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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행복한 그림자의 춤 -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
이 번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기 전, 나는 머릿속이 꽤나 복잡했다. 먼저는 정말 오랜만에 내 자신이 쓴 글을 합평을 받는 이유 때문이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글을 읽을 때 기존의 방식과 달리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하고 읽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이러한 글 읽기 방식은 내가 수도원을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수도원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가지치기하기로 작정했고, 그 가지를 친 시간과 에너지를 글을 읽고 쓰는 데로 전환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내려와서 약 두 달 동안, 나의 단단한 결심은 어디로 갔는지, 병든 닭처럼 집안 그 어딘가에 틀어박혀, 목구멍으로 세어 나오지 못하였고, 당연히 가슴 속에 맺혀 있던 말들도 글이나 혹은 그 다른 무언가로도 세어 나오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으며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세 편이나 되는 단편을... 물론, 이 단편들은 전부 예전에 썼던 짧은 콩트이거나 수필 같은 형식의 글을 열심히 습작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견지 하에 다시 새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아니,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예전과 다르게 강렬하게 내가 시름시름 앓던 만큼 목구멍에 맺혀 거치적거리면서, 미묘하게 내가 예전에 글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게 글을 보게끔 만들었다. 물론, 이는 글을 쓰는 이에게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독자와 똑같이 글을 분석하고, 그저 감상하려고만 한다면 거기에서 ‘작가정신’이라든가 혹은 ‘창작의욕’이라 부를 수도 있는 다른 그 무언가가 피어날 여지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글에 대한 순수한 접근을 막는 커다란 장애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설프게 피어난 작가의식은 글을 읽는데 있어서 글을 먼저 감상하고 느끼기보다, 분석하려 들고, 함부로 재단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분을 내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였다. 아마, 이는 내가 내 글을 세 편 정도 쓰고 나서, 내 글에 대한 개인적 애착으로 한 50번 이상 퇴고를 한 다음, 이상 문학상의 글들을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본인에 대한 글의 퇴고는 너무나 가깝고 밀착되어 있는 까닭으로 거리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거리를 두고 분석하고 비평해 보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이다. 때문에 이상 문학상의 작품들을 읽을 때 나는 나와 비슷한 관념이 나열된 글에서는 지긋지긋함을 느꼈고, 다소 몽환적이거나 실험적인 글에서는 내 글에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도입할까를 생각하면서 읽게 되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내게도 미약하게나마 ‘작가의식’이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가의식’이 너무 익숙지 않은 경험이었기에, 어설펐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한 재단과 망상 속에 글을 읽다보니, 어느새 나는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정작, 그 글이 무슨 글이었는지, 어떤 포인트를 말하고자 쓴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염두에 두지조차 않고 글을 읽었다. 물론, 그 글들이 내가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십대 때부터 줄곧 나는 이상하게도 한국문학보다 외국문학에 더 친밀함을 느꼈고, 때문에 동경해 왔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글이라도 예전에는 결코 이런 식으로 접근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줄곧 나는 글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오감을 사용하여 읽는 것이라고 믿어왔고, 그러하기에 가슴에 울림이 있거나 떨림이 있는 시적인 뒷맛이 있는 글들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지금 이순간도 바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모든 글들을, 심지어 내 글조차 머리로만 읽었다. 바로 이 이유로,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지 못한 채, 내 개인적 사변에 휘둘리면서 글들을 그 글 자체로가 아닌, 하나의 내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거나 교재 비슷한 심정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예감 속에서 나는 잔뜩 경계의 시선을 품고서,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법 이제는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주인공 소녀의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근방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오던 마살레스 선생님은 매해 6월이면 학부모와 아이들과 함께하는 파티를 연다. 그렇지만 파티라고 해서, 뭐 왁자지껄하거나 대단한 행사 분위기를 연상해선 결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오래된 전통의식과도 비슷한 학예회 일종이라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파티라고 해서 차려지는 음식도 매해 아이들을 위해 차려지는 비슷비슷한 음식들이 고작이고, 파티의 하이라이트라는 것은 그냥 아이들이 그들의 학부모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게 전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실력이란 것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얼마나 엉성한지... 간혹 재능이 풍부한 아이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마살레스 선생님의 끝없는 아이들에 대한 무한 긍정주의와 신뢰는 있던 재능도 사라지게 만들기 일쑤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마살레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재능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이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그 본인 스스로가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얼마나 순진무구하기 그지없는지, 아이가 설령 박자를 놓치고 다른 음정을 치더라도 개의치 않고 아이들의 그 엉성한 천진난만한 연주를 찬양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대체 어떤 아이가 그 재능을 만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아이들은 그 순진무구한 때를 벗기까지 모두 마살레스 선생님을 좋아한다. 항상 친절한데다 칭찬일색인 선생님을 그 어떤 아이가 마다하겠는가? 사실, 그러하기에 주인공의 엄마도 자신의 그 추억의 자산 때문에 주인공 소녀를 마살레스 선성님께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몇 해 전까지 주인공 소녀도 그러했던 어머니와 같이 마살레스 선생님을 너무나도 좋아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그런 입에 발린 소리들을 듣고 좋아하기엔 주인공 소녀는 조금 커버렸다. 그리고 주인공 어머니도 이제 그런 고리타분한 파티에 참석하기엔 꽤나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게다가, 몇 해 전 경제적 사정으로 마살레스 선생님이 좁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그 집에서 피아노를 배워야만 하는데다 파티도 그곳에서 열려야 했기에, 어쩌면 올해를 끝으로 주인공은 마살레스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고, 그런 이유로 그 특별한 파티의 참석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주인공도 그녀의 엄마도 그저 마지막 파티일지도 모를 그 시간을 어떻게든 때울 작정으로 파티 내내 서로 딴 생각에 여념이 없다. 주인공 소녀는 그저 마지막 피날레가 될 자기 공연 시각이 어서 빨리 와서 파티가 끝났으면 하는 눈치이고, 그녀의 엄마는 선생님이 차려놓은 파티음식이 6월의 후덥지근한 날씨에 혹시 상하지 않았을까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주인공 소녀의 피아노 연주를 끝으로 의례적이고 지루한 파티는 끝날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살레스 선생님은 파티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가장 나이도 많은데다, 파티의 피날레를 맡은 주인공 소녀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썩 관심이 있는 눈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주인공 소녀가 연주하는 그 도중, 그렇게나 마살레스 선생님이 안절부절 못하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 주인공들이 당도하여, 시끌벅적하기까지 하다. 똑같은 황갈색 옷의 제복을 입고 들어오는 열 명 남짓한 아이들,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에서 마살레스 선생님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인 모양이다. 개중에는 남자아이들도 여럿 보이는데 모두가 초점 없는 눈에 짧은 머리를 한 모양이 비슷비슷한 생김새이다. 그 모습에 엄마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하고, 예정에 없던 그 아이들의 연주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살레스 선생님은 역시 그런 학부모들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 아이들의 연주를 그저 흐뭇하게 지켜볼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 키만 하고 여윈 ‘돌로레스 보일’이란 여자아이의 이름이 호명되고, 그녀의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곡은 독일의 작곡가 ‘글루카’가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전설’을 소재로 작곡한 3막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나오는 발레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런데 이 게 무슨 일일까? 그렇게나 수런대던 모든 소리들이 어느새 잠잠해지고 모두 그 소녀의 연주 속에 빠져든다. 그리고 모두 무언가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열망 같은 혹은 그리움 같은 것이 되살아나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당혹스럽기만 하다. 왜냐하면 그곳은 다름 아닌, 어떤 재능도 만개시킬 수 없는 그저 사람 좋은데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마살레스 선생님의 피아노 파티장소이고 (말이 좋아 파티이지 그저 학예회일 뿐인 장소이고), 그 연주자는 근처 지적장애아 학교를 다니는 한낱 흐리멍덩한 여자아이의 연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소녀의 연주가 끝마쳐지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어떻게 그 감정을 설명해야 할지 모두 당혹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 지루한 파티를 딱하고 지루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주는 개운하진 못하지만 달콤 쌉싸름한 뒷맛 때문이 아닐까?
글을 다 읽고서 처음에 품었던 나의 경계심은 글속에 주인공과 학부모들이 지루한 마살레스 선생님의 파티와 지적장애아들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피아노곡의 연주로 자연스레 스르르 풀려간 것처럼 어느덧 걷혀있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전부 다 하면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매일 도배학원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의 1-2시간을 이용하여 짬짬이 그 글들을 모두 보게 되었다. 그리고서 내가 느낀 것은 크게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현재 내가 써가고 있는 내 글의 지점과 앨리스 먼로의 글이 추구하는 지점과의 차이와 그것을 통해 앞으로 내가 추구할 글의 지점에 관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내 글에 대한 팽배한 애착을 오롯하게 버리기란 현 단계에서 힘들뿐더러, 그러한 애착과 상반되는 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미묘한 거리두기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볼 수 있게끔, 앨리스 먼로의 글들이 어떤 단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앨리스 먼로의 단편들을 모두 읽고서 내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의 비평을 ‘앨리스 아줌마의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보따리 요리란’ 제목으로 한 이유는 비단 ‘행복한 그림자의 춤’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글들에 그러한 맛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로 채색된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와 ‘망상’,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그녀의 아련한 향수와도 같은 지나버린 시절에 대한 어떤 애착을, 힘없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의 사랑에 대해 대처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한 ‘태워줘서 고마워’와 ‘그림엽서’, ‘주일 오후’에서 여성 내부의 사랑에 대한 열망과 야멸찬 증오를, 뭐라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개운치 못하지만 달콤하면서 씁쓰름한 그 맛을 느낀 것은 대체 무슨 연유였을까? 분명, 이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착들이 내게 어떤 개운치 못한 맛을 주고, 동시에 그 향수는 앨리스 먼로 특유의 장황하진 않지만 한가득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 같은 묘사적인 필체에 기인하여 풍부한 달콤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개운치 못한 애착 때문일까? 아니면, 달콤하다고 말하기엔 앨리스 먼로의 주인공 여성인물들이 갖는 씁쓸한 자아 풍경 때문일까? 그 씁쓰름한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특히, ‘태워줘서 고마워’에서의 마지막 여자아이의 제목과 똑같은 작별 인사말은 아련하게도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가벼운 이별에 대해 순응하고 있는 듯한 암시를 보이고 있기에, 내내 뒷맛이 텁텁했다. 아예 대놓고 그러한 이야기로 꾸민 ‘그림엽서’는 그 맛은 덜 하지만, 분명 같은 맥락의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여성의 이별이야기이다. 또, ‘주일 오후’의 하녀신분의 소녀가 상류층 신분의 청년의 갑작스런 키스로 발견해 내는 ‘자아 찾기’의 방식이란, 정말 여류작가가 이런 글을 써도 좋은지 하는 생각마저 들게끔 했다. 물론, 그 헛된 ‘자아 찾기’ 방식에 대한 불안의 전조와 예감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렇듯 아이러니하게도 여류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여성 주인공들은 힘없는 약자인 여성으로서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 앞에서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없이 무력하고, 순응적이다. 하지만 이렇듯 씁쓸하고 씁쓰름하다고만 하기엔 그녀의 글엔 다른 풍미가 은근히 배어있다. 특히, 그녀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거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때면 이 향취는 이상하게 히스테릭하게까지 묘사된 그녀의 어머니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덤덤하면서도 낭만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남성성’에 대한 은근한 동경과 함께 자신의 ‘여성성’을 통해 그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극복해 보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해내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붉은 드레스-1946’을 통해서 결국은 자신도 평범한 여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말지만... 작가 내부의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동경의 끊임없는 갈등과 더불어 해결안을 모색하고자 발버둥치는 자아상이 엿보인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통해 그녀는 ‘마살레스’라는, 어쩌면 자신이 추구하거나, 자신의 분신일지도 모를, 어느 시골의 늙고 순진한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그 모든 맛을 버물려 낸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돌로레스 보일’이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가 존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코뮈니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연주를 통해서만이 작가내부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뛰어넘는 자리, 그리고 지나간 시절의 ‘애착’과 ‘향수’가 섞인 오묘한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그 전까지 그녀의 글들에서 나던 씁쓰름하던 맛은 쌉싸름한 맛으로 뒤바뀌게 된다. 또, 그 맛엔 달콤함이 배어있기까지 하다. 그러하기에 씁쓰름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콤함은 씁쓰름함을 중화시키는 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모두에게 그러하듯이, 너무 달콤하기만 하면 그 맛은 금세 질리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쌉싸래한 맛은 어떤 면에서 달콤함과 씁쓰름한 뒷맛을 동시에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그런 맛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런 점에서 볼 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돌로레스 보일’이란 ‘코뮈니케’의 연주는 작가자신이 추구하는 ‘글’에 대한 맛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내가 현재 쓰고 있는 글의 지점과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지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현재, 나는 습작이란 핑계를 대고 있지만, 다소 관념적이고 실험적인 글들을 썼고, 지금도 그런 글들을 쓰고 있다. 아마 이는 내가 시에 대한 집착이 있기에 시의 호흡을 소설로 가져가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 것이다. 동시에 줄곧 그러한 실제적인 관념과 실험 속에서 살아왔던 나로서는 남들과 같은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다룰 어떤 재간과 관심이 없다. 뭐랄까? 그러한 관념과 실험들이 내게 일상이 되어, 그런 것들이 내겐 평범하고 소소한 것들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어찌됐든 현재의 내 재능과 지금까지의 내 살아온 과정, 그리고 내 글의 방향성에 대한 믿음,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글들은 당분간 그런 관념적이거나 실험적인, 더러 좋은 글이라면 시적인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글들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현재 쓸 수밖에 없는 글과 자신이 추구하는 글이란 건 당연히 별개일 수밖에 없고, 언제나 모든 길엔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똑같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만약 자아과잉이 덜하다면, 아마 나는 앨리스 먼로와 같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혹은 다른 자아를 통한 묘사의 형식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덜어내지 못한 나의 관념들과 어떤 집착들은 그러한 글들을 쓸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국엔, 그러한 관념과 집착의 덩어리인 자아를 덜어내는 방법은 글이란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배우지 못한 나로서는 글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달리 방도를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덜어내지 않고는 다른 걸음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 절실히 예감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 예감은 나를 묶어두는 퀴퀴한 족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축지법’을 배운 적도 없고, ‘돈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모든 길엔 여정이 있고, 그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수밖에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이제껏 보아왔기에 인정할 뿐이다. 아니, 그것은 거스르고 싶지만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의 법칙임을 나는 인정하고 있다. 사실, 그러하기에 앨리스 먼로의 글들에 대해서도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이전의 글속에 여성 인물들의 전형성은 부정해도 좋을만한 인물상들이었다. 게다가, 그 밑에 깔린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가장한 은근한 콤플렉스와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얼마든지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비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보여주는 모든 미묘한 맛의 버물림은 그 이전까지의 글들이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견지하게 했고, 과정의 중요함에 대해 새삼 내 스스로 재고하게끔 만든 것이다. 물론, 나는 어떤 글이 시기적으로 먼저인지 나중인지 모른다. 그리고 한 작품, 작품을 떠나 이렇게 그녀의 모든 작품을 한 작품에 뭉뚱그려 비평하는 방식이 결코, 좋은 비평방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반에 흐르는 풍미를, 그리고 그 풍미의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한 작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해서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내가 처한 위치와 앞으로 자리하게 될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은 내 글의 전반적인 풍미를 좌우하게 될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내부의 고유의 갈등,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고 동시에 그 해결안을 찾고자 발버둥 칠 때만이 찾아지거나,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또, 그 자리는 아마도 지금 현재부터 자신의 맨 처음, 애착이든 향수든 혹은 관념이든 이야기든 뭐든지 간에, 그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풍미이거나 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사람됨은 그 시작점부터 차츰차츰 형성되어, 어느 순간이면 단단하게 굳어져버려 스스로 눈치 챌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글을 쓰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런 사람됨의 형성과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그러한 시작점부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대체 어느 지점에 관심을 둘 수 있겠는가? 그러하기에 아직은 조금은 더 느긋한 걸음으로, 어쩌면 앞으로도 쭉 그러한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길 뒤편도 바라보고, 길옆도 바라보면서 긴 여정을 잰 걸음으로 황소가 무겁고 고집스럽게 걷듯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비록 그 여정이 그 때문에 길고 지루할지라도 앨리스 먼로라는 어쩌면 그 과정을 모두 걸었을 작가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란 작품처럼, 종국엔 그 모든 맛을 버물려낼 수 있는 작품을 하나쯤 써낼 수 있다면,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