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댈러웨이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댈러웨이 부인 -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너무나 익숙했던 이름의 탓일까? 그 익숙함과는 교묘하게 배치되게도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접한 적이 거의 없다. 10대 때 아주 오래된 번연본의 시집을 본 기억과 20대 때 영화 올랜도를 본 기억 정도? 그렇지만 사실 이마저도 마치 날조된 기억처럼, 거의 뇌리 속에서 지워져버려, 아니 그만큼 별 느낌과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거 같다. 물론, 이는 그 당시 나의 지적인 성장과 인생의 경험의 폭이 거기에 따르지 못했을 이유가 클 것이다. 더불어, 개인적으로 영미문학보다는 불문이나 독일이나 러시아문학 쪽에 줄곧 관심을 두어온 탓도 배제할 순 없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읽게 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그동안 왜 내가 버지니아 울프에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왜 영미문학에 그토록 편협함과 비슷한 감정으로 다가서질 못했는지 반성해 보게 되었다.

 

 사실, 처음 글을 읽어 내려갈 때는 글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전날 잠을 제대로 본 잔 탓도 있었고, 흔들리는 전철에서 대충 시간을 때워 보려는 어중간한 심산도 한몫 했을 게다. 하지만 그만큼 익숙하지 않은 문체와 스타일이기도 했다. 표지에 쓰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쓰인 기법’이라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당최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동안 프랑스의 숱한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소설도 접해 보고, 러시아식의 무겁기 그지없는 종교적 관념에도 굴하지 않았던 내가 왜? 대체 왜 그냥 길거리나 묘사하고, 날씨에 자기 기분이나 투영하는 한 여자의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동안 너무 외국소설과 장편을 등한시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설들이 추구했던 관념과 여기서 쓰인 의식의 흐름이란 기법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기본적인 관념소설의 특징은, 특히 내가 많이 읽어왔던 장르에선, 시간의 축이나 장소의 축이 중심이 되질 않는다. 즉, 현실이란 공간보다는 사유의 측면이 부각되어져, 소설의 가장 큰 틀이며 기본 축이라 할 수 있는 스토리가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관념 속에서 현실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엔 시간의 축도 존재하고, 장소의 이동도 공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스토리가 중시되는 관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순식간에 시간과 장소가 변경이 되고, 심지어 의식의 중심이 되는 인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 순간 집중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일반소설과 달리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에선 친절하게 제 3자인 작가나 의식의 주인공인 화자가 시간을 알려주거나 장소의 변화를 알려주지 않는다. 갑자기 뒤바뀐 의식의 주인공인 어느 화자가 자신의 의식을 어느 시각과 장소에 투영하면서 독자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그리고 장소가 변경했음을 그제야 알 수 있게 된다. 때문에 독자는 때로는 페이지가 한참 지나서야 의식의 주체도 바뀌었음을 인지하게 되고, 시각과 장소가 바뀌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일부러 난해하게 그 의식의 흐름을 흩뜨려 놓은 경우는 없다. 내 개인의 경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었을 때,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작가가 일부러 의식의 흐름을 흩뜨리고,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는, 어떤 그런 인상? 물론, 이 또한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날조되었을 확률이 크지만, 어찌됐든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러한 작위적인 복잡성을 띈 글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법의 소설은 흔한 소설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집중력이 없고, 익숙한 기법만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외면 받을 확률이 크다. 이 글이 단순히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라는 측면만 강조 된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의식의 흐름의 내면을 속속들이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의식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현실을 보게 된다면, 결코 이 소설을 그러한 기법의 소설로만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의 내면들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1. 클라리사 댈러웨이

 

 어떻게 보면 허영심이 가득한 속물적이고, 차갑기 그지없는 귀부인이면서도, 모두가 주목하게끔 만드는 우아함과 기품을 지닌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 한 마디로 축약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다. 비단,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인물들에 대해서 묘사할 때도 그 인물의 한 축만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이면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묘사가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인물에 대해 묘사하려는 시도보다는 인물 내부의 의식으로 작가 자체가 들어가 인물과 동일시함으로써, 인물의 객관적 묘사를 시도하기에 더욱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에는 다소간의 어패가 있기는 하다. 작가가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 표현 자체에서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주며, 때문에 인물의 객관적 묘사의 정당성에 대한 반박의 여지를 얼마든지 갖게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한 인물만의 1인칭 시점일 때의 문제이다. ‘댈러웨이 부인’ 소설과 같이 여러 인물이 각자만의 1인칭의 시점을 갖고, 각자의 의식 속에서 서로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비판하고 애증 하는 관계 속에 있을 때엔,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인물 서로는 서로를 평가하게 되고, 이를 통해 독자는 각자 다른 시점 속에서 한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 인물의 의식 속에서 왜 그런 다양한 시점들이 그 인물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때문에 댈러웨이 부인은 그의 남편 리처드에게는 더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지혜로운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렇지만 피터 월시에게는 허영심 가득한 속물이면서, 동시에 차갑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 스스로는 이러한 관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 어쩌면 이것이 가장 그녀를 설명하는데 어울리는 키워드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녀가 소설 초반부에서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 4막 2장의 ‘더는 두려워 말라, 태양의 열기를, 사나운 겨울의 횡포를’이란 경구가 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나는 이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생뚱맞다고 할까? 피카딜리의 거리를 걷다가 문득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떠올린 이 경구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게다가 이 진부한 표현이란. 맨 처음 읽을 때 집중력이 없던 탓도 있었지만, 이 구절이 다시 인용되었기에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질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모두 읽은 후, 그녀의 단편 중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이 경구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이 정확하게 몇 년 도에 쓰인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번역본에선 1922년에서 1925년 사이에 쓰인 단편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1925년에 쓰인 ‘댈러웨이 부인’의 초고 형태인 단편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댈러웨이 부인’의 초반부와 거의 비슷한 구성과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거기서도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에서 나온 경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가 존 키츠의 죽음을 애도하며 썼다는 ‘아도나이스’의 한 구절도 등장한다. ‘서서히 스는 녹으로부터 안전해진 그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할 수 없네. 가슴이 차갑게 식고 머리가 하얘졌네.’ 여기서 특히,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라는 구절이 강조되면서, 셰익스피어의 ‘심벌레인’의 구절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나이가 50이 넘은 댈러웨이 부인은, 더 이상 20대 때의 뜨겁고 격렬하게 피터와 사랑하고 싸우던 클라리사가 아닌, 세월의 풍파를 온 몸으로 겪어 늙고 닳은 한 여인으로써 이제야 삶에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서서히 스는 세상의 녹으로부터. 그러하기에 그녀는 동시에 젊은 날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던 태양의 열기도, 사회주의라든가 혹은 페미니즘이라든가 하는 그런 관념으로부터, 그리고 인생의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피터와의 이별이라든지 혹은 미스 킬먼으로 대변되는 종교와 권력의 횡포라든지 하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이제 담담하고 자연스러워져,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다는 자체는 아직 거기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50이 넘은 그녀는 이제야 그 실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됐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녀 자신이라는 그 실체를.

 

2. 피터 월시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개인적으로 많이 몰입하고 흥미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비록 나이는 다르지만 50이 넘은 그와 40이 가까운 내 나이에서의 작은 연대감을 찾을 수가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헛된 사랑과 꿈을 찾아 헤매는 방랑자의 모습을 통해 나를 쉽게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문인지 피터 월시에 대해서는 꽤나 단순하게 내게 읽혔다. 물론 피터 월시의 캐릭터 자체가 특별한 것은 분명하다. 젊을 적 지금의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와의 사랑에 실패하여, 마치 도피하듯이 인도로 향하며, 그 인도로 가는 배에서 처음 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다시금 애가 둘이나 있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 철없는 남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하지만 작가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야기의 축이 아무래도 피터보다는 클라리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피터는 어떤 면에서 피터 그 자체로 읽히기보다는 ‘클라리사’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물론, 피터 자체에 대한 의식의 투영도 버지니아 울프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너무 특별해서 일까? 아니면 나라는 개인적 인물과의 유사성에 기인한 익숙함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왜 피터 월시는 그 의식의 흐름 속에서 클라리사와 대비되는 불안감과 자유라는 측면 그 외에 피터 월시 그 자체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클라리사의 파티에 마지막이 이르기까지 부외자로 겉도는 피터 월시는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내 부유한다.

 

3.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와 루크레치아

 

 댈러웨이 부인과 피터 월시를 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다른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 둘과 교묘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의 구조 속에 놓여있지만 이 두 인물만큼은 별도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둘과 연관된 월리엄 브래드 쇼 경이라는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는 클라리스의 파티에 등장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도 이 두 인물이 클라리사와 피터가 함께하는 산책과 여정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이 부부는 이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리사 파티에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마치 그 파티 이면에 가려진 비극의 전초처럼, 아니면 파티를 가능케 하는 비극적 자양분인양, 셉티머스의 불행한 자살과 함께 파티는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버지니아 울프는 이 두 인물을 등장시킨 걸까? 그것도 그렇게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어머니의 죽음 때부터 시작되어 그녀 말년의 비극적 자살까지 이끈 그녀 자신의 정신 병력을 떠올려 볼 때 나름 수긍이 가는 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소설가와 소설은 분명히 분리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이 소설 속에서 이 부부의 비중은 왜 이렇게 큰 것일까? 심지어 어떤 면에서 이 두 인물은 많은 이들에게 이 소설 속에서 축이 되는 두 인물인 클라리사와 피터 월시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지도 모르는 인물들이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클리리사의 귀족적 삶과 피터 월시의 방랑자적인 삶은 비현실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당시 세계 1차 대전을 겪은 후, 그것도 그 전쟁을 참여했던 당사자였던 셉티머스란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의 불행은 훨씬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불행한 젊은이의 죽음은 소설 속 정점이 아닌 그 정점을 이루기 위한 출발선에 놓여 있다. 피터 월시가 클라리사의 파티로 향하는 여정의 사이렌 소리로, 그것도 먼 곳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로. 이 소설의 정점인 클라리사의 파티와는 마치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렇지만 이 불행한 부부가 참여하지 못한 클라리사의 파티에 그들의 불행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블래드 쇼 경은 등장한다. 그것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수단으로 클라리사 파티를 이용하기 위해서. 특히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셉티머스를 자살까지 내 몬 블래드 쇼 경 그 자신의 다소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철학을 정책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그가 파티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면에서 윌리엄 블래드 쇼 경은 클라리사의 파티의 감춰진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고 있는 구심점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클라리사의 파티는 이들과 무관하게 클라리사를 위해 그리고 피터 월시를 위해 존재해야 하고, 이 소설의 정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대체 또 무슨 이유일까?

 

4. 결말 : 클라리사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클라리사의 파티는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의 자살과 그의 젊은 이탈리아 부인 루크레치아의 불행을 떠안은 채 시작된다. 동시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집결되는 장소가 된다. 영국 수상에서부터 대대로 권력 군인가문인 레이디 브루턴, 모사꾼인 휴 휘트브레드, 정신의과 권위자인 월리웜 블래드 쇼 경에, 클라리사의 옛 친구인 셸리까지. 그렇지만 그 모든 인물들은 다시금 소설 말미에 두 축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리처드 댈러웨이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피터 월시에게로. 하지만 이 두 축은 사실 클라리사 댈러웨이를 통해 연결되어지고, 갈라진 축이다. 하나는 리처드와 엘리자베스로 대변되는 행복한 부녀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댈러웨이 부인으로써의 삶의 일면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피터 월시로 대변되는 그녀 자신 클라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따로따로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마지막에 피터가 느끼는 두려움과 황홀감 속에서의 이 두 삶의 축은 ‘클라리사로군.’이란 한 마디로 축약되어져 접합점을 찾고서, 소설은 바로 거기에 클라리사가 와 있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이 마지막의 간단한 피터의 외마디 경탄은 내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첫째는 그 동안 줄곧 부유하던 피터의 정체성이다. 피터의 정체성은 바로 클라리사 그 자체였다. 클라리사라는 존재 속에 피터의 모든 사랑과 절망이 존재해 왔고, 때문에 피터는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클라리사는 이미 자신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피터는 클라리사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녀 없이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그 어떤 삶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피터의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클라리사에 대한 미적 의식으로 확장되게 된다. 왜냐하면 피터가 ‘클라리사로군.’이라고 외마디 경탄을 했을 때, 피터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줄곧 자신이 비판해온 클라리사의 허영과 거짓마저도 인정해버리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노와 공포감이 아닌, 황홀감과 두려움 속에서 클라리사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클라리사는 결국 이 글 속에서 본인 스스로는 아니더라도, 피터를 통해 나르시시즘을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셉티머스 워런 스미스 부부의 불행과 파티에 온 모든 인간 군상들을 떠안은 그녀의 파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엔 세상에 스는 모든 녹이 존재해 있고, 동시에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가 공존해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어우러져, 동시에 외떨어져,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클라리사’의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나르시시즘’이 피터를 통해 확언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나르시시즘’의 확장인 진정한 ‘미’에 대한 획득으로까지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야기를 다소간 정리해 보아야 할 거 같다. 이 글을 어떤 면에서 나와 같이 미적인 측면에서 읽는 것은 분명 위험한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은 ‘클라리사’로 대변되는 삶의 모순적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느끼고 있다. 비록 그것이 셉티머스의 불행한 죽음과 여러 인간 군상들의 위선을 바탕으로 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는데 반론을 꺼내야 한다면 어떤 인생이 행복할 수 있고, 또 어떤 인생에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생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사나운 겨울의 횡포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에 스는 녹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천천히 우리를 좀먹어 들어,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었을 때가 대다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감춰진 찬란한 태양이 지닌 빛의 충만함을 쉽게 부인할 수 없으며, 사나운 겨울의 횡포 속에 가려진 눈 내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외면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스는 녹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 분명 세상에 스는 녹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세상에 스는 녹이 없다면, 그렇게 우리가 모르게 머리에 새치가 생겨나고 이마에 주름이 늘어가는 그 세월의 녹이 없다면, 우리가 젊은 날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히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란 존재가 이러한 세월의 녹들 가운데서도 혼자가 아닌, 그 어느 누군가에게는 두렵게까지 황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 무엇보다 이 불행한 삶 가운데 놓여진 우리의 존재를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동인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왜 쉽게 이렇게 우리의 삶의 동인이 되는 누군가의 외마디 경탄을, 우리에 대한 존재 고백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이미 가 닿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주 가까이에... 너무 낮은 읊조림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또 다른 방황하는 ‘피터 월시’라는 우리의 자아가 아주 낮은 목소리지만 두려움과 떨림을 가득 품은 황홀감으로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클라리사로군.’이란 외마디 경탄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아들의 연인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미경을 읽는, 고통스러운 즐거움

- 비극적 원형의 인물군상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희극적 묘사

 


 먼저, 이 비평의 제목을 이 소설집 뒤쪽에 나와 있는 문학평론가 신승엽의 해설집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음을 밝혀두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사람의 비평을 읽은 것은 전혀 아니다. 원래 내 개인의 성향상 무언가 비평을 할 때 내 개인의 이야기와 엮어서 전혀 새로운 다른 이야기를 창출해내는 것을 나름의 재미라 여기고 있는 탓에, 기실 나는 거의 누군가의 비평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다만 우연히 읽어가는 도중에 본 이 소설집의 해설 제목이 내가 정미경의 소설을 읽고 느낀 바와 맞닿아 있는 맥락이 있어서 그대로 차용해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미리 밝혀두고 싶은 바는 나는 이 소설집에 나와 있는 정미경의 소설 중 한 작품을 골라 비평을 하지 않고, 전 작품을 망라해서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그만큼 한 작품 한 작품마다에서 느낀 재미가 개인적으로 남달랐고, 여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떻게 이 비평을 풀어나갈까 하고 몸이 달아있다. 아니, 읽는 그 순간부터 달아 있었다. 정미경이란 작가의 다소간의 색기 있는 묘한 얼굴이 내게 섹스어필한 작용을 한 구석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녀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다소간의 냉소적이면서도 악착같은 그녀의 그림자에게서 내가 환영을 품은 걸 수도. 그 무어래도 좋다. 안달이 난 이 몸을 이 비평을 통해 다소라도 해갈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를 통해서 내 글의 또 다른 방향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발견해낼 수 있다면, 이 비평이 단순히 내 자신을 위한 수음이 아닌, 그녀와 아니 그녀 문학과의 정신적인 접합이거나 접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그러하기에 먼저는 내 이런 안달의 이유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고자 한다.

 

 사실, 정미경의 소설집을 산 순간부터 나는 이미 흥분해 있었다. 이미 전에 ‘밤이여 나뉘어라.’를 통해서 그녀를 처음 접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고, 같은 소설집에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통해 일종의 내 이런 욕구에 대한 예감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제목부터 강렬하지 않은가? 마치 시그널 레드라는 원색처럼 강렬한 ‘나의 피투성이 연인’ 그리고 ‘밤이여 나뉘어라.’ 하지만 그때는 일종의 예감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거 같다. 왜냐하면 나중을 기약하며 그녀를 바로 찾아보아야겠다는 욕망을 억누르고서, 이내 지워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소설집을 펼쳐드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모든 기억의 저변에 깔려있던 욕망들이 되살아났다. ‘너를 사랑해.’를 읽는 그 순간부터 바로, 불꽃처럼 활활 타올라, 그 불꽃은 내게서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고, 경면주사 붉은 빛깔의 점이 비에 젖은 꽃잎처럼 착 들러붙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붉은 원색이란 원형에 대한 집착을 앗아갈 만큼 강렬하게 붉은 기억과 욕망이다. 그렇지만 그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주홍색이나 적갈색이라고 폄하한다. 게다가 비에 젖은 꽃잎처럼 그 빛깔이 착 달라붙었다고 한다면 대체 사람들은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시그널 레드’ 속 화자는 ‘미쳤구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대신 스스로에 대한 초라함을 느낀다. 왜 일까? 글 속 화자는 타인에게 ‘미쳤구나.’라고 말을 꺼내게 될 때,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자신의 차가움에 진저리가 처질 거 같아서, 스스로에게 초라함을 느꼈다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마음속의 말로 읊조리고 있다. 그렇게 글속 화자는 미친 경면주사의 붉은 빛깔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이유로, 원색과 유사빛깔 사이에 있는 색채에 대한, 다른 말로 단순하게 표현하면 광기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애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쉬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빛깔이 글속 k에게 갖는 이유를? 그 빛깔 때문에 어느 날 누군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면 우린 이해할 수 있을까?

 

 ‘너를 사랑해.’를 읽는 순간, 문득 그리스 비극이 떠올랐다. 아마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사랑하는 남녀가 생이란 팍팍한 현실을 위해 서로의 사랑과 감정마저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하지만 왜 하필 그리스 비극이었을까? 그리스 비극을 남달리 읽은 적도 별로 없고, 아마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나 읽어본 게 전부일 텐데. 그저 철학을 공부했을 때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조금 언급된 비극의 원형에 대해 들은 풍월과 그리스 철학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에 대해 이름만 알 뿐인데. 하지만 단 한 가지 선명한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어디선가 최근에 내가 읽고서, 내 깊숙이에 각인시킨 그런 기억이.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그리스 비극을 검색해 보았다. 그를 통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내게 꽤 맞을 거 같다는 정도였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마르티아(판단착오 혹은 도덕적 결함)’이 결여된 모순덩어리 그 자체를 다룬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과격한 인물군상들과 구성들이란 무언가 다른 비극작가들과 궤를 달리하는 바가 언뜻 봐도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작가들은 직접 읽은 것도 아니라,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원래 처음에 찾고자 했던 작품도 내 기억 속에 있는 ‘그녀는 12명의 자식이 죽은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란 내용이 들어간 비극작품이었는데, 전혀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보이지도 않아, 이 기회에 그냥 큰맘 먹고 그리스 비극을 정독해 보자란 마음으로 알라딘 중고샵에서 약 9만 원가량 되는 그리스 비극 전집을 결제했다. 그리고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한 후 집에 들어가서, 근래에 봤던 철학원서를 뒤져보았다. 분명 거기 어디선가 그리스 비극에 대해 읽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책엔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새벽 지겨운 영어문자들이 난립하는 가운데에서도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았지만, 내가 찾는 구절은 어디에서도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오쯤이라고 해야 할 거 같다. 여하튼 그 시각에 불현듯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시몬느 베이유’ 전집이 있는 것이 기억이 나서, 한 1시간가량 또 책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뜻밖에 내가 찾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내용은 이러하다. ‘머리칼이 그토록 아름다운 니오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란 구절인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잃고 상심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에게 테베의 여왕이었던 니오베가 자식 열둘을 잃고도 식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이 고사를 통해 프리아모스를 위로하며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난 완전히 삼천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혀 그리스 3대 비극작가와도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니, ‘하마르티아’니 하는 작가도 말들도 그냥 뻘짓에 불과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토록 그 구절에 집착한 까닭과 그를 통해 그리스 비극을 3-4시간 이상 일일이 검색해 가며, 과감히 지름신의 임재를 통해 결제까지 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쭉 돌고 돌아 온 정경미 소설의 색기인 그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이야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이디푸스’니 ‘엘렉트라’니 하고 많은 유명한 비극들을 놔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와 있는, 그것도 그저 고사로 이용된 니오베의 이야기에 나는 꽂혀있던 것일까? 그리고 왜 불현듯 정경미의 소설을 읽었을 때 그 구절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비극의 지점이 기존에 그리스 비극을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운명과 굴레라는 지점이 아닌, 이런 현실의 기반 위, 다시 말해서 비극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란 비극의 지점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마치 ‘너를 사랑해’에서의 두 남녀의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비극의 서막 같은 결말처럼, 그리고 ‘들소’에서 여주인공 ‘수혜’가 그가 그토록 끔찍이 여기던 남편 ‘하윤’이 죽고 난 이후에도 그 ‘하윤’의 그림자 속에서 나머지 생을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비극은 오히려 모두가 죽거나 벌 받거나 하는 식의 간단한 결말이 아닌, 생을 살아가는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많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니오베가 자신의 모든 자식이 죽고 난 후에도 식사를 거르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하기에 비극은 오히려 생에 대한 강한 집착과 천착으로 이어진다. 그 때문일까? ‘바람결에’에서 여주인공은 사랑 없는 관계에서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 아기에 대한 희망마저 꺼져버린 그 순간조차 억척스럽게 비빔밥을 비벼 먹는다. 그리고 ‘매미’에서 ‘간질’ 비슷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쓰러질 듯한 36kg의,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뻔뻔스러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공 남자에게 생을 살아가기 위해 남자라는 특별한 다른 약이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인간군상들 뿐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이 모든 것은 그저 ‘하마르티아’라는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빚어낸 인물상들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역으로, 그런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물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런 인물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모순된 우리들을 판단착오와 도덕적 결함이란 잣대로 재단하여 만들어낸 죄책감과 죄의식이란 관념으로 붉게 물들게 하는 그 경면주사 빛깔에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 ‘라신’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히폴리투스’란 작품을 각색하여 만든 ‘페드르’란 작품이 있다. 내용은 간단하다. 전쟁을 나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새 아내를 부탁하고 떠나는데, 그의 새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다시 말해서 의붓아들과 새 어머니 사이에서 연정이 들끓어 올라, 결국엔 모두 자살로 끝나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정미경 작가가 ‘시그널 레드’에서 다소간 이 이야기의 원형을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는 동안 했었다. 하지만 비단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런 류의 금기된 사랑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려 있다. 그런데 왜일까? 정미경은 ‘시그널 레드’에서 그 금기된 사랑 이야기를 ‘경면주사 빛깔’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면주사 빛깔’이 진짜 원형이 되는 시그널 레드의 빛깔을 앗아가 버린다는 이야기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왜, 금기된 사랑의 강렬함이 원형적 사랑의 형태를 앗아가 버리는 걸까? 왜, 똑같은 사랑인데 하나는 원형이고 하나는 금기가 되는 것일까? 만약 색의 맹이라면 그 두 색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개인적으로 실제 색약인 나는, 그것도 적녹 계열의 색약인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일정부분 공감하는 바가 있다. 색약검사를 하는 책자를 내가 읽을 때마다 학교 친구들은 큰소리로 웃었다. 분명히 내 눈엔 33으로 보이는데, 86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이공계열과 예술계열에는 발을 들이미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물론, 내 기질상 그 근처로 감히 갈 수도 없었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권리를 빼앗기고, 소싯적 소방공무원 시험에는 이 문제로 인해 시험 응시 자격조차 얻을 수가 없는 실제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 불이 났을 때, 색의 구분이 모호할 경우, 판단착오를 내려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사고도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색약인들을 위해 색약안경도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원형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분명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구분해 놓은 색의 규정에 따르면 분명히 색의 원형은 나름 존재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색의 구분이란 것은 너무나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나라마다 가장 다른 정의와 구분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색이라고 한다면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색이란 원형은 우리 인간의 눈이 가진 관념으로 구분 짓고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 규정 때문에 우리는 많은 동류의 색을 단 몇 가지 원색 안에 묶는 일반화의 오류를 매일 범하고 있다. 왜,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 달라붙으면 안 되는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그널 레드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같은 종류의 붉은 빛깔 아니란 말인가? 파랑을 붉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붉어서 붉다는 것뿐인데... 그 빛깔이 유난히 강렬하고 야하게 비쳐지는 까닭은 혹 그 경면주사 빛깔을 같은 붉은 계통의 색이 아니라는 오해에서 오는, 단순하게 말해서 그냥 금기시하는데서 오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비극은 탄생하고, k는 아파트 베란다에 뛰어내릴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 스스로도 분명 경면주사 빛깔에 대한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테니까. 끝끝내 그가 뛰어내리는 순간까지. 하지만 악착같이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이러한 비극적 코드도 얼마든지 희극으로 바꾸어 놓을 힘이 있을 것이다. 마치 정미경의 이 소설집 속 과장적이고 비극적인 인물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희극적으로 써내려가진 문체 그 자체처럼. 그 때문인지 나는 정미경의 소설집을 읽는 내내 카페에서 사람들 눈치를 봐가며 혼자서 키득거렸다. 물론, 정미경의 소설은 그런 비극적 삶에 대한 나름의 애착과 애증의 시선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가볍게 키득거리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나머지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리고 문학이란 이 덧없는 놀이에 함몰하기 위해, 이 정도 냉소적인 웃음 약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 이런 거라도 없으면 대체 어떻게 생을 영위해갈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 해봐야겠다. 처음부터 방만하게 이야기를 벌려 놓아서 산만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느낀 바는 사실 간단하다. 정미경 작가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에 관한 부분이었다. 정미경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 구성을 가진 작가도 아니고, 그런 구성을 구태여 짜지도 않는 작가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생생하고 감정선이 살아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과장된 인물들처럼.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녀는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킬로스처럼 인생의 굴레라 말할 수 있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에우리피데스의 극중 인물들과 같이 악착같은 인물들을 좋아하는 듯하다. 자신의 남편에게 복수하기 하기 위해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식의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처럼,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파르티아’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비극에 초연하거나 초탈해 있지는 않다. 그저 다소 냉정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즐긴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 때문에 비극을 코믹하게 표현하고 생생한 생으로 엮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 비해 내 개인은 이제껏 내 개인의 이야기에 똬리를 틀거나, 관념 속에 파묻혀, 캐릭터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 사실,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성이 약한 나로선 이 부분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고름 짜내기란 명목 하에 너무 관심을 두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때문에 이번 계기를 통해 그리스 비극과 다른 캐릭터의 정형성이 살아있는 작품들을 공부해 봐야겠다는 의지를 다져본다. 어쩌면 다소 과장되고 어이없는 이런 캐릭터 구성들이 내게 더욱 어울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속에서 내 나름의 경면주사 빛깔의 점이 비에 젖어 착하고 달라붙는 그런 느낌의, 강렬한 원색에 대한 도전을 써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아마도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내 개인은 거기에 천착해 왔을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분간 인간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분간 인간 - 알레고리를 통해 보여주는 21세기의 무미건조한 구조



 한때 알레고리와 상징에 대해 집착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신학생이었던 내게 있어서 해석학적인 입장에 대한 내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싶은 충동에 기인했다. 그렇지만 그 때도 기본적으로 문학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접근했던 터라, 결국엔 그것은 내 문학적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찌됐든 그를 통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최종적인 작업방향은 알레고리와 상징의 연결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너무 방대하게 접근한 데다, 근본적으로 방향성이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알레고리와 상징을 연결한다는 것은 내 개인적 역량의 한계와 엇물려, 그저 무리한 시도와 발상으로만 끝나버렸다. 그렇다면 무엇이 알레고리고, 무엇이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단어에 관해 정의하기 위해선 먼저 더 큰 범주에 있는 은유에 대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여기서 나는 은유 속에 직유, 비유도 함께 포함해서 정의내리고자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은유는 어떤 사물을 낯선 다른 대상에 비교 혹은 대조함을 통해 그 어떤 사물을 새롭게 정의내리는 시도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커피라는 한 사물을 연인과의 대화라는 낯선 대상 속에 포함시켜 커피는 이제 여유와 사랑이라는 이미지로 읽히는 뭐 그런 작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제와 커피를 여유와 사랑이라는 이미지로 읽는 것 자체도 너무 진부하여 비유라고 느끼기도 힘들겠지만, 여하튼 이렇게 커피를 연인과의 대화라는 전혀 다른 매개체와 비교하여 커피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작업을 은유라고 정의내리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은유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싶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작은 범주에 속한 알레고리와 상징은 사뭇 이런 은유와 궤를 달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알레고리와 상징을 은유에 포함해야 하는지 개인적으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알레고리와 상징은 어떤 사물을 낯선 매개체와 비교를 통해 의미를 확장한다는 면에서 은유와 궤를 같이하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어떤 사물의 의미를 확장한다는 방식의 은유와는 확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의미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알레고리의 경우는 은유가 표현하는 방식인 의미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의미의 본질로의 회귀의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알레고리가 설정해 놓은 비교대상들은 결국 그 애초의 어떤 사물에 대한 그림자 연극과 같은 기능의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레고리 소설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벌레인 주인공은 주위의 무관심과 홀대 속에 쓸쓸하게 죽어간다. 그렇다면 여기서 은유적으로 풀 때 주인공 남자와 벌레의 비교를 통해 어떤 의미가 확장될 수 있을까? 절망한 인간? 혹은 인간의 소외? 뭐 이런 식으로 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의미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보다는 인간 본연의 한 부분을 벌레라는 낯선 대상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벌레를 통해 인간의 의미를 확장시켰다기보다는 인간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벌레라는 낯선 대상을 끌어들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소설 속에 알레고리 비유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그림자 연극이라 흔히들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 비유들은 당연히 그림자의 실체인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결국 현실로 회귀하게 되고, 독자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흐름에 따르게 된다. 반면에, 상징의 경우는 또 이와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징은 어떤 사물과 전혀 생경한 대상의 비교를 통해 그 어떤 사물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알고 있는 유치환 시인의 ‘깃발’의 경우로 예를 들면 간단하다. 깃발이라는 사물에 시인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는 전혀 다른 매개체를 비교하여, 깃발이란 사물에 그리움을 표현하고 투영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종전까지 우리가 흔히 아는 깃발이란 사실 무언가 전쟁터에서 승리를 위해 내거는 응원이나 의지와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유치환 시인에게서는 이런 깃발이 전혀 다른 이미지인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의 이미지로 치환되어 그리움이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설에서의 은유는 알레고리와 가깝고, 시에서의 은유는 상징과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실제로 거의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에 읽어본 서유미 작가의 경우, 소설 속에서 알레고리를 매우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작가란 점이 내 개인적으로는 가장 눈에 들어왔다.



 사실, 처음 서유미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는 다소 진부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읽고서도 무언가 새롭다든지 혹은 신선한 느낌보다는 그냥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습작을 하는 내 입장에서 분명한 두 가지는 크게 눈에 들어왔다. 그 첫째가 앞서 밝힌 알레고리의 능수능란한 사용법이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소설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의 트윈로봇이라든지, ‘삽의 이력’에서의 두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삽질, ‘당분간 인간’에서의 쩍쩍 갈라진 인간과 흐물흐물한 인간, 그리고 ‘검은 문’에서의 죄수들의 끝없는 벽돌 손잡이 돌리기와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의 존재까지, 모두 현실의 우리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 연극인 알레고리적 표현으로 읽혔다. 그리고 이 알레고리는 이 글 뒤 비평에도 제목으로 나와 있듯이(내용은 모르지만), 프랙털과 데칼코마니 사이에 놓여있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지만, ‘검은 문’의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런 구조를 취하고 있다. 검은 문을 통과했을 때 또 다시 등장하는 감방과 검은 문을 통해 반복 재생되는 프랙털의 구조를, 그리고 원래 프랙털과 데칼코마니가 비슷한 구조의 다른 표현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 감방과 새로운 감방의 유사 겹침 구조인 데칼코마니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분간 인간’에서의 쩍쩍 갈라진 인간과 흐물흐물한 인간은 비교가 아닌 대조라는 기법만 사용했을 뿐, 똑같이 ‘프랙털’과 ‘데칼코마니’ 구조를 취한 알레고리이다. 나머지 작품 또한 매한가지이다. 특히, 이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소설들이 알레고리로 유명한 소설들을 다소 차용한 점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의 경우 ‘도플갱어’를 다룬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거의 유사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검은 문’의 경우는 카프카의 ‘문지기’란 단편과 비슷한 느낌의 글이다. 때문에 솔직히 개인적으로 이를 알고 있던 내게 있어선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작가의 객관적인 시각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경과민적인 과도함도 ‘카프카’의 절망적인 음울함도 그녀에겐 없었다. 그저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설 속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한 채, 철저한 제 3인칭이라는 시점에서 ‘보여주기’만 할 뿐인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은 다소 건조하고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이 때문에 21세기적인 알레고리 소설로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건조함과 나른함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보여주기’만으론 알레고리의 전부를 드러낼 수 없다고 믿고 있기에, 많은 부분 배울 점이 있었음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더 ‘보여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질로 회귀하는 방향의 알레고리가 되었다면, 물론 그것이 어려운 길이며 소설을 난잡하게 만들 소지도 다분하지만, 그랬다면 조금 더 소설적 여운이 남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상징이 지닌 새로운 의미의 창출의 시도도 여기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물론, 처음에도 이야기했듯이 알레고리와 상징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기에 연결고리를 찾는다는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더 좋은 소설을 위해서라면 그런 위험을 한 번쯤 감수해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된다. 앞으로 내게 있어서 이 부분은 아마도 내내 풀어가야 할 숙제가 되리라는 예감을 가져보며 짧은 평을 마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