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할인행사
에이나인미디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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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옅은 파란빛 파스텔 톤의 영상에 누구의 손목인지 모를 가녀린 손목 위로 유난히 밝게 돋아 오른 새하얀 붕대, 한 손길이 애처롭게 다가서려 천천히 가 닿고 있지만, 어느 매정한 손길에 가로막혀 붕대를 두른 손목 위로 두 손길이 포개지고 있다. 그리고 산산이 조각나는 유리알들, 부셔진 창문의 창틀 사이로 한 소년이 비집고 들어와 진열장에 놓인 망원경 하나를 몰래 훔치고선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종교 영화의 거장, 블루, 화이트, 레드에서 보여준 빛깔의 마술사, 그리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의 신비에 관한 끊임없는 모색. 같은 종교 영화 계열에 타르코프스키식의 무언가 기괴한 이미지와 분위기와는 달리 얼핏 보아도 연민으로 가득 찬 크쥐토프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시린 뉘앙스의 묘한 전조와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 구조로 들어가고 있다.

 

  매일 밤 어느 시각이 되면 시끄러운 시계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지고 소년은 거실에서 재미있는 TV프로를 보다가도 갑자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기에 둘러싸인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어느새 소년이 가 닿아 있는 곳은 맞은 편 아파트에 비어있는 쓸쓸한 집 하나, 어느 틈엔가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면서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다. 한 삼십대 중년에 그리 어여쁘지도 않고 무언가 찌들고 지쳐 보이는 그러나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듯한 여자, 여자의 옷깃이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여인은 훌훌 자신의 옷을 마침내 다 벗어 재끼고선, 매일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욕조로 가서 몸을 씻고 부엌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아마도 한 열 아홉이나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법한 소년은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사춘기적의 불타는 성적 호기심을 감당하지 못해 이렇게 관음을 즐기고 있으리라. 하지만 무언가 영화에서 풍겨 나오는 배경음악은 심상치가 않다. 소년이 망원경에 자신의 시선을 투입시키는 동시에 단조의 선율로 애잔하면서도 무언가 절제된 음악의 분위기는 대체 이 관음증 환자와는 어울릴 법하지가 않는 것이다.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나오는 관음증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론스톤이 나와 떴던 `슬리버`에서의 환자의 모습도 아니고....... 단지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따스하고 애린 음악을 배경으로 깔은 것일까? 여하튼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소년의 시선과 음악은 이러한 관음과 뒤엉켜 여인의 몸짓 하나 하나에서 풍기는 자태를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아니나 다를까 여인은 그렇게 단아한 여인은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집 문이 다시 열리고 그 나이 또래의 한 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벌써 강렬한 키스신과 함께 뜨거운 정사에 대한 예감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것은 이제 막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소년이 갑자기 망원경에서 자신의 시선을 떼어놓는 것이다. 그리고선 이 놈, 어이없게도 수화기를 들더니 가스 점검소에다 맞은 편 아파트 그녀의 주소를 대며, 점검이 필요하다 거짓 신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한참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려는 두 중년의 불타는 남녀가 사는 그녀의 집에 초인종이 울리며, 가스점검부가 들어선다. 두 남녀가 극구 전화한 적 없다고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들어가, 두 남녀의 달아오른 육체를 식혀주는 것이 아닌가? 음흉하게 생긴 남자는 어이가 없어 그냥 돌아가 버리고, 여인은 요사이 자꾸 일어나는 이 일들이 심상치가 않다며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여기까지 모든 행위는 스토커 이상의 행위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작태임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나 아직도 여운이 남은 시린 소년의 시선과 함께 무언가 다른 예감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어느 날 밤, 어김없이 소년의 시선이 망원경에 가 닿고, 비어있는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있는데, 한참을 지나도 여인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 오늘은 밖에서 외박을 하는 거라 여기고 소년이 실망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거의 자정 지나 새벽쯤, 잠 못 들고 있는 소년의 귀에 요란한 차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니, 저 번에 그 남자와 여인이 다투고 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여인을 밀쳐 버리고선 홀로 자신의 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여인은 힘겹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다. 텅하니 비어있는 집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 결국 가눌 수 없는 자신의 몸뚱이를 식탁에 엎드러뜨리고 서글픈 눈물들을 뿌리는데. 뜨거운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소년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지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다가 아직 잠들고 있지 않을 친구의 어머니의 방으로 찾아간다.

 

  여기서 소년의 캐릭터는 매우 특이하다. 고아인 소년은 친구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친구는 세계 여행을 떠난 상태이고, 아마 소년이 친구의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듯하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우체국에서 정식 직원으로써 일을 하고 있다. 아마 법적 미성년 나이를 갓 지난 듯싶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상황이 이렇다면 분명 조금은 어둡거나 해야 할 소년이지만, 소년은 전혀 평상시에는 삐뚤어지지 않고 성실한데다 스스로 공부도 매우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여기서의 이런 소년의 캐릭터의 설정은 아마 감독 자신의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그 무엇일지도 모르겠지만, 중년의 여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나지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설정 가운데 얼핏 소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소년은 친구의 어머니께 질문을 한다.

 

  "왜 사람들은 슬퍼하는 거죠?"

 

  "왜 그러니? 토멕(소년의 이름) 무슨 일이 있니?"

 

  "아니오. 그냥 책을 읽다가....... 어른들이 너무 힘들어하면서 사는 거 같아서요. 전 그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어요."

 

  "토멕, 지금은 세계 여행을 떠난 네 친구가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아기였을 적에 일이란다. 너무 아파서 마치 곧 죽을 거 같은데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더구나. 정말 내가 그 고통을 대신 당할 수만 있다면 하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어. 그런데 불현듯 옆에 코드를 뽑지 않은 다리미가 보이더구나. 그래서 내 어깨에 그 다리미를 조용히 갖다 댔어.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그러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구나."

 

  약간은 이해할 수 없는 키에슬로우스키식의 대화가 이렇게 오간 후, 소년은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가위를 꺼내서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천천히 찍어 내린다. 한 번, 두 번, 가위는 손가락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 속도를 빨리 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은 눈을 감고....... 마침내 볼펜이 한 손가락을 거세게 찍어 내린 후, 선 붉은 핏방울과 함께 고통스러운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소년은 미소를 머금은 것만 같다. 아마도 분명 소년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관음의 대상으로써 이었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이제 여인의 주위를 배회하며 자신의 존재를 천천히 알려간다. 소년 특유의 그 순진함으로. 예를 들어, 소년은 자신의 직위(우체국 직원임)를 이용해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여인을 우체국에 들리게 만든다거나, 여인이 우유를 항상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괜히 수거하기 위해 내놓은 병을 몰래 치우고선 가짜로 빈 병을 받기 위해 새벽에 여인의 집에 초인종을 눌러, 여인을 귀찮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소년이 자꾸 가짜 용지를 만들어 우체국에로 여인을 헛걸음을 시키면서 여인이 우체국 직원들에게 모욕을 받게 되기까지 하는데 있다. 물론 소년이야, 아마 그 순진함 때문에 그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여인을 보기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것이겠지만, 어른의 사회에서 위조 서류라는 문제는 만만치 않은 것이기에 여인은 심한 모욕을 당하고, 서러이 우체국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다. 이에 소년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여인의 뒤를 쫓아가 소리를 질러 여인을 멈춰 서게 한다.

 

  "잠깐만요.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너무나도 어이없는 한 마디, 순간 놀란 여인이 뒤를 돌아 소년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요."

 

  "그래. 난 아무 잘못도 없어. 하지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혹시?"

 

  "네. 다 제가 꾸며 낸 거예요."

 

  "왜? 무엇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기가 찬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년을 모멸 차게 바라다보다가 다시 소년에게 놀라 묻는다.

 

  "뭐! 뭐라고... 사랑한다고... 날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오. 전 당신을 잘 알아요. 어젯밤 당신은 울었어요!"

 

  소년의 어이없는 대답들에 여인은 이제껏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감을 잡고선 너무나 경악을 한다.

 

  "그럼 이제까지 너였단 말이야! 전화를 하고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가짜 용지를 만들어서 나를 곤란하게 하고, 우리 집 주소로 전화를 해서 있지도 않은 가스점검을 받게 한 게 다 너란 말이야!!"

 

  "네..."

 

  너무나 화가 난 여인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년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럴 수가.. 그게 다 너였다니.. 정말 꼴도 보기 싫구나.."

 

  그리고선 여인은 '획' 하니 돌아서 소년을 남겨두고서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 날 밤, 여전히 소년의 시선이 여인의 집에 머물고 여인은 예전에 그 남자와 같이 있다. 그런데 여인은 소년을 의식한 듯 되려, 더욱 과감하게 옷을 벗어 재끼고선 가장 눈에 띌 만한 자리에 침대를 돌려놓는다. 남자는 뭔가 이상한 듯 주춤거리지만 여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이내 의심을 풀고 다시 중요한 작업에 돌입하려 불을 끄려고 하는데, 여인이 자꾸 불을 못 끄게 만든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한 남자가 여인에게 왜 그러냐고 다그치자 여인은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흥분한 남자는 수화기를 들어 소년에게 신호를 보낸다. 순진한 소년은 그 신호에 그대로 응하고, 여인의 집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남자가 밖으로 나오라고 하자 무력하게 나와 남자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여인은 불쌍하다는 듯이 남자를 말리고, 멀리서 소년의 친구 어머니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소년이 어김없이 시퍼런 눈덩이를 하고 여인의 집에 우유병을 치우러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갑작스레 여인이 튀어나온다.

 

  "괜찮니?"

 

  여인의 손길이 소년의 파란 눈덩이로 다가서려 하자 소년은 두려운 듯, 시선을 떨군다.

 

  "미안하구나. 그렇게까지 할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이제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니?"

 

  말없이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모습, 그래서였을까? 여인은 못내 애처로운 시선으로 소년을 응시하며 묻는다.

 

  "그리고 어제 나한테 했던 말.... 정말이니? 그러니까.. 어제 내가 우체국을 나왔을 적에..."

 

  "네..."

 

  "뭐라고 했었지?"

 

  집요하게 여인은 소년을 추궁한다. 대체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였을까..?

 

  "사랑한다고요.."

 

  "음... 사랑이라...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구나.."

 

  무언가 닳고 닳았으면서도 그리웠기 때문이었을까? 여인의 표정은 찌든 듯 냉소하면서도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근데 너 같은 애가 왜 나같이 나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대체 넌 사랑이 뭔지 알고나 있는 거니?"

 

  "그냥... 같이 있고 싶어요... 자꾸 생각이 나고... 보고 싶고..."

 

  "그래? 재밌구나. 흥미롭고.. 그럼 오늘 같이 저녁이나 먹자꾸나. 어때? 괜찮겠니?"

 

  "네.."

 

  갑작스레 환희의 들뜬 소년이 미친 듯이 여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내달리기 시작한다. 층계를 내달리며 옥상까지 숨 쉴 틈 없이 달려가 한 움큼 쌓인 눈덩이를 자신의 귀에 가져다 대고선, 뜨거운 청춘의 미열을 달래본다. 분명 소년은 환희를 꿈꾸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날 밤, 같이 저녁을 먹고 이제까지의 모든 얘기를 솔직하게 나눈 뒤 헤어질 무렵, 여인은 자연스레 소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아주 능숙하게 소년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샤워를 하고,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고선....... 아직 자신의 미열을 감당할 수 없는 소년에게

 

  "난 지금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단다. 한 번 만져 보지 않을래..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는 거란다. 왜냐면 사랑은 터치니까."

 

  여인의 손이 소년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얹어 놓는다. 소년은 괴로운 듯 그러나 뜨거운 본능을 어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점점 여인의 깊은 곳으로 자신의 손길이 미끄러지고 있음을 응시하고 있다.

 

  "지금 축축하게 젖어있지? 그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그 걸 하고 싶을 때 나오는 거란다... 괜찮아.. 더 가까이.. 더.."

 

  마침내, 끝까지 미끄러진 소년의 손길과 함께 소년은 그만 그 순간 사정을 해버리고, 여인의 무릎 위로 엎드려 진다.

 

  "벌써 끝이야? 안됐지만 사랑이란 건 이게 전부란다..."

 

  씁쓸한 여인의 말이 채 방안에 여운을 띄고 맴돌기도 전, 소년은 벌떡 일어나 여인의 집을 뛰쳐나간다. 그리고 마구 내달려 자신의 집으로 들어선 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 대야에 물을 받고선 칼 하나를 떨리 듯 움켜 쥔 채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간다. 투명한 물 깊은 곳곳으로 뭉게구름이 퍼져 가 듯 빨간 선혈이 번져 지고 있다. 그렇게 소년은 쓰러지고서, 앰뷸런스에 실려 간다.

 

 

 

 

 

 

  여자의 예감이란 항상 무언가 분명하진 않지만 사건의 분위기를 감지 할 수 있는 더듬이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기 주인공인 여인은 소년을 떠나보내고선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고 소년의 집 쪽으로 응시를 한다. 그런데 그 아파트 단지에 앰뷸런스에 누군가 실려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선, 여인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우유 배달 시간, 소년이 자신 때문에 자살 시도를 하여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때부터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날마다 소년이 여인을 응시하던 그 시선이 여인에게로 전이가 되어, 여인이 이제 부재하고 있는 소년의 집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창문에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라는 글귀를 써 붙이고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년을 기다리고 있는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은 이제껏 닳고 닳은 사랑에 대해 불신하던 어제의 여인이 아니다. 여인은 소년의 사랑이 자신을 바꾸었음을 깨달게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제 용기를 얻어 소년의 집으로까지 찾아가게 된다. 다행히도 소년은 죽지 않았다.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여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처럼 팔목에 새하얀 붕대를 두르고서 그렇게 누워 잠들어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소년의 친구의 어머니가 여인을 그냥 쉽게 들어서게 해줄 리가 만무하다. 몇 번의 헛걸음 끝에, 간신히 잠들고 있는 소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친구의 어머니는 그것도 매우 불안하여 소년의 방에 들어선 여인을 뒤쫓아 들어온다. 그리고 여인의 손길이 자신 때문에 고통당한 소년의 손목에게로 가 닿으려는 순간, 여인의 손길을 매몰차게 가로막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 많은 여인. 어이할 줄 몰라 서성이다가 돌연 여인의 시선이 소년의 망원경에게로 멈추어 선다. 그리고 마치 소년이 자신의 집을 쳐다보았을 때 같은 그 심정으로 천천히 망원경 안으로 자신의 시선을 집어넣는다.

 

  분명 비어있는 그녀의 집, 거기엔 서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있는 여인 바로 자신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탁자에 엎드려 너무나 슬프게 울던 날, 엎드려진 여인에게로 소년이 천천히 다가서고 있다. 소년은 가만히 여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놓는다. 마치 어떤 거룩한 성화처럼 천천히 고개를 쳐든 여인의 뒷모습은 소년의 손에게로 기대어 지고, 자신의 가련한 손길을 소년의 어깨 위로 기대어 놓는다. 마치 구원을 향한 간절한 염원처럼. 그리고 망원경에서 시선을 뗀 여인의 옅은 미소가 어린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원래 키에슬로우스키 감독의 단편 연작 시리즈물이었던 ‘십계’ 중 여섯 번째 ‘간음하지 말라’라는 작품을 연장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수이 종교적으로 바라다 볼 것이 많기도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읽힐 수가 있다. 사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선 조금은 야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는 나의 이러한 관음증과 욕망을 배반하고서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통해 시작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내 안의 진정한 갈망을 여실히 목도하게 해주었다.

 

  군대를 제대하고서 주체할 수 없었던 그 때, 진종일 새벽길을 홀로 몇 시간씩 나다니며, 이제 주어진 내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신학생으로써 신에 대한 열망, 동시에 인간에 대한 열망, 욕망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으로 신 앞에 엎드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되묻고 되물었던 그 때, 내 욕망과 관음의 전이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소년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이기도 하였다. 왜냐면 욕망으로 시작한 소년의 관음이 여인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연민의 시선으로 뒤바뀐 것처럼 스크린을 향한 내 관음의 욕구가 소년의 사랑,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인을 통해 나 자신의 닳고 닳은 사랑에 관한 불신을 목도하고, 동시에 어느 날 밤 괴로웠던 그리고 외로웠던 나의 날들에 나를 지켜준 까닭 모를 손길들의 존재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전혀 충격적인 영상이 아니었음에도 여인의 시선 속에 되새겨진 마지막 장면, 여인이 고통으로 슬피 울던 날 소년이 함께 하던 그 여린 두 뒷모습은 신성한 충격이었고, 내내 잊을 수 없는 황홀함을 내게 심겨다 주었다.

 

  분명,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서 신성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일 게다. 우리의 모든 시선은 관음에 가 닿아,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어쩌면 우리의 모든 무의식은 성적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가 우리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그런 의구심을 버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마 키에슬로우스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 존재의 욕망의 시원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의 전이를 꿈꾸며, 영상에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담아낸 것 같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그러한 그의 질문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된다. 정말 그런 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욕망이란 것이 신성함으로 전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소외가 끝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처럼 그렇게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홀로' 있어도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존재의 신비가 가능한 것일까?

 

  창밖엔 비가 내리고 이럴 때면 항상 나는 서글픈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바라보았던 내 애틋한 시선들과 또 그것이 거짓이라 믿어야 했던 기억들, 그것은 내 몫이 아니어서 더욱 슬프다는 어느 시인의 지쳐버린 연민, 버거운 처녀성을 견디지 못하고 숨죽여가며 자신의 순결을 내어버리고서도 다시금, 거대하게 가로막힌 순결의 성 앞에 질식해 버린 어느 소녀에 관한 기억들....... 마치 꼭꼭 숨어서 유난히 도드라진 꽃처럼 모든 욕망의 손길들을 배반하고서 잡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이 되어버리신 나의 그리스도의 초상. 이런 것들이 뒤엉켜 마치 사랑은 금기처럼 가 닿을 수 없는 경계처럼 내 시선 저 멀리 저 어딘가 파도가 거꾸로 밀려드는 수평선 사이로 아스러지고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그렇게 내내 그리운 것들, 다시 상념들....... 오늘 괜스레 떠올려본 한 영화에 대한 기억들과 어울려 다시금 생각해 본다. 아니 기도해 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신앙 없는 내 차가운 맘으로 모든 존재에게로 아니면 그저 아득한 당신에게로, 사람의 그 모든 욕구들이 이루어지기를....... 그것을 통해 당신의 신성함으로 가 닿을 수 있기를....... 더 이상 당신의 그 구원으로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말기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써만이 가능케 하고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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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시즌 - [초특가판]
토니 뷔 감독, 돈 두옹 외 출연 / SRE (새롬 엔터테인먼트)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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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시즌 - 잃어버린 계절을 위한 염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에겐 추운 계절이 지나가면 반드시 봄이 오리라는 희망이 주어져 왔다. 그러나 현실은 판도라 때문인지, 모르긴 몰라도, 희망이라는 먼 수평선과의 차이만큼이나 온갖 고통들과 번뇌들 그리고 재앙들로 가득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번뇌들, 재앙들은 결국엔 희망마저 앗아가 버리곤 한다. 이 때문인지 우리는 그 숱한 시절들로 거슬러 올라가기 전부터, 이렇게 봄을 빼앗긴 우리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염을 하고 씻김의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내일로 나아가길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정말로 빼앗긴 봄이 돌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오랜 세월동안 그 허무한 염과 씻김의 의식들을 계속 해왔다. 왜 일까? 아마 당장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쉬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영화 '쓰리시즌'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 물음에 가까운 대답들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999년 선댄스 영화제에선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졌다. 왜냐하면 거의 무명에 가까운, 그것도 매우 젊은, 26살의 한 신인 감독의 영화 하나가 극영화 부문 최고심사위원상과 관객상, 촬영상 등 세 개 부문을 휩쓸어 버리는 일이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동안 독립 영화제로선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로 다루던 인권 문제나 사회 문제 같은 그런 내용이 아닌,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인데다, 그러한 내용을 뒤집어 버리는 영화이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베트남계 미국인인 퇴니 부이 감독의 영화 '쓰리시즌'은 이젠 모두에게 잊혀진 베트남의 상처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르고 매만진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영화의 무대는 어제를 묻어두고서 살아가는 오늘의 베트남이며, 그 내용은 크게 세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하나의 큰 줄기로 나아가고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이야기

 

  우디는 만물 상자를 자신의 목에 걸고서, 비 오는 거리를 누비며, 시계, 라이터 등 잡동사니를 팔고 다니는 소년이다. 그리고 해거는 퇴역한 해병으로써, 베트남전에서 자신이 버린 딸을 찾아 베트남에 온 미국인이다. 그리고 영화는 전혀 관계없는 이 인물의 우연한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

 

  그날도 비 오는 거리를 오가며,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목에 걸고, 장사를 하고 있던 우디는 비가 너무 많이 내린 탓인지, 한 술집으로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우디는 우연히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미국인 해거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해거는 무슨 마음에서인지,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우디를 자기 테이블에 앉혀 놓고선, 물건을 팔아 줄 것처럼 하면서 술을 먹이는 것이다. 이제 겨우 열 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우디에게... 그리고 우디가 취해, 잠시 졸음을 참지 못한 사이, 우디의 생명과도 같은 만물 상자를 가지고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때부터 영화는 우디가 해거를 찾아, 만물 상자를 되돌려 받으려는 이야기로 꾸며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 우디에게 매우 잔인한 일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영화는 여기서 다시 반전을 염두 해두고 있다. 왜냐하면 우디의 만물 상자를 해거가 훔쳐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거는 그저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디는 사라져 버리고, 수일 후에 나타나, 자신에게 만물 상자를 되돌려 달라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없다. 그리고 그토록 찾고자 원했던 자신의 딸을 찾을 길이 없어, 이제 내일이면 이 곳 베트남을 떠나야만 한다. 결국 영화는 여기서 마치, 어린 베트남 소년 우디와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의 아무 의미 없던 허무한 상황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반전된다. 왜냐하면 우디는 해거에게서 만물 상자를 되찾지 못한 채, 비참하게 비를 맞으면서 길을 걷다, 우연히 자신과 같은 처지에 한 소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소녀와 함께 비를 피하려 들어선 어느 골목길에서 덤으로 버려진 자신의 만물상자까지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해거는 우디와 헤어진 후, 괴로움에 술을 마시다, 맞은 편 테이블에서 다른 남자를 접대하고 있는 자신의 딸을 목격하게 된다. 끝으로 영화는 해거와 해거의 딸의 만남을 보여줌으로써, 어색하지만 이제 화해의 길로 접어들고자 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치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 은둔 시인 다오 선생과 젊은 아가씨 키엔의 이야기

 

  일자리를 찾아 호치민시까지 오게 된 키엔은 연꽃을 파는 다오 선생의 집에 고용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키엔은 오전이면 연꽃이 피는 수렁으로 가 연꽃을 딴 후, 오후엔 시내로 나아가, 연꽃을 파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연꽃을 따면서, 키엔은 그곳에서 부르는 연꽃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장 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다오 선생의 부름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은 은둔자로서 그 곳 일하는 사람 가운데 누구도 본 일이 없었다. 아니, 다오 선생이 기거하는 집 근처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그 누구도 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에 다오 선생의 무슨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새벽녘 아무도 모르게 키엔을 따로 부른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에서 드러낸 사실은 다오 선생이 나병 환자라는 사실과 나병이 걸리기 전까진 시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다오 선생은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은둔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키엔의 노랫소리를 듣자, 자신이 나병이 걸리기 전, 시장터에서 아낙네들이 부르던 노래임을 깨닫고서 자신의 젊을 적의 그리운 시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야심한 새벽 키엔을 몰래 불러, 다시 자신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오 선생의 집에 종종 들릴 수 있게 된 키엔은 그때부터 다오 선생의 손이 되어, 잃었던 다오 선생의 시심을 되찾아 주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다오 선생의 병이 깊어지면서, 다오 선생은 키엔을 부르지 않고서, 쓸쓸히 혼자서 죽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물로 키엔에게 자신의 젊을 적 사진이 담긴 자신의 시집 한 권을 남겨둔다. 여기까지 영화는 마치, 하나의 못 다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에피소드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다시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다오 선생의 시를 대필해 줌으로써 다오 선생이 죽어서 연꽃으로 피어나고 싶어 한다는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엔은 무수한 연꽃더미를 가지고서,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었던 시장터 강변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연꽃을 띄움으로써, 다오 선생의 못 다한 소원을 이뤄준다. 실은, 늪 속에서만 가장 아름다운 시심을 꽃피웠던 다오 선생의 연꽃은 죽어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의 시장터에서도 꽃피우길 간절히 원했던 까닭이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키엔이 불렀던 시장터 아낙네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는 연꽃을 보여줌으로써 두 번째 에피소드의 막을 내리고 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창녀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어느 날 손님으로부터 도망치는 콜걸 렌을 자신의 씨클로에 태우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이는 렌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렌은 자신의 가난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기에, 콜걸이 되어,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세계인 호텔과 상류층 사회에 한 쪽 발을 들이밀고 있다. 그러니, 그런 렌에게 있어,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는 귀찮기만 한 존재이다. 그렇지만 하이는 렌에게 아무런 바람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렌이 자신의 일을 끝마치고 호텔에서 나올 때면, 기다렸다가 렌을 태우고서, 렌의 집까지 데려다 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그래서 렌도 귀찮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 하이의 그런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나 그 어느 순간부터 하이의 행동이 부담스러워진 렌은 하이에게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선 하룻밤에 50달러라는, 하이에겐 부담스러운 대금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하이는 평소 관심 없었던 씨클로 경주 대회에 참가하게까지 되고, 거기서 행운의 1등을 하게 됨으로써, 상금 200달러를 얻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렌과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하이는 렌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만 자신에겐 부담스러운 가격의 아름다운 잠옷을 렌에게 선물하고선, 그 옷을 입어 보라고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대로 잠드는 렌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질 않는다. 그리고선 아침밥까지 주문해 놓고서, 그대로 사라져 버린 후, 다음 날 다시 렌을 찾아간다. 하지만 렌은 하이의 그런 사랑이 너무나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하기에 렌은 돈과 옷을 하이에게 그대로 돌려주며, 제발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하이 앞에서 절규한다. 그러나 여자이기 때문일까? 자신의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하이의 그 묵직한 사랑을 렌은 결국 거부하지 못하고, 하이를 자신의 집으로 들어서게 한다. 그리고 그 둘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이 또한 우리가 기존의 생각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그 둘이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하이는 정성스레 땀으로 가득한 렌의 온 몸을 닦아주며 어름으로써, 그 동안 창녀로써 때 묻은 렌의 육체를 깨끗이 씻겨주고 달래줄 뿐이다. 그리고선, 하이는 렌의 눈을 두건으로 둘러,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 후, 그 어딘 가로 렌을 데리고 간다. 그곳은 언젠가 렌이 하이의 씨클로를 타면서 말했던 곳이었다. 창녀인 렌이 가난했지만 꿈 많던 학창 시절, 나무에 매달린 꽃을 보며 떨어지길 기다렸던 그 시절, 어떤 잘생긴 남학생이 와서 꽃을 따다가 자신의 머리에 꽂아주길 바라던 그 시절, 그 시절 꿈꾸었던....... 나무에서 한없이 꽃이 떨어져,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머리에 꽃으로 화환을 쓸 수 있는 그 시절 그곳. 그러하기에 두건을 벗은 렌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으로 하이의 씨클로가 렌의 집 앞에 언제까지나 머물 것 같은 풍경을 보여주면서 끝을 맺는다.

 

 

  만물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파는 소년 우디, 베트남전 버린 자신의 딸을 찾아 나선 퇴역한 미국 해병 해거, 은둔 시인 다오 선생, 청순한 아가씨 키엔 그리고 가난한 콜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 영화는 이 불협화음과도 같은 여섯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시종 씻을 수 없다 믿은 베트남의 상처를 어르고 달래며, 베트남의 잃었던 봄으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두 살 때 베트남을 떠나 스무 살까지 줄곧 미국에서 자란 감독, 토니 부이의 서구적 시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토니는 영화 속에서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마치 우디와 해거를 통해서 오해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당하는 약한 자의 편에선 그것은 오해일 수 없다. 왜냐하면 강한 자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돌에 약한 개구리는 피를 토하고 거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약한 개구리들은 강한 자의 던지는 돌팔매와 화해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다. 절치부심이라고 했던가? 독하게 이를 악물고, 약한 개구리는 자신의 씻을 한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즉, 약한 개구리에게 씻김이란 건 오직 복수뿐이며, 그도 강한 자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좀 더 넓은 시각 하에서 보면,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돌멩이는 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베트남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너무 간단하게 치부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화해와 공존이라는 시각 하에서 뒤늦게라도 내민 손길을 뿌리치지 말자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이미 잃어버린 만물 상자를 아무리 해거에게 돌려 달라 해도 해거에겐 만물상자가 존재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 걸 어떻게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상처와 고통을 어떻게 씻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감독은 바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거에게 있을 거라 믿은 우디의 만물 상자의 미련을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히려 우디에게 우디와 같은 처지에 놓은 한 소녀와의 만남을 가정함으로써, 우디에게 이 연약한 소녀라도 잘 보살펴 줄 것을 당부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그렇게 약한 개구리끼리 오순도순 도우며 살아갈 때, 언젠가 잃어버렸던 만물상자가 예기치 않게 나타날 수 있음을, 그런 희망을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거가 아무 잘못도 안 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디와는 오해일지라도 해거는 분명히 용서받을 일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 고백해야만 된다. 그런 이유로 해거는 자신이 버린 딸을 만나,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어색한 고백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버린 딸의 처지-남자를 접대하는 창녀로써의 처지-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해거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며, 눈물을 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약한 개구리와 강한 자의 오해가 풀어지고, 화해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치자.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살아남은 약한 개구리의 가족이나 친구가 강한 자가 서로 화해했다고 해도, 이미 죽어버린 개구리가 살아날 리는 만무하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감독은 또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평생 씻을 없는 나병이라는 하늘의 저주로 살아갔던 다오 선생과 청순한 처녀 키엔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나병환자와 달리, 영화 속에서 다오 선생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꽃과 같은 존재이다. 아니, 연꽃이란 건 수렁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던가? 연꽃의 마음이란 건 꼭 수렁 안에만 있지 않음을... 어쩌면 그러하기에 되려, 연꽃의 마음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터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연꽃은 그 강가에서 둥둥 떠다니며, 그들의 노랫소리에 화답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었다. 그들과 정말로 대화하고 싶고, 정말로 함께 숨 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렁 속에서밖에 피어날 수 없는 연꽃은 어디로 가지 못하고, 그 스스로 은둔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젊은 시절의 그 꿈을 가슴속에 머금은 채. 그러하기에 영화 속에서 키엔은 죽은 그 연꽃의 마음을 시장 터에 뿌려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베트남전이라는 상처 속에 죽어간 아름다웠던 젊음들과 꿈들을 묻어주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되살아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넋이라도 강가에서 피어나라고. 아니, 이제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피어나라고. 그리고 이제 남겨진 이들에겐 사랑의 계절이 돌아오라고. 다시 해거의 딸과 같이 창녀인 렌과 가난한 씨클로 운전사 하이가 다오 선생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청순한 처녀 키엔과의 못 다한 사랑을 이루어 준다. 그렇게 베트남에게 잃어버린 봄이라는 희망이. 꽃이라는 희망의 화환이 한가득 내려주라고.

 

 

  그러하기에 이제 남겨진 우리에게 남은 계절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그들의 못 다한 사랑을 꽃피우는 봄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죽어간 이 땅에 혼백들은 생각보다 그리 치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가 자신들의 고통 속에 머물러 헤어 나오지 못하길 바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신들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자신들을 곱게 묻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못 다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피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연꽃은 수렁에서만 피어오르지만, 해거와 해거의 딸의 대화하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하고, 시장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강가에 띄워지기도 하며, 창녀 렌의 꿈 많던 시절로 돌아가 머리에 화환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 가슴속에 묻어둘 것은 이제 묻어두자. 그리고 꽃피울 것은 꽃피워, 지나간 상처들과 고통들과의 화해와 사랑의 계절을 꽃피워 보자.

 

    

 

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의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 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얕은 파문처럼

고요히 번져 지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환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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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
레오 까락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나쁜 피 -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라!



 스무 살,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던 시절, 나는 영화 나쁜 피를 보았고, 평생 그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을 미리 예감해버렸다. 컬러풀한 영상에 뒤섞인 회색빛깔의 세기말적인 우울함. 그리고 머리에 총성을 꽂는 듯한, 부유하고 흩어져 버린 대사들. 이해할 수 없는 배우들의 발작과 함께 대조되는 무미건조한 표정들, 그리고 몽환적인 영상의 이미지들. 그 당시 내 상황과 엇물려 마치 나는 그렇게 밖에 사랑할 수 없고, 그렇게 밖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버렸고, 지금도 그 고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라도 영화 나쁜 피에 대해 이 글을 통해 되 바라봄으로써 무언가 그 동안 내 속에 자연 알아진 그것들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래서 또 다른 배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렇게 그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겹지만 않을 수 있다면.......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일단 멈추어,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본다.


 

 레오 까락스, 우리에겐 소년 소녀를 만나다, 나쁜 피, 폴라X, 특히 퐁네프의 연인들로 매우 친숙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 심각한 우울함과 이해 할 수 없는 난해한 대사와 이미지들은 그를 다시금 우리로부터 예술영화감독이라는 별나라로 격리시킬 수밖에 없게 하였고,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너무나 범접하기 힘든 범죄형의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한 번 그에게 빠진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독성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 심각한 전염성 불치병까지 얻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하다. 유독 내 경우에는 그 중에서도 나쁜 피 전염성 불치병이라는 레오 까락스 바이러스 균에 감염이 되어, 이제부터 애연가가 금연에 대해 광고하는 심정으로, 그 병의 위험성과 심각성에 대해 천천히 고백해 보고자 한다.


 

 핼리혜성의 접근으로 파리엔 이상 기후의 징조들로 가득하다. 연일 50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STBO라는 세기말적 병이 발발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괴상하게도 이 병은 어떤 바이러스라든가 병균의 감염 문제라기보다는 사랑하지 않는 섹스를 통해 발병되는 현상으로, 도저히 어떻게 미리 예방하기가 힘들뿐더러 치유할 수도 없는 불치병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죽음으로 이르는. 그러하기에 이미 여기서 우린 영화 속 파리의 세기말적인 절망과 우울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망 가운데에서도 하나의 희망은 꼭 생겨나기 마련인지, 그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백신이 발견되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어떤 불안과 혼돈의 전조를 드리우게 되고,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가 등장하게 된다.


 

 알렉스는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존재다. 물론 아버지가 존재했고, 어머니가 존재했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를 평생 내버려둔 채 자신의 삶만을 살아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평생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이다. 한 마디로, 그의 삶 속에선 아버지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 시작부터 그나마 어디선가 존재하던 아버지는 미국 갱단에 의해서 살해되어 버리고, 이제 알렉스는 고아라는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던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흔적들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이룬 지금, 이젠 진정 자신만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 리즈에게마저 그는 이별을 선포하고, 여행의 길에 오른다. 어떤 몽환과 예감들의 전조로 가득한 여정을. 그리고 바로 그런 몽환을 쫓아 가다가 그는 안나를 발견하게 된다. 버스 창 사이로 유독 하얗게 도드라진 여자의 얼굴이 서려있다. 마치 이제껏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해 준 것처럼 신비로운 경이로 가득한 여자이다. 이미 어떤 굴레도 없는, 그러하기에 어떤 의미와 희망도 없던 알렉스에게 안나는 과연 어떻게 비추었던 것일까? 그저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질 때, 우리는 늘 어떤 신비와 경이로움 그리고 몽환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알렉스에게 안나는 나타났고, 그에게 그런 신비와 경이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유리창에 서린 얼굴을 따라 미행해 들어간다. 그리고 안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지....... 안나는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의 애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버지의 친구는 그동안 그를 간절히 찾아왔다. 한 마디로 자연히 그 둘은 알아질 수밖에 없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알렉스의 여행이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서 떠나지는 것이 목적이 되어 떠나지는 여행이 아닌, 그 동안 자신에게서 부재했던 아버지의 흔적을 쫓아가는 여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떠올려 보게 한다.


 

 마크는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 둘은 같은 갱단의 일원이었던 듯싶다. 특히 알렉스의 아버지 장의 경우는 도둑질에 대해선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돈 씀씀이가 좋지 않았는지, 미국 갱단에게 자주 돈을 빌리다 못 갚게 되어, 결국 살해당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연 그 빚의 부채를 장과 같은 일원이었던 마크가 떠맡게 되어, 이제 마크가 다시 살해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 빚이라는 건, 아들에게 떠맡겨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고전적 방식이라면 아들이란 존재는 당연히 아버지의 그런 죽음에 대해 알고 복수를 할 의무가 있다. 더군다나 알렉스는 장을 닮아 있었다. 한 마디로 알렉스 또한 도둑질에 관해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동안 마크는 알렉스를 찾아왔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갱단의 빚을 갚기 위해 그 당시 파리에 돌고 있는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의 치료 백신을 훔칠 것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알렉스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안나를 쫓아, 제 발로 찾아 들어왔다. 그러니 마크로선 이 일은 기막힌 행운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로서는 끔찍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가 내린 그 천부적인 도둑질의 재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다. 그가 아는 건 오직 지금 자신이 안나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운명이거나 숙명 같은 믿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안나가 자신의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크의 애인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안나는 마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결코 자신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안나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결국 마크를 도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안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안나와의 만남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마크를 도와 사랑 없는 관계로 발병하는 불치병의 치료 백신을 훔치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그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게 된다.


 

 안나는 늘 마크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알렉스는 안나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그 전에 알렉스의 애인이었던 리즈는 아직도 알렉스를 잊지 못하고, 알렉스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예전부터 리즈를 좋아하였던 알렉스의 절친한 친구인 도마는 리즈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마지막 그 꼭지 점에 서 있는 마크는 오직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을 훔쳐야 한다는 것만을 바라다본다. 그리고 다시 역으로 그들은 자신을 바라다보는 존재들에게 매정하지 못하고, 순간순간마다 조금씩의 마음을 내어주고 있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알렉스는 안나에게 묻는다. 그러나 안나를 고개를 젓는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순간의 모든 즉흥적인 감정이 모두 진실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랑일 수 있다면, 안나는 알렉스를 몇 번이고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알렉스는 그렇게 수십 번 리즈를 사랑했었다. 그런데 왜 불현듯 갑작스럽게 알렉스는 리즈를 버려야만 했고, 전혀 알지도 못하던, 그것도 오직 마크만을 바라보고 있는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알렉스는 말한다. 속도감을 찾고 싶었노라고. 그렇다면 왜 알렉스는 안주하지 못하고 질주해야만 하는가? 안나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다시금 속도감을 잃어버리는 안주가 아니란 말인가? 사랑이란 것이 그 폭발할 듯한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영원히 식지 않고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어야만 한단 말인가? 알렉스의 옛 애인 리즈는 말한다.


 

'알렉스, 넌 사랑을 몰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알렉스는 말한다.


 

'여자들이 나에게 그러더군. 단순해지라고. 그런데 그 단순해진다는 게 나한테는 너무 어려웠던 거야.'


 

 어쩌면 알렉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안나에 대한 그 사랑에 있어서, 잃었던 자신의 열정의 속도감을 발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린 알렉스의 선택은 자신 하나에게만 속해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 마치 먹이 사슬처럼 알렉스의 친구 도마는 닿을 수 없는 리즈를, 다시 리즈는 닿을 수 없는 알렉스를, 그리고 다시 알렉스는 닿을 수 없는 안나를, 마찬가지로 안나는 닿을 수 없는 마크라는 수평선을 쫓아 달려가는 형국이 되어, 결국 그 먹이사슬 가장 아래에 있던 리즈와 도마에게로 그 모든 관계의 병적증상이 드러나게 된다. 리즈는 알렉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알렉스와 가장 절친하던 친구 도마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알렉스를 배신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 없는 관계를 통해 도마는 STBO라는 사랑 없는 관계에서 오는 세기말적 병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역으로 알렉스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 STBO를 치유하기 위한 백신을 알렉스가 훔치는 과정에서 도마가 이 모든 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경찰에 밀고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렉스는 연구소에서 백신을 훔치는 순간, 사방에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버리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단 하나의 인질인 자기 자신의 머리통에 총을 꽂고선, 당당하게 경찰들 앞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미리 도마의 밀고를 눈치 챈 리즈의 도움으로 그 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은 약간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도주과정에서 자신을 쫓던 경관을 총으로 쏴 죽였을 뿐 아니라, 갑작스런 리즈의 등장으로 인해 마크와 안나 그리고 또 다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다시 자신을 도피시켜 준 리즈에게로 영영 안주하면 된다. 그러면 그 모두에게 배신자가 될지언정, 어쩌면 자신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또 다시 잠든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달려간다. 마치 늘 부재하였음에도 떨쳐버릴 수 없던 자신의 냉정한 아버지를 평생 바라보던 어머니에 대한 그 연민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사실 그 이전에 영화에선 아마 과거에 알렉스의 아버지 장과 연인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미국 갱단의 여두목이라는 존재가 나와, 알렉스에게 마크와 안나를 배신할 것을 촉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알렉스는 마치 그 배신에 대해 거의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어차피 알렉스에게 중요한 것은 안나이지 마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미국 갱단 여두목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것 또한 알렉스가 아닌 마크이며, 게다가 사실 마크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알렉스를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 무엇보다도 마크는 안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늙었음에 비해 안나가 너무 젊고,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크의 목숨만 보장된다면, 알렉스 자신은 그 미국 갱단에게 STBO의 치료 백신을 넘겨주고서, 받은 돈으로 안나와 함께 어딘가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된다. 어쩌면 이것은 마크가 가장 바라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안나는 결코 마크를 저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 어리석게도 알렉스는 죽어도 안나를 배신할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결국, 알렉스는 리즈의 도움으로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리즈를 버려두고서 안나와 마크에게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신의 대가로 미국 갱단에게 총상을 입게 된다.


 

'마치 나의 인생은 연습장에 마음대로 그려진 낙서처럼 그렇게 살아져 왔어.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부셔지기만 하고, 해변이나 바위에 닿지 못하는 파도처럼. 그리고 인생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렸지. 하지만 그래도 난 믿었어. 아직도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그들 모두는 원래 예정대로 스위스로 달아날 비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알렉스는 총상이 심각해져, 이제 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엔 미국 갱단이 쫓아오고 있고, 다시 그 뒤로 리즈의 오토바이가 뒤따르고 있다. 처음 이 사실을 몰랐던 마크와 안나 일행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로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알렉스의 숨겨진 총상에서 피가 새어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시면서, 마크와 안나는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마크는 복수심에 그동안 두려움에 떨었던 미국 갱단과 그 여두목에게 총을 겨누어, 그들을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이미 그렇다 해도 알렉스의 죽음만은 도저히 어이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알렉스는 비행장에 도착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둔다. 뒤따라온 리즈에게 그 특유의 복화술로 이야기하면서.


 

'리즈, 나의 귀여운 리즈, 모든 것은 끝났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지난날처럼 되겠지.'


 

 알렉스가 그렇게 숨을 거두자, 리즈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왔던 그 모습 그대로 오토바이를 타고서 돌아간다. 그리고 안나는 갑자기 미친 듯이 비행장 활주로에서 뛰기 시작한다. 마크가 그 뒤를 쫓지만 금세 멀어져 가고, 마치 한 마리 새가 된 듯 뛰어가는 안나의 모습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영화 나쁜 피는 사실 그 줄거리 잡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고, 또 여러 가지 이야기로 읽힐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복잡한 씬 하나하나에 담긴 이미지는 마치 의미의 과열된 포화 상태처럼 여기저기 흩날려 있어, 영화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강의 줄거리와 어설픈 평을 가지고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더군다나 비록 '나쁜 피'라는 영화 하나 자체로 완전한 하나의 영화로 볼 수는 있긴 하지만,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레오 까락스의 영화들과 기묘하게 연관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 때문에 이 영화를 보았을 적에 나는 그 몽환적이고 발작적인 배우들의 동작과 대사들 말고는 머릿속에 모호한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슴에 남아, 무언가 파도치는 것처럼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다시 그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게 되었고, 결국 시간이 오래지나 어느 순간에 내가 그 속에 흠뻑 담가졌다 나왔음을 자연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나는 여러 번에 사랑을 했고, 그것이 불가능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랑이란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무슨 사랑이기에, 그것은 불가능으로 밖에 치달을 수 없는 것이었을까?


 

 영화에선 줄곧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 백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간에 모두가 그 곳으로 향해져 있음을 우린 그 관계의 고리 속에서 알 수가 있다. 심지어 미국 갱단의 여두목마저도 그 치료약에 목말라 있음을 우린 영화를 보면서 금세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사랑이 없어서 생긴 병이라면 사랑만 있다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그 사랑 없는 관계에서 걸린 불치병의 치료약이라는 의미는 종국적으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알렉스는 그리고 모두는 사랑이 오길 자연 기다리지 않고서, 그것을 훔쳐내려 한단 말인가? 사랑이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결코 사랑은 훔쳐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왜 알렉스는 그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고, 끝내는 그 죽음에 이르는 그 불치병으로 자신을 내던진 것일까? 여기서 잠깐 우리는 알렉스의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해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알렉스의 아버지 장은 천부적인 도둑이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그런 장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지만, 그 천부적인 도둑질 재능 하나만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어떤 물건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랑에 대한 것임을 우린 금세 눈치 챌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 전혀 훔쳐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도둑질 할 수 없는 도둑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이유로 유독 그들의 관계는 사랑 없는 관계 속에만이 놓여 있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을 훔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랑은 결코 훔쳐지지 않고, 훔쳐진 사랑이라면 그들한테 이미 흥미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장은 사랑 없는 관계 속에서 알렉스를 낳았고, 알렉스는 다시 부재했지만 평생 그에게 짐이 된 그의 아버지 장을 떨쳐내려 몽환적인 안나와의 사랑에 기대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배운 도둑질이라는 재능 말고는 아무 재능도 없었기에, 다시 영원히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서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안나는 이런 알렉스가 절망으로 흘린 나쁜 피를 얼굴에 묻히고선, 마치 새가 된 듯 비행장 활주로를 뛰어감으로써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그 불가능성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왜? 왜? 사랑은 그렇게 끝까지 그 목마름으로 불가능해야만 하는 것일까? 알렉스와 안나, 리즈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버지라는 그 부재한 대상의 나쁜 피들을 정녕 떨쳐 낼 수 없단 말인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알렉스는 안주하지 않고 질주하길 원했다. 아마도 알렉스는 그것을 사랑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안나의 마지막 심장이 터질듯 달리는 모습은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알렉스인 감독 자신(레오 까락스의 본명은 알렉스 뒤퐁이다)의 염일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레오 까락스는 사랑하는 그 순간순간 자체가 완전한 채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순간의 감정들 그리고 열정들, 불꽃같은 욕정들....... 이런 사랑에 대해, 자연 시간이 지나지면서, 우리는 늘 불신해 왔다. 왜냐하면 빨리 불타오르는 불줄기일수록 금세 식어지는 모양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그 찬연히 불타올랐던 그 순간 보다 더욱 오래도록 남는, 싸늘히 다 타버린 잿더미들을 아직도 치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순간에 완성될 수 있는 진실 일 수 있으며, 순간의 감정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말할 수 있겠는가? 쉽게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그것은 사춘기적 불장난이었다고, 아니면 그것은 쉽게 써 내려져간 낙서였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다! 사랑이란 건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서로 간에 불꽃이 튀어 올라 빚어질 상처들은 미연에 방지하면서 혹은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그렇게 버티어 가는 것이, 그렇게 밀고 당기면서 자연 익숙해지는 것이어야지, 확 피어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사랑이라도 그 순간 진실했고, 진정 사랑하고 싶었다면,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이 아니라 말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말 아닐까?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리고 순간은 지나가면 사라져 버리는 그 무엇이지, 오래도록 멈춰 서는 그 무엇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깐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레오 까락스는 진심으로 그런 자기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었던 거 같다.


 

'순간으로 완성될 수 있는 사랑이 있을까? 그 순간으로 영원할 수 있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그러나 우리는 안나처럼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 우리 모두의 나쁜 피라는 굴레들은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도 버거운 것처럼 안주할 곳을 찾아, 연일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부표들 같이 맞닿지 못하고 서로를 부유해야 하는 것일지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렉스도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리즈와의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체 사랑이란 건 무엇이란 말인가? 심장이 터져 버리도록 날아오를 수 있다면, 그리고 마치 다리를 잃어버린 새처럼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면, 끝내 곤두박질치며 맨 머리로 맨 바닥에 부딪친다 해도 우리의 모든 나쁜 피들을 이 땅에 흩뿌릴 수 있다면, 추락하는 모든 것들에 날개가 없다 해도, 피비린내 나는 온 몸으로 섞어지는 자태가 추악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위로 꽃이 피어 오를 수 있을지도, 그리고 한 마리 새가 그곳에 내려 앉아 있을 수 있을지도,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순간의 사랑! 어쩌면 그것은 이런 권태로운 기적 속에서 일어난 신비일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다시 어쩌면 순간순간의 모든 사랑들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그렇게 믿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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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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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쩌면 그 어느 날 나도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거나 혹은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를 설명해 낸다는 것? 예전부터 나는 여기에 깊은 매력을 느낌과 동시에 매우 큰 두려움을 느껴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우주나 신, 혹은 이데올로기나 역사와 같은 거대한 문제와 결부되지 않다손 치더라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대상들에 대한 묘사를 결코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머니, 아버지, 친구들 그리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 그러나 언제나 하나의 묘사 속에서 그들은 왜곡되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를 바라보는 자아 또한 심하게 왜곡되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대상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자아란 이 세상에 없을뿐더러, 그것을 알아버린 자아라면 대상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이미 왜곡된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조차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가(아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건 대체 무엇이 있을까?

 

 주.절.거.림... 주.접.거.림... 처음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를 접했을 때, 나는 이 단어를 머릿속에서 연신 떠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는 詩라는 것이 머릿속에 맺힌 어떤 소리의 울림이거나 떨림이라고, 혹은 숨김이거나 미끄러짐이라고, 아직까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지우의 시는 그것은 고사하고, 자기 넋두리 비슷한 것이 마치, 한낱 관념의 찌꺼기나 쓰레기 같은 이미지들을 조합 시켜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시의 내용이라는 것도 얼마나 황폐하기 그지없는지, 그의 표현처럼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발가벗겨진 부산물들처럼 부질없어만 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시집 뒤편에 있는 소설쟁이라는 그의 친구 이인성의 시집에 대한 평론을 보면 이것을 ‘겹의 두께’라느니, ‘에로틱한 몸뚱이’라느니 하면서 극찬을 해대는데, 한 마디로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역하기 그지없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느글거리는 비곗살 가득한 삼겹살의 그 두툼한 육질이 어디 에로틱하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에로틱하다손 치더라도, 그건 육체에 대한 지나친 병적 관념이 아니라고 감히 그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하기에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황지우의 시를 다시 펼쳐보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왜 증오하거나 역한 것들이란 어느 새면 슬며시 다가와 그 거부했던 몸짓으로 옭아 들어가게 되는 건지...

 

 겨울, 찬바람의 느낌이 볼 살을 부비우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스피드에 적응하기로 한 난, 이제까지 일하던 독서실 일을 그만두고서, 오랫동안 고집스레 써오던 삐삐를 버리고, 핸드폰을 사고, 운전 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다시 스무 살 때처럼 집을 나와, 노가다 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집에 할머님 제사가 있어, 다시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내 개인의 피치 못할 사정상, 나는 집안의 제사가 있을 때마다 늘 부담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나는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적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 때부터... 그리고 신학대를 갔다는 이유로 오래 동안 나는 그 어디서든지 절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집 식구들 또한 뭐라 그런 적은 없었다. 이미 하나의 관행처럼 식구 모두가 절을 하고 그 때마다 나는 뻣뻣하게 서서 그것을 찬찬히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와는 거의 스무 살 터울 나는 우리 집안 막내가 절을 하다 말고, 갑자기 내게 물어 보았다.

 

“왜 큰 형은 절을 안 해요?”

 

 왜일까? 언제나 거대하거나 혹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보다 갑작스레 순진무구함으로 던져지는 질문들 앞에서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오래 전에는 물론 나는 분명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서, 절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부터 나에게 그 신념은 이미 버려져 너덜거리는 누더기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응당 나는 한 집안에 장손으로서, 그리고 사람 된 도리로서, 응당 제사상에 절을 했어야함이 옳았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러고자 마음먹은 적이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뭐, 달리 이유가 있어선 아니다. 그저 이것이 너무나 오랫동안 굳어져 편안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군가들에게 나는 그렇게 대답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 알아 지게 될 거라고...

 

 

初經(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제사를 마치고서, 다음 날, 나는 제사일로 인해 하루 일을 빠지게 되어 24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머니가 일하는 동대문 밀레오레의 지하 매장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제사일로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일한 어머니가 아침 10시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일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멋도 모르고 간 그곳은 여성 속옷 전문점이었다. 그 동안 어머니께서 새벽에 동대문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여자 속옷을 파는 일인지는 전혀 몰랐었다. 그러하기에 무척이나 당황한 나는 처음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런 아들을 잘 알고 있을 어머니이기에 이런 일을 예상하셨는지, 미리 앞의 가게 아가씨들에게 귀띔을 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의 가게 아가씨들이 나를 대신해 가게를 정리해주고, 물건을 팔아주는 것을 온종일 멀건이 바라보아야만 했다. 아니, 나는 심지어 손님이 오든 말든, 가게에 물건 파는 일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종일 앉아 책을 읽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결코 다시 펼쳐 보지 않았던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왜냐하면 그런 곳에서 詩를 읽는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왠지 詩 같아 보이지 않는 긴 활자채의 황지우 시들이 제법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황지우의 시는 전혀 그로테스크 하지 않은 속옷 가게에서 그로테스크 하게 시를 읽는 나와 너무도 어울려 있었다.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오후 3시 넘어서 어머니가 오셨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어, 황지우 시집을 덮었다 다시 읽고,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심하게 어지러웠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등장으로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오랜만에 종로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시집과 음반을 사볼 요량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냐하면 그간 나는 의도적으로 무언가 시를 읽고, 새로운 음악에 심취해 보는 일에 대해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하루 고된 노동으로 겨우 번 돈으로 그런 부르주아한 삶에 갔다 바치기가 억울하기도 하였고, 시나 음악 같은 것들에 대한 나의 집착이 자꾸 나를 뒤쳐지게 한 원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졸업한 학교의 동아리에서 후배들이 준비한 시낭송회를 다녀온 뒤, 나는 나의 그런 생각들을 다시 고쳐먹어야한다고, 금세 변절해 버렸다. 뭐랄까... 왠지 이런 것마저 없다면 내 삶이 너무나 황폐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나의 아버지처럼...

 

 

 젊을 적 신학생이기를 원하였고, 시인이기를 원하였던 아버지는, 그리고 언젠가 자기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말한 나의 아버지는, 그럼에도 술 한 잔 할 줄 모르고, 바람 한 번 피워보지 못한 나의 아버지는, 그 언젠가부터 언어를 잃어버리셨다. 그러하기에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다. 대부분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꼭꼭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기 시작한 날 이후로는 보통 나 혼자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 아버지 너무 죄송하다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너무 무섭다고... 그러나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서로를 잘 이해한다. 그러하기에 결코 서로의 삶에 대해 타박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 같이 단 둘이 식사를 할 때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할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국을 끓이고, 나는 밥상을 차리고,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면, 나도 따라 들고...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시면 내가 밥상을 치우고, 아버지는 설거지를 하시고...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 언젠가 우연히 아버지께서 혼잣말처럼 뱉어낸 주절거림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가 다 결혼하고 나면, 시골로 내려가 못 다한 공부를 하시면서, 정원이나 가꾸고 싶다던...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씁쓸한 주절거림을.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가만히 거울을 바라다본다. 아직 아랫배도 나오지 않았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는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봐줄만 하다. 그리고 아직 치기 어린 눈빛은 슬픔을 알기엔 반항심으로 그늘져 있다. 그러나 바싹 말라버린 볼 살 위로 튀어나온 광대뼈와 부르튼 입술은 벌써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어 보인다. 그리고 찌든 듯한 고통의 눈빛이 지어보여 진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그러나 어쩌면 그 어느 날 나도 흐린 酒店(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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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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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20대 때 기형도의 시 중 나는 이 시를 가장 좋아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 본연의 자기연민이거나, 역으로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관한 연민의식으로부터의 발아였을 것이다. 아니,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자기연민이었든 타인에 관한 연민이었든, 분명한 것은 저 시를 통해 나는 지금의, 혹은 향후 앞으로의 나의 몇 년 후를 예감했던 것 같다. 속은 이미 헐어버렸지만 날렵한 듯한 외양으로 부러지지 못한 채 나무줄기에 매달려 있는 모양의... 무언가 잔혹한... 혹은 이미 말라 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생생한 줄기 앞에서 뒹구는... 무언가 황폐한... 그렇지만 나는 그 때 한 가지 예감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줄기에 매달려 있든, 줄기로부터 부러져 나오든, 그래서 잔혹하든 황폐하든, 그 존재 자체에 깃든 허무가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전혀 충일하지 않고, 그래서 전혀 나의 방어막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것이 예상보다 무척이나 서글프고 서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나는 결코 예감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지금부터 이 슬픔에 대해 정직하게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 이것이 비록 내 치부를 드러내는 치욕밖에 될 수 없는 작업이 될지라도.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사랑과 섹스가 별개가 아니었던 스무 살 적을 떠올려 본다. 그 때 비록 나는 나의 동정을 창녀촌에 갖다 파는 멍청한 짓을 했지만, 첫사랑의 손길엔 떨려했고, 첫입맞춤에 온몸을 뒤틀었다. 그렇게, 단지 그녀의 손끝 체온과 입술에서 불어오는 숨결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 각자가 분열하여 ‘감각’이란 이름의 또 다른 세포를 낳고, 그 세포를 통해 ‘영혼’이란 이름의 또 다른 생명을 낳을 것처럼, 그렇게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말했듯이 사랑을 배우고 알기엔 너무 멍청했다. 나의 동정을 그렇게 쉽게 팔았듯이, 나의 감각을, 나의 영혼을, 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다는 그 이유로 너무도 간단하게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단지 섹스란 행위 하나에 손쉽게 팔아버렸다. 아니, 그 밑 모를 바닥으로 너무 쉽게 매몰되어 갔다. 그런 황폐한 인간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아주 단순한 손끝 감각으로부터 전해오는 세심한 배려가 사랑의 시작이자 완성이라는 사실을...

 

 

발화는, 그렇게 끔찍했다.


 

 스무 살 적에 그녀에게 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에 대해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갖고자 현학적인 말로 떠벌였던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실제로 맺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실은 어느 누구보다 이제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비록 내 품에서 잠시 쉬고 있지만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나에게도 너무나도 소중한 내 친구라는 사실을. 그러하기에 그녀와 친구 둘을 모두 너무 사랑했던 나로선 그 말도 안 되는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이란 말로 내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애써 위로하며 자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말의 올무라는 것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그 단순한 현학적 말장난 때문에 나는 그녀와의 예정된 이별이란 수순 이후,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 없는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집착해왔다.

 

 

안마시술소를 나온 뒤 기분은 더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그녀 이후 이제까지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고, 그녀들과 쉽게 관계를 맺고, 그렇게 쉽게 헤어져 왔다. 그러나 나의 대다수의 관계는 업소의 여자들과의 관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채팅으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관계를 맺거나,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는 그녀들에게 제대로 치근덕거려 본 적이 없다. 아니, ‘자자’라는 말이 내 입 밖으로 나온 적조차 거의 없다. 내 스스로 그런 내 모습을 너무 혐오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에게도 쉽게 성욕을 느끼는 내가 나의 그런 성욕을 자연스럽게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결국 나는 누구보다도 욕망을 추구하고 싶노라고, 그리고 그래왔다고 떠벌려 왔지만, 기실 나의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여자들에게조차 나는 너무나 쉽게 자고 싶다고, 그렇지만 사귀기는 부담스럽다는 말로 철옹성을 치고서, 그녀들과의 관계를 거부해 왔다. 그리고선 아주 쉽게 안마시술소와 같은 업소의 여자들에게로 도망을 쳤다. 때론 그녀들과 연인 비슷한 오랜 관계를 맺기도 하면서...

 

 

내가 처음부터 은교를 음심으로 본 것은 아니다.

 

 

 결국, 이 모든 말들이 변명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찌됐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거의 모든 여자에게 음심을 품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음심을 쉽게 드러낸 적은 없다. 너무나 황폐하게 변해버린 내 감정을 내 진심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고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자꾸 보고 싶기도 했고, 자꾸 생각나기도 하긴 했다. 그렇게 하나의 욕망의 구멍이라는 존재로서 여자가 아닌, 존재 그자체인 여자로서의 누군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나를 휘감아버리는 음심에 그만 나는 절망해버렸고,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국, 모든 감정을 부인하곤 했다. 마치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아니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파동도 없었던 것처럼.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하나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형은 책 읽고 울어 본 적 있어요? 나는 초등학교 때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고 1주일 동안 울었었는데...’ 잠깐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가 어릴 적 어머니와 이혼을 해서, 남달리 감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던 후배의 상황, 그리고 그에 비해 정작 문학을 한다고 하지만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인간... 문득, 삼국지를 읽었을 때 관우가 죽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 후배에게 그 장면에서 분해서 한 번 운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후배는 내 대답이 너무 엉뚱했던 탓에 ‘형은 진짜 남자다.’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 코믹한 상황과 대화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자꾸 서글픈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실은 그 삼국지에 관한 기억마저도 날조된 기억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오기 때문이다. 대체 내가 슬픔을 터뜨렸던 그 마지막 때는 언제였을까? 나라는 존재는 실은, 남자다움이거나 혹은 담담함이란 외피를 가장하며, 줄곧 내 모든 감정을 삼켜오기만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쉽게 내 진심을 외면한 채 나락해가며, 동시에 수인으로서 이제까지 내 모든 시간을 써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거울 속에 들어서 있는 남자는 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이 모든 얘기들이 전혀 소설과 관계없는 허튼 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글이 이럴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 아니, 글을 읽자마자 이 글의 적요 속에 감춰진 ‘나’라는 인간의 황폐함과 그 슬픔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일이었다. 이미 일주일 이전에 개략적으로 나는 글을 완성시켰지만,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텍스트의 모든 맥락과 이야기 그 자체를 무시한 채 ‘나’라는 인간만 가득한, 그것도 징징 짜는, 마치 나의 외로움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모두 전가시키는 듯한 이 글을 도저히 바라다 볼 수가 없었다.

 

 

육체의 과실이 어느 생생한

물통에서 멱감는다

그러나 물 밖에선

투구와 같은 힘센 실다발을 풀며

떨어지는 물에 목이 잘리는

황금의 머리가 빛난다


           -P.Valéry, <목욕하는 여인>에서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고, 이야기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려야 할 거 같다. 처음 나는 기형도의 시 ‘노인들’을 인용하면서, 내 본연의 자기연민과 가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식에 관해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발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내 사랑과 동시에 그렇게 시작도 해보지 못한 내 사랑의 나락에 관해 줄곧 두서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홀했던 것은 내 지나친 감정이입 탓에 처음에 밝힌 어떤 예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이미 표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한 감춰진 언급은 거의 어떤 자기변명과 가까웠다. 그러하기에 그것이 어떤 예감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필연으로 표현되어진 느낌을 내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코 필연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결국 필연이라는 말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기책임을 다른 무언가로 전가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미 처음 그녀와 관계가 시작됨과 동시에 끝나가는 것을 예감하면서,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예감하고, 줄곧 그 예감에 따라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삼십대의 내 모습이 이렇게 황폐할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무줄기에 날렵하게 매달려 있는 추악한 마른 나뭇가지의 모습이나 이미 말라비틀어질 대로 말라비틀어져 나무줄기로부터 잘린 채 그 앞에서 나뒹구는 마른 나뭇가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의 육체가 풀과 같다면 어떨까? 푸르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뻣뻣한 나무줄기가 아닌, 거센 바람에도 이리저리 몸을 누일 수 있는 풀과 같다면, 그렇다면 어떠할까?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불에 타고 난 노트의 재를 그녀가 울면서 화장실 변기 속에 주워넣고 있었다. “할, 할아부지...... 아무 죄...... 없어요! 진짜로...... 시......인이었어요!”

 

 

 인간은 결국 죽는 순간까지 풀이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론 시를 통해 시 속에서 풀과 같은 인간을 창조하며 풀이 되는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을는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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