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tarsta > 서재칠우쟁론기(書齋七友爭論記)

이른바 서재칠우(書齋七友)는 인허내(人攄乃) 방 가온데 일곱 벗이니 게임(偈任)하는 선배(士)는 구봉(球棒;조이스틱)과 화음(畵音;모니터와 스피커)으로 서재 삼우(畵面三友)를 삼았나니 규중 녀잰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오.

  이러므로 서재(書齋) 돕는 유(衆)를 각각 명호를 정하여 벗을 삼을새, 자판으로 달각할미라 하고, 마우스를 미(尾) 마마라 하고, 모니터로 화면여인이라 하여 재료삼품이라 삼았고, 리부는 정경부인이라 하고 패이버로 다정첩실이라 하고, 댓글을 천진소녀라 하여 마음을 드러내는 글발삼위로 삼았으며, 종(終)으로 적립금오천랑을 매혹랑자에 봉해 칠우를 삼아 규중 부인내 아츰 소세를 마치매 칠위 일제히 모혀 종시하기를 한가지로 의논하여 각각 소임을 일워 내는지라.

  일년이 지난 일일(一日)은 칠위 모혀 침선의 공을 의논하더니 자판 달각할미 긴 허리를 자히며 이르되,

  "제우(諸友)는 들으라, 나는 리부와 패이버, 댓글과 방명기록에 이르기까지 픽선 논픽선 시서화악를 다 내여 펼처놓고 글발을 세울 새, 파안대소이며 감탄기원을 나 곧 아니면 어찌 일으리오. 이러므로 의지공(衣之功)이 내 으뜸되리라."

미 마마 길다란 꼬리를 흔들며 내다라 이르되,

  "달각할미야, 그대 아모리 글발을 세운 들 알아딘의 상품을 집어내지 아니하면 리부 제되 되겠느냐. 내 공과 내 덕이니 네 공만 자랑마라."

화면여인 방대평면을 구붓기며 날랜 부리 두루혀 이르되,

  "양우(兩友)의 말이 불가하다. 진주(眞珠) 열 그릇이나 껜 후에 구슬이라 할 것이니, 글발에 능소 능대(能小能大)하다 하나 나 곧 아니면 확인수정을 어찌 하리오. 문단정렬 띠어숙이 오타교정 특수문자 임오티곤을 이루미 나의 날내고 빠른 화면이 아니면 리부헤 글발세워 무엇하고 상품 집어 무엇하랴.   달각부인의 고단이 하늘을 찌르고 미 마마의 꼬리에 때국이 전다 하나 내 아니면 공이 없으려든 두 벗이 무삼 공이라 자랑하나뇨. 재료삼품의 일등공신은 내 으뜸이라."

정경부인 리부의 얼골이 붉으락 프르락 하야 노왈,

  "재료삼품 들어라. 네 공이 내 공이라. 자랑마라. 네 아모리 착한 체하나 내 없이 오만랑을 구경이나 할수 있을소냐. 알아딘의 정수는 바로 내게 있음이라."

다정첩실 패이버가 웃고 이르되,

  "정경부인 마님, 위연만 자랑 마소. 이 첩실이 위상 적기로 서방님의 마음씀을 읽어내고 풀어냄이 나만한 이가 없으니, 나는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 뒤는 되지 말라 하였음이라. 화면여인은 달각할미의 뒤를 따라 다니며 무삼 말 하시나뇨. 실로 십칠인치 거대얼골이 아까왜라. 마태서방 품속이 그립거든 사이주부터 줄여야 할줄 아노니, 내 화면여인의 상황을 배려하여 비법전수 내릴테니 고마운줄 알라."

천진소녀 댓글 이르되,

"리부나 패이퍼는 핑계뿐이라. 나는 천만 가지 목록에 아니 참예하는 곳이 없고, 무명씨 여인들은 하로 분량도 열흘이나 되어야 살이 주역주역 오르는 것을 내의 천진으로 한번 쓰치면 거미줄 낱낱이 날리고 광택이 고하지고 더욱 하절을 만나면 소님이 다사하야 일일도 한가하지 못한지라. 글발이 나 곧 아니면 어찌 고오며 홍보 수줍어 서재만 녈어 두고 고요 마실만 다닐 제 나의 천진 아니면 어찌 고으며, 세상 서재 어찌 활활한 기운이 넘쳐나리요. 이러므로 글발삼위 중 내 제일이 되나니라."

매혹랑자 적립금오천랑이 크나큰 입을 버리고 너털웃음으로 이르되,

"그대네는 다토지 말라. 이벤드가 활성하여 즐겨차기 백배신공을 이루며, 정경부인과 그의 언니 목록부인이 오만랑의 쌍을 이루며, 서재지수 탑 오십으로 상승할 재 내의 손바닥에 밀려나면 그 아픔 감당키 어려워함을 알고 있느니라. 미모로운 멍든삭와도 미모로 감당키 어려웠나니. 수고로운 칠일의 흔적이 감초여지기를 정녕 원하는가. 내의 손바닥 아닌 시야에서 벗어나 백위를 넘어서면 존재조차 흔들리노라. "


규중 부인이 이르되,

  "칠우의 공으로 서재를 다스리나 그 공이 주인의 쓰기에 있나니 어찌 칠우의 공이라 하리오."

하고 언필에 칠우를 밀치고 베개를 돋오고 잠을 깊이 드니 달각할미 탄식고 이르되,

  "매야할사 사람이오 공 모르는 것은 녀재로다. 오매불망 원할 제는 몬저 찾고 일워내면 자기 공이라 하고, 뼈마디 달각소리도 알아듣지 못하니 어찌 야속하고 노흡지 아니리오."

미 마마 이어 가로대,

  "그대 말이 가하다. 점검시간 먹통되면 분통나니 하고 내어 던지며 꼬리로 날 잡아 흔들제는 토심적고 노흡기 어찌 측량하리오. 불아우저 설정 다시하라 경고하면 매양 내 탓만 너겨 달각할미 두드리니 마치 내가 감촌 듯이 문고리에 거꾸로 달아놓고 좌우로 고면하며 전후로 수험하야 얻어 내기 몇 번인 동 알리오. 그 공을 모르니 어찌 애원하지 아니리오."

화면 여인 한숨 지고 이르되,

  "너는커니와 내 일즉 무삼 일 사람의 손에 보채이며 요악지성(妖惡之聲)을 듣는고. 각골 통한(刻骨痛恨)하며, 더욱 나의 방대 얼굴 휘드르며 날랜 부리 두루혀 힘껏 글발을 세우는 줄은 모르고 마음 맞지 아니면 나의 얼굴을 찔러대니 어찌 통원하지 아니리요. 사람과는 극한 원수라. 갚을 길 없어 이따감 손톱 밑을 질러 피를 내어 설한(雪恨)하면 조곰 시원하나, 오타대왕 직이 믿고 설쳐대니 더욱 애닯고 못 견디리로다."

정경부인 눈물지어 이르되,

  "그대는 데아라 아야라 하는도다. 나는 무삼 죄로 현학지형(衒學之刑)를 입어 찾는 이도 없는 독수공박을 하느뇨. 댓글또한 나를 무시하니 섧고 괴롭기 칙량하지 못할레라."

다정 첩실 왈,

  "그대와 소임(所任)이 같고 욕되기 한가지라. 서재지수 차별에 멱이 잡혀 들까지며, 퍼다 실려 매번 이사가 끊이지 아니하니 황천(皇天)이 덮치는 듯 심신이 아득하야 내의 몸이 따로 날 적이 몇 번이나 한 동 알리오."

적립금오천원 분개하여 이르되,

"달인순위를 점검하여 삼십줄이 넘으면 나를 못 가짐이 당연하거늘, 밀려나면 제 능력을 탓하지 아니하고 속물취급을 하는게 다반사, 반면에 나를 취하면 흥에 겨워 비릿하게 껴안으니, 그 행태가 참으로 방정치 못하리라. 상종못할 알아딘어로세!"

칠우 이렇듯 담논하며 회포를 이르더니 자던 여재 믄득 깨쳐 칠우다려 왈,

  "칠우는 내 허믈을 그대도록 하느냐."

오타대왕 직이 고두사왈(叩頭謝曰),

  "젊은 것들이 망녕도이 헴이 없는지라 족가지 못하리로다. 저희들이 재죄있이나 공이 많음을 자랑하야 원언(怨言)을 지으니 마땅 결곤(決棍)하암즉 하되, 평일 깊은 정과 저희 조고만 공을 생각하야 용서하심이 옳을가 하나이다."

여재 답왈,

  "오타대왕 직이의 말을 좇아 물시(勿施)하리니, 내 손부리 날라다님이 대왕 공이라. 마음에 차고 다니며 은혜를 잊지 아니하리니 비단금침으로 삼복 덮위에 이불을 덮어 오타가 해롭지 않게 하리라."

하니 대왕은 고두배사(叩頭拜謝)하고 제붕(諸朋)은 참안(慙顔)하야 물러나리라.


요점 정리

 연대 : 미상
 작자 : 어느 규중 부인
 형식 : 고대 수필, 한글 수필
 성격 : 교훈적, 논쟁적, 풍자적, 우화적
 표현 : 의인법, 풍유법
 문체 : 내간체
 주제 : 서재를 운영함에 있어 알라디너의 자세를 망각하고 교만하거나 불평·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내용 : 자판.마우스.모니터.리뷰.페이퍼.댓글.적립금오천원 등을 의인화하여 세정(세정)을 풍자함
 의의 : '조침문(조침문)'과 함께 의인화로 된 내간체 고대 수필의 쌍벽을 이룬다.
 출전 : 알아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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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고조선-고구려-발해 모두 한국역사"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프레시안/ 2004-08-13 오전 9:58:38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중국혁명의 양대 지도자로 꼽히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 전 중국총리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발언록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은래 전 총리는 중국인들이 마오쩌뚱보다 더 존경하는 역대 최고지도자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현재 중국지도부가 추진중인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지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역사"
 
  이같은 사실은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수중인 설훈 전 의원이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중국연수중 발굴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설훈 전의원에 따르면, 이 문건은 주은래 전 총리가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발언을 기록한 것이다.
 
  주은래 당시 총리는 우선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주은래 총리는 구체적으로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말해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서기 644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에서 이를 격퇴한 일을 언급함으로써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또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주은래 "영토침탈, 조상을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과"
 
  이처럼 중국 국수주의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질타한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 행위를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이같은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이처럼 주은래 총리 생전에는 한-중 고대사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분명한 인식이 존재했기에 역사왜곡 갈등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중국지도부는 경제력 팽창에 고무돼, 선배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정부차원의 조직적 역사왜곡에 나서 큰 갈등을 빚고 있다. 현 중국지도부가 자신들의 역사왜곡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중국인민이 최대 존경하는 주은래 총리부터 '인민재판'에 붙인 뒤 역사왜곡 행위를 할 일이다.
 
  다음은 설훈 전의원이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발언 전문이다.
 
  주은래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广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견/기자
출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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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놀자 > 우유팩을 이용한 수납 아이디어


깔끔하게닦은 우유팩에 알록달록한 색종이를 붙여 꾸며보세요. 삼단 우유팩걸이를 만들어 아이 핀도 수납해 보고, 아이가 먹다남긴 과자를 넣어 두어도 좋아요. 크기가 제각각이라 옷장속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아이양말, 팬티도 깨끗하게 정리 할 수 있지요. 언제 어디서나 구하기 쉬운 우유팩. 자잘한 아이용품을 깔끔하고 예쁘게 정리하는데 제격 이랍니다. 우유팩을 이용해 아이핀, 양말, 과자 등을 깔끔하게 수납하는 아이디어.
삼단 우유팩 걸이를 만들어보세요
하드보드지나 합판에 색지로 포장한 우유팩을 붙인다. 우유 팩에 네모, 세모, 동그라미 등 다양한 모양으로 구멍을 내고 우유팩 안에 비닐을 붙이면 장식 효과뿐 아니라 수납한 내용 물이 한눈에 들어와 용품을 찾기가 수월해진다.
머리핀,면봉 등을 수납해 보세요
화장대 근처에 두고 아이의 머리핀, 면봉 등을 수납한다. 올망졸망한 아이 용품을 엄마가 찾기 쉬운 곳에 수납해두면 때마다 아이 용품을 찾느라 고생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먹다 남은 과자를 수납해 보세요.
아이가 먹다 남긴 과자나 사탕을 예쁜 색종이로 포장한 우유팩에 넣어두면 자투리 과자를 깔끔학데 먹을 수 있다. 우유팩은 자잘하게 먹다 남긴 과자를 수납하기에 크기나 모양이 제격이다.
서랍장에 우유팩 정리대를 넣어두세요
아이 속옷 한번 갈아 입 히려면 서랍 속을 이리 저리 뒤지기 마련이다. 크기가 작은 아이 속옷 을 돌돌 말아 우유팩에 쏘옥 꽂아두면 아이 속 옷 찾느라 서랍 뒤지는 일이 줄어든다.


우유팩 손질을 잘 하려면요…
01. 미지근한 물로 헹구세요_
우유팩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우유팩안 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는 미지근한 물로 우유팩을 닦아낸다.

02. 햇볕에말리세요_
물기가있는 우유팩을 헝겊이나 티슈로 닦아 내기보 다 햇볕에 말리면 우유팩도 단단해지고 물기를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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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8-1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유팩에다가 다신물도 넣어 놓고 아이들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놓고 정말 편하더라구요^^^

마냐 2004-08-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살림의 여왕' 광풍이...

가을산 2004-08-1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가까운 곳에 좋은 소재를 두고 멀리 헤매었고나! ^^

밀키웨이 2004-08-1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저도 이거 한번 해보겠다고 두주먹 불끈 쥐고.
우윳팩 씻고 말리느라....
시트지 이쁜 거 고른다고 동네방네 다니느라....
크기 잘 맞춰 자르고 붙이고...그러다 보니 나중엔 흑흑흑...
지쳐서 두번 다시 못하겠더이다.....
게으른 여자의 말로는 참으로 삭막하고 재미없을 것이 분명합니다...ㅠㅠ

waho 2004-08-20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림 잘하는 사람은 따로 있나봐요. 전 우유팩에 천이건 종이건 잘라서 장식하고 할 생각하면...엄두가 안나네요. 락앤락으로 모든 수납을 해결하고 있답니다. ㅎㅎ. 미싱도 배워보고 싶고 한데 학교 다닐 대도 가사는 젤 성적이 안 좋았거든요.
 

2시까지 여우언니 페이퍼에 매달려있다가 모두 자자~라는 책나무님의 권고를 따랐지요. 그리고 책나무님 덕택에 6시 30분에 무사히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면서 부팅을 했고요, 옷 갈아입고 가방까지 둘러맨 채 앉아 창 2개를 띄워놓고 잠복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마로가 배고프다고 하데요. 못된 엄마는 참치통조림이랑 김이랑 깨소금이랑 참기름만으로 쓱쓱 밥을 비벼주고, 무릎위에 앉혀 먹이며 자리 보전. 마침내 신랑에게 '출근 안 하냐, 미쳤냐'는 폭언까지 들었습니다. 흑흑흑

결국 시계가 8시를 가리키게 되자 ' 305554 결국 5555를 못 보고 가네요 라는 댓글을 남기고 저장하려다 마지막 미련으로 f5를 눌렀습니다.

짜짠~ 드디어 5555! 순간 광분하여 잽싸게 복사해서 원래 댓글에 덮어 씌우고 신이 나서 자축 댓글을 남긴 뒤 바로 컴퓨터 끄고  미친듯이 집을 뛰어나왔죠.

그런데 너무 서두르다 뒷부분만 복사해서 덮어 씌웠나 봐요. 꽁수 쓰다 덜미 잡힌 거니 체포당하면 그저 선처를 바랄 수밖에...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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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8-17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놀라워라... 진짜 이상하다구 생각했어요.
자, 과거는 다 털어버리고 가자구요 ㅋㅋ

물만두 2004-08-17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을 빨리 하시고 직장에서 하실 것을... 미난합니다... 님의 실수이신 것과 분명한 캡쳐였으니..

明卵 2004-08-1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치통조림이랑 김이랑 깨소금이랑 참기름만으로 쓱쓱 밥을 비벼주고'... 그만하면 무지 많이 넣고 비빈 건데요~^^ 저는 저희집에서만 그런 식으로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식으로: 있는 거 대충 넣고 비비기.. 아무 것도 없으면 간장에 참기름만;;)

아영엄마 2004-08-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바쁜 시간에 참 힘들게 성공하셨는데 인정받으셔야죠! 그나저나 저도 혜영이가 참치통조림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그렇게 비벼서 먹이는데..쩝~ 어쨋든 오늘 고생하셨어요~축하축하 빰빰빠~~

호랑녀 2004-08-1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그 참치통조림...
제 친구의 친구가(즉 직접 듣지는 않았단 소리) 오래 전에 모 참치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요, 한 일이... 유통기한 날짜 지우고 새로 써넣는 뭐 그런 일이었단 소리를 듣고는... 그 후로 가능하면 참치를 먹지 않고 삽니다. 뭐 설마 지금도 그럴라구요...ㅠㅠ

조선인 2004-08-1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호랑언니? 안그래도 먹이사슬 꼭대기라 오염 가능성이 심하다는 것 때문에, 1달에 1캔 이상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면... 집에 있는 거 다 버릴래요. ㅠ.ㅠ

반딧불,, 2004-08-1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걱..

요새 자꾸 늘어가는 참치 캔들이...

흑흑..아침에도 부쳐서 먹였건만....^^;;;

비로그인 2004-08-17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통기한이라고 하니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는군요. 한 때 부모님께서 제과점을 하셨었거든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케익이 엄청 팔리지요. 생크림 케익은 매장에서 직접 만드는지라 유통기한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진 않지요. 문제는 생크림으로 되지 않은 초코릿, 버터 케익 등...(본사에 주문해서 크리스마스 전날 매장에 들여오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부분의 제과점의 경우, 크리스마스가 되기 6개월 전에 대량으로 만들어서 급속 냉동을 해놓는다지요. -_-;; 크리스마스 땐 케익 되도록이면 생크림으로...;;;
그리고 유통기한 표시 지우는 것은... 참치캔도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케익 밑에 깔리는 판의 경우, 매니큐어 지우는 아세톤이던가요.. 휴지에 그거 조금 묻혀서 싹싹 문지르면 감쪽같이 유통기한 지워지더라구요. -_- (별걸 다 해본 나-_-)
 

우선 반갑다는 인사부터 드릴께요. 아이가 또래라니 더욱 반갑구요. 근데 좀 부끄럽네요. 알라딘에 보면 그림책 전문가들이 무진장 많거든요. 헤헤

그래도 질문하신 대로 몇 자 끄적여보면... 프뢰벨 뽀삐 1단계는 거의 다 가지고 있어요.
http://www.aladin.co.kr/foryou/mylist/mylist_admin.asp?UID=1908247445&MCID=923851&CNO=764633183
요 링크 보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거 확인하실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마로의 경우 아직까지 뽀삐는 1단계만 좋아하더군요. 그중에서도 인지발달이랑 언어, 감각이 제일 인기구요. 음... 그리고 제 생각엔 개똥이는 뽀삐로치면 2단계 이상에 해당하니까 비교 대상이 되긴 좀 어려울 듯 ^^;;

숫자의 형태를 익히는 건 책보다도 왕눈이 폰의 덕을 더 많이 봤어요.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번호를 어느 순간 외우더라구요. 얼마나 신기하던지 ㅎㅎㅎ
코니실업 왕눈이 폰 : http://www.promam.com/sishop/img/item/737l.jpg

그리고 숫자를 셀 줄 알게 된 건 뽀삐 인지발달 시리즈 외에도 How Many Bugs in a Box?의 덕을 많이 봤지요. (이건 알라딘에서 안 팔아요) "배고픈 애벌레"의 경우 길다란 머리끈 고무줄로 벌레를 만들어줬더니 역시 반응이 좋았구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효과가 좋았던 건 번호 붙이며 계단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랑, 탑쌓기였어요. 집에 있는 쌓기 블럭이나 종이컵이나 두유팩에 1부터 10까지 숫자를 쓴 다음 차례대로 탑쌓기를 하고 무너뜨리고 하는 와중에 자연스레 숫자를 세게 되더군요. 무너뜨릴 때 효과는 쌓기 블럭이 와르르 소리도 나고 재밌지만 1층탑부터 10층탑까지 나란히 세워 비교해보며 놀려면 종이컵이 최고더군요. 55개나 필요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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