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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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뭐 뜸들이지 말고 바로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책장뒤에 나열되어 있는 유명 리뷰어들의 현란한 찬사를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 리뷰어들의 찬사는 왠지 사막한가운데의 개미무덤처럼 뻔히 알고도 당하는 유혹일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 그런 경험을 많이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에 접한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는 아! 개미무덤이 아니고 오아시스일수도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작품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봉 잡았다고 해야하나요. 영국 옵저버지는 "흠 없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어도 좋다" 라는 짧막한 촌평을 게재했는데요. 그야말로 이번 작품을 제대로 표현한 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아무리 미사어구와 스펙타클한 임펙트를 가한 문구로 표현을 해도 이보다 작품 전반을 제대로 표현한 말은 없을듯 하니까요. 그야말로 정말 흠 잡을데 없이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결론을 짓게 합니다. 전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마치 프로방스의 밀발길에 서서 서쪽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과 더불어 초원의 향기가 진하게 온몸에 스며드는것 같고 발길을 옮길때마다 절로 미소짖게 하는것 같은 착각, 빽빽하게 양옆으로 메세타콰이어가 줄지어 서있고 그 사이로 촘촘하면서 간간이 비쳐드는 햇살을 만끽하면서 두서없이 걸어가는 전남 담양의 가로수길 위에 있는 것 같은 착각, 정말이지 그냥 그런 길을 하루종일 한번 걸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드네요. 많은 아쉬움과 그리움 그리고 잡고 싶은 모든 것들을 걸어가는 그 순간만은 모두 내려놓고 그냥 그 길을 걷고 싶어지는 마음이 있듯이 바로 <이런 이야기>가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영향으로 인해 이태리문학이라면 섬세하고 논리정연하면서도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선입관을 가졌는데 이번 작품은 그런 선입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고 합니다. 남성인 제가 읽어봐도 이처럼 아름답게 서술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내러티브 전반의 앙상블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참 즐겁게 작품을 대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라는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라 처음엔 다소 망설이면서 작품을 대했죠. 에코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문학에 대한 왠지 모를 막연함 이거 끝까지 독파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등등... 근데 역시나 초반은 그런 선입관들이 살짝 밀려옵니다. 복합 화자의 시각과 왠지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레이싱 이야기들을 비롯하여 내러티브의 도입부는 약간(솔직히 상당히) 지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뭐 사실 처음에 이 작품을 대면하서 초장에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그 만큼 그 동안 상당히 임팩트가 강한 자극적인 씬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내러티브가 살짝 탄력을 받으면서 시선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예열되는 구식 엔진처럼요. 특히 자동차와 레이싱을 묘사해나가는 부분이 가히 일품으로 다가오는데요(사실은 내러티브가 도입부에 자칫 잘못하면 상당히 지루하고 이게 뭔소리인지 하는 삼천포로 빠질 소지가 다분이 있는데요. 바로 이부분에서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FI 레이싱처럼 속도감 있는 현장을 어떻게 저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정말 기가막힌 묘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작품을 조금만 더 읽게 되면 바로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진다는 점에서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묘사력은 상당히 인상에 남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양반의 작품은 난생 처음 접해봤지만 왠지 느낌이 오는 작가라는 생각도 들면서 주변상황이나 인물들의 묘사 그리고 상황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한편의 세밀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정도 한순간 한순간을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러한 묘사가 그냥 어느 형상을 터럭하나 놓치지 않고 전사하는 그런 세밀함이라기 보다는 왠지 그 묘사속에 살아있는 감정과 풍경 그리고 시대적 상황을 풍기고 있다는 점이 이 양반의 장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네요. 구체적으로 당시 일반인들에게 자동차는 상당히 진기한 물건이었고 이런 진기한 물건이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자체가 거의 이벤트에 가까울정도로 희귀했는데요. 알레산드로는 이런 일련의 묘사를 마치 당시 그 시대의 인물이 처음으로 자동차를 접했을때나 가질수 있는 감정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묘사력을 가진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사의 디테일을 살펴보자면 대표적으로 카포레토 전투의 회상부분을 들수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이후 가장 사실적이고도 사유적이면서 유머러스한 전쟁씬의 묘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알레산드르 바리코의 서사는 참으로 가슴에 와닿다는 거죠. 우리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느꼈던 감정들 마치 현장에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연상케 하듯이 알레산드르 바리코는 카포레토 전투의 장면들을 생중계하듯이 리얼타임으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포탄의 비명소리와 자욱한 화약냄새, 군인들의 숨소리 심지어 그네들의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마저 체감케 하는 듯한 묘사는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포화속으로 끌어 당겨버립니다. 이런 볼거리를 따라 가면 독자들은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쇳덩이처럼 전쟁에 대한 확실한 사유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 수 없게 하기도 하고요. 특히 이번 작품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전쟁, 역사등의 거시적인 담론과 사랑, 父情등의 미시적인 담론이 참으로 절묘하게 한 작품속에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그저 녹아있는게 아니라 내러티브 전반을 관통하면서 시의적절한 곳에 등장하고 그 타이밍이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기법이 알레산드로 바리코만의 능력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하구요. 이러한 디테일한 서사라는 작은 줄기가 한테 모여 인생과 그 인생을 걸어가는 우리라는 커다란 강줄기로 변해 가는 과정을 부담없으면서도 사유깊게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참 그리고 여기서 하나 빼놓을수 없는 것은 바로 번역의 힘이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게 합니다. 왠만한 독자들이라면 이세욱 번역가에 대해서 잘알고 있을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몇작품 무엇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거의 모든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실상 국내에 베르베르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한데요. 베르나르의 작품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생동감있고 있을수 있을법한 내러티브로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우리말로 맛깔스럽게 번역해낸 번역가의 역활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작품에서 이세욱의 힘을 다시한번 느낄수 있을 것 같네요. 문학작품을 그림 그리기로 비유해보면 알레산드로 바리코 화가라는의 단어 하나 하나는 붓놀림에 해당할 것이고 화가가 붓질을 한 번 또 한번 해 나가듯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단어를 하나 또 하나 덧붙여 가면서 삶의 온갖 깊이와 생동감을 담아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문장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그림이라는 작품을 완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작품전체에 대하여 채색이 아니라 솜씨좋게 소묘정도만 수행하고 있고 나머지 여백을 채울 실마리는 독자들의 몫으로 던저 주죠. 색깔, 명암, 질감등 장면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정보를 독자들의 판단에 일임합니다. 그리고 이런 독자들의 판단에 가장 결정적인 역활은 번역가의 우리말 번역이라는 것을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수긍할 것입니다. 원작자와 국내독자들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역활 이상으로 독자들에게 한단계 더 나아가 차원에서 작품을 보게 하는 메신저 역활을 하는 것이죠. 작품의 전체적의 내러티브와 일맥상통하는 번역은 국내 독자들에게 상당히 크게 어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요 왜 그런 작품들 한두번 경험해봤을 것입니다. 뭔가 내러티브와 달리 우리말로 옮겨놓은 문장들 단어들이 상호 엇박자를 널띠면서 내러티브 자체를 상당화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 오르한 파묵의 전담 번역가 이난하는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세욱의 번역을 보게 되면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인지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연가미연하다", "씨억씨억하면서 결연하게","진둥한둥","생급스럽다","중동무이","동","줄느런" (물론 덕분에 국어사전도 한번 더 들쳐보게 되고요^^)등 평소에 접해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는 어휘들 약간은 어색하고 생뚱맞은것 같지만 유심히 음미해 보면 정말 이번 작품과 딱 궁합이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어휘들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같은 작품속에 나열되어 있었다면 과연 어떤 느낌으로 <레미제라블>은 독자들을 찾아왔을까요? 올티모의 삶을 역 추적하면서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내러티브와 레이싱과 길이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삶에 투명시키는 내러티브 자체와 너무나 잘 버무러 져서 정말 맛깔나는 식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번역가 이세욱 자신의 말처럼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이 처럼 외국작품의 경우 번역을 누가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느낌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요. 이런 면에서 이세욱의 <이런 이야기>이 번역은 알레산드로 바리코가 전달하고자 한 의미를 제데로 국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지않나 싶네요.

 

           "그 여자는 하나의 길과 같았어요. 생뚱맞은 굽이가 자꾸자꾸 나오는 길, 돌아올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광막한 벌판으로 내닫는 길,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고 달리는 길이었어요"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 만한 길, 그녀는 그런 길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이렇듯 이번 작품은 내러티브를 관통하면서 참으로 많은 주옥같은 의미의 문장과 단어의 파편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동안 일본추리스릴러나 핏빛과 엔터테이먼트 요소가 강렬한 작품들을 대면했던 독자들에게 한번쯤 문학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작품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습니다. 대단원을 향하면서 왠지 예기치 못한 대반전을 기다리기 보다는 결말의 끝부분이 뻔히 보이지만 왠지 그 결말로 칫닫고 있는 시간을 붑잡고 싶은 그런 작품이면서도 이국적인 비포장 밀밭길을 질주하는 자동차안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죠. 비포장도로 요철면의 진동이 그대로 자석에 전달되고 그런 흔들림이 그대로 온몸으로 전달되면 열어둔 창으로 들어오는 향긋한 꽃내음, 그리고 엔진의 굉음과 소버에 톡톡하고 튀는 조약돌의 충격음 백밀러 뒤쪽으로 뿌연 먼지들... 뭐 상상만해도 정말 그런 길을 드라이브하고 싶어지는 바로 그런 작품이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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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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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전에 국내에 개봉된 <방황하는 칼날> 을 원작으로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뭐 영화는 영화대로 또 다른 느낌이 들지만 아무래도 원작을 읽어보는게 제대로된 작가의 의도나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더욱이 다름아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라 더욱 더 그런 욕망이 앞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히가시노의 게이고의 작품들은 추리스릴러작품치고는 상당히 많이 영화된 사례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작품세계가 기존의 추리스릴러계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겠죠. 매번 사회적인 이슈를 한 두가지 작품속에 배정함으로써 추리스릴러와 사회성을 동시에 추구하기에 그의 작품들은 읽을때 마다 가슴 뭉클하고 속 시원하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사유가 담겨있어 국내에도 많은 매니아층을 갖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번 작품도 어김없이 전 사회적으로 한번쯤은 꼭 생각해 봐야할 사유가 담겨져 있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영화개봉을 앞두고 각종 홍보를 통해서 '미성년자들의 성폭행' 그리고 이에 대한 미성년자들의 처벌 수위와 그 피해자와 가족들에 대한 대책등 아직도 특별한 안전장치가 없는 우리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 이번 작품은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섭렵했던 독자들이라면 다소 의아한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그 동안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회성 짙은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추리스릴러의 기본 ABC를 철저하게 지켜왔고 작품의 내러티브나 스트럭쳐등 거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독자들이 추리스릴러를 대하면서도 사회성 짙은 사회고발 소설을 동시에 접할 수 있었고 이 두가지의 면이 서로 절묘하게 연관되어 작품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던 독특한 작가였죠. 그런데 이번 <방황화는 칼날> 이라는 작품은 아예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심하고 집필한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작품으로 추리스릴러의 기본공식은 찾아보기 힘든 작품입니다. 초장에서 부터 사건의 전말과 그에 연관된 등장인물들 그리고 사건의 주 동기등 기본적인 기법등이 그냥 오픈되어 있고, 어느 누구라도 예감할 수 있는 복수와 그 결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뭐 내러티브만 놓고 보면 정말 뻔한 작품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작품은 사회고발성이 깔린 사회소설로 받아들이는게 타당할 듯 합니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이슈는 '미성년자들의 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 와 '피해자 및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보호책' 이라는 두 가지의 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범죄가 성범죄일 경우 미치게 되는 개인적인 파장과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 기존의 법률이 정하고 있는 최대한의 안정적이라는 방책에 대해서 과감하게 그 현 주소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라면 가해자나 피해자나 그에 대한 부모의 미묘한 입장를 십분 공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한번쯤은 필히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좀더 확대하면 우리가 정해놓은 법규가 과연 타당할까라는 회의심마저 들게 하고요, 여러모로 가슴이 무거운 작품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는 내내 화가 나고(여기에 세월호 참사와 맞물려 그런 감정들이 더 증폭된것도 사실이구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탈감마저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자력구제가 용인될 수는 없지만 정말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요.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은 읽는 내내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중고등생 여학생을 둔 부모 독자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머리끝까지 열이 뻐치면서 몰입하게 만드는 내러티브를 갖고 있기에 흥분지속 상태에서 작품을 읽게 되고 마치 작중의 아버지와 동일선상에서 같은 사고와 같은 상상을 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동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면면을 살펴보면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이슈들이 많았음을 알수 있지만 이번 작품만큼 급속도로 독자들과 공감하는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리얼하면서도 솔직한 사유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쇼킹한 작품이기도 하죠. 이렇듯 독자들과 십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그 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이 어필하는 부분이 뛰어나고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청소년 성범죄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그 예방책등 사회 전반에 작용하는 작용들에 대한 논의가 있길 바라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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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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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독자들은 귀신이나 유령이야기에 매료되기 마련이죠. 이는 아마도 각 개인의 잠재 의식 속에 상상으로 남아있는 귀신이나 유령의 형의상학적인 이미지가 작가라는 제3자를 통해 형이하학적인 실재적이고 뚜렷한 존재로 다시금 확인하고 싶어하는 충동과 더불어 귀신이나 유령에 대한 사유의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각 개인만이 느끼는 그러한 감정이나 느낌등을 불특정 타인과 비교해보기도 하고 서로 공감을 하면서 내심 안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겠죠. 이러한 면에서 지금으로부터 한세기도 더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 이 귀신이나 유령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로 손에 꼽히고 있는 이유가 바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정확하게 문자화했다는데에(엄밀히 말하면 독자들과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전형적으로 그로데스크한 설정배경과 등장인물 그리고 여기에다 액자구조까지 곁들이고 있지만 왠지 고딕소설로만 볼 수 없는 미묘한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사의 회전>의 진정한 묘미일 것 같네요. 그리고 백여년이 더 지난 현대의 독자들에겐 더욱이 호러공포장르에 왠만히 길들여진 독자들에겐 왠지 김빠지고 시시하게 다가올 것이 자명할 정도로 내러티브의 잔혹성, 피의 향연과 귀신이나 유령과의 담판등 다양한 공포-호러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고 내러티브 자체만 보면 다소 밋밋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호기심의 증폭을 더한다는 것이죠. 오히려 가정교사(유일하게 이름이 들어나지 않고 있죠)와 마일스, 플로라, 그로스 부인등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를 기가막히게 묘사하여 이러한 심리적 상태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종의 심리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들고요.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이나 이의제기도 만만치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퀸트나 제슬양의 유령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유독 가정교사만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괴기스럽고 어두운 분위기를 작중화자인 가정교사가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도의 모호함을 지닌 사이코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물론 작가는 두 유령의 생존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부분과 그로스 부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가미해서 정말 존재하는 유령으로 이끌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호응받기는 힘들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 이유 불문하고 <나사의 회전> 은 이렇듯 보는 독자들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게하는 다양한 테제를 가지고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방을 떠나서 <나사의 회전> 이 오랜시간동안 독자들의 사로잡고 있는 매력은,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심리묘사나 배경설명의 리얼리즘이라고 봐야겠는데요. 이는 마치 나사가 회전하면서 조여들듯이 독자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그 상황으로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끔 흡인력이 뛰어난 문체들의 향연이고 이러한 심리적 묘사부분이 시대나 공간의 이격성을 걷어버린다는 점에서 많은 감흥을 주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눈에 띄고 끌리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작가는 내러티브의 진행을 나사의 조임으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점, 나사의 주역활이 조임(연결성)에 있지만 간혹은 헛바퀴 돌듯이 급작스럽게 풀리기도 하듯이 긴박함과 흡인력으로 일관하던 내러티브가 한 순간 갑자기 헐거워져버린다는 느낌으로 맥을 놓게 하기도 하는 점에서 유령의 존재만큼이나 모호함을 가중 시키고 있다는 것이 작품을 읽는 내내 찾아드는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레파토리를 소개하는 또 다른 화자인 더글라스의 모호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액자속 이야기 자체도 모호함의 연속이고 그 결말 역시 모호함으로 끝을 맺는 모호함 그 자체라고 보여지는데요. 그렇지만 이러한 모호함속에 일련의 사실성이 내재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가 마치 독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상상속의 귀신이나 유령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모호함은 독자들 나름대로 나사를 조이고 풀어가면서 느끼는 일종의 그 끝을 바라고 싶지 않는 심리상태를 유지하게끔 하고 있다점이 참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는 상상속에서의 공포를 다 체험하고 싶지 않듯이 현실화된 소설속에서도 그런 안도감을 주는 것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두어 더 모호함을 증폭시키는 장치로만 남아 다양한 결말의 연장선에 독자들을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그 어떠한 잔혹성이나 공포의 확정성을 체화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장치가 오히려 더 심리적으로 긴장감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라고 보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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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17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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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꼭 읽어 본다라는 생각은 강하게 뇌리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지만(그리고 책도 오래전에 서가귀퉁에 고이 모셔 놓고 쳐다만 보고 있었지만) 막상 실천에 옮기지 못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지 오웰의 <1984> 입니다. 몇해전에 일본과 국내 독자층을 강타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를 접하면서(물론 제목만 비슷하지 내용은 다르지만요 그래도 하루키의 1Q84는 자연스럽게도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하던군요) 정말 이번에는 꼭 읽어보리라 다짐을 했건만 끝내 책장 한귀퉁에 방치해둔채로 외면했던 <1984> 를 이번에야 완독해 보게 되었네요. 물론 그동안 써머리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1984> 에 대한 계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어지만 문학 작품이란게 더욱이 故人의 작품인 경우 정말 그 작품을 읽어 보지 않고는 섣부른 평가를 내릴수 없기 때문이겠죠. 여하튼 얼마 먹지 않았지만 이 나이에 <1984> 를 이제야 읽어봤다는 안도감에 우선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습니다(책줄이나 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책도 안보고 뭐했냐고 하는 말에 이제 핑계거리 하나 잡았다는 생각이 위안을 주네요^^)

 

          조지 오웰의 <1984> 는 한마디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불멸의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회자될 만한 충분한 자격요건을 갖춘 작품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네요(물론 이러한 간략한 평이 늘그막에 이 작품을 대해서 면피용 발언은 결코 아닙니다). 우선 조지 오웰의 시대인 1940-1950년대에는 미래의 암울한 상(특히 도버해협 건너편에서 히틀러와 그 아이들, 동쪽 유럽으론 스탈린과 그 패거리들 그리고 동아시아에선 천황무리들 이렇게 전체주의적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는 시대였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에 대한 걱정이 앞설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습니다)을 조명한 디스토피아계열의 작품으로 빼어난 내러티브를 가진 명작이자 정치 권력 형태에 강한 경종을 울리는 사회성 짙은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시간이 흘러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세상의 모든 규정을 결정했던 냉전시대에는 그야말로 전체주의의 악을 예견했고 그 실상을 폭로한 문제작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마치 예견된 종말의 끝을 본 것처럼요. 그리고 냉전시대가 끝나고 더 이상 어느 한쪽을 악의 축으로 규정지을 수 없게 되면서 조지 오웰의 <1984>는 서서히 그 향이 잊혀져 갔습니다.(이데올로기라는 개념자체가 희석되면서 새로운 끝없는 글로벌개념과 디지털 혁명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패러다임이 지구촌을 강타하면서 1984년 <동물농장>과 함께 수능의 논술대비용 가치나 그냥 서가의 고전으로서의 역활 변화를 맞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입니다. 기껏해야 SF뉘양스가 살짝 묻어나오는 흥미본위로 그 값어치가독자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全지구인이 리얼타임으로 시시각각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디지털 시대에 다시금 그의 작품이 다시 재조명 받는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생각,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리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면서 절로 공감하게 되었네요. 특히 냉전시대에 대한 그나마의 아련한 기억거리가 있는 독자들에겐 아마 저와 같은 느낌에 많이 공감하리가 여겨지네요. 이런면에서 조지 오웰의 <1984> 는 60여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하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해주는 작품으로 남을거이고 앞으로 미래상(당시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미래상이기도 합니다)에 대해서 충분한 논란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물농장>에서 느꼈듯이 조지 오웰의 혜안에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빅 브라더,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이중사고, 사상경찰, 신어, 활주로가 필요없는 비행기, 핵확산의 경고, 전쟁의 진정한 목적, 과거기록의 조작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용어나 플롯 그 자체만 보더라도 섬뜩할 정도로 지금의 시대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보는듯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네요(물론 노스트라다무스는 굉장히 추상적이게 표현했지만 조지 오웰는 정말 꼼꼼하게 들어맞는 느낌을 주네요)비록 당시대엔(냉정시대를 포함해서) 전체주의에 대한 예견으로 여겨졌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해가고 있는 디지털 정보화시대에 더 딱맞는 예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항상 다양성을 상실한 조직이나 집단의 미래는 암울했던 것이 역사적으로도 판명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개별적이면서 글로벌적이라고 자화자찬 하지만 리만사태나 유럽발 경제위기 뭐 가까이 선거때면 벌어지는 양대진영의 색깔전쟁등을 바라보면서 과연 다양성을 갖추 세상을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라는 강한 의구심이 절로 들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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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요즘 덕분에 세계문학들을 대면할 기회가 잦아지는것 같습니다. 학창시절 써머리형태의 팜플릿으로 접했던 명작들을 새삼 완독해 보니 알고 있는 내용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느낌 강하게 받고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들의 왜곡이 상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이번에 접한 노벨상수상작가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역시 이 범주에 속하지 않나 싶네요. 정확한 기억속에는 없지만 어렴풋이 망망대해속을 가르는 돛단배와 배 고물쪽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 그리고 세월의 세파를 달관한 표정의 노인.... 뭐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보았고 나중에야 그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를 영화한 거란 사실을 알게되었을 정도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대면해 보지 못했지만 뇌리속에는 강한 像을 심어놓은것 같네요.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정신(프론티어 스프리트) 을 대변하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F.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 하는 작가로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죠.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의 작품들이 곳곳에서 읽혀지고 연극, 영화로 리메이커되듯이 세계문학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작가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야 헤밍웨이의 원작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스포트라이트를 꾸준히 받는 작품을 접할때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 작가나 작품의 뒤에 걷어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후광의 빛을 좀처럼 걷어내지 못하고 작품을 보게 된다는 점 그래서 순수하게 작품의 사유를 느끼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기존의 유명 리뷰어들이나 작품의 해설등 엄청나게 쏟아낸 평을 무시할 수 는 없으니까요) 을 빼면 나름 작품의 바다속을 목적지 없이 항해하는 책읽기도 또 다른 감흥을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몇자 끄적거려 봅니다.

 

          <노인과 바다> 뭐 워낙 알려진 작품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들(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뇌리속에 남아있는 <노인과 바다> 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청새치를 배에 달고 귀향하는 극히 한정된 씬일 것입니다. 작품 전반을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고 상어떼들의 공격보다 더한 파토스를 남기고 있는 서사이기에 <노인과 바다> 하면 딱 그 장면이 고착화되어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직히 달리 떠오를 만한 테제가 없을 정도로 <노인과 바다> 는 저 개인에게는 굉장히 비쥬얼이 강한 작품속에 들기도 하고요. 왠만한 거장들의 명작품과 비교해봐도 이런점은 눈에 띌정도로 강하게 독자들 뇌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으로 이 작품을 대하지 않더라도 독자들 머리속에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장면이라는 말이죠.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꼭지점에서 끝이없는 나락으로 일순 떨어지는 허망함과 더불어 모든것을 놓고 가야 한다는 당위성 사이에서 밀려드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사실 작품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특별한 이슈가 보이지 않을 만큼 밋밋한 느낌을 주는것도 사실입니다(뭐 속된 말로 찰랑찰랑 파도 치는 바닷가에 발다금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노인과 소년 그리고 노인과 노인의, 노인과 고기라는 구조는 세대와 세대, 자신의 정체성과의 사투, 대자연과 인간이라는 또 다른 플롯을 상상케 하는 이중적 구조로 그리 난해하지도 않죠. 그리고 스토리를 전개상 두번의 클라이막스를 엿볼 수 있죠, 첫번째는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에서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면서 노인과 청새치의 전쟁의 결과를 주목하게 되고 노인의 승리로 막을 내린 1차 전쟁에서 희열을 공감하게 됩니다.(뭐 낚시광이라면 이 부분이 엄청난 느낌을 가져다 줄 정도로 헤밍웨이의 서사는 일품입니다) 그리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바다는 그야말로 세상모든 것을 품을듯한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 역시 노인과 더불어 편안하게 고른숨을 내쉬게 하지만 곧 이어지는 상어떼의 공격과 자신이 온힘을 다해 잡은 청새치를 지키는 2차 전쟁의 모습을 사뭇 다르게 전달됩니다. 헤라클레스같은 지혜와 힘으로 청새치를 굴복시켰던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무기력하게 상어떼에게 자신의 포획물을 헌납하는 순수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독자들의 심장의 박동 강도도 느려지고요 실상 내러티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극적인 반전이지만 막상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강도는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무기력함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이 헤밍웨이의 사유가 집약된 부분일거란 생각이 들구요. 등장인물들과 화자의 설정에서 이중적 구조를 보여주듯이 이러한 반전을 통해서 헤밍웨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슬구도를 암시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이는 소년과 노인과의 대화 노인과 노인(고기가 현현한 노인으로 봐도 무방하겠죠) 의 대화는 육지와 바다라는 구도와 일맥상통하기도 하죠. 뭐 평론적으로 파고들면 끝도 한도 없이 복잡한 구조를 말해야겠지만 겉으로 들어난 구조상으로도만 보더라도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는 설정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들어가면 사실상 재미없는 논쟁만 남을테니까요.

 

          제목 자체로만 보면 독자들 머리속에는 쪽빛 같은 적도의 바다와 강렬한 태양에 반사된 눈부신 수평선 그리고 세상을 다품을 듯한 노을빛등 서정적인 묘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내러티브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정적인 서사와는 무관한 사실주의적 서사들을 대면하게 됩니다(아마 이부분이 작품해설과는 상반되는 부분일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낚시 장면, 생선을 해부(해체)하는 장면, 청새치와 사투하는 장면등...에서 서정적인 서사는 찾기 힘들어지고 그저 무덤덤하게 사실적인 면을 강조하죠. 뭐 작품 해설자는 하드보일드 기법이라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헤밍웨이는 이런 사실주의적인 서사속에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증폭시킨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죠. 노인과의 감정이입을 통해서 마치 바다위에서 실재로 청새치와 사투중에 느끼는 손맛이랄까요. 뭐 그런 상상의 나래속에 우리 독자들도 무임승차한다는 기분으로 슬쩍 다리하나를 걸치면서 나름이 감정을 흡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낚시중 노인이 내뱉는 코믹한 멘트나 바다 낚시의 생생한 묘사는 마치 살아있는 고기를 낚은 현장에서 리얼타임으로 생중계를 하는듯한 서사가 일품입니다. 만세기를 낚시로 잡는 장면과 해체하는 장면은 정말 실감나죠. 마치 생선의 비릿한 냄새마저 느껴지게 하면서(예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사냥장면에서 화약냄새을 느낄 수 있었던 만큼이나 생생합니다) 생선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솔직히 입안 가득 군침마저 돌게 하구요. 마치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정리해주는 아주머니의 손길을 눈앞에서 처다보는 느낌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노인에 대한 애잔한 감정들 그리고 고기와 사투에서 느껴지는 비장함등 왠지 모를 일체감일까 뭐 그런 느낌들을 자아내게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를 통해서 사실적인 서사와 더불어 감정적인 서사가 절묘하게 내러티브 전반에 깔려 있기에 스웨덴 한림원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정로 문학적인 격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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