림책을 보는 광경, 무엇보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관게에 대한 서사는 가히 일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독자들은 마냥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그 옛날 철모르던 시절로 갑자기 돌아가 기분이고 '그랬지 나도' 하면서 절로 웃음짓게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번째 단계는 다 자라서 엄마 아빠의 말이 법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를 확연히 알게 된 성인의 시선으로 무덤덤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러한 시선처리로 인해서 더욱 더 전체적으로 상당히 매력있는 아이템과 그런 아이템을 맛깔나는 필체로 서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성장소설이라는 한계을 뛰어 넘어 세대간의 소통을 이끌어 내면서(물론 협소한 의미죠. 좀더 줌 다운하게 되면 세대간 및 계층간 그리고 인종간의 소통으로 봐야 하겠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여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낯선나라에 대한 이해가 들면서요(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 이스라엘, 일본등과 더불어 세계 3대 惡으로만 생각했던 나라였는데요 이부분이 많이 완화되었습니다)굳이 성장소설이라는 현판을 걸어야 할 이유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보기 드문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차기작이 더 기대되게 하는 작가로 보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수동 타이거스 - 2013년 제1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최지운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연치 않는 기회에 큰 범주에서 말하는(속칭 전문가들의 잣대이자 뭐 보편타당한 논거로) '성장소설' 을 연거푸 읽게 되었네요.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 과 최지운의 <옥수동 타이거스> 라는 작품을 주말 내내 손아귀에서 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는 어쩌면 뻔한 스토리를 가지고 뻔한 주인공들(대게 갑자기 닥쳐온 집안문제와 사춘기 모드로 인한 자기 정체성의 불투명과 친구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학교생활 이를 하나 둘씩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개인 내면적인 승화의 결실.... ) 그리고 뻔한 결과들을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구조로 인해 그 작품이 그 작품인 것 같은 그런 뉘양스가 많았죠(물론 폄하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닥 일독을 권해싶지 않는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장소설(청소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의 한계성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 밥에 그 나물에서 벗어날려고 하다보니 스토리의 과격성(약간 현실성을 결여해버리기도 하죠) 아이템의 비현실성으로 인해서 세칭 전문가들이 그려왔던 범주에서 궤도이탈을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어떨때는 그래서 굳이 이놈이 경계선을 왜 자를 대서 쫙 그어났을까라는 생각에 전문가들의 머리구조를 의심케 하기도 합니다. 아 참 물론 형편없는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우선 저는 이번에 읽는 <옥수동 타이거스> 라는 작품을 성장소설(청소년 소설)의 범주로 보지 않는다 점입니다. 굳이 영역을 지정해서 작가가 의도하는 담론의 나래를 미리 제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런 엉텅리같은 범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비록 주인공이 청소년(비행 청소년으로 봐야죠)들이고 그 줄거리의 핵심이 베틀(좋게 이야기해서 그렇고요 까놓고 말하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패싸움하는 내용이 주죠)과 용공고 폐교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실상 조금만 살펴보면 여기에는 지금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거대한 담론(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개인적)의 치열한 베틀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회소설이나 르포르타주 형식의 소설로 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할 정도입니다. 공적인 영역의 담론만을 가지고 내러티브를 구성했더라면 아마도 신춘문예 당선은 물건너 가겠죠. 또한 역으로 개인적인 영역의 담론으로 내러티브를 끌었다면 전문가들 이야기하시는 그저 그런 성장소설로 남았겠죠. 하지만 이 둘의 영역이 서로 서포터를 해주므로서 내러티브 전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느낌이 강하게 옵니다.


   여기에 공적인 영역과 개인적인 영역에서 결국 그 결과는 뻔하게 결말 된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공상적인 발상보다 이를 받아들이는 현실성을 가미함으로써 오히려 더 피해자측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독자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부분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신예작가이지만 그 내공은 왠만한 기성작가 빰을 칠 정도로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경영학 원론 인사관리에서 가장 우선시 하는 적재적소의 법칙을 이 만큼 철저하게 기법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몇몇 안되는 작가로 보여질정도 내러티브의 요소요소에 적절한 아이템과 스토리 거기에다 관중(오호장군을 열라 지지하는 층과 더불어 왠지 독자들도 모르게 그층과 하나가 되어 내심 쾌거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을 즐겁게 하는 다양한 형식(인터뷰,회고록,채팅창등)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어 한시라도 책을 벗어나게 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선 성공적으로 보여집니다. 바로 이러한 끊임없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으면서 작품과의 유채이탈 자체를 거부케 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싶네요. 뭐 문학적인 완성도니 필체의 수려함이니.... 아시죠 전문가님들의 뻔한 내퍼토리말이죠. 근데 사실 이러한 제도적인 부분들은 현실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죠(마치 캡틴 파이브가 허구헌날 오현장군에게 묵사발 나는 것처럼요) 바로 이런 점이 최지운이라는 이름 석자를 독자들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 같습니다.


   대게 신인들의 작품이 참신한 맛이나 기성 작가들에게 볼 수 없는 퓨어한 아우라를 무기로 모든 것을 용인 받지만 이 양반(제가 왠만하면 신인작가한테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데 절로 나오네요)의 이번 작품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그런 맛은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왠지 선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구요. 근데 기존 선수들에게 느껴지는 닳디 닳은 느끼한 맛이 아닌 뭔가 대형사건을 칠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마음을 사로 잡게 한다는 것입니다. 직전에 읽었던 <구원> 의 신예작가에서 느껴지는 포스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속이 후련(세칭 스펙을 다 갖추고 있는 캡핀파이브를 물리치는 오호장군의 활약상에)하면서도 마음을 짠하게 울리(극도의 자본주의 시스템논리와 특권계층의 강자의 힘이 드세하는)는 작품입니다. 그러면서도 희망이라는 메타포를 버릴 수 없는 이유를 직시해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구요. 신예작가 답지 않는 도도한 필체가 어우어져 작품의 빛을 더해주고 독자들과 같이 소통하고 호흡할 수 있는 소재를 맛깔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반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인터넷창에서 파업창이 연속으로 뜨는듯한 유니크한 구조가 눈에 들어오고요 이로 인해서 독자들을 더 내러티브속으로 끌어들이면서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설정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가는줄 모르게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작품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작품에 대한 편차는 개인별마다 상당한 차이를 부여하고 있죠. 그러기에 문학작품에 대한 묘미가 있는 것이고 다양한 부류의 독자층이 생겨나는 것이겠죠. 그 동안 책좀 본다고 하면서도 사실 문학 작품에 대해선 상당히 아래로 보는 경향이 본의 아니게 내 마음속 한켠에 자리잡은것 같았습니다. 동서양고전이나 전문경제/인문서적을 보면서 이 아까운 시간에 왜 저런 문학작품에 매진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졌는데 막상 문학작품들을 대하면서 아 책읽기의 진수는 바로 문학작품에 있구나라는 사실 하나를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작가별로 판이하게 다른 사유와 담론을 내러티브에 서사하는 기술적인 방식에 이르기까지 그 세계는 갈수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네요.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밀란 쿤데라가 제 가슴에 살짝이 불을 당기더라구요. 이 양반의 작품을 아직까지 많이 접해보질 못해서 딱히 '밀란 쿤데라 스타일' 이다라는 감을 제대로 잡을 순 없지만 그래도 한두 작품씩 읽어나가면서 막연하게나마 아! 이런것이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구나라는 막간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웃음과 망각의 책> 을 접하면서 대략적인 밀란 쿤데라의 스타일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딱히 기호학적인 언어체계로 100% 표현할 수 없지만 이번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플롯이나 모티프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전반적으로 아우러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하는 작품입니다.

 

    <웃음과 망각의 책>소설과 에세이(그것도 상당히 무거운 에세이라고 해야할까요)의 경계선(경계선이라는 이름의 별도의 작품 수록되어 있기도 하죠) 을 묘하게 건너다니면서 독자들의 눈을 희롱하고 있죠. 여기에다 마치 단품을 모아 놓은 선집같은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이거 막상 읽다보면 앞과 뒤가 연관되는 묘하디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또 한번 독자들을 농락하죠. 뭐랄까 이번 작품에 수록되어 있는 '경계선'과 '엄마' 에서 볼 수 있는 상당히 당혹스러운 성애 장면을 보는듯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7편의 이야기가 밀란 쿤데라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혹은 전지적 작가시점과 뒤섞이면서 내러티브의 주제를 잡아 나가기가 곤혹스럽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아주 가뿐하게(단편들이라는 생각에 말이죠) 출발했건만 그리고 1부 '잃어버린 편지들' 을 끝낼때만 해도 정말 부담없이 생각했는데 이건 갈수록 태산이라고 나도 모르게 덩달아 작중인물들과 꼬여 버리는 느낌을 받게 하네요. 여기에 작중 화자인 밀란 쿤데라의 뜬금 없는 서사들이 덧대어 지면서 중수필을 읽고 있는 것 아닌가(뭐 문학쪽에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보니 사실 어리둥절했습니다)라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무엇보다 다시 한번 주목해지는 부분은(물론 저 개인적인 관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지만 성애의 묘사 부분이 독특하다는 것죠. 솔직한 표현으로 쇼킹 그자체였지만요. 밀란 쿤데라의 이런 성애의 묘사는 상당히 은밀하고 농염스러운 에로시티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은 상상해 볼 수 있는 (뭐 이렇게 말하면 내 자신의 性정체성에 대한 이상한 발현일수도 있지만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뭐랄까요 내 머리속에 있는 씬들을 마치 스캔이라도 뜬듯이 보여주는 서사들이 들어낼 수 없는 속마음을 들킨것 같은 얼굴 화끈함을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일 이상한 것은 이런 성애의 표현과 설정들이 왜 그리 3류 에로비디오를 보면서 느끼는 저속함을 느낄수 없다는 것이죠. 그의 작품에 걸쳐 거의 모든 면에서 등장하는 이런 묘사들에 익숙해져서 그런것이지 아니면 밀란 쿤데라만의 뛰어난 화법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의 일환으로 보는게 맞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의 쟁점은 거의 모든 작품들속에 녹아져 있고 각각의 작품들을 감미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조미료 같은 역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번 작품의 백미는 다름 아닌 '경계' 에 대한 담론의 서사들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계에 대한 담론과 웃음 그리고 망각(비록 제목이지만요 오히려 경계에 대한 강한 서사로 인해 묻혀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 하지만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대담론은 맞습니다) 이 담론들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해서 경계는 경계성대로 웃음은 웃음대로 망각은 망각대로 각각의 나래를 펼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죠. 또한 이 삼총사가 하나의 앙상블로서의 일체감을 강하게 돋보이게 하기도 하고요. 물론 애매모호한 배경음악(밀란 쿤데라의 목소리가 강하게 간섭하게 되죠)이 깔려 있어 더 모호성을 가중시키면서 작품 각각의 경계성을 허물어 버리는 서비스도 부여하고 있네요. 

단적으로 파세르의 장례식 풍경을 다룬 부분에서 예견치 못한 바람으로인해 날라간 모자때문에 장례식 본연의 모습을 사라지고 모자를 주으려는 클레비스나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모자나 이를 지켜보고는 사람들 모두가 경계와 웃음과 그리고 망각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모든것은 우리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하나의 속박에 불구하고 그 경계선을 넘는데는 웃음과 망각이 필수요건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죠.

 

"경계 반복을 받아들일 만한 최대 용량, 경계는 반복의 결과가 아니다 반복은 경계를 눈에 보이기 만드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 " 그래, 더 이상한 것은 저 모든 몸들이 아름답다는 거야. 봐봐, 늙은 몸조차 병든 몸조차 몸이 그저 몸이기 때문에, 옷을 벗은 몸이기 때문에 아름다워. 자연처럼 아름다워. 오래된 나무도 젊은 나무만큼이나 아름답고, 병든 사자도 여전히 동물의 왕이지, 인간의 추함은 옷의 추함이야". "몰이해 위에 세워진 경이로운 연대", "경계선이란 인간이 만든 문명이라는 감옥의 건너편" - 이 문구들이 이 책의 전반을 아우르는 밀란 쿤데라의 모든 담론이 함축되어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여태까지 얼마 읽어보질 못했지만 대면했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중에서 가장 난해하게 느껴졌고 한편으로 가장 강렬하게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구요, 작품전반에서 느껴지는 잔상이 참으로 오래토록 남을 작품인것 같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순간까지도 제목인 <웃음과 망각의 책> 이라는 제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니면 그토록 강조되고 있는 '경계' 에 대한 개념을 종잡을 수 없어서 그런지 멍한 상태로 마무리하게 되지만 어렴풋하게 나마 웃음과 망각 그리고 경계의 모호한 선상을 그리게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5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은 한마디로 상당히 곤혹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특히나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명성과 더불어 그 동안 그의 몇몇 작품을 대했던 가슴 깊은 곳의 울림만으로 보게 되면 더욱 더 당혹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상당한 분량까지 더해져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과연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이고 작가의 내러티브를 제대로 추적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몇번씩이나 가지면서 앞으로 나갔던 작품이기에 솔직히 지금도 머리속이 혼란스럽네요.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일까라는 생각 달라도 변신해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들 정말 작중 화자인 라이더 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작품이라면 침소봉대같은 생각일까요.

 

   자 첫 스타트 그러니까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피아니스트 라이더가 낯선 도시의 초청강연을 받고 호텔에 도착해서부터 대면하게 되는 포터 구스타프와의 만남은 그래도 봐줄만한 설정으로 출발합니다. 뭐 물론 여기에서부터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왠지 이 작품 만만치 않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죠. 쉴세없이 정말 숨도 안쉬는 것 처럼 주절주절대는 구스타트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에서 대충은 감이 오지만요(그리고 이 놈의 엘리베이트는 왜그리 늦는지 모르게 한없이 올라갑니다). 그래도 작품의 특성상 하나의 장치적인 설정이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을 향해 갈수록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처참하게 그런 희망이 무너져 버리죠. 하지만 그 이후 등장하는 호텔지배인 호프만(솔직히 이 인간은 정말 말이 많아도 너무 많죠 이부분에서 전 약간의 짜쯩스러움을 느꼈으니까요), 소피와 보리스(이 둘이 등장하면서 독자들은 또 다른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뭐 일종의 기시감 같은 그런 심리학적으로 몽환스러운 분위기를 접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혼란속으로 빠져들죠.), 브로즈키 등등등(정말 쉴세 없이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를 반복하면서 무슨 미로속에서 보물찾기 마냥 내러티브 전체가 꼬여 버립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 하나 출현하면서 이와 걸맞게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버리는 묘하디 묘한 설정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쯤오게 되면 플롯이고 내러티브고 뭐고 개의치 않고 그냥 책장을 넘기게 되어 버리죠.

 

   여기에 등장인물들의 성정 자체에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면을 볼 수 있죠(참 뻔번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들이 들면서 왠지 이러한 뻔뻔함을 무채색으로 덧칠하는 서사가 오히려 더 얄밉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개인적으론 남의 말은 귀퉁으로 듣는 안하무인격인 성정들로 인해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고 특히나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우리의 주인공 라이더의 애매모호하고 우유부단한 행동들이 이런 감정들을 더 가중시킨다는 점입니다. 뭐갈까 등장인물들 모두다 철저하게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그 세계만을 보고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죠. 물론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전기공 사내는 제외하고요. 그러니까 도시민 등장인물들의 한결 같은(정말 시종일관 한결같다는 미덕을 보여줍니다) 비정상적인 언행을 보여주므로써 그리고 화자인 라이더가 여기에 살짝 동조하는 분위기인 입장표명을 불명확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혼란을 독자들에게 이입시키는 현상마저 불러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2% 부족함(아마도 이게 바로 그 결정적인 2%가 될 것 같은데요 바로 '위로' 이지 않을까 싶네요) 뭔가에 매달리는 부분들이 우리 고전인 구운몽의 몽환적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에 작품 저변을 흐르는 그로데스크한 색체에 블랙코미디를 능가하는 해학들이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실하게 하면서 그냥 눌러앉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작품의 결말을 기대했던 희망마저도 산산히 부서버리면서 내가 뭘 읽었을까라는 허탈감을 사정없이 부여해버리죠.  

 

   뭔가 한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면 나아지겠지라는 안도감이 내러티브를 따라가면서도 오히려 계속해서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약간의 추리기법을 차용에서 독자들의 불안감을 유도하죠. (독자들은 라이더씨 입장과 시각을 따라가게 되고 왠지 그를 자기도 무르게 두둔하면서 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되고, 한편으로 생뚱맞는 처지에 놓이는 라이더씨를 위로 하면서 스토리를 밟아가게 되는 아주 묘한 설정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 이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의 교묘한 장치적 설정으로 또한 이번 작품은 누굴 위로해야하는지 아니 독자들 스스로가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정말 헷갈리게 하죠. 사실 이러한 설정들이 화두인 '위로' 라는 개념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역활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 전반은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된 위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제대로 위로를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설정이지만 결말부분에 전기공 사내가 한 말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일어날 당시에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처럼 여겨지게 마련이죠.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리 나쁜 일도 생각했던 만큼 나쁘지는 않습니다. 기운을 내세요" 외에는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판단여부를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난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구요.

 

   사족으로 작품 전반을 흐르는 음악이라는 부수적인 소재가 훗날 <녹턴> 이라는 작품의 모티프 역활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을 위로의 형식으로 삼을려고 한 취지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그런데 이부분도 재미있는게 그런 음악이나 음악가가 마치 존재하는것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는 것이죠. 물론 소설이지만 상당히 허탈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특히 그동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대면했던 독자들이라면 그 충격파가 더 클것으로 보이네요. 그래도 저 개인적으론 모던 클래식이라는 뉘양스와 가장 걸맞는 작품중에 하나이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고요, 카프카의 현신이 보이는 작품인 것 같았습니다. 비록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인내력을 시험받게 되지만 이 또한 작품을 통한 '위로' 보다는 독자들 스스로 '위로' 라는 담론에 대해서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는 거 같았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약간 서정적이고 여성적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네요(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