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동서울청년회 우등불 가을답사는 용주사로 가게 되었다. 원래는 브라이언 베리 스님과 함께 탱화를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스님의 사정으로 우리끼리만 가게 되었다.
아침 9시에 강남역에서 모여서 10시가 좀 넘어 출발, 1시간 남짓 차를 달려 도착한 용주사는 기대했던 바와는 조금 달랐다. 산속에 있으리라 생각은 안했지만 도로가 바로 옆에 붙어 있을 줄이랴....절 규모 또한 별로 크지 않았다.

용주사 일주문?! 원래 일주문은 기둥이 하나라 일주문인데, 어쨌든 일주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의 이 문은 창건당시에는 없었으나 1980년 이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삼삼오오 용주사를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양쪽벽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어 온갖 잡귀와 악신을 물리치고 절을 수호한다.

 

 

 

 

 

원래 용주사터는 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가 있던 곳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창건한 절이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 스님으로 하여금 4년 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힘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부각되고 성리학이 성행하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인 것이다. 때문에 보통 절과는 다르게 궁궐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매표소가 있고 바로 삼문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은 좌우에 줄행랑은 지닌 맞배지붕 양식의 문이다.

 

 

삼문의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싯구가 주련(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으로 걸려있는데 일제시대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이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용주사라고 쓰인 현판 역시 안순환의 글씨이다.

 

 

 

 

 

삼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우리 일행은 사찰을 둘러보기 전에 은행나무 옆에서 각자 준비한 발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탱화에 대해서 발제한 희정언니.

 

 

절의 문양에 대해서 발제한 용호형

 

 

용문사에 대해서 발제한 나.

 

 

혼자 셀프놀이 한 종민이형.

 

 

옆에서 땅파고 노는 마로~!

 

 

토론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절 밖으로 나가서 점심으로 순두부를 먹었다.

식당 앞에 묶여 있던 누렁이.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본격적으로 사찰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삼문을 지나면 탑이 정면에 보이고, 바로 천보루를 만나게 된다.

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누각 앞에 놓여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천보루는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이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거대한 석조기둥...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승당(僧堂) 서쪽에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는 각각 나유타료(那由陀寮)와 만수리실(曼殊利室)이라고 불리는데 스님들의 요사채와 객실로 사용된다.

나유타료는 현재 공사중이고 만수리실만 볼 수 있었다.

 

천보루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천보루 였다가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된 것이다.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밖에서 보면 천보루

 

 

안에서 보면 홍제루

 

 

중정에서 본 천보루의 모습.

 

 

 

천보루는 궁궐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건물명칭이 그러하고, 궁궐과 같이 난간을 둘렀으며 좌우로 연결된 나유타료·만수리실이 이를 말해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규모로 지어진 건물인 것이다.

천보루는 현재 각종 법회 장소로 이용되는데 누각의 내부 측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목어가 잉어 모양으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살아있는 듯이 걸려있다.

 

 

 

 

천보루를 지나 중정에 들어서면 정문에 대웅보전이 보인다.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호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주사에서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한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사진에 보이는 쇠로 된 길다란 막대기가 문을 받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서역공간과 외부의 새속고안이 차별 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또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용인데, 용은 법당 전면 기둥과 처마 밑을 비롯하여 법당의 닫집, 천장, 기둥, 벽 등에 주로 장식된다.

대웅보전 어간(御間 : 전면의 중앙칸)의 양쪽 기둥머리에 조각된 용머리.

 

 

법당에서는 전면 바깥쪽에 용두(龍頭)가 안쪽에는 용미(龍尾)를 장식한 경우와 건물 앞쪽에 용두를, 뒤쪽에 용미를 장식한 경우가 있다. 이 때 용두는 극락세계를 향해 가는 반야용선(般惹龍船)의 선수(船首)를 상징한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참조)

용주사의 대웅보전에 장식되어 있는 용두와 용미

 

 

 

대웅보전 내에 모셔져 있는 삼존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다.

 

가운데가 석가모니불, 오른쪽이 약사여래, 왼쪽은 아미타불이다. 석가여래와 아미타불은 얼굴 형태가 네모졌고, 약사불은 둥근 형태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각각 전라도와 강원도 조각승이 깍아서 그렇다고 한다.

 

 

삼존상 뒤에 걸려 있는 탱화는 '삼세불의 후불탱화' 이다. 탱화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김홍도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분분하다.

탱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탱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탱화는 인물의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

 

 

 

삼존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닫집이란 '또 하나의 집'이라는 뜻으로 극락정토를 상징한다.

용주사의 닫집은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가 파손되고 넷만이 남았다.

 

 

 

대웅보전 앞에는 정조가 식수하였다는 회양나무가 있으나,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온몸에 붕대를 감은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의 처마에 장식되어 있는 봉황. 그런데 꼭 닭대가리 같이 생겼다-_-;;;

 

 


 

 

대웅보전 옆에서 열심히 살펴보고 있는 용호형과 종민이형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는 시장칠등각이 있는데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호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하며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으로 전각이름이 매우 독특하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천불전은 말 그대로 천 개의 불상을 모셔놓은 곳이다.

 

 

 

대웅전쪽에서 바라본 천불전과 범종각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오른쪽을 향하면 정면에 법고각이 있고 범종각이 맞은편에 있다. 범종각 안에는 원래 고려대에 만들어진 동종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고 안은 텅비어있다. 용주사의 동종은 상원사의 동종, 에미레종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잇다.

 

 

 

 

용주사에는 그 밖에 지장전과 효성전 등의 건물이 있다.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는 지장전이라고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용주사의 가람배치

 

 

마지막으로 탑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구도 한 번 멋지다. -_-;;;

 

 

마로를 데리러 일어나는 희정언니.

 

드디어 마로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찍은 사진. 흔들린데다가 옆으로 치우쳤다--;;

 

 

보너스로 마로와 희정언니 사진

 

엄마가 목걸이 사줬어요~!!!

 


 

 

신나서 펄쩍 펄쩍..

 

 

 

 

이번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사찰답사는 없을 것 같다. 아쉬운 점은 불교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미륵이 뭐고 보살은 뭔지....불상은 또 왜그리 많으며 등등....) 사찰건축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그 나마 몇 가지 얻은 지식도 단편적인 이해로만 그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사찰답사를 계기로 많은 흥미를 가지게 된만큼 앞으로도 사찰을 가게 되거나 하면 관심있게 둘러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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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5-01-0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건 아니구요, 후배가 쓴 거 퍼왔습니다.

옆지기가 그 후 단식을 들어간 터라 마음이 어수선해 후기를 정리하지 못 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작정하고 올리려고 보니... 사진이 1장도 안 남아있네요.

며칠전 하드를 날려먹었거든요.

회사자료야 그때그때 다 백업서버에 넣어두니 문제가 아닌데,

2년간 찍어놓은 마로 사진이 몽땅 날라간 겁니다. 흑흑흑

반딧불,, 2005-01-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습니다.그나저나 마로 사진 자주자주 구워두세요.

어떡한답니까..아까워서요.

그리고, 사이든 드림위즈든 사진 많이 올려도 부담없는 곳 꼭 만드세요.

얼마나 아까울까요. 이리 어여쁜 사진을 말여요.

반딧불,, 2005-01-07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최근에 불사를 다시 하셨나봅니다.

단청이랑 벽화 들이...좀 어색한 듯 느껴지는 것은 제 착각이겠죠??

조선인 2005-01-0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주사에 불이 난 적 있었거든요(도중에 공사중인 사진 보이시죠?)

그래서 몇 군데 새로 손 본 곳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결정적인 건 사천왕상이겠죠?

없던 걸 새로 불사 올린 건데, 정말 허걱입니다. ㅠ.ㅠ

호랑녀 2005-01-0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다녀왔는데,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게 맞는 말이로군요...ㅠㅠ

저는 효성전인가 앞에 있던 탑에 새겨진 효란 뭔가, 불효란 뭔가 뭐 그런 글들이 기억나네요. 아이들에게 소리 내서 읽혔답니다. 그런데 무지 찔리더군요. 니 어머니가 널 이렇게 키웠으니 효도해야 한다... 뭐 그런 글이었는데, 저한테 해당되는 게 통 없어서... 나 엄마 맞을까 뭐 그런 생각만 했거든요...

줄리 2005-01-07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주사에 몇번 가봤는데 이렇게 많은게 있었는지 몰랐네요. 가는 길이 무지 좋았었던 기억이 나는데.. 좋은 사람과 가서 그랬었나. 산에 있는 절들을 많이 좋아했었는데, 점점 커지고 색깔 요란해지는 절들이 많아지는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paviana 2005-01-0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글 읽다가 "나"라는 사진 보구 이상하다 내가 아는 조선인님이 아니네 내가 잘못 들어온건가 했답니다...아래 계속읽다가 다른 데서 퍼온글이라는걸 알았구요.마로는 언제봐두 예뻐요..^^
 

지난주 목~금에 걸쳐 고구려연구재단이 개최하는 제1회 국제학술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첫날, 중국의 손진기라는 학자가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되어 술렁술렁.

동북공정 속지주의 역사관(지금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해있는 지역의 역사는 무조건 중국사다)에 따라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고구려사는 무조건 중국사에 포함된다.

그런데 한술 더 떠 손진기의 주장에 따르면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한 뒤에도,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중국땅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 학자들이 더욱 분기탱천했던 것이고, 신문들도 대서특필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문보도에 과격우익단체도 흥분한 것이다.

세미나가 끝나기 무섭게 "활빈단"이라는 단체에서 1인 시위를 전개한 것이고,

정부측 인사나 외국인의 참가가 꽤 있었던 터라 주최측에서는 황급히 시위를 말렸지만,

저 분은 참으로 꿋꿋하게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며 끝까지 1인 시위를 펼쳤다.

나로선 집회의 자유 보장에 동조하여 호텔측 요원을 말렸지만,

만주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니 참 기가 차다.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침략주의를 주창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우리가 그들과 뭐가 다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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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9-23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격분한 많은 사람의 인식 수준이 저 모양이라는 거죠.
 

용주사 [龍珠寺]
요약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華山) 기슭에 있는 사찰.
종파 대한불교 조계종
소재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본문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의 하나였는데, 이곳에는 원래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세운 갈양사()가 있었다. 952년(고려 광종 3)에 병란으로 소실된 것을 조선 제22대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긴 후,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와 동시에 팔로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경내에는 이 절의 전신인 갈양사의 유물인 7층의 석조사리탑과 6개의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는 천보루()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서면 대웅보전(殿)과 석가삼존불()이 있다. 그 뒤쪽의 후불탱화() 역시 석가와 여러 보살 및 10대 제자상들인데, 이를 김홍도()의 그림이라고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밖에 당우로는 시방칠등각()·호성전(殿)·독성각()·명부전(殿) 등이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범종()이 있으며, 정조가 이 절을 창건할 때 효심에서 발원(), 보경을 시켜 제작한 《불설부모은중경판()》이 있다.


가을 사찰 여행 후보지입니다. 도움말이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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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08-20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초등학교 때 소풍 가곤 했던 곳인데... 가물가물...

마태우스 2004-08-20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제가 가봤어야 했는데...

2004-08-20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4-08-2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주사에 가면 큰 은행나무가 있다던데.. 아직 못가봤어요..
 
 전출처 : 바람구두 >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고조선-고구려-발해 모두 한국역사" 
  [주은래 발언 전문] "영토침탈행위, 조상을 대신해 조선에 사과"
  
 
  프레시안/ 2004-08-13 오전 9:58:38   
 

  모택동(毛澤東)과 함께 중국혁명의 양대 지도자로 꼽히는 주은래(周恩來:1898-1976) 전 중국총리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하며,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 발언록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은래 전 총리는 중국인들이 마오쩌뚱보다 더 존경하는 역대 최고지도자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현재 중국지도부가 추진중인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지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역사"
 
  이같은 사실은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에서 연수중인 설훈 전 의원이 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중국연수중 발굴한 <주은래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설훈 전의원에 따르면, 이 문건은 주은래 전 총리가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발언을 기록한 것이다.
 
  주은래 당시 총리는 우선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주은래 총리는 구체적으로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말해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또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서기 644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시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에서 이를 격퇴한 일을 언급함으로써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또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주은래 "영토침탈, 조상을 대신해 당신들에게 사과"
 
  이처럼 중국 국수주의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왜곡을 질타한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 행위를 사과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이같은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이처럼 주은래 총리 생전에는 한-중 고대사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분명한 인식이 존재했기에 역사왜곡 갈등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중국지도부는 경제력 팽창에 고무돼, 선배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정부차원의 조직적 역사왜곡에 나서 큰 갈등을 빚고 있다. 현 중국지도부가 자신들의 역사왜곡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중국인민이 최대 존경하는 주은래 총리부터 '인민재판'에 붙인 뒤 역사왜곡 행위를 할 일이다.
 
  다음은 설훈 전의원이 공개한 주은래 총리의 발언 전문이다.
 
  주은래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금년(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广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견/기자
출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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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코리아, 통일조국의 지름길”
 COREA 되찾기 연대회의 첫 포럼 가져
COREA 국호개정운동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일까?

29일 오후 2시 서울 경희대 종합강의동 509호에서 열린 ‘통일국호 COREA되찾기연대회의 제1차 포럼’ 참가자들은 국호개정운동이 제국주의 잔재로부터 벗어나 민족적 자주성을 발현시키려는 운동이며 조국의 통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운동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COREA 국호개정운동은 8천만 민족의 운동

박인주 서울 흥사단 대표는 COREA 국호개정운동에 대해 “남과 북이 통일이후 구호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운동이며 남.북.해외를 아우르는 8천만 민족의 한민족 공동체를 구성하여 통일뿐만 아니라 문화공동체, 역사공동체로서 이 지구촌에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운동이다”고 설명했다.

첫 발제자로 나선 김승국 평화운동가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옛 국호, 지명 되찾기 운동에 대해 역사청산을 통한 통합, 통일,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 평가하고 “북조선을 조센징이라 부르거나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협감을 담아 ‘북’이라 부르는 등 조선인을 폄하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의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칭하는 이름은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 김승국 평화운동가의 설명이다.

이어 COREA란 명칭이 중립통일국가의 국호로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단일기에 COREA를 새겨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용한다면 멋진 운동이 될 것이라 제안했다.

오정윤 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COREA 국호개정문제를 역사회복과 결부지어 발제했다.

오정윤 소장은 일제시대를 살아왔던 역사가들이 사대적인 역사관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해방이후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은 친미세력들에 편승해 북한의 역사를 배제한, 반 쪼가리 역사서를 기술해왔다고 지적하고, COREA 국호개정운동을 시작으로 남북 시대사를 새로이 정리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어 “K-코리아가 과거를 상징한다면 C로 시작하는 코리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을 주장하는 사람, 즉 미래의 코드”라 설명하고 기존의 친일, 반공, 친미의 역사의식과 그들 세력의 비호아래 누렸던 권력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주류가 국내문제와 주변국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COREA 국호개정운동은 고구려사를 기본 축으로 한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대륙사의 복원을 의미하며 이는 속국의식, 패배주의, 소아주의를 버리는 첫 걸음인 동시에 동북아 허브를 지향하는 움직임이란 것이 오정윤 소장의 주장이다.

COREA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는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한 것

장의균 민예총 남북문화예술교류위원장은 국호 COREA를 되찾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함이라 설명하고 인터넷이 사회전반을 이끄는 ‘신 유목사회’를 맞아 우리 문화의 원류인 유목문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시스템을 되살리기 위해 먼저, 우리의 본디 영문 표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현석 COREA 연대회의 실무위원장은 한국사회가 시민들이 주도 하에 민주주의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이 다시 제도권으로부터 편입되면서 ‘위로부터의 민주화운동’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하고 광화문 촛불로부터 다시금 시작되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사회의 담론들이 COREA 국호개정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화운동의 발전과정을 잘 계승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 주체성들을 미래에 맞게끔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COREA 국호개정운동을 봐라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7천만 겨레가 함께 고민하는 생활 속 운동으로 자리잡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현석 실무위원장은 국호개정 문제를 북측과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북 민화협과 금강산에서 공동행사를 하자고 합의한 바 있으나 룡천역 사고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북측이 이 문제를 오는 8.15 행사에서 논의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측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단일기에 COREA를 새기고 함께 응원하는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과 북은 COREA 공동행사를 2005년 다시 제안키로 했다.

송 위원장은 이외에 서명운동 등의 일상 캠페인, 정기적인 COREA포럼 개최, COREA운동의 취지를 대중과 교감하는 교육사업, 강연회 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성근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사무차장은 이에 덧붙여 2003년 8월 남북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열고 COREA가 고유 국호였으니 통일국호로 사용하자고 합의한 바 있으나 그 이후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진척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베이징 등 제3국에서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전국대학생 5월 한마당’에 참가중인 학생들과 통일연대 한상렬 대표 등 시민사회단체 인사 40여명이 참여했으며, COREA 연대회의 첫 포럼을 계기로 이후 포럼을 활성화 시켜 국호개정운동이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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