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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언제부터 소설을 꺼려했을까 생각해보니 96년이다. 속칭 '연세대사태'의 끔찍한 기억, 그리고 여성학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의 갈등, 그 둘의 장단에 놀아나느라 소설이 싫어졌다면 우스운 얘기일까. 나에게는, 혹은 지인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들이 후일담으로 쓰이는 게 못내 서러웠다면? 난 아직도 아픈데, 더 열심히 아파야 하는데, 이 생생한 고통을 완료보고서마저 서류철하여 문서보관실로 보내버린 과거사로 치부하는 거 같아 억울했다.
여성작가의 단편소설집은 더욱 질곡이다. 가정폭력, 성희롱, 낙태, 이혼, 어긋난 동성애 등 여성학의 어두운 테마만 어쩜 저렇게 골라내어 토막토막 정리해버리는가 싶고, 도대체 왜 천편일률적으로 우려먹나 싶어, 심지어 분기탱천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인 선입관에 똘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처녀치마'를 읽으니 얄팍한 단편소설집을 열흘이 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고, 찌그럭거리는 마음을 주체 못해 무슨 책으로 외도할까 궁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기꺼이 포기하지 못하고 책에 매어지낸 것을 보면 권여선의 글이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뜻도 되겠다. 답습되는 주제라 하더라도 주인공이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면 내 얘기인 듯 착각되어 긴장감을 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12월 31일"이 그랬고, "두리번거린다"가 그랬다. 처연한 듯, 의연한 듯 굴지 않는 여주인공들은 진짜배기였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굳이 단정하고 싶지 않은 오래된 친구에게 문득 전화해 만났다면, 구질구질하게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냥 짤막하게 "그동안 너 많이 생각했어" 혹은 "셋까지 되면 난 죽는다"라고 툭 던지고 돌아서면 그만이다. 굳이 때 지난 고백을 듣고 싶지도 않고, 주절주절 위로받고 싶지도 않기에.
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는데 괜찮은 척 애써 마음을 다스리다 어쩌다 눈물 한 방울 또르륵 굴리는 사람도 있을 리 만무하다. “죽겠네, 또 울어”라고 푸념을 들을 정도로 호시탐탐 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게 진실이다.
알짜 인간들이 튀어나와 주니 어떻게든 다른 인물들과도 교감해보자 작정하고 되풀이 읽기를 거듭했다. 열의라는 기름칠을 해주자 끼긱거리며 하나 둘 움직여주는 걸 보니 마냥 어긋난 톱니바퀴가 아님도 증명되었다. 다만 끝까지 나와 어울려주길 거부한 것은 “트라우마”와 “그것은 아니다”였다. 이는 작가의 탓이라기보다 내 고집스러운 외면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은 아니다”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거푸 읽으며 곱씹었으면서도 내 것이 아니라고 억지로 밀쳐버린 것이다.
나로선 한때 투사였다는 명예훈장을 달고 제도권에 편입한 선배들이 고깝기 보다는 어찌 이용해먹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게 된다. 하지만 ‘문’이나 ‘윤’과 닮은꼴 선배들의 모습이 오싹하게 겹쳐 떠오르면 대책이 안 서버린다. 철거투쟁이나 등록금투쟁을 하다가 폭력이나 사기횡령 전과를 단 선배들은 막연한 의심 속에 취직도 ‘입문’도 못 하기 일쑤이고, 마지막 희망인 고시마저 연거푸 낙방하면 ‘바깥세상’은 물론 우리들 눈앞에서조차 사라져버린다. 가까운 지인의 부음조차 전할 길 막연해져버린 선배와 동기들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면 권여선은 대체 뭔 심정으로 이런 글을 토해냈나 싶어 울컥해져 버리니 애당초 공정하고 후한 리뷰를 쓰기란 불가능하다.
권에게 미안해져버려 처녀치마에 대해서라도 알아봐야겠다 싶어 찾아보니 참으로 소박한 꽃이다. 백합과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야생초가 땅바닥에 잎사귀를 내려놓고 제 꽃대는 곧추 세운 모습을 보며 제목지은 구실을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그늘지고 습한 구석에 자리잡고서도 기적처럼 윤이 나는 잎사귀를 빙 둘러 세우고, 난 꽃 같은 존재로 두고두고 살아가겠노라고 덧붙이고 싶었던 것은 혹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