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2:1-20 은금을 줄지라도
 

호주의 원주민들은 마법사가 저주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뒤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부두 죽음(Voodoo Death)'이라고 하는데 마법사가 저주해서 죽은 사람이 꽤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의사가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하면 환자는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하는데 의사가 약을 처방하고 효과가 없을 거라고 말하면 실제로 차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말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부두 죽음이고 노시보 효과입니다. (반대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하고 합니다.) 이 사실을 모압 왕 발락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를 지나 요단 강 동편에 있는 모압 평야에 이르자 심히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백성들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민2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부터 이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이민 갔을 때는 인구가 70-75명이었는데 400-430년이 지나자 성인남자가 6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60만 3천 5백 5십 명이었습니다.(민1:46) 성인 남자 한 명당 아내가 있고 아이가 2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60만 곱하기 4하면 240만 명이 됩니다. 우리 집으로 가정하면 300만 명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히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지금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소가 밭의 풀을 뜯어 먹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사방에 있는 먹을거리를 다 먹어치울까 걱정이 됐습니다.(민22:4)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 시절에는 입 하나가 느는 것이 걱정거리였잖아요?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전쟁을 하면 모압이 불리하니까 브돌에 사는 예언자 발람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모압은 오늘날로 말하면 레바논이고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로 말하면 이라크입니다. 거리로 환산하면 64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20km 정도가 되니까 굉장히 먼 거리였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브돌 예언자 발람을 부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브돌 예언자 발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하여 모압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민22:6) 모압 왕 발락은 부두 죽음 다른 말로 하면 노시보 효과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여러분 혹시 장난으로라도 자녀에게 저주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저주가 내릴까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브돌 예언자 발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믿는데 고고학자들이 발람이 실제 인물이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967년 ‘프랜켄’이 이끄는 네덜란드의 고고학 원정대가 ‘데이르 알라’라는 지역에서 회반죽으로 된 석고 조각 몇 점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발람이 밤중에 신의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것은 이웃이 기대하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과 과학이 상충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성경이 비과학적이 아니라 초과학적이라 과학이 성경의 기적들을 규명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사신들은 ‘복채’를 가지고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이르러 모압 왕 발락의 부탁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민22:8)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브돌 예언자 발람은 모압 사신들이 먼 길을 걸어서 왔으니 일단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말씀하시면 모압 사신들에게 통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12) 이것은 중요한 말씀이니 함께 읽읍시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은 발람에게 모압 사신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복을 받은 자'란 수동분사는 과거에 이미 ‘복을 받았던 자’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복을 받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복을 받을 수 있듯이 우리도 이미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복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과거에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복’(삼상7:12)을 받았고 하나님이 지금 나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의 복’(마1:23)을 받고 있고 나중에는 주님이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복(창22:14)’을 받을 줄 믿습니다.

모압 사신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모압 왕 발락은 더 높은 고관들과 더 많은 복채를 딸려 브돌 예언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민22:15) 발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발람이 사신들에게 말했습니다.(민2:18-19)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은 아무리 많은 은금을 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또 발견하게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이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았듯이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전하지 않아야 합니다. 금에 이물질이 혼합되면 그것은 순금이 아니듯이 설교에 자신의 생각이 가미되면 그것은 순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전하라는 것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모압 사신들과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신들이 다시 오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또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민22:20)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은 지난번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다 왜 다시 가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을 알면 브돌 예언자 발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되며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발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전했고 그것도 가감 없이 전했기 때문에 오늘날 설교자의 역할 모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른 본문에서는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아야 그에 대한 다면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을 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발람이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모압 왕에게 갔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미친 행동을 저지했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길을 막아선 것을 보고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잖아요? 이번에는 유다서 11절을 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친형제인 유다는 발람이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을 갔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의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이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마지막에 가서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나는데 발람도 처음과는 다르게 반전이 일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발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신약성경은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구약성경과 구약성경이 다른 경우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조명아래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우선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왜 발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물은 데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발람이 다시 묻자 그냥 마지못해 가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추정해 봅니다. 발람은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 은금이 탐이나 가도 되느냐고 다시 물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시기 위해 가라고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나중에는 은금을 탐내다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브돌 예언자 발람의 모습을 보며 오늘날 설교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발람이 진실한 예언자였지만 은금을 탐내 타락했듯이 저도 돈을 탐낸다면 타락하게 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비단 저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금 때문에 실족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아간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나서 은금을 감추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은금을 숨겼기 때문에 부부가 같이 죽지 않았습니까? 돈은 우리가 사는데 꼭 필요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우리를 타락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선용하면 축복의 도구가 되지만 악용하면 파멸의 도구도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뚝이는 중심이 있기 때문에 흔들어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우리가 돈을 인생의 중심으로 삼는다면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다면 잠깐 흔들리더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발람처럼 처음에는 신실했지만 돈 때문에 나중에는 타락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 물질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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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6일(화) 김수영 집사에게 구원상담을 하여 확신을 심어주었고 27일(수) 새가족 훈련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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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 동방의 새로운 로마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9
미셀 카플란 지음 / 시공사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손안에 든 책으로 비잔틴제국을 한 눈에 볼 수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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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4일(주일) 포항중앙교회를 다녔던 서상환 집사, 김수영 집사, 서영우, 서예성(2010-20,21,22,23)이 사택에서 드리는 주일 낮예배와 오후예배에 출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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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6:1-24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과 세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잠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울산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군종병으로 복무할 때 중대 회식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군종병이었기 때문에 회식에는 참여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대장이 목사님에게 술을 따라주며 마시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부하자 중대장은 화가 났는지 만약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회식을 중단하고 중대원들을 완전군장하여 연병장에 집합시키겠다고 위협했다고 합니다. 회식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목사님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중대원들을 기합 받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을 잠깐 포기하고 중대원들에게 분위기를 띄워줄 것인가 망설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눈물을 머금고 중대장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 벌컥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야, 너도 별수 없구나!’ 하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나 한 사람을 희생한다면 감수하겠지만 동료들까지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시민의 가치관과 세상 사람의 사고방식이 상충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도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다니엘은 원래 남 유다의 귀족이었는데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이 남 유다를 공격할 때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를 멸망시켰던 바벨론도 신흥 강대국인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비록 포로였지만 능력이 출중하다 보니 바벨론에서도 고위 관리가 되었고 페르시아에서도 고위 관리 그것도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무총리나 장관 후보자들이 인사청문회를 통해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받으면서 곤욕을 치르는데 다니엘도 국무총리가 되자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받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야당에서 후보자들을 샅샅이 파헤치는데 페르시아에서는 다른 고위 관리들이 다니엘의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켰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야당에서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페르시아 사람 입장에서 포로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그래서 페르시아 고관들은 다니엘의 모든 인적사항과 경력사항을 현미경으로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아무 그릇됨도 없었고 아무 허물도 없었습니다.(단6:4) 다니엘은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몸가짐을 반듯하게 해야 합니다. 죄는 언제가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김 OO 국무총리 후보자도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다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해 야인으로 전학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는데 우리가 죄를 저질러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페르시아 고관들은 어떻게든 다니엘을 낙마시켜야 하는데 아무 허물도 없자 다니엘의 신앙을 문제 삼았습니다.(단6:5) 페르시아는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다니엘을 옭아매려면 올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페르시아 고관들은 왕을 높이는 척하며 삼십 일 동안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조서를 만들었습니다.(단6:9) 왕은 이 조서가 다니엘을 잡기 위한 올가미인지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걸려들 일만 남았습니다. 다니엘은 신앙이냐 관직이냐를 놓고 기로에 섰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국무총리는 고사하고 사자 밥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포로 주제에 국무총리가 되더니 결국 사자 밥이 됐다고 고소해 할 겁니다. 그렇다고 관직을 선택한다면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니엘에게 신앙은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절에도 신앙을 지켰는데 페르시아 국무총리가 됐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신앙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관직을 선택하겠습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단6:10) 다니엘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숨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열어놓고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타협을 모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타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꽉 막힌 종교처럼 비쳐지지만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양보한다면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는 겁니다. 페르시아 고관들은 다니엘을 고소했고 왕은 어떻게든 구해보려 노력했지만 왕의 도장이 찍힌 법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단6:11-15) 왕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구해주시기를 바라며 밤이 새도록 금식하며 날이 새도록 잠도 청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단6:16,18) 다니엘이 얼마나 왕의 신임을 받았으면 왕이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까요?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선택했는데 하나님은 다니엘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다니엘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새벽에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이 살아있는지 물었습니다.(단6:20)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계시는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왕은 하나님이 다니엘을 살려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 바람대로 다니엘은 살아있었습니다.(단6:21-22)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다니엘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심히 기뻐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끌어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리라 믿었고 하나님은 다니엘의 믿음대로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왕은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그 가족들과 함께 끌고 와서 사자 굴에 던졌더니 그들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의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선택해서 손해 본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면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서울 강남중앙감리교회 장로인데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16살 때 세례를 받았지만 40살이 될 때까지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아 그때부터 신앙생활을 잘 했다고 합니다. 황수관 박사는 연세대학교 교수지만 학력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구교육대학을 나와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국민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 황수관 박사가 연세대학교 교수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해외 유학파도 어려운데 서울 O류 대학교 출신이 연대 교수가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전도에 불이 붙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교수 세미나를 마치고 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에게 무언가를 내밀며 교수로 채용해 달라고 청탁한 것이 아니라 전도지를 내밀며 "교수님 제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도 예수 한번 믿어보시면 어떨까요?" "...." 그 교수님은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하다가 "황 교수, 내가 교회 집사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황수관 박사가 처음 전도했는데 하필이면 그 분이 교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이화여자대학교 하종식 교수였습니다. 얼마가 지나 하종식 교수가 황수관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황 선생! 연세대학교에 이력서를 넣으세요." 황수관 박사는 서둘러 이력서를 냈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채용되었습니다. 황수관 박사가 돈을 주고 청탁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전도지 한 장을 내밀었더니 그것이 교수 추천장이 되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기독교 가치관을 실천했더니 하나님께서 황수관 박사를 높여주셨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건강 비결이라고 강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든 하나님을 자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도 신앙을 지키고 우리가 이익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손해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통로를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일로 섬긴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제일로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제일로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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