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찾은 것은 김부용의 묘였던가? 이하 펌.
김부용(金芙蓉)은 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는데 문장가인 숙부에게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16세에 성천군 백일장에서 시로 장원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호는 운초(雲楚)이며 순조 때의 여류시인(女流詩人)으로 황진이(黃眞夷), 이매창(李梅窓)과 더불어 3대 시기(詩妓)로 불리운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 마저 잃으니, 가세가 기울고 천애고아가 된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와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영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양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신임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 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함께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비롯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 김이양은 직권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 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사람을 보내 부용을 불러,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렸다. 그 집은 단촐 하였지만 숲이 우거졌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며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다. 김대감의 친구는 부용을 '초당마마(草堂)'라 불렀다.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며 그들은 원앙새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김대감은 89세에 부용을 데리고 이 곳 천안 조상의 묘를 참배하였고,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 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녀는 임종 전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라고 하고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