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생충> 관련 많은 댓글 중 "왜 눈물이 다 나냐? 정말 늙었나 보다"(?) - 나도 그랬다. 단속적으로 깨 단속적으로 꾼 꿈에도 계속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가 나왔다.  지난 학기에 <살인의 추억>과 <기생충>을 보고 그 '-앓이'를 꽤 한 것 같은데, 더 앓아봐도 좋겠다. 글씨체도 참 쫀쫀한데, 천재가 악필이라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준다.

 

 

이런 노트까지. 1프로의 영감-천재성은 99프로의 노력이 없으면 어떤 것도 생산, 창작하지 못하니 아무 의미가 없고,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영감-천재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거나 시원찮은 것만 나온다. 어쨌든 일단 하고(쓰고/만들고) 볼 일이다. 김영하의 말마따나 우리를 괴롭히고 교란하는 무수한 악마들을 무찌르며 -  Just do it!

 

또 하나는 소위 업무 능력(성적, 재능 등)과 소외 사회성의 결합이다. 세상에 '일'만 딱 있지 않다. 우리가 흔히 '일'이라고 할 때는 그와 관계된 각종 부수적인 '일'도 포함된다. 소설을 본때나게(?!) 쓰는 것, 물론 중요하지만 출판업자, 편집자 등을 만나야 하고 그 과정의 일도 참 보통이 아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려면 물론 전문지식이 필요하지만 제도가 요구하는 각종 요건 중 사회성의 항목을 피해갈 수 없다. 그 점에서 영화(아마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더)는 무척 힘든 작업일 것으로 생각된다. 고 이청준 선생이 임권택 선생과 작업(?)하시며 하신 말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소설가 김연수 역시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며>에 출연했다가, 영화 찍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갓 서른을 넘긴 젊은 봉준수. 배우들만 젊은 것이 아니었다, 감독도 너무 젊다.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의 중년 감독을 보며 (그의 형도 그렇고^^;) '다 갖추었는데 인물은 참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한창때를 보니 그렇지도 않다.  나는 그의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는데(않았는데), 소설로 치면 너무 베스트셀러 느낌을 주어서 그랬던 것 같다.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등을 다 건너뛰었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에 차곡차곡 볼 수 있을지.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있다지만 '디테일'은 큰 밑그림, 그보다는 깊고 넓은 주제의식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다 좋아야하고 다 잘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런데 -

 

우리의 감독님은 계획이 있으시다니, 두 개나 되신다니,

-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 "

- "계획을 하면 반드시 망한다, 계획대로 안 되거든"(?)

- 어느 쪽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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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2-16 12:27   좋아요 0 | URL
예, 그렇습니다^^;

2020-02-16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2-16 17:24   좋아요 0 | URL
예, 제가 지금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는데, 출판사 일정상 연내 출간은 힘들 것 같습니다.(현재 저의 러시아문학 연구서-교과서가 편집 작업 중인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내년 초에는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0-02-16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0-02-16 19:33   좋아요 0 | URL
완전히 개정판(개역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리는 거죠 ㅠㅠ

2020-02-16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교 시절 <철학> 교과서가 있었으나 주된 과목은 아니었다. 철학을 그나마 맛이라도 본 건 아마 도덕(윤리)이나 사회 교과서를 통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달리 말해, 철학은 모든 학문, 적어도 인문학의 토대. 심지어, 자연과학조차 (어제도 김상욱 강의를 좀 들으며 생각했지만) 철학에서 나왔으니 그 위엄이 과연 대단하다 할 터이다. 하지만 철학은 무엇인가.

 

<도덕> 책에 '실존철학', '실존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 옛날이여! 기억나는 건 단어 몇 개. 키에르케고르, 실존철학의 창시자(선구자), '신앞에 선 단독자', '죽음에 이르는 병' 등. 이 정도만 외워도 적어도 이 주제 때문에 서울대 떨어질 일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 무렵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던가. 얼마나 많은 정보/지식의 더미 속에 살았던가. 당장 미분적분, 확률통계, 삼각함수 등만 떠올려도 머리가 빙빙 돈다.

 

대학에 들어와 한국문학 강의를 듣는데, '키-'의 이름이 출몰한다. 김윤식 선생님 강의에서이다. 그의 책을 쭉, 쭉 찾아본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런 책이 인용된다. 기억나는 대로 빼 보면. 결혼해라, 후회할 거다, 결혼하지 마라, 후회할 거다. 이런 식이다. 뭘해도 너는 다 후회할 거다, 라는 것. '이것'이든 '저것'이든 우리를 후회(회한)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그 기저에 깔린 건?? 저 도저한 시간-권태이다. 차라리, '권태'보다는 '나태'가 극복하기 쉽다. '나태'는 게으름인바, 의지력을 발휘하여 일을 하면 된다. 그 즉시 극복된다. 그러나 '권태'는?  일을 하면서 오는 권태야말로 최악의 권태이다. 그러나 극악한 권태 없이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떤 창조도 없다.

 

쓰다 보니 뒷부분은 지금 내가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이다. 어릴 때는 저기까지는 안/못가고 김윤식 선생이 긁어다 놓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고 언제 원서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잊혔다. 그러다가...

 

 

 

 

 

 

 

 

 

 

 

 

 

 

<지루함의 철학>을 읽으며 '키-'를 다시 떠올린다. 그와 나의 명실상부한 첫(!) 인연은 1999년 여름에 맺어졌다. 그해 나는 박사과정에 다녔고 과에서 마련된 여름 연수차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정말 황홀한(!) 여름이었다. 8주인가, 그랬는데, 러시아-페테르부르크란 딱 그만큼만 체험하면 정말 좋은, 황홀한 시공간이다.(다른 곳도 그런가?^^;) 그때 내가 챙겨간 책이 당시 민음사에서 '이데아총서'라는 이름으로 나오던 시리즈 속 <두려움과 떨림>이다. 러시아어 страх и трепет. 두 단어의 운을 맞추자면 '불안과 전율'. '공포와 전율'. 이런 조합도 생각해볼 수 있고, 우리말을 살리고 싶으면 '떨림'도 그대로 두어도 좋겠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그 책에서 아브라함-이삭, 아가멤논-이피게니아 얘기를 다뤘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즉, 신의 뜻에 따라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비, 마찬가지로 대의를 위해(여기도 신탁) 딸을 바쳐야 하는 장군-아비의 고뇌 등. 후자는 괴테의 희곡의 소재이기도 하다.(그랬던 듯.)

 

 

 

 

 

 

 

 

 

 

 

 

 

 

 

흐억, <두려움과 떨림>은 이미지도 뜨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잊고 있던 사이 이런 책들이 나와 있었다. 낼름 주문하며 지금 1권을 삼분의 이 정도까지 읽었다. 아, 잘 읽힌다! 생몰연도를 다시 본다. 1813-1855. 19세기도 한참 초반. 활동기를 따져도 초중반. 하지만 글만 던져주고 가늠하라면 줄잡아도 니체 이후, 그 언저리로 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과문한 탓?^^;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키-'가 읽힌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현대성과 의미를 증명해주는 것이리라. 덧붙여, 혼자서 이거 다 번역하신 님은 누구심? 고 임춘갑, 이라고 소개되는 걸 보면 작고하신 듯도 한데, 당신이 누구든 정말 대단하시다!

 

 

 

 

 

 

 

 

 

 

 

 

 

 

덴마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안데르센과 키-르일 것이다. 이삼십대 청년이 쓴 글을 세월이 흘러흘러, 아시아의 웬 아줌마가 읽고 감동하는 이런 정황이야말로 '사피엔스'의 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대체 어떻게 썼기에! 기회가 되면 몇 부분 옮겨 놓겠지만,  어떤 장르를 쓰든 '필력'이 나날이 '쇠-'해지는 것을 느끼는 요즘, 무엇보다도 부러운 건, 열정!이다. 즉, 이 글은 쓰고 싶어서 쓴 글이다,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쓴 글이다, 몸과 마음에서 절로 터져 나와서 쓰인 글이다, 이런 느낌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진정성이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나이 들 수록 이런 욕구, 열정을 잃게 되어 있다. 세포 분열이 더디기 때문에, 기초 대사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시간이 긴 사람이 대가로 남는 것 같다. 톨스토이가 대표적. 최근에 근처(?)에서는 이어령 같은 분. 자, 그럼, 모든 청춘은 다 이런 에너지를 갖고 있나? 절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기에 키-르의 글이 더 절절히 읽힌다.

 

*

 

상당히 미남처럼 보이는데 (칸트나 아인슈타인처럼) 살짝 위트랄까, 유머랄까, 이런 것이 느껴지는 얼굴이라 더 좋다.

 

*

 

겨울의 코펜하겐, 이라고 한다. 굉장히, 모스크바 뒷골목스러운 느낌이라, 가져와 본다. 가끔씩 그립다, 모스크바 유학 시절. 나도 한 때는 자작나무의 나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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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알프레드 드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을 읽었다. 아주 꼼꼼, 은 아니더라도 아무튼 다 읽었다. 다 읽고 알았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는 것임을. 세상에. 오랫동안 읽은 책인 줄 알았는데 아마 그 이유는 내가 번역하기도 한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탓인 것 같다. 이 소설의 경우 오래 전 논문도 한 편 썼는데, 무수한 레퍼런스에서 뮈세의 책에 관한 언급을 읽었고 아마 그때문에 오랫동안 기시감(기독감??)을 가졌던 듯하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제목이 말해주듯,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즉 '역사'의 차원까지 넘보려려는 젊은/어린 작가의 야망이 담긴 작품이다. 야망이 항상 실현되는 건 아니지만^^; 레르-프는 여러 모로 '선전'했다고 할 만하다. 이 책의 말하자면 원조 격이 <세기아의 고백>이다. 스물을 전후한 청년이 스스로를 '세기아'로 내세우고 일견 '일기-수기'나 다름 없는 글을 '고백'이라는 거대한 장르로 내세운다. 여기에는 유구한 문학적(기독교 문학) 전통이 들어 있기도 하다. 아무튼 뮈세 역시, '선전 이상의 선전'을 한 것이다. 사실 소설이 좋으니 뒷 얘기가 궁금한 것이다. 그가 조르주 상드와 뭘 했든, 문학이 좋지 않다면, 아무도 관심 없을 터. 중요한 건 '사소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용의 퀄러티(^^;)이다.

 

 

 

 

 

 

 

 

 

 

 

 

 

 

 

찾아보니 뮈세의 책은 꽤 있는 반면, 조르주 상드는 거의 찾기 힘들다. 비슷한 작업을 대학 초년 시절, <광장>과 <그날> 서점을 뒤지며 해보았다. 그때 상드의 책을 읽은 듯도 싶고 아닌 듯도 싶다. 분명한 건, 그녀는 문학 작품보다는 삶-형상으로 문학사에 남았다는 점이다. 사실 요즘 같으면 '-깜'도 아니었을 텐데, 그 시대에는 애(들?) 딸린 유부녀(이혼녀?)로서 무슨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다시 보니, 뮈세도, 상드도 이십대. 뮈세는, 레르-프도 그렇지만, 요즘 같으면 대학 초년생이다. 글 재주 좀 있는 어린/젊은 제자가 연상의 여자(남자라도 좋다)와 연애한 이야기를 쭉, 쓰면 이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런 가정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는 뭔가를 할(쓸) 때 비로소 생긴다.

 

말이 길어진 건, 솔직히, <세기아의 고백>이 '-시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십대 초반에 읽었다면, 레르-프의 경우처럼, 탄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년에 읽으니 그렇고 그런 것이다. 문득, 어린 천재의 걸작(^^;)을 '씹고' 있는 중년 아줌마를 발견한다. 그러는 너는 도대체 뭘 썼니? 아, 이럴 줄은 몰랐다.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변변찮은 소설 한 권 못 쓴 주제에 계속 남욕이나, 즉 남이 쓴 책 욕이나 할 줄은 참 몰랐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갑자기 안 하기는 힘들 테고, 좀 줄여가며 대신, 내 글을 쓰는 일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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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책을 주문했다. 무척 크고 묵직한 박스가 왔다. 너무 무거워서 마루로 들이기도 힘들 정도다. 역시나 힘겹게 커트칼로 박스를 열었다. 으악. 보자마자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이걸 왜 샀지? 미쳤나, 정말? 제일 분통 터지는 건,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이 책들을 완독, 정독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2곱하기 2는 4"처럼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그 미친 짓의 증거인 이미지를 긁어다 놓는다. 그나마 미친 짓을 만회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책이 손을 타기 전에 중고샵에 올려 '최상'으로 갖다 파는 것이긴 한데...

 

 

 

 

 

 

 

 

 

 

 

 

 

 

 

 

 

 

 

 

 

 

 

 

 

 

 

사기만 한 건 아니다. 물론 동네 헌 책방에도 갖다 팔고, 알라딘중고샵에도 팔았다. 하지만 판 책을 다 합쳐도 2-3만원 돈인데, 주문한 책은 2-30만원이니, 세상에 이보다 더 미친/멍청한 짓이 어디 있나. 물론, 읽으면, 읽으면 괜찮다.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맨 위에 썼듯, 내가 죽기 전까지 결코 다 읽지 못한다는 데, 이 미친 바보 짓의 핵심이 있다. 그 시작인즉, 저 책들은 박스에서 꺼내진 즉시 작은 방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는 것이다. 저것들을 꽂을 마땅한 자리를 찾자면, 다른 책들을 또 갖다 팔든가 버리든가 해야 하는데, 그 역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다가도 몇 번 썼지만, 책 역시 물신숭배, 스노비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020년 ss 신상품이 나온지 오래, 심지어 아울렛에도 작년 신상품(?!)이 뜨고, 덩달아 내 마음도 들뜨고 통장 잔고가 들썩인다. 충분히 입지 않을 옷을 사는 것이나(그러나 반품이라는 구원책이 있다!!!!) 충분히 읽지 않을 책을 사는 것은 거의 같은 행위다. 마찬가지로, 낡을 만큼 입으면 괜찮듯, 적어도 몇 마디 할 정도로만이라도 읽으면 괜찮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지 못한 채, 하루 이틀, 한두달, 한 두해 계속 쌓여만 있다. 그런데도 왜 샀지? ㅠㅠ 이미 샀으니 투덜대지 말고, 얇은 책부터 시작하자, 흑. 왜 여태껏 이걸 안 읽었담? 놀랍다.

 

 

 

 

 

 

 

 

 

 

 

 

 

 

*

 

- '나'가 '나'가 닮고자 했던 무수한 '나들'의 패러디라고 해서, '나'가 '나'인 것은 아니다.

- '나'는 내가 닮고자 했던 무수한 '나들'의 총합, 패러디의 패러디, 제곱패러디이다.

- '제곱 패러디'라는 말조차 체호프 단편(<배짱이>) 관련 논문에 말이다.(그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 '나'를 인용과 각주로부터 자유롭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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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3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 '허수자'라는 사람 알아?

- 아니 모르는데, 왜?

- 이 사람, 겁나 재미있어~

 

남편의 말에 블로그를 찾아본다. 하, 재미있는 사람일세. '직'은 있는가, '업'은 있는가. 아주 청춘(=학생)이 아닌 이상, '직'은 없어도 '업'(돈벌이)은 있을 텐데, 뭘 하는 분이신고. 이렇게 자주 여행(출장?)을 다니고, 그 중에는 (옛날의) 우리집(^^;)에서 조금 멀긴 하지만 전포동도 있다. 2년째 '이웃'을 맺어 그를 좇아다닌 남편은 그가 무척 부러운 모양이었다. 술(한주/막걸리)에 음식 여행에...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이다. 술과 여행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 말이다.

 

응당, 시새움이 일어(^^;) 검색을 해본다. 서울대 중어중문과 졸업, 대학원까지. 아마 중문학/어학 공부가 싫었나보다, 그럴 수 있지, 빨리 잘 돌아섰네. 영국으로 유학가서 금융학을 공부한다. 부지런한 사람인가 보다,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다음 회사생활. 그다음, 대략 마흔쯤 '막걸리 소믈리에'(헉, 이런 명칭이란^^;)로 나선다. 그리고 지금은? 저 블로그에서 보는 대로다.  사실 저렇게 사는 것이 의외로(?!) 어렵지 않다. 조금만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지? 나는 뭘 할 때 제일 편하지? 그리고 이른바 새 출발은 늦어도 40세 전후에는 해야 한다. 이런 '용단'도 빨리 내려야 한다. 그런데... 허걱,

 

 

 

 

 

 

 

 

 

 

 

 

 

 

얼굴의 느낌이 전혀(!) 닮지 않아 깜짝 놀랐는데, 그는 연구실이 우리학과 바로 옆에 있었던 어느 영문과 교수의 장남이다. 그 교수는 동시에 당대 최고 비평가(평론가) 중 한 분. 문학 교수든 작가든 '돈'과는 거리가 먼 직업지만, 그는 원래 막대한 자산을 지닌 가문의 후손이기도 하다.

 

*

 

 

 

 

 

 

 

 

 

 

 

 

 

 

 

 와인도, 지나친 부르주아 감성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 읽지는 못했다. 막걸리가 만화의 소재가 된다면 무슨 감성? 서민 감성?? -_-; 술을 거의/ 전혀 먹지 않지만, 내 기억 속 첫 술은 막걸리다. 농번기에 새참 먹을 때 어른들이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게 했던 것 같은데(요즘 같으면 아동 학대??), 아마 그래서인지 막걸리의 단맛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그래서 거의 마시지는 않는다. 어느덧 초등입학 연령이 된 딸(둘째 아이)을 데리고 다니는 남동생을 보니, 친구들 만나러 갈 때 어린 나를 데리고 가던 젊은 아빠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역시나 요즘 같으면 아동 학대?? 젊은 남자들끼리 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 막시며 돼지껍질 같은 거 구워 먹는 자리에 어린 딸은 왜?? -_-;;

 

 

와인을 좋아하면 치즈, 살라미 소시지 등을 같이 연구하듯, 막걸리를 좋아하면 파전이나 보쌈이나 그밖의 것(술을 안 마시니 잘 안 떠오름 -_-;)을 파게 될 법하다. 세상에 가장 큰 기쁨이 먹고 마시는 기쁨이다. 임신 중, 수유 중에 커피를 하루 한 잔으로 제한했는데, 그 한 잔이 매일 너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막걸리라고 와인이나 사케의 지위를 누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막걸리 소믈리에'라니. 이래저래, 흥미 있는 '직'이자 '업'이다. 

 

*

 

아이의 동영상 시청 및 아이패드 게임 시간 제한과 관련,,,

과연 나는 하루에 얼마 동안을 '-온' 상태로 있는가, 자문해본다. 셀 수 없다!!! 어제 '허수자'를 검색한 시공간도 그렇다. 한밤, 불끄고,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터. 이런 생활 자체가 '극악'이거니와, 엠마 보바리의 저 '모방 욕망'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문하기도 했거니와,,,,

 

- 나의 욕망은 과연 순수하게 '나의' 욕망인가

즉, 뭔가 - 특히 저 인터넷의 세상 - 에 의해 매개된 것은 아닌가 - 물론 그렇다, 가 답이다. '나'의 욕망은 모두 '너/그'로부터 오는 것이다.  

 

- 나의 지식/정보는 과연 '나만의' 것인가

이 역시, 아니다, 가 답이다.

 

이 순간 네이버, 다음 등을 접속하면 줄줄 뜨는 라인들을 거의 다 같이 클릭한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공간에서 우리는 다산 정약용의 책 소개를 읽고 있다. 술이나 음식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역시나 많은 시간을 '허수자'를 검색하고 그의 글을 읽으며 보낸다. 최근에 나는 '김영민 칼럼'을 검색한다. 아니, 왜 3주가 지났는데 안 올라오지? 이런 고민을 적잖은 사람들이 또 공유하고 있을 터. 물론, 지금 가장 '핫'한 공유물은 '우한/폐렴/코로나'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 깔린 것은, 권태. ennui. 프랑스어를 거의 다 까먹었지만(언제 많이 배웠던가?) 이 단어는 여전히 제대로 쓴다. 새로운 주제, 권태를 향하여. 권태를 파보려는 욕망 역시, 이 역시 권태의 산물. 몽상, 불안, 환멸 등등 보다 더 권태는 시간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굉장히 실존적인 정황이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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