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책읽는나무 > 통도사

통도사를 아는 사람이 많을까?.....모르는 사람이 많을까?......^^

나는 그게 좀 궁금타~~...하긴 관심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테고...관심이 없으면 모를터~~...다행히 나는 관심이 있든,없든....나는 통도사를 알고 있다.....왜냐하면...울친정근처에 있어서..국민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거의 뭐 해마다 이곳으로 소풍을 갔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나면 좀 벗어나려나했더니....대학동아리에선 또 해마다 신입생환영회를 이곳 통도사를 장소로 잡는다....ㅠ.ㅠ.....그래서 나같은 경우는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다....^^

통도사는 아주 유명한 절이다....우리나라 삼대사찰중 하나다..(삼대사찰로는 해인사,송광사....그리고 이곳 통도사다..)...(여기서부터는 전문가의 소개문을 발췌하였슴..^^) 통도사는 《삼국유사》에 있는 신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唐)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귀국하여 대국통(大國統)이 된 뒤 646년(선덕왕15) 왕명에 따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의 이름을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취산과 통한다는 뜻에서,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통해야 득도할 수 있다는 뜻에서 또한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설법을 하여 계율종(戒律宗)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이 절의 특색은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점으로, 이것은 대웅전 뒤쪽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유서 깊고 전통있는 절인 만큼 많은 국보와 보물들의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

지난주 토요일에 아이손을 잡고서 친정에 잠시 들른 틈을 타서 날씨도 좋고하여....통도사에 들렸다...통도사입구에서 입장권을 사서(이것이 나 중학교시절만해도 입장권이 없었다..고등학교때부터 생겼는데....그래도 그때까지는 "저 여기 사는데요!!"이말한마디면 만사 O.K였는데....이제는 그것도 안통한다...무조건 돈을 내란다.쩝~~)내고....우리는 일부러 절입구까지 걸었다...도보로 천천히 걷는다면 한 이십여분이 걸릴것이다...아이에겐 좀 무리한 거리이겠지만...(민이는 이날이후로 몸살이 좀 난듯하다..^^)...산책삼아 걷기에 아주 적소인곳이다....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있어...산림욕이 따로없다....나는 개인적으로 이산책길이 아주 좋다....^^

 

 

 

 

 

 

 

 

 

 

 

 

 



 

 

 

 

 

 

 


 

 

 

 

 

 

 

 

 

 

 


 

 

 

 

 

 

 

 

 

 

 

 

 

 

 

 

 

 

 

 

  절입구까지 가기전에 오른쪽을 유심히 보면 이러한 길이 나 있는데....저쪽길로 올라가면.......중학교때 친했던 내친구집이 나오는 길이다....지금도 이길이 맞는지 모르겠지만....그땐 그랬다....^^....그래서 항상 이러한 길을 걷다보면 저쪽끝에 친구가 웃으며 서있는듯한 착각에 빠진다....^^


 

 

 

 

 

 

 

 

 

 

 

 일주문에 거의 다다르기전에....이렇게 소원을 빌기위한 돌탑을 아기자기하게 쌓아놓은곳이 있었다.....나는 진짜 몇년만에 통도사에 왔는데....이런 돌탑이 있는건 처음 보았다....내가 그렇게 오랫만에 온것이었던가??....누가 저렇게 다 쌓아놓았지??


 

 

 

 

 

 

 

 

 

 

 

 부처님의 유골을 모셔놓은 비석들이다...


 

 

 

 

 

 

 

 

 

 

 

 일주문....절에 들어갈 때 지나는 첫번째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일주문은 우리 나라 고유의 양식으로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독특한 일주문의 양식은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진리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가짐을 올곧게 다지라는 깊은 뜻을 상징하고 있다.

일주문 정면에 걸린 현판 글씨인 ‘영취산 통도사’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쓴 것으로 영취산의 장엄한 기상에 어울릴 만큼 매우 장중하다.
두 기둥의 주련에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부처님의 으뜸 가는 사찰이요, 나라의 큰 절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보 종찰(宗刹)임을 알려 주는 사격(寺格)을 잘 표방해 주고 있다.



 

 

 

 

 

 

 

  일주문 앞에서...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지날때 좀 긴장을 해야한다...사천왕상들이 꽤나 위압적이고 무섭다....나도 국민학교 고학년이 될때까지는 무서워서 제대로 고개를 못들고 얼른 뛰다시피 도망쳤던 곳이다...^^....울아이는 놀래가지고 울어대었다...^^...들어서면 극락전과 영산전.....그리고 삼층석탑....등등.....오래되어 빛이 바랜 절내를 둘러볼수 있다...나는 우리고장의 문화재라서기보담....몇몇의 절을 둘러보았지만....통도사절만큼 구경거리가 많은곳은 아직 못본듯하다....꽤 괜찮은 절이다...하긴 우리나라 삼대사찰중 하나라는데...안그렇겠는가??...산위에서 내려다보면....통도사는 숲속에 폭 안겨있는듯한 형상이다....뒤로 영취산이 우뚝솟아 있고....주변에 나무들이 많아서 안정감이 있다...


 

 

 

 

 

 

 

 

 

 

 

 

 극락전....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 지붕 건물이다. 초창은 1369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초의 건물 양식을 나타낸다.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추녀의 네 귀는 활주(活柱)로 받쳤다. 내부에는 서방 정토 극락 세계의 주존(主尊)인 아미타불과 그 좌우에 협시 보살로서 관세음 보살과 대세지 보살 상이 봉안되어 있다. 지방 유형 문화재 제194호이다.



 

 

 

 

 

 

 

 

 

 

 

 

 

 

 

 

 

 

 

 


 

 

 

 

 

 

 

 

 

 

 

 

 극락전에 새겨져 있는 벽화!!......훼손될까봐 아래에 철창이 쳐져있다....아래그림은 내맘도 배에 올라탄듯 둥실둥실대는것같다....^^


 

 

 

 

 

 

 

 

 

 

 

 

 영산전.....하로전(下爐殿)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곳으로서,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영산전(靈山殿)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 지붕으로 전면의 주칸이 다른 건물과 달리 아주 넓게 자리하고 있다. 지방 유형 문화재 제203호이다.

통도사의 전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영산전은 1704년에 건립된 것으로 단청 문양 및 색상도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형되지 않았고, 내부 가구 형식도 조선 초기의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보탑을 비롯하여 양류 관음, 나한상, 여러 가지 경전의 내용 등을 그린 벽화도 품격 높은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처님의 일생을 압축하여 그린 8상도는 보물 제1041호로 지정될 만큼 당시의 불화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그림이다.(이곳 벽화는 촬영을 못했다..)



 

 

 

 

 

 

 

 

 

 

 

 

 

 

 

 

 

 

 

 

  삼층석탑......양식이나 기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봄이라 여러가지 색의 꽃이 만발하여 그냥 지나칠수 없었다....^^

 

 

 

 

 

 

 

 

 

 

 

 

 

 

 

 

 

 

 

 

 

 

 

 봉발탑....보물 471호


 

 

 

 

 

 

 

 

 

 

 

 

 

  개산조당(開山祖堂)은 해장보각(海藏寶閣)으로 통하는 문의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가운데 칸이 양쪽 칸보다 높게 솟아 있어 솟을삼문이라 한다. 3칸 모두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건물 형식은 조선 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의 솟을삼문과 같다. 뒤에 해장보각이 보인다....나는 대웅전도 마음에 들지만...이 개산조당도 마음에 든다.....특히 이런 각도의 모습을..^^



 

 

 

 

 

 

 

 

 

 

 

 대웅전 북쪽으로 적멸보궁의 현판이 있는곳!!.....통도사의 중심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 지붕 건물이다. 임진 왜란 때 불탄 것을 1645년 인조 23년에 우운(友雲)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불이문 쪽과 금강계단을 향하여 이중으로 정면성을 주기 위하여 합각(合閣)을 양 측면, 전면 3곳에 마련한 것이 이채롭다.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 연구 및 목조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주목받고 있으며, 국보 제290호이다. 사방을 둘러 가며 각각 다른 현판을 걸어 놓았다. 동쪽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남쪽에는 금강계단,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중에서 정면에 있는 금당계단(金剛戒壇)이란 글씨는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썼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내부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불상 대신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대웅전 북쪽의 금강계단에 봉안했기 때문에 대웅전은 불상이 없으며 예배를 올리는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 불당 내부에는 북쪽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이 있으며,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이 있다.


 

 

 

 

 

 

 

 

 

 

 

 

 남쪽의 금강계단의 현판이 있는 방향....통도사의 대웅전의 구조는 북쪽의 적멸보궁쪽이 정면 같지만....돌아서 남쪽의 방향에 서있어도 이곳도 정면이다....지붕의 배치가 특이한 대웅전이다...


 

 

 

 

 

 

 

 

 

 

 

 

 동쪽으로 대웅전의 현판이 걸려있다....구룡포가 있는곳!!


 

 

 

 

 

 

 

 

 

 

 

 

  통도사 창건의 근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세기 중반에 처음 축조되었고, 그 뒤 일곱 번에 걸친 수리가 있어서 지금은 원래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현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은 석종형의 부도, 각 상들의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문헌 기록상 가장 오래된 계단이며, 같은 성격을 띤 금산사나 용연사의 것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조형미도 뛰어나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계단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이다.
계단 주변에는 석문(石門)과 석조 난간을 둘러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4천왕의 입상이 있고, 기단의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계단의 하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새겨 놓았고, 상층 면석에는 불보살 및 비천상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하층보다는 상층의 양식이 유연한 수법이 월등하다.
두 손은 무기 대신에 천의(天衣) 자락을 쥐고 있는 듯한 신장(神將)의 퉁방울눈이 인상적이다.

계단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 수법이 다른 조각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동서 좌우에는 유연한 비천상을 부조로 나타냈고,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아쉽게도 지금 현재도 수리중이었다...그래서 간판에 걸려있는 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대웅전의 기둥과 공포모습들!!

 

 

 

 

 

 

 

 

 

 

 

 

 

  대웅전 앞에 있는 탑!!

 




 

 

 

 

 

 

 

 

 

 

  통도사의 창건 설화가 얽힌 연못이다. 자장 스님이 처음 절을 세우려고 할 때 이 곳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아홉 마리의 용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연못을 메워 절을 짓고자, 용들을 구제한 뒤, 한 마리 용만을 이 곳에 남겨 사찰을 수호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현재 금강계단 옆에 있는 이 곳을 구룡지(九龍池)라고 한다.




 

 

 

 

 

 

 

 


 

 

 

 

 

 

 

 

 

 

 

 구룡지연못이 마음에 들었던지.....이곳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계속 다리를 왔다,갔다 하기만 하고........얼른 오라고 손짓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아들....그리고 그옆에 어쩔수없이 앉아있는 아버지!!^^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며 꼬드겨 겨우 데리고 나왔다....^^


 

 

 

 

 

 

 

 

 

 

 

 

  녀석!! 좋아하기는..^^


 

 

 

 

 

 

 

 

 

 

 

 

  아이스크림 먹고 힘내서.....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지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두가지 느낌.....石과 木의 느낌!!


 

 

 

 

 

 

 

 

 

 

 

 

  통도사절은 구조상 들어갈때는 긴장감을 가지고 들어가게 되지만...나올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나올수 있도록 절내부터 그렇게 배치가 되어있다고 한다....산책길또한 그러한 기분이 들었다.....^^


 

 

 

 

 

 

 

 

 

 

 

  상상이 가는가??......내가 이사진 찍고 저기까지 뛰어가기가 좀 벅찼을꺼란~~~^^


 

 

 

 

 

 

 

 

 

 

 

  결국 녀석은 피곤한탓에 곤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절내의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하여 좀 아쉬웠지만......그냥 이렇게 짧게 구경을 하고 왔다....이번엔 절구경보다는 주변 경치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나는 몇십번을 이곳에 들르면서도 이렇게 경치가 좋은지 왜 미처 몰랐을까??......진짜 나이들어간다는걸 피부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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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7-0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으셨겠당..
그나저나 ..그 곳 갈만한 곳이었는데..

통도환타지아 땜에 영...(허긴 아이엄마로써는 좋을지도^^;;)

책읽는나무 2004-07-1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퍼가신 덕택인지??....수수께끼님이 정정을 해주셨네요..ㅡ.ㅡ;;

< 참고 말씀을 드리자면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곳이라는 설명은 잘못된 설명으로 그 사진의 뒷편은 부도밭으로 부처님이 아닌 스님의 유골(승사리)을 모신 곳입니다. 그리고 앞에 주르륵 서 있는 비석들은 이곳 통도사를 거쳐간 스님들의 입적후 공덕을 적은 공덕비로 나이가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부름으로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가져와서 황룡사 등 3곳에 봉안을 하였으며, 불화 중 윗 그림은 인왕상이며 아래그림은 '반야용선'입니다. 그리고 석탑은 고려 초기라고 보기보다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이라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오대산 중대사, 태백산 정암사,설악산 봉정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등을 5대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적멸보궁은 숭배의 대상인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곳이라 부처를 대신하는 불상이나 불화을 놓지 않음을 말씀 드립니다...>

저도 통도사홈페이지를 들어가서 복사를 좀 해온것인데....저의 실수였는지??...복사를 잘못한것인지??....암튼....틀린부분이 있어서 좀 부끄럽네요!!...ㅡ.ㅡ;;
좀더 공부를 해야될것 같네요!!.....ㅠ.ㅠ
나는 여지껏 부처님의 진신사리라고 알고 있었는데....스님이라니??....
입구에 세워져있는 비석은 제가 오타를 친걸 이제서야 발견했습니다...저건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의 공덕비가 맞습니다....ㅡ.ㅡ;;
통도사에 관한 책도 있었는데.....현재 그책이 없어서....찾아보질 못하겠군요!!
암튼...수수께끼님의 말도 맞는듯하여....확실하고 해박한 지식이 없다보니 반박하기도 그렇고....어째 기분이 좀 묘하네요...^^

암튼.....혹여 제가 지식이 부족하여 잘못 기술하여 다른이들에게 잘못된 상식을 알려드린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좀 착찹하네요......ㅡ.ㅡ;;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2년 전 석가탄신일 기사인데, 아직도 못 가봤다......-포항 운제산 오어사-동아일보

[여행/한국의 비경]원효대사 전설 깃든 포항 운제산 오어사

 《올해가 불기 2546년. 내 종교가 무엇이든 ‘부처님 오신 날’은 기쁜 날이다. 오는 일요일(19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니 주말에는 산수경계 좋고 신록 우거진 숲속의 사찰을 찾아 봄이 어떠할지. 흔치 않게 물도리동에 자리잡은 비경의 수변 고찰, 경북 포항시 운제산(雲梯山) 오어사(吾魚寺)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포항 오어사 앞의 연못 오어지 

 신라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사이에 설총을 낳고 실계(失戒)한 뒤 대중속에서 노래와 춤으로 교화를 이루던 때,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 10성에 드는 혜공대사 역시 망태기 진채로 거리에 나가 춤추고 노래하며 불교를 알리던 중이었다. 이 두 스님이 하루는 술병차고 냇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 안주삼아 한 잔 하고 있었다. 그 때 혜공스님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명색이 중인데 물고기를 잡아 먹고 있으니 누가 볼까 두렵소.” 그러자 원효스님의 대답. “다 먹고 난 다음에 그런 소리를 하면 뭐합니까. 정 그렇다면 산 고기를 뱉어 내면 되지 않겠소.” “스님께서 그런 신통력이 있소.” “해봐야 알지.” “원효스님이 한다면 나도 자신있소이다.” “그러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한번 시험해 봅시다.”

●물고기 안주로 술한잔

 이렇게 해서 두 스님의 신통력 대결이 물가에서 벌어졌는데 한 스님은 냇물 상류쪽에서, 또 한 스님은 하류쪽에서 고이춤을 풀고 ‘큰 것’을 보았다던가. 그러자 고기들이 생환, 물안에서 떼지어 몰려 다니는 것이다. 한데 섞인 두 고기떼를 가리키며 두 스님은 서로 내 고기라고 우겼다는 이야기인데, 그 물가에 절이 들어서니 ‘나 오’(吾)자에 ‘고기 어’(魚)자, 오어사가 됐다는 일화가 내려오고 있다.
 그 오어사를 찾아 포항을 향했다. 포항시내 오거리에서 포항제철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천(읍)으로 가는 길. 포철 지난 뒤 길은 다리 하나를 건너 하천 둑가로 이어졌다. 그 물, 오어사 앞 오어지에서 흘러내린 냉천. 오천에 당도하니 길은 호젓한 계곡으로 접어들고 한참을 달리다 사하촌에 이르렀다.
 마을 지나 왼편으로 큰 제방에 가로막힌 계곡이 보이고 오르막의 제방 위쪽에 올라서면 큰 연못, 오어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계곡 양편의 숲그늘 탓에 물은 온통 진초록빛 일색. 그 수면에 빠진 5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선경이다.
 연못가로 난 꾸불꾸불한 길, 몇구비나 돌았을까. 막다른 길(주차장)이다. 왼편은 연못, 오른편은 산(운제산), 오어사는 정면에 있었다. 물가로 난 길 하나가 절 건너 저편 계곡을 잇는 유일한 통로다. 절 담장 끼고 연못가로 난 길로 몇발짝을 옮기니 일주문이 나타난다. 오어사는 크지 않았다. 대웅전 응진전 산신각 범종각 등 당우 몇 채뿐. 그 가운데 유물전시관이 보였다. 유서깊은 고찰임을 단박에 알수 있는 대목이다. 원효대사가 쓰셨다는 삿갓도 있었다.
 지금 경내는 만발한 진분홍빛 연산홍으로 꽃대궐을 이뤘다. 이제 며칠후면 부처님 오신 날. 평소 같으면 저녁공양 마친 지금은 말 그대로 ‘절간’일텐데 행사 준비로 부산했다.
 신라 진평왕때 창건된 이 절은 신라 사대조사(원효, 혜공, 자장, 의상)가 수도했던 명찰. 원효 혜공 자장 그리고 의상, 이렇게 큰 스님 네 분을 이름인데 절 주변의 암자(원효암 자장암)가 그런 역사를 말해준다. 원효암은 다리 건너 계곡 깊이, 자장암은 절을 품은 운제산 꼭대기 바위에 있다.
 원효암 가는 길에 지나는 원효교, 이 다리와 다리 건너 물가에서 바라보는 오어사와 연못이 어울림은 빼어나다. 수면에 비친 사찰의 담장과 장독대, 다리에서 감상하는 수많은 방생 물고기의 유영 모습 등등. 가파른 산정의 아슬아슬한 자장암 풍치도 빼놓지 말자.
 그 자장암, 보기보다는 오르기가 쉽다. 주차장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거리가 200m, 넉넉잡고 10분이면 오른다. 한 뼘의 평지가 귀한 옹색한 산정이지만 관음전, 나한전, 산신각에 선방까지 있었다. 여기 연등에 불 밝히면 오어사에서 올려다 뵈는 모습이 기막힐 것 같았다.

●굽이굽이 계곡 한눈에

절뒷산 정상의 자장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운제산 계곡 풍경. 왼편 숲속에 절 지붕이 보인다. 

 자장암에서 내려다 본 오어사와 계곡의 경치. 실로 압권이었다. 첩첩이 두른 근방 산악의 마루금은 물론 연못을 향해 굽이굽이 흘러드는 계곡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물가의 숲에 살포시 가린 오어사 당우의 지붕. 절벽위에 앉아 이 선경에 빠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만다. 이곳서 수도하던 스님들이 계곡의 구름을 사다리삼아 이산 저산을 오갈 수 있었다 해서 이름붙였다는 산이름 ‘운제’(구름 雲, 사다리 梯)는 여기서 보면 딱 그대로다.
 자장암에서 이뤄진 뜻밖의 만남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세존진보탑. 98년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인데 봉안후 불가사의한 일이 여러차례 일어났음을 알리는 비문의 글은 한번 쯤 읽어 볼 만하다. 자장암 정염(주지에 해당) 법승(法承)스님은 “관음보살을 모시는 자장암은 예로부터 기도 효험이 높기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빗물이 새는 등 손볼 곳이 많아 개축불사를 계획 중”이라며 “선경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조용한 찻집도 두어 찾는 분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포항〓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식후경

●단풍나무…찬밥…양푼이 비빔밥

 오어사를 7㎞ 앞둔 문곡초등학교 앞 삼거리. ‘감포 33㎞ 양북 24㎞’라고 쓰인 14번국도 이정표 밑에는 ‘천년고찰 방생도량 오어사’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여기서 3㎞를 더가면 용산주유소 삼거리. 오어사로 가려면 직진하는 14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편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부터는 호젓한 산길. 조금 가다 보면 왼편에 장짓문이 달린 전통가옥 앞에 ‘山下村’(산하촌)이라고 새긴 나무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더 눈에 띄는 것은 집 앞에 걸어둔 ‘양푼이 비빔밥’이라는 특이한 메뉴.
 구멍 뻥뻥뚫린 장짓문 열고 들어선 실내는 아늑한 시골집 분위기다. 서까래 대들보 그대로 드러낸 지붕은 온통 초서 예서의 글씨로 뒤덮인 한지로 도배됐고 사방은 온통 황토벽이다. 원목을 잘라 만든 식탁과 긴 의자, 그 가운데 황토를 덧씌운 장작난로가 온기를 풍기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그룹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등 70년대 가요가 줄줄이 이어졌다.
 ‘386세대’에 한 수 뒤처진다해서 숫자를 하나씩 뺐다는 ‘275세대’를 위한 공간이 틀림없었다. 그래 주인(이갑종씨·48)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역시. “30∼50대를 위한 식당겸 찻집”이라는 것이었다. 이 집을 지은 이씨는 직접 생활 도자기를 굽는 도자기 장인. 찻잔 접시 등 산하촌의 모든 그릇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음식은 여주인 홍정자씨(45)의 작품이다.
 “양푼이 비빔밥은 어릴 적 시골에서 양푼에 찬 밥 넣고 찬장에 남아 있던 반찬 쏟아 부은 뒤 써억써억 맨손으로 비벼주시던 어머니의 그 비빔밥 맛을 내려고 한건데….” 여주인 홍정자씨(45)의 말이다.
 큰 양푼안에는 참나물 단풍나물 치커리 쑥갓 등 생야채와 무채 쇠고기 호박 당근 볶은 것과 참기름이 들어간다. 열무물김치등 곁다리 반찬도 대여섯가지나 된다. 화학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고 집간장과 집된장만 넣어 칼칼한 맛이 달달한 여염집 식당 비빔밥과 다르게 소박하기만 하다. 5000원. 동태찜(5000원)도 특미. 연중무휴. 054-291-2039

◇여행정보

▽찾아가기 △손수운전〓경부고속도로/영천IC∼28번(국도)∼안강∼7번(국도)∼포항(오거리)∼14번(국도)∼오천(이정표 따라 감)∼오어사 △대중교통〓서울(동서울터미널·446-8000)↔포항(시외버스터미널·054-274-2311), 포항↔오천(300번·시내버스). ▼사찰 종무소(054) △오어사 292-9554 △자장암 285-0129 ▼특별행사(자장암 연등터널)〓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등반로(자장암∼주차장)에 연등을 줄지어 매달아 행사 전후 몇 일간은 연등터널을 통해 암자를 오르내리는 진귀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입력 | 2002-05-15 17:43

 

http://www.donga.com/fbin/output?search=1&n=200205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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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발~* > 대흥사, 미황사에서


대흥사 들어가기 전, 마치 외계인이 오우~ 내지 메롱~하는 듯한...

죽(竹)이지요? 역시 대흥사에서...

단청없는 날몸이 오히려 감동적인 대웅전. 미황사에서

미황사 대웅전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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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7-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황사에 가보고 싶다.

반딧불,, 2004-07-09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님..
휴가계획 짜는 중이신지요??

조선인 2004-07-0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흘흘흘 비슷합니다.
제가 역사기행 소모임에 속해있는데, 올해의 주제가 사찰기행입니다.
이번 여름에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이라고 탱화그리시는 분을 모시고 갈 곳을 물색중이랍니다.
 

고구려를 백제, 신라와 함께 외국으로 명기

    (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진행
하면서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중국에서  발간된
고지도 책자에 고구려를 외국으로 표기한 지도가 국내 학자에 의해 발견됐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중국의 역사왜곡 주장은 `모순'임
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 됐다.

    10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 교수에 따르면 최근 입수한  `중국고대지도
집'(中國古代地圖集) 영인본과  `중화고지도진품선집'(中華古地圖珍品選集)  영인본
등 2종의 문건에 고구려가 백제.신라와 함께 외국으로 표기된 지도가 수록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고대지도집에 수록된 지도 중 청나라 때 제작된 `동남양각국연혁도'(東南洋
各國沿革圖)는 한반도에 대해 `조선' 표기와 함께 옛 왕조 명칭인 고구려.백제.신라
를 병기했다.

    중화고지도진품선집에 수록된 송나라 시대 지도의 경우도 우리나라를 중국 영토
가 아닌 `동이(東夷)'로 표기했으며, 그 안에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함께 표기했다.

    김 교수는 이들 지도 외에 `대청제국 지도'도 공개했다.

    청나라 때 만든 이 지도에는 현재 중국과 북한이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과
달리 두만강 이북 지역을 경계선으로 국경을 설정, 북간도(北間島)  지역을  한반도
영토로 사실상 인정했다.

    김 교수는 "중국이 2002년초부터 추진 중인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조선족 문제와
간도 문제를 앞으로 자국의 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풀어나가기 위해 고구려사를 중
국사로 왜곡해 편입하려는 정치적 성격의 움직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를 자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등 역사 왜곡을 추진하
는 상황에서 중국에서 발간된 지도에 한반도가 독립국가로 표기돼 있다는 점에서 의
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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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무능한 정부... 이 나라는 국민 개개인의 힘이 아니면 지켜질 수 없단 말인가...

비로그인 2004-06-10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외국어대의 동양사학 교수가 주장한 내용이 있는데,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는 중국도...우리 나라도 내 나라였다고 말할 수 없는 독립적 위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사는 조금은 국수주의적이고 동양사는 냉철한 편으로 주변 정세를 고려하는데, 문제는 중국과 우리 나라가 아닌 제 3국의 눈입니다. 그들은 고구려를 하나의 고대국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은 바로 이점을 최대한 활용을 하고 있답니다. 국제적으로 발표된 고구려 관련 논문도 중국이 우리보다 수십배가 더 많으니...객관적 자료를 접할 수 밖에 없는 각국의 학자들은 몇 편 안되는 우리의 연구자료를 주 자료로 활용할 턱이 없습니다. 진정 우리의 영토임을 외치려면 그만한 연구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데, 남북이 갈라져 마음대로 연구할 형편도 안되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조선인 2004-06-10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적 여건상 북한의 고구려사 연구가 남한보다 앞선 편입니다. 통일이 되면 고구려사 연구에도 훨씬 진척이 있을텐데... 쩝...

반딧불,, 2004-06-10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건 널리 퍼져야 합니다..퍼갑니다^^*
 
 전출처 : 수련 > 고구려 고분벽화 제작기법

고구려는 4세기~7세기에 걸쳐 우리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 강혁했던 정복국가였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을 앞서서 이끌고 영향을 끼쳤던 나라였다. 그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에 넘치는 것이였고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돌궐, 유연)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가사상을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국제적인 동북아 문화권을 형성하는가 하면 지극히 독자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우리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만약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와 의식세계 그 냉요과 성격을 단지 추상적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인들의 생활상과 내세관, 문화생활 전반을 이해하는데 없서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며 삼국시대 미술사뿐 아니라 고대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벽화에 대한 지금가지의 연구 성과는 묘제형식이나 벽화의 회화사적 위치를 재고하는 미술사적 접근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제작기법이나 벽화의 물리적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현상은 제작기법이나 물리적 특성을 살피기 위해선 현장 관찰과 과학적인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분단의  현실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연구를 주도해온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의 관점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조지벽화(자연석 표면을 다듬어 화면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직접 채색 표현한 형식의 벽화)를 제외하고 화장지 벽화(벽체 조성후 회나 흙으로 벽면을 마감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 위에 채핵한 벽화기법)의 형식을 한 고분벽화에 대한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의 기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묘실을 석재로 쌓고 들 표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2. 석회는 (또는 호분)두께가 0.5센티내지 1센티되도록 정제하여 바르고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3.벽화는 붉은 색 또는 검은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다음 다시 결정적인 먹선으로 백묘를 하고고 색을 칠해 완성하였다.

4.안료는 대체로 천연광물성이지만 식물성 역채채료도 일부 보존재로로 사용하였으며, 적,황, 녹, 흑, 백색등이 주를 이루고 금은박 및 옥,상감기법까지 동원하여 장식하기도 했다.

5. 안료는 주로 아교 특히 개가죽 아교에 섞어 그렸다.

6. 고구려고분벽화는 화면이 둗기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듣은 다음에 그리는 방법 두가지고 있고 앞의 기법은 프레스코화법과 유사하다.

이 외에 앞으로 안료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기법의 연구가 전체를 말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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