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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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한 기억속에는 없지만 어렴풋이 망망대해속을 가르는 돛단배와 배 고물쪽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그리고 세월의 세파를 달관한 표정의 노인.... 뭐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보았고 나중에야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를 영화한 거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정도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대면해 보지 못했지만 뇌리속에는 강한 像을 심어놓은것 같네요.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정신(프론티어 스프리트) 을 대변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F.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 하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읽혀지고 연극, 영화로 리메이커되듯이 세계문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헤밍웨이의 원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스포트라이트를 꾸준히 받는 작품을 접할때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작가나 작품의 뒤에 걷어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후광의 빛을 좀처럼 걷어내지 못하고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 그래서 순수하게 작품의 사유를 느끼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기존의 유명 리뷰어들이나 작품의 해설등 엄청나게 쏟아낸 평을 무시할 수 는 없으니까요) 을 빼면 나름 작품의 바다속을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책읽기도 또 다른 감흥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몇자 끄적거려 봅니다.

 

 

   <노인과 바다> 뭐 워낙 알려진 작품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들(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뇌리속에 남아있는 <노인과 바다> 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청새치를 배에 달고 귀향하는 극히 한정된 씬일 것입니다. 작품 전반을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고 상어떼들의 공격보다 더한 파토스를 남기고 있는 서사이기에 <노인과 바다> 하면 딱 그 장면이 고착화되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달리 떠오를 만한 테제가 없을 정도로 <노인과 바다> 는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비쥬얼이 강한 작품속에 들기도 하고요. 왠만한 거장들의 명작품과 비교해봐도 이런점은 눈에 띌정도로 강하게 독자들 뇌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이 작품을 대하지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에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장면이라는 말이죠.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꼭지점에서 끝이없는 나락으로 일순 떨어지는 허망함과 더불어 모든것을 놓고 가야 한다는 당위성 사이에서 밀려드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사실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특별한 이슈가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한 느낌을 주는것도 사실입니다(뭐 속된 말로 찰랑찰랑 파도 치는 바닷가에 발다금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노인과 소년 그리고 노인과 노인의, 노인과 고기라는 구조는 세대와 세대, 자신의 정체성과의 사투, 대자연과 인간이라는 또 다른 플롯을 상상케 하는 이중적 구조로 그리 난해하지도 않죠. 그리고 스토리를 전개상 두번의 클라이막스를 엿볼 수 있죠, 첫번째는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에서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면서 노인과 청새치의 전쟁의 결과를 주목하게 되고 노인의 승리로 막을 내린 1차 전쟁에서 희열을 공감하게 됩니다.(뭐 낚시광이라면 이 부분이 엄청난 느낌을 가져다 줄 정도로 헤밍웨이의 서사는 일품입니다) 그리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바다는 그야말로 세상모든 것을 품을듯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 역시 노인과 더불어 편안하게 고른숨을 내쉬게 하지만 곧 이어지는 상어떼의 공격과 자신이 온힘을 다해 잡은 청새치를 지키는 2차 전쟁의 모습을 사뭇 다르게 전달됩니다. 헤라클레스같은 지혜와 힘으로 청새치를 굴복시켰던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무기력하게 상어떼에게 자신의 포획물을 헌납하는 순수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독자들의 심장의 박동 강도도 느려지고요 실상 내러티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극적인 반전이지만 막상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강도는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이 헤밍웨이의 사유가 집약된 부분일거란 생각이 들구요. 등장인물들과 화자의 설정에서 이중적 구조를 보여주듯이 이러한 반전을 통해서 헤밍웨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슬구도를 암시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이는 소년과 노인과의 대화 노인과 노인(고기가 현현한 노인으로 봐도 무방하겠죠) 의 대화는 육지와 바다라는 구도와 일맥상통하기도 하죠. 뭐 평론적으로 파고들면 끝도 한도 없이 복잡한 구조를 말해야겠지만 겉으로 들어난 구조상으로도만 보더라도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는 설정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사실상 재미없는 논쟁만 남을테니까요.

 

 

   제목 자체로만 보면 독자들 머리속에는 쪽빛 같은 적도의 바다와 강렬한 태양에 반사된 눈부신 수평선 그리고 세상을 다품을 듯한 노을빛등 서정적인 묘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정적인 서사와는 무관한 사실주의적 서사들을 대면하게 됩니다(아마 이부분이 작품해설과는 상반되는 부분일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낚시 장면, 생선을 해부(해체)하는 장면, 청새치와 사투하는 장면등...에서 서정적인 서사는 찾기 힘들어지고 그저 무덤덤하게 사실적인 면을 강조하죠. 뭐 작품 해설자는 하드보일드 기법이라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런 사실주의적인 서사속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킨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죠. 노인과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마치 바다위에서 실재로 청새치와 사투중에 느끼는 손맛이랄까요. 뭐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우리 독자들도 무임승차한다는 기분으로 슬쩍 다리하나를 걸치면서 나름이 감정을 흡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낚시중 노인이 내뱉는 코믹한 멘트나 바다 낚시의 생생한 묘사는 마치 살아있는 고기를 낚은 현장에서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를 하는듯한 서사가 일품입니다. 만세기를 낚시로 잡는 장면과 해체하는 장면은 정말 실감나죠. 마치 생선의 비릿한 냄새마저 느껴지게 하면서(예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사냥장면에서 화약냄새을 느낄 수 있었던 만큼이나 생생합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솔직히 입안 가득 군침마저 돌게 하구요. 마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정리해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눈앞에서 처다보는 느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노인에 대한 애잔한 감정들 그리고 고기와 사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등 왠지 모를 일체감일까 뭐 그런 느낌들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를 통해서 사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감정적인 서사가 절묘하게 내러티브 전반에 깔려 있기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정로 문학적인 격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족입니다만, 개인적으로 본문에 맞먹는 작품해설을 보면서 약간은 씁쓸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사실 작품의 해설이나 서평등은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마다 편차가 크기 마련이고 작품을 읽고 느끼는 느낌 역시 제각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처럼 본문에 맞먹는 역자의 해설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독자들 입장에서는 작품의 해설부분에 대한 의존도랄까 신뢰도등등 이런면에서 자신의 느낌이나 작품에 대한 감상이 훼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워낙 친절하게 해설을 달아 놓아서 마치 독자 자신이 생각했던 방향과 어긋나거나 아예 감상평을 올릴 엄두가 나지 않을수도 있다는 말이죠. 물론 어디까지 저 개인적 생각입니다만요 그냥 작품 그대로 나름 느낄수 있는 짧막한 해설이 수록되었으면 한결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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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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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회구조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다. 사회을 합리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냉정한 논리뿐이다" 라는 신념으로 똘똘 무장한 경찰청 특수해석연구소 주임해석 연구원 가구라,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그래도 맨발로 감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는 경시청 반장 아사마 이렇게 극단의 성정과 가치관이 다른 두 인물이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이번 작품은 그동안 추리스릴러소설로 국내에도 이미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대게가(물론 작가 자신의 전공인 과학분야의 소재를 카메오처럼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요) 개인 vs 개인의 구도를 띠고 있는 사건 해결의 메카니즘을 갖고 있죠. 물론 여기에 작가는 사회성이라는 담론을 깔아놓고 출발하지만 보통의 작품들에서 개인의 문제에 촛점을 맞춘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플래티나 데이타> 는 그동안의 작품과 사뭇다른 플롯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조지오웰의 <1984> 을 연상시킬만큼 그 내러티브가 상당히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띄네요.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서 도래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경고에 대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시대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지만 결국 이번 작품역시 아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일종의 경고적인 멘트가 담겨져 있는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최첨단기술을 통해서 명목상으론 사회범죄를 사전에 예방할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하지만 결국 일반대중을 통제하는 권력층의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작가는 자신의 작품속에 이러한 사회적 이슈를 담고 그 담론들을 독자층에게 호소해옴으로써 단순한 추리스릴러장르를 뛰어넘어 사회적으로 호응을 받을수있는 기반을 구축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 만큼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강한 멘트와 플롯으로 내러티브를 끌어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네요. 아예 작정이라도 한듯이 작품의 서두에서 부터 강한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기에 추리스릴러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사회소설이라는 장르속으로 넘어가버린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죠. 여기에 추리스릴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요건들은 다 충족하고 있어 다소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는 스토리를 한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런면들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만의 매력이자 차별화된 영역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죠.

   빅 브라더, 플래티나 데이타 가 이에 해당하겠죠. 그리고 DNA을 통한 일반대중의 통제 그러면서 기득권층과 권력층은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특권을 공고히 다지는 작중 "어느 세상이건 신분은 존재해. "인간이 평등한 사회는 있을 수 없어"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과학 문명이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자연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것을 뿐이며, 자연에 친숙해지거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등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뇌리속에 깊이 박혀있으면서도 대놓고 공론화 시키지 못하는 부분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서슴없이 들어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번 작품의 소재와 주제가 상당히 하이퍼 테크널리지한 최첨단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부분에서 다소 의아한 점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가구라와 스즈랑이 경찰청의 압박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과정에서 번역가는 "회중전등"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왠지 이런 번역이 눈에 거스린다고 해야 할까요. 작품 분위기나 시대설정이 갑자기 20세기 중반이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같아 다소 아쉬움으로 남네요. 물론 의도적으로 작품의 플롯을 더 부각하기 위해 아나로그시대의 향수을 표현했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석연치 않습니다.

 

   그리고 유심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대한 독자라면 발견할수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요(아 명탐정의 규칙에도 나온 보레로라는 가상의 지명말고요) 다름아닌 '블랙커피와 밀크티' 입니다. 그의 작품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료인데요. 항상 남자(특히 사건해결자인 남성)은 블랙커피를 마시고 여성들은 대부분 밀크티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죠. 이러한 점도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가십거리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작품은 전반적으로 조지 오웰의 <1984> 를 데자뷰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지만 그와는 또 다른 흥미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다소 무거운 주제에 대한 접근을 다양한 설정과 복선으로 메우고 끌어가면서 독자들에게 사회소설과 추리스릴러소설 두 장르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자감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작품이지 않았나하는 느낌이 드네요. 작중 "어느 세상이건 신분은 존재해. 인간이 평등한 사회는 있을 수 없어" 는 말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문명의 이기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전체적으로 사회전반에 던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한 메세지를 엿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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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난아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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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잘 알려진 오르한 파묵은 터키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특히 이슬람문화권의 작가로는 드물게 국내에도 많은 메니아층(저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얼마전 출간된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로 그의 모든 작품이 출간될 정도로 국내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죠(사실 이러한 출간 자체만으로도 그 위상이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거니까요). 이러한 주목은 단지 그가 우리에게는 낯선 이슬람문화권의 작가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세로 인한 후광이 아니라 그의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동서양 문화충돌에 관한 사유(대표적인 오브제이자 파토스죠.오르한 파묵의 동서양 문화에 대한 담론들이 돋보이는 이유는 어느 한쪽의 자잘못을 지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한발자국 물러서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거죠. 몇몇 이슬람권 작가들의 서사는 다소 격하고 동적인면이 강하다면 이에 반해 오르한 파묵의 서사들은 정적인 것 같지만 그 힘의 파장은 어느 동력보다 오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합니다)들이 독자들과 소통이라는 형식으로 공감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고요, 터키라는 나라가 우리에겐 상당히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온것도 약간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 자체에 대한 독자들의 느낌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에 이역만리 떨어진 작가의 작품에 많은 공감을 느낄수 있지 이유이지 않을까 싶네요.

 

   오르한 파묵의 전담 번역가 이난아씨가 이번에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를 고찰한 책을 출간 했습니다. 제목도 아주 단순하게 <오르한 파묵> 으로 정해졌고 그야말로 오르한 파묵과 그의 작품에 관한 모든 것을 대할 수 있다는점에서 오르한 파묵의 팬들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기회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르한 파묵에 대해선 국내 어느 누구보다도 전문가인 이난아의 작품해설과 원작가와 번역가의 이색적인 만남등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뒤담화까지 곁들여서 오르한 파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자료들이 많다는 점에서 더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르한 파묵의 출생에서 성장배경 작가로의 변신 과정등 그의 개인적인 내면의 세계와 이러한 삶이 그의 문학세계에 어떠한 형태로 투영되었는지, 그리고 하나의 작품을 집필해 나가는 과정에서 오르한 파묵 특유의 기획력과 고집스러운 집착등 작품 이면에서 깔려있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끽할 수 있다는 자체가 보기 드문 기획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했던 독자들이라면 약간은 의아해했던 점들을 속시원하게(?) 풀어준다는 점에서 이번 책은 눈에 띄네요. 오르한 파묵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차기작에 대한 연관성을 미리 염두해 두고 등장인물과 설정들에 대한 커다란 밑그림을 그린다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네요.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 <고요한 집> -> <하얀 성> 이런식으로 연계되고 데자뷰된다는 점,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내러티브의 플롯이 오르한 파묵과 연관된 실존하는 인물들, 그리고 자신 가족사등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등 많은 부분에서 이번 책을 통해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르한 파묵을 좋아하고 그의 작품 매력에 빠져있는 독자들에게 호흥이 크게 오리라 여겨집니다. 전 개인적으로 '같은 스토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스타일' 이라는 평이 오르한 파묵의 작품 세계를 적확하게 평가한다고 보여지네요. 특히 <내이름의 빨강> 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관점은 포크너식의 관점을 뛰어넘어 오르한 파묵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들구요. 여기에 <순수 박물관> 출간 이후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사랑의 정의가 기막히게 뇌리에 꽂히네요. "사랑은 교통사고입니다" 아마도 사랑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묘사하는 문장은 없을듯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동안 읽어던 작품들과 저자가 바라보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평을 냉정하게 한번 비교해 볼 기회도 가져보게 되었구요. 그나마 큰 범주 범위내에서 벗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도 내쉬게 되었습니다. 참 그리고 팁으로 출간예정 작품의 제목이 <내 머릿속의 기묘함> 이라고 소개되는데 제목만 봐도 잔뜩 기대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서 빨리 국내에도 선보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짧은 소견이지만 걱정되는 점이 있기는 하네요. 저자인 이난아의 너무 소상하고 리얼리티한 작품 해설로 인해 출판사의 매출에 지장이 오지나 않을까라는 짧은 생각과 더불어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면했고 그의 작품매력에 빠져 있는 독자라면 무관하겠지만 처음으로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에겐 약이 아닌 독이 될 수 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문학작품이라는 특수성은 인문사회계열의 서적과는 상당히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개인(독자)별 편차가 오차 범위를 넘어설 수 밖에 없고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사유의 강도 역시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역자의 의견이나 작품평들이 이런면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 올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이 일정한 꼭지점을 향해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면하지 않았던 독자들에게는 선뜻 권하고 싶지 않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대면했던 독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네요. 물론 일독을 하더라도 전제 조건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하나 하나 끝내고 나서 봤으면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경우도 나의 느낌과 생각을 비교해 본다는 차원에 국한해서죠. 굳이 상이한 느낌을 받더라도 내가 잘못 느꼈나? 라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했듯이 문학작품의 편차는 클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게 정상이라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이번 책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를 한층 더 이해하고 자신의 느낌과 비교해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좋은 기회의 장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전반적으로 오르한 파묵에 대해서 궁금점이 많았던 부분들이 해소되었다고 할까요. 오르한 파묵만의 기획과 집필과정을 통해서 독자들과 소통할수 있을수 밖에 없는 작품이 탄생한다는 생각도 들구요. 이러한 작품을 번역하면서 단순하게 터키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게 아니라 작가의 출생,성장배경과 그의 사유 및 집필의도등을 공감하고 원작가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고 수렴해 나가면서 번역에 임했던 이난아씨의 노력이 있었기에 작품이 더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지울수 없습니다. '번역도 또 다른 창작이다' 라는 말 100%로 수긍하게 하네요.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밀양을 선택했다는 점,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에 등장하는 손자 아흐메트가 실존하는 화가이면서 자신의 책 표지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 순수박물관의 건립과정을 담은 뒷담화 등 여러모로 작품외적인 부분에서까지 오르한 파묵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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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스토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11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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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에 상당히 당혹스러운 작품(솔직히 책 제목에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이 드네요)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작품의 스트럭쳐면에서 보더라도 연속되고 통일된 내러티브를 가진 작품이라고 보기엔 왠지 2% 부족한(솔직히 2%가 아니라 더 하지만요) 느낌이 들고요. 오히려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29장 각각이 하나의 단편을 형성하고 있다는 뉘양스가 강하게 드는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진짜 복잡합니다 머리속을 혼란하게할 만큼요).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만큼 많은 등장인물들(저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을때 독서노트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연관관계를 필기하는데 이번 작품은 중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이 등장하면서 독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또한 어느 특정 인물에 대한 포커스가 전혀 없고 특색적인 스포트라이트도 비추고 있지 않아 내용자체가 뒤죽박죽 섞이면서 도통 내러티브를 이해하기가 난해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작품 전반을 흐르는 작가의 사유나 담론 뭐 이런 비슷한것를 정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독자들을 당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잉고 슐체의 <심플 스토리>이런 측면에서 디피컬트 스토리라고 명명하는게 더 어우릴 듯한 그런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죠. 처음 이 작품을 접하면서 인물들에 대한 접근을 가지고 시작하는데(대게의 작품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주연과 조연 그리고 양념으로 뿌려 놓은 인물들의 성정과 그들이 끌어가는 내러티브의 감을 잡기 위해 시작하는데) 한 챕터가 끝나기 무섭게 이어지는 다른 장의 이야기에는 갑자기 그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앞 장의 스토리를 완전히 갈아 엎어버리고 마는 효과를 가져오죠. 작가도 너무 했나 싶어서 앞장의 인물을 어떠한 형태로간에 카메오처럼 등장을 시키지만 그 연결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죠. 물론 작품의 중간부를 넘어서면 나름이 퍼즐을 끼워맞춰 나가는 일종의 재미 아닌 재미를 만끽하게 되지만 페이지를 앞으로 뒤로 몇번에 걸쳐 왕림해야 하는 번거스러움을 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렇듯 복잡한 미로속을 헤매이게 하는 작가의 의도된 장치의 중요성이 작품 후반부에 가서 그 빛을 발하게 되기도 합니다. 뒤죽박죽 얼히고 설힌 복잡한 인물들도 조금만 신경써서 보게되면 다양한 형태로의 관계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 현실의 우리를 대변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권터 그라스가 극찬을 했듯이 이번 작품은 독일이 통일과정과 그 이후 남게되는 후유증에 대해서 개인들이 삶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 하나 하나에 대한 의미 부여가 가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역설적으로 본다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할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역으로 개인들의 삶을 부각시기키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할까요). 잉고 슐체는 <심플 스토리> 를 통해서 주인공이라던가 비중있는 인물에 대한 특별한 권능을 부여하지 않고 있는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주인공이나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인물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자체가 바로 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에 대한 일대의 반기를 든 작가의 사유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구요. 이는 작품의 스토리를 29장이라는 독립된 별개의 이야기(사실 이 별개의 이야기 자체로도 무슨말인지 얼핏 이해하기가 그리 녹녹치 않죠. 그러면서도 왠지 하나의 단편소설같은 느낌을 많이 줍니다)로 진행하듯이 통일과 그 이후에 대한 일반 민중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혀 메이컵하지 않는 민낯 그대로를 투영해 내고 있다는 점이 참 매력적인 작품이다는 생각입니다. 뭔가 강조하고 좋게 보여줄려는 서사보다 더 강하게 독자들의 뇌리속에 각인된다는 것을 보여 주네요.

 

 

"7에 대해서 물어요. 그럼 노인들은 4를 설명해주고, 내가 또 한번 물으면 6에 대해서, 그러곤 3에 대해서 설명하죠. 내가 포기할 때쯤 되면 노인들은 다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4더하기 6 빼기 3은 7이라고" 이 처럼 이번 <심플 스토리> 를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은 없을 듯 합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없이 딱 이처럼 처음에 출발해서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되새겨보게 되면 아하! 하고 무릎팍을 탁 치면서 머리속이 명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이죠. 디피컬트하면서 컴플랙스하지만 다른 한편의 시각으로 보면 아주 심플한 그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작품에 대한 평가는 전체적으로 많이 상반된 형태를 띨 것으로 보입니다. 포스터모더니즘계열의 복잡다난한 구조를 가진 말 그대로 디피컬트한 스토리라는 평가도 충분히 이해갈 수 있는 부분이고요(사실 많은 독자들이 처음 대면하면서 느끼는 그런 평이지 않을까 싶네요 솔직한 표현으로 이번 작품을 다 읽고 나서도 절로 이해가 되었다고는 못할 정도로 전혀 심플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말 단순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도 일리가 가는 부분일 것입니다. 통일된 직후 구동독의 아주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많은 사람들의 그들만의 이야기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듯 하지만 그 각기 다른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떠한 형태와 방법으로든 서로간의 관계성(혈육적이거나 사회적으로나)을 가지고 있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잉고 슐체는 이러한 무지건조하고 전혀 맛갈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양념으로 밑간을 하면서 오히려 이들간에 벌어지는 스토리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효과가 거대한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확대 포장된 통일과 그 후유증에 대한 다큐보다 훨씬더 생동감있고 사실감 있게 독자들에게 다가간다는 거죠. 통일이 되던 분단이 되던 간에 그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담론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임을 강조하는 거죠. 이러한 면은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왜 제목을 "심플 스토리" 로 정했을까라는 부분에 수긍이 많이 가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범국가적이고 범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독일의 통일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거대한 담론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자기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그저 그런 심플한 이야기일수밖에 없다는 반증이 한부분을 서사하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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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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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論하기 힘든 작품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음 솔직히 괜한 끄적거림으로 인해 불후의 명작에 먹칠을 하는 딴지를 거는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구요). 워낙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고 영어로 쓰여진 소설중에 두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하기에 더욱 더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였고요, 각종 유명 리뷰어들의 찬사가 줄지어 있기에 여기에 토를 단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넌센스가 될 수 도 있기에 조심스러운 작품이다는 생각도 듭니다. 엄청난 후광이 뒤를 받치고 있는 작품들은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또한 그 명성에 결부된 독특한 사유가 내포되어 있기에 일반 독자로서의 리뷰는 사실 조심스럽기도 하고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는 마음으로 나름의 느낌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전형적인 미국 소설이라고 해야 겠죠. 여기서 전형적인 이라는 의미 자체가 다소 왜곡된 象을 뜻할 수도 있지만 그 동안 다양한 콘텐츠로 비쳐진 '아메리카' 의 이미지를 총칭하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북아메리카에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급부상한 미국이라는 국가는 전세계의 하나의 대안 혹은 희망으로 여겨진 사례중에 대표적인 현실입니다. 지금도 '아메리카 드림' 에 대한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있고 물론 그런 드림이 상실되는 순간 미국의 원동력 자체가 그 빛을 잃겠지만요. 특히나 제3세계에 속한 정치적 자유와 금전적인 기아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아메리카 드림은 복음과도 같은 유일한 끈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만큼 세계적으로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든 면)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개츠비> 를 전형적인 미국소설이라고 한 점은 바로 작품속의 등장인물들의 성정이나 행위자체 그리고 사유가 독자들의 뇌리속에 전형적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가는 아메리카 드림을 내러티브에 교묘하게 뿌려놓고 있어 실상 독자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상당히 넓은 분포도를 가지게될 수 밖에 없는 형태를 띠게 마련입니다. 이런면에서 보게되면 <위대한 개츠비> 정말 위대한(?) 아메리카 드림의 본 고장 미국을 다루는 작품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번역가의 소견이나 영향력 있는 리뷰어들의 진단은 하나같이 바로 이 아메리카 드림에 대한 예리한 접근과 필체에 대해서 극찬을 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 독자가 아니라면 크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다는 것에 그 괴리감이 있다는 것이죠(물론 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실상 재즈시대라고 명명된 1920년대 당시 <위대한 개츠비> 가 출간될었을때 미국내 독자층에게도 그다지 큰 매력을 끌지 못했던 작품이었고 훗날 대공황을 거치고 2차대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세계패권을 손에 쥐게 되면서 부각된 작품중에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내러티브 자체적으로만 보더라도 크게 눈에 띄일만한 힘이 없다는 점입니다. 뭐 결말부분에 이르러 개츠비가 독박을 자청하는 부분 역시 반전이라기 보다는 왠만한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의 일부로 보여지고요, 닉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혼자서 안고 가는 부분 역시 전형적인 미국냄새가 난다는 점외에는 특출나게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이벤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명성이 후대에까지 사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앞에서 언급해듯이 피츠제럴드의 역활(아메리카 드림을 바라보는 사유와 이중적인 인물들 배치시키므로서 은근히 슬쩍 면죄부 비슷한 것을 제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끌어내는 부분)이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드네요.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과 더불어 작가의 덕을 많이 본 작품이라는 느낌이 듭니다(굳이 이런 작품들이 고전이라고 하면 뭐 할말은 없지만요). 작품의 내러티브보다 작가가 표방했던 사유가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형국이라고 할까요. 이러면에서 영화로 재작되는 개츠비 역시 어디에 포커스를 두고 있을지 사뭇 기대되는 바입니다.

 

   작품은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세월이 지나서 제이 개츠비를 회상하는 구도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한 관전 포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피츠제럴드는 닉의 역활에 상당히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뜻 보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닉의 회상록에 가까울 정도로 닉의 시선과 관점에서 개츠비를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역활을 수행하고 있죠. 이러한 구조적 설정이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사유의 진정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나 비미국 독자들에겐 좀더 의미있는 사유이기도 하지요. 당초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가졌던 순순한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는 닉과 이후 자본주의가 덧칠해져 왜곡된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는 개츠비 이렇게 양측의 아메리카 드림을 동시에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식견은 상당히 높게 평가될 만 하는 거죠.(피츠제럴드는 닉과 개츠비를 양 당사자를 통해 자신의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으며 이 두 사람의 등장인물은 그들에게 부여된 역활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죠) 당시 독자층에게 어필되지 못했던 부분을 피츠제럴드는 아마도 예견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작중에 매일밤 개츠비 저택에서의 파티에 불나방처럼 각계인사들이 모여들지만 그들은 개츠비의 성공에 질투를 던지고 있으면서도 그 바운드리안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빗나간 욕망을 보여주며, 결말부분 개츠비를 희생양으로 모든 사건을 급히 덮어버리는 철저한 외면에 씁슬함을 감추지 못하게 하죠. 당시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부분아닐까 싶네요. 특히 이번 작품은 초반부에 '도덕적인 차렷 자세' 라는 복선을 깔아두면서 사실 독자들에게 이 작품이 어떻게 흘러갈것인가에 대한 립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차렷 자세' 는 이 작품의 핵심적인 키워드이고 피츠제럴드가 작품속에 담고 싶은 담론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에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아니 솔직한 표현으로 철저히 외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네요) 훗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가치관이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죠.

 

   <위대한 개츠비> 가 곧 국내에도 개봉된다고 하는데 원작을 먼저 대했던 독자들에겐 상당히 반가운 소식이 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무엇보다 피츠제럴드가 표방했던 위대한 개츠비가 영상으로 어떻게 재 탄생하게 될 까라는 부분이 상당히 관심을 끄는 부분입니다. 개츠비로 분한 디카프리오와 닉의 역활을 할 스파이더맨 토비 맥과이어 두사람의 연기력에 기대가 되네요. 캐스팅자체에서 벌써 반은 먹고 들어갈 정도로 이상적인 조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리 듭니다. 디카프리오의 집착과 다소 허영적인 고집, 맥과이어의 바른생활 사나이 뉘양스가 개츠비와 닉을 제데로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또한 '항상 어딘가에 발을 가볍게 두들겨 대거나 참을성 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는 개츠비의 다소 불안정한 모습과 '형씨' 라는 호칭, 그리고 개츠비의 저택과 데이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옷차림등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또 다른 흥미거리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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