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주문하여 읽고 있다. (나에게는^^;) 좀 권위 있는 분이 좋다고 하셔서 우선은 <빛그늘>부터 펼쳤다. '산문시'라던가. 이야기가 있는 시들이 좋았다, 그냥(?) 시보다. 다 옮겨 적으려니 힘에(-이) 부쳐 일부만 쓰지만, '이야기'가 좋은 '시'였다. 이야기가 좋으니 말맛(시의 맛, 시어의 맛)도 살아난다. 내용과 형식은 한 몸.
<이불 장수>
동대문시장 이불 장수가 나를 붙잡는다. (...)
사십년 이불 장사 베타랑의 수완에 말려들어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많은데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 가격이 맘에 안 드나요? (....) 가격을 올린다. 어느새 둘둘 말아 포장을 한다. 카드를 내미니 현금 내면 십 프로 할인해준다고 한다. 호랑이도 장미꽃도 공작새도 다 가짜라는 거 안다. 이불 덮고 항우울제를 삼키고 눕게 될 것이다. 벌떡 일어나 소비자고발센터에 전화라도 해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꼼짝 못한다. 시장에서의 현급 결제는 반품이 안 된다고 했다.
이불 덮고 누워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코르디셉스는 왕개미 거미 속에 들어가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면 개미는 한낮에 나무로 올라가 나뭇잎을 물고 매달린다. 꼼짝 못하다 저녁 무렵 죽는다. 곰팡이는 밤사이 개미 머리를 뚫고 자라나 포자를 흩뿌린다. 포자는 나무 아래를 지나는 또다른 개미들에게 낙하 침투한다. 포자가 침투할 최고의 장소로 개미를 유혹해 나뭇잎에 매달리게 한 것은 곰팡이 코르디셉스. 어떤 화학작용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일까, 호랑이 이불을 덮고 곰팡이 코르디셉스를 읽는다.
<기다란 그것>
그것은 논둑길을 가로질러 걸쳐져 있었다. 도망 중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길을 막고 쉬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서 비명을 지른 것은 나였다. 중학생 사촌이 그것을 막대 채찍으로 때리고 때리고 때렸다. 뱀은 아무 잘못이 없었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의기양양해진 사촌이 뱀을 막대기로 들어 올려 길가 물푸레나무 가지에 걸쳐놓았다. 그날 이후 그 나무 지나치지도 못하겠고 고개 들지도 못하겠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걸쳐 있던 뱀은 어딘가로 가고 없고 얇고 투명한 껍질만 걸려 나부끼던 그 장면, 죽은 척 살았던 그것, 죽어서도 살아 달아났던 그것.
베개 위에 누운 기다란 머리카락, 구부정 누운 한가닥, 지난밤에 죽은 듯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는, 잠시만 내 몸이었던 것, 당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도 일어난다. 기다린 그것이 빠져나갈 동안 당신이나 나나 기댈 곳은 없고.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간다고 간 것이었는데 어린 토끼와 마주치게 되었다. 식목일이었고, 우왕좌왕하는 토끼 한마리를 향해 아이들이 고함치며 달려들고 있었다. 어린 토끼는 처음 맞는 이상한 광경에 어리둥절 달아나지도 못하고,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아마 딴 세상의 소풍일 거라 짐작했다. 누가 토끼에게 바위 밑 구멍을 가리켜준 듯 토끼는 재빨리 구멍 속으로 파고들었고, 귀에 고함 소리 가득했으나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 소리 다 흩어질 때까지, 그들이 다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졸업 삼십주년이 될 때까지. 누군가 구멍 속으로 연기를 피워 넣자고 했고, 젖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고, 그러면 토끼가 튀어나올 것이라 했다. 그러나 죽어본 적 없는 어린 토끼 뭐가 뭔지 몰라 무작정 굴속에서 기다렸다. 외롭고 어둡고 어지러운 이상한 소풍날, 기다리기만 하면 이 마술의 끝이 올 것만 같았는데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고, 빨간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그냥 죽었다.
구멍에 손을 뻗어 휘젓다가 축 늘어진 토끼를 꺼낸 것은 은기였다. 졸업 삼십주년 동창회에서 은기가 말했다. 학수는 선생들이 토끼탕을 먹는 것을 보았다고, 토끼가 펄펄 끓던 학교 가마솥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토끼를 마주친 것은 식목일이 아니라 눈발 날리는 초겨울이었다고 성만이 말했다.(....)
<물고기 얼굴>
(...)
유사성이란 별똥별처럼 휙 지나며 눈앞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던데 보고 싶은 대로만 보니 물고기 얼굴에 인간 얼굴이 찍히며 펄떡, 펄떡, 펄떡.
* *
기본적으로 정가가 아니라(백화점) 흥정을 해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많이 (따라) 다닌지라 <이불 장수>는 내내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마지막, 곰팡이균 얘기, 흐억. <기다란 그것>의 뱀(을 목격한 아이들), <어디가 세상의 끝인지>의 토끼(와 어른이 된 아이들) 역시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비슷한 느낌. 토끼 묘사, 너무 좋아! 공포나 고통보다는 당혹감, 공감된다. 그밖에 신문 기사에서도 많이 인용된 <1mg의 진통제> 같은 이른바 '병원시'는 뭐,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참깨순> 같은 것.
"참깨순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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