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2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2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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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다 2 - 시에 고백을 담아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에서 시인은 어떻게 나비의 꿈을 꾸게 된 것일까? 시퍼렇고 서슬 퍼런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가 왜 나비는 무섭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공주 같은 나비였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 어떤 시절 그러했듯이, 세상이란 바다가 무섭지 않았던 걸까? 그렇지만 청무우밭으로 착각하고 간 바다에서 청무우가 소금에 절어지듯 어린 나비는 절어서 되돌아온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우리 새하얀 청춘이 세상이란 소금기 가득한 풍파에 절어지듯이,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쩐 삶만을 삶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아직 꽃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삼월 달에 꽃이 피지 않는다 해도, 그래서 늘 서툴기만 한 우리네 청춘이었다고 해도, 우리 가슴 속에 시리게 품을 문장 하나쯤은 남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 초생달 같이 시린 문장 하나! 그래서 살아가면서 내내 꼬옥 품어주어야 하는 상처 같은, 그렇지만 배움 같은 그런 문장 하나!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왜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물이 되기를 늘 꿈꿔왔다. 내 뜨거운 욕정이 닳고 닳아, 더 이상 그 누군가를 뜨겁게 감싸지 못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꿈꿔왔다. 그래서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고, 늘 되뇌고 되뇌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뇐 만큼 꼭 그만큼, 어느 누구와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게 되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늘 상대가 헤어지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유는 명료했다. 내 불길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혼자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사랑하고 싶다고. 어쩌면 흐르는 물이 되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렇게 줄곧 거짓말을 해왔다.

 

 

 

절벽

 

이상

 

 

꽃이보이지않는다.꽃이향기롭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거

기묘혈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

는들어앉는다.나는눕는다.또꽃이향기롭다.꽃은보이지않는

다.향기가만개한다.나는잊어버리고재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

리고들어간다.나는정말눕는다.아아.꽃이또향기롭다.보이지

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관념적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청춘이라면 모두 이상이라는 이 이상한 사내에게 한번쯤은 꼭 끌려야만 하는 게 법이라도 되는 걸까? 이 시를 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실 잘 난 모르겠다. 그렇지만 읽는 바로 그 순간 내 가슴 속에 울림이 있었다. 절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절벽에 핀 꽃처럼 매달린 어느 사내의 절규가, 울부짖음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꽃의 절규일지도 모르는 그런 울부짖음이······.

 

 

 

 

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진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틀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넣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태어나서 시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학교의 문학 동아리 선배인데, 지금은 ‘시가 그리스도를 죽였다.’란 화두와 함께, 시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들어온 01학번 새내기 여자 후배였다. 선배의 경우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인이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움을 알고, 노래를 아는,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데 01학번 여자 후배의 경우는, 좀 색달랐다. 뭐랄까? 그 발상이 엉뚱하다고 할까? 아니, 처음엔 그렇게 느꼈다.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 태양이니까, 구름아! 태양을 안아주겠니? 이런 어투의 짧은 동시 비슷한 글을 동아리 사이트에 남겼는데, 이상하게 울림이 있었다. 그리고 빗소리를 듣기 위해 우산을 펴는 시부터, 어차피 무너져 내릴 모래성의 허망함을 파도의 말로 따뜻하게 감싸는 시선으로 시를 써내려갔다.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투성이었다. 늘 관념과 관념이란 절망에 허덕이던 내겐 그 모든 언어가 신선하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눈이 내려 검게 질척이는 눈에 대한 절망적인 시를 쓴 적이 있었다. 동아리 사이트 내에 그 시를 올렸는데, 댓글에 후배가 이런 말을 달아 놓았다. 난 그 질척이는 검은 눈들이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느껴진다고. 또 무언가 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쿵하는 울림이 어떤 그림으로 내게 되살아났는지 알 것만 같다. 짙은 농담으로 그려낸 할머니의 싸륵싸륵 눈을 밟는 굽은 발걸음, 그렇게 눈을 녹이는 할머니의 소리,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본다.

 

 

 

 

호남선

 

김준태

 

 

기차는 가고 똥개만 남아 운다

기차는 가고 식은 팥죽만 남아 식는다

기차는 가고 시커멓게 고개를 넘는

깜부기, 깜부기의 대갈통만 남아 벗겨진다

기차는 가는데 빈 지게꾼만 어슬렁거리고

기차는 가는데 잘 배운 놈들은 떠나가는데

못 배운 누이들만 남아 샘물을 긷는데

기차는 가고 아아 기차는 영영 사라져버리고

생솔가지 저녁연기만 허물어진 굴뚝을 뚫고 오르고

술에 취한 홀애비만 육이오의 과부를 어루만지고

농약을 마시고 죽은 머슴이 홀로 죽는다

인정 많은 형님들만 곰보딱지처럼 남아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무덤을 지키며

거머리 우글거린 논바닥에 꼿꼿이 서 있다.

 

 

 그리스 민요 중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민요가 있다. 사실, 민요라기보다는 전통가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겠다.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는 장르로 꽤나 유명한 곡이니까. 여하튼 처음 이 시를 혼자 속으로 읊을 때는 그런 느낌이었다.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남아 있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에 대한 미련으로 자꾸 시계를 보고, 그럼에도 떠나는 사람은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야만하는······. 어쩌면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 근대사 속에서 터키와 전쟁을 치루며, 그렇게 누군가는 칼을 품고서 기차를 타고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렇지만 이 시는 그런 비장미보다는 오히려 내게는 한이 물씬 풍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무 한스럽고 서글퍼서 읊다가 그만 나도 호남사람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몰입을 할 뻔했다. 겨우 네다섯 살 적 서너 해 산 게 전부인 내가, 그리고 기차를 타고 떠가날 잘 배운 놈들의 하나일 게 분명한 내가, 감히 그런 말을 토할 뻔했다.

 

 

 

베트남 Ⅰ

 

김명인

 

 

먼지를 일으키며 차가 떠났다, 로이

너는 달려오다 엎어지고

두고두고 포성에 뒤집히던 산천도 끝없이

따라오며 먼지 속에 파묻혔다 오오래

떨칠 수 없는 나라의 여자, 로이

너는 거기까지 따라와 벌거벗은 내 누이

 

로이, 월남군 포병 대위의 제 3부인

남편은 출정중이고 전쟁은

죽은 전남편이 선생이었던 국민학교까지 밀어닥쳐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레시션 박스

속에서도 가랑이 벌려 놓으면

주신 몸은 팔고 팔아도 하나님 차지는 남는다고 웃던

 

로이, 너는 잘 먹지도 입지도 못하였지만

깡마른 네 몸뚱아리 어디에 꿈꾸는 살을 숨겨

찢어진 천막 틈새로 꺾인 깃대 끝으로

다친 손가락 가만히 들어올려 올라가 걸리는 푸른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행복한가고

 

네가 물어서

생각하면 나도 행복했을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다

잊어야 할 것들 정작 잊히지 않는 땅 끝으로 끌려가며

나는 예사로운 일에조차 앞날 흐려 어두운데

뻑뻑한 눈 비비고 또 볼수록, 로이

적실 것 더 없는 세상 너는 부질없어도 비 되어 내리는지

우리가 함께 맨살인데 몸 섞지 않고서야 그 무슨

우연으로 널 다시 만날 수 있겠느냐

로이, 만난대서 널 껴안을 수 있겠느냐

 

 

 나는 물론 베트남을 잘 모른다. 내가 아는 베트남은 아버지의 베트남이다. 신학대를 가겠다고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후 가출을 하고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 놓여진 17장의 편지, 그 속에 아버지의 빼곡한 베트남과 신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신학교를 휴학하고서 방황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그 때,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의 일기장 속에 베트남의 사진들과 아버지의 글들로 베트남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베트남에 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로이에 관해선?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시를 택했는지. 그렇지만 스무 살 때 처음 어느 선배가 루오의 화집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게 루오 그림 중 유독 ‘창부’라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깔의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한 허리, 그 어디에도 내가 생각하던 기존의 창부의 모습은 없었다. 단지, 거울 속 지친 기색의 창부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화집을 사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서 여인의 슬픔을 이해해 보려 하였고, 드가의 무희들의 공연 뒤 그 시린 등 뒤를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내 청춘의 시린 등 뒤에 대한 기억을 보듬어 보려 하였다. 그리고 화사한 모네의 그림 속 여인에게서 환상을 품어보았다. 개양귀비 핀 들판에서 서 있는 여인의 풍경과 우산을 들고 뒤돌아선 여인의 자태에서 눈부신 여성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땐 몰랐다. 그 모든 시작이었던 루오의 그림의 창부로부터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 지, 그땐 미처 몰랐다. 축 늘어진 가슴과 오동통하게 부풀어 올라 어디가 허리인지 배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는 어느 창부에게서, 그렇게 지친 피로의 기색을 띤 조금은 못생긴 창부에게서, 내가 얼마나 큰 위안을 얻게 될지. 문득, 내 20대 때의 모든 연민들이 가증스럽기만 하다.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

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우리말들을 모르며, 얼마나 많은 꽃들의 이름을 모르는지 생각해 보았다. 쑥부쟁이, 벌개미취, 자주달개비, 부추꽃,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이름들, 그러하기에 당연히 생경한 꽃의 정경과 향기들. 아무리 인터넷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고 들여다보아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저 아름다운 꽃의 말들로 사람들의 얼굴마다 형상을 그려주고, 새들의 날개로 옷을 지어주고, 나무와 들풀의 뿌리로 밥을 짓고, 산과 강의 풍경들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툰 시를 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 삶이 쭉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박남준이란 시인도 나처럼 그러하지 않았을까, 문득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나는 저 모든 꽃과 새와 들풀의 말들을 모르지만, 나무를 하고 아궁이에 불을 떼는 법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원’이라는 산골짜기 마을에 살면서, 나는 하루 일과로 나무를 해오면 장작을 쪼개고, 아궁이는 아니지만 기름보일러 대신 사용하는 나무보일러에 불을 피우곤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박남준 시인처럼 서툰 내 삶을, 서툰 내 시를 한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이 남은 재들을 부대자루에 담아 밭에 뿌리면서, 또 다른 환생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서툰 나비가 바다에 절어서 돌아와 생긴 시린 초생달이 서서히 차올라 보름달보다 환환 달빛을 드리울 그런 환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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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모리스 피알라 감독, 모리스 피알라 외 출연 / 무비플렉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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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서 - 소녀의 순결한 죽음에 관하여

 

 

 '사탄의 태양 아래서', 스무 살 적 기독교 문학이란 장르에 대해 공부하고자하여, 우연히 듣게 된 이 제목만으로도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을 사탄의 태양이라 하고, 것도 모자라 그 아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사탄이라는 악의 실체를 인간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그 제목으로 인해, 나는 처음으로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책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작품이 번역된 적은 있지만, 출판사가 망해서인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란 영화를 보게 되면서, 나는 우리나라에 출판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또 다른 작품들인 '기쁨'과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를 알게 되어 구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유독,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많이 영화화했던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시골 사제의 일기'를 보게 됨으로써, 대충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윤곽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소설이나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너무나 현란한 관념과 몽상이 뒤섞인 이미지들의 축제이기에, 해석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너무나도 신학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실제로 신학적인 고뇌 속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책과 영화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 개인적으론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 중 유독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소녀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무언가 간과할 수 없는 이미지들로 내게 각인되어져, 지금부터 나는 이 뭉뚱그렸게 일그러진 이 형상들의 이미지들을 영화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중심으로 해서 쫓아 가보고자 한다.

 

 

  도니상은 무능한 젊은 신부이다. 신학교 시절부터 형편없는 재능과 의지들로 인해 유독 튀었던 그는, 그렇지만 신과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열정을 가지고 있는 신부이다. 이 때문에 그는 늘 깊은 신앙적 고뇌의 한 가운데 던져져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 신부 밑에서 보좌하고 있는 교구 생활조차도 매우 적응해하기 힘들어하며, 늘 수도원에서 은신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깊은 신앙의 고뇌로 인해 일반 신도들에게서 신이 날마다 처참하게 외면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무.력.하.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는 신을 그는 구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신을 자책하며,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다시 그 때문에, 그의 건강 또한 사제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돕기 위해 늘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해, 자신을 궁지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절망의 궁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 박혀 있던 악의 실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신부들이 아닌, 가장 진실하고자 노력했던 도니상에게 왜 그런 악마의 존재가 현현하는가이다. 사실, 이것은 쉬 설명될 수 없는 문제지만, 분명한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고뇌가 극명하면 극명할수록 악의 실체 그리고 원죄의식에 접근하게 되어, 자신을 구원이 아닌 절망의 늪 가운데로 몰아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아주 쉽게 구원의 확신과 타협을 하여, 신을 자신의 욕망의 범주 한 가운데로 예속시켜 버리는 이들에겐, 악의 실체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원어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도니상과 같이 끊임없는 구원의 목마름과 물음 가운데 놓인 이들에겐 꼭 한번쯤은 바로 이러한 악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여하튼 그로 인해 도니상은 자신의 양심 속에서 현현한 악의 실체와 입 맞추게 되고, 이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옭아매져 들어가는 악의 올무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속에서 그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적... 그러나 기적이란 것은 사실 별 게 아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악의 실체에 대해, 절망해 대해, 깊숙이 내려가게 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악과 절망에 대해서 투시하고, 다른 인간들의 욕망을 간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필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그러한 절망과 악의 실체 그리고 우리 욕망의 근본을 다 파헤칠 수 있다 하여도, 그리고 또 그러한 능력을 아무리 인간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사용한다 하여도, 오히려 그것이 다른 이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원죄의 구렁텅이 안으로 집어넣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영화는 도니상과 무쉐트와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악의 실체의 올무가 얼마나 잔인한 가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무쉐트.. 16살의 무쉐트는 영화 속에서 완벽한 악녀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가녀린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의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그러하기에 그녀는 어쩌면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한 존재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이반 표도로비치와 같이 매우 연약하고,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매우 순결하고 고상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의 이러한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매우 포착하기 힘들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배경이 나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강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면, 그녀는 일단 자신의 놓인 환경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끔찍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없이 자유로워지기 원하는 존재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란 존재는 늘 그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의 상징으로써 상정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그녀의 자유에 대한 열망의 표출은 영화 속에선 남성편력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 역시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특히, 근대라는 시대상 속에서) 여성이란 존재, 더군다나 감성이 지극히 예민한 소녀란 존재가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순결이란 처녀성을 무기화 하여, 남자란 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독해질 수 없는 그녀는 한 가난한 소설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 나면서, 다시금 아버지로 인해 강제로 그 가난한 소설가에게로 귀속되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 그리고 그 마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동경의 도시 파리로 향하고 싶다. 그런데 그 가난한 소설가가 꿈꾸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녀와 함께 그 마을에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것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영영 도망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시에, 그 지역 시의원이면서 의사인 갈레란 남자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의 정부로서 그녀의 모든 고향의 삶을 청산하고 파리로 도망갈 것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사랑하던 그 가난한 소설가라는 걸림돌을 넘어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야 어떻든 간에, 살인 충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은 다음 날, 무쉐트는 식탁에 놓인 그의 총을 주워든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처럼 똑같이 그녀를 억압하려는, 영영 고향에 자신을 가둬두려는, 가난한 소설가의 턱에 대고 총성을 울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총에 정말로 총알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충동에 의해 방아쇠를 당겼을 뿐, 정말로 살인이 일어날 지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대로 살인이 일어났고, 이제 그로 인해 그녀는 완전범죄를 위해 자신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낸 후, 그 지역 시의원이자 의사인 '갈레'에게로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순진하게 꿈꾸었던 파리로의 여행을 갈레에게 제안하지만, 갈레는 완벽하게 속물인 인간이기에, 여태껏 무쉐트 자신이 오히려 갈레에게 이용되어져 왔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아니, 영특한 그녀는 이미 그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애인이었던 가난한 소설가에 대한 살인의 죄책감으로 그녀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심적으로 공범자이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을 갈레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쉐트는 갈레에게 자신이 살인을 했음을 고백했음에도 전혀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어, 이제 자신이 사랑하던 소설가와 자주 만났던 마을 외곽 우물가에서 자살을 꿈꾸며 서성이게 된다. 그런데 그 때 악마에게서 능력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도니상 신부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의 키스로 사람의 마음을 투시할 수 있게 된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를 보자마자, 바로 그간 무쉐트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가기에 급급한 무쉐트는 도니상 신부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하기에 도니상은 무쉐트에게 이제껏 일어난 그 모든 죄가 무쉐트 자신이 벌인 일이 아닌, 무쉐트와 혼연 되어 섞인, 그의 뿌리부터 그와 가까운 모든 존재에서 비롯된 원죄 바로, 그 악의 실체로부터 벌어진 일이며, 무쉐트의 순결한 영혼이 그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거기에 얽매어져 파괴되어지길 원했음을 밝히게 된다. 그렇지만 오히려 무쉐트는 그러한 원죄의식에서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욕망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음을 그로 인해 깨닫게 되어, 자살을 하게 되고... 도니상 신부는 그 때문에 자신의 교구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니상 신부는 무쉐트의 지울 수 없는 형상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팔고서라도 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모든 욕망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자신이 악마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죽은 아이를 살려냄으로써, 모든 신의 섭리를 거스른 자신의 파멸을 신에게 고백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갈등 가운데서 자신의 몸 하나 가눌 수 없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다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

 

 

 무쉐트.. 그리고 원죄.. 도니상 신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이 복잡한 관계의 고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신학생으로서 젊은 도니상 신부의 고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지만, 무쉐트의 경우는 도저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 원작가인 베르나노스의 경우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다시금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라는 글을 통해, 무쉐트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의 경우,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의 무쉐트와 달리, 같은 자살의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살이 구원으로 귀결되어지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소설 '기쁨'의 경우에서는 좀 더 확연하게 소녀의 죽음이 갖는 이미지가 구원 쪽으로 그 의미가 드러나 지게 된다. 왜냐하면 ‘샹탈’이라는 지극히 순결한 소녀의 존재가 지극히 이기적이며, 지극히 비열한 소녀의 아버지와 그의 식구들로 인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어떻게 소녀의 순결이 이 땅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살며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는 비록 소녀는 아니지만, 한 젊은 신부의 고뇌와 죽음을 통해 이러한 모든 소녀의 죽음들에 대해, '그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귀결을 내놓고 있다. 즉, 베르나노스는 소녀란 이미지를 통해 줄곧 순결이라는 이미지에 집착하여왔음을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이러한 소녀와 순결이란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나는 뭉크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고자 한다.

 

 

 흔히 많은 이들에게 '절규' 혹은 '비명'으로 각인되어 있는 뭉크의 경우, 그의 다른 많은 그림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관념에 대한 상징주의적 그림 뿐 아니라, 많은 소녀들의 그림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소녀의 그림들이 주로 순백이나 빨간 색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다리 위의 소녀들' 그리고 '빨간 색과 흰색'이란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표현이 두드러져 있음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빨간 색과 흰색으로 대비되어져 있는 소녀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 우울한 소녀의 모습이 어느새 빨갛게 달아오를 것처럼만 느끼게 된다. 특히, 기묘한 달빛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녀들이 사내들과 뒤섞여 춤을 추고 있는 그의 다른 그림 속에선 하얗던 소녀마저도 빨갛게 변해버리면서, 마치 죽음과 키스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데 소녀는 간 데 없고, 발가벗은 나부의 모습을 한 요염한 여자가 남자의 시신 위에서 일어나, 이상한 해골처럼 변한 남자 혹은 뭉크가 길길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렇다면 대체 소녀는 어디로 가고, 남자의 마른 시체 한 구와 길길이 비명을 지르는 해골만 남아 있단 말인가? 어느새 새하얗게 순결했던 소녀가 붉게 달라올라 요염한 나신의 여자로 변해버린 것일까?

 

 

 

 

 

 

 

 

 

 

 

 

 

 

 

 

 

 


 너무나도 보편화된 관념들 속에서, 우리는 뭉크와 같이, 소녀의 순결이 사라져 버리고, 소녀가 여자로 변신한다는 사실에 많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결의식이 단순히 성적관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 지게 된다.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의 경우, 오히려 순결은 너무나도 잔혹한 의식이다. 그녀는 차라리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악녀가 되길 원하였고, 가차 없이 자신의 몸을 남자들에게 내맡겼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순결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녀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가난한 소설가와의 사랑을 통해 더욱 명백히 그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금껏 자신을 옭아매 온 족쇄인지는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시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순결의식을 더럽히기 위해,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자신의 살인충동을 실현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그녀는 소설가와의 추억이 깃든 우물가에서 서성인다. 그런데 이제 타인의 속을 꿰뚫어 보는 도니상 신부가 갑작스레 나타나, 그녀에게 그러한 진실을 명백히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얼마나 순결하기를 집착하고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엇나가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을 원죄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니상 신부는 과감히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의미하는 바이다. 그녀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증오해왔던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대로 혼연 되어져, 평생 그 올무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순결이란 감옥 속에서... 그렇다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순결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어떻게 원죄의식으로 귀결되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 우리는 무쉐트를 통해, 도니상 신부를 통해 가늠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무쉐트와 같이 순결한 소녀의 이미지를 말살시킨 남자로 대변되는 우리이기에, 뭉크와 같이 여성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마치 자신이 무쉐트에게 살해당한 가난한 소설가라도 되는 양, 비명을 길길이 지를 수밖에, 그럴 수밖에 없단 말인가? 혹은 순결이고, 원죄고, 이러한 관념의 잔치들을 벗어나, 신이 없다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믿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반 표도로비치처럼 아버지의 살해라도 교사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우리에게 순결이란 건 커다란 족쇄 이외에 그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무쉐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까웠기에,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을 통해서 이미 원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인 순결이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돋아 오르는 순결의식을 지켜내기 위해 소녀들의 또 다른 죽음들을 설정하고 있다. 결국, 그 잔혹한 순결의식을 포기하지 않고서, '모든 것은 은총이다'라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계속되는 소녀의 죽음을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순결이란 것이 더욱 원죄로, 악의 실체로 옭아매 들어가는 사슬일지라도, 그를 통해서만이 인간 구원이 가능하고 신의 은총을 인간이 확인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그에게서 뭉크와 같이 소녀가 농염한 여자의 나부로서 변신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 조차도 뭉크 그림에서의 남자를 살해하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 순결이란 게 무엇이기에, 우리를 그 원죄의식이란 절망 가운데에서 다시금 구원으로 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쉐트의 죽음을 단지, 또 다른 무쉐트의 죽음을 통한 구원으로 그렇게 쉽게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또 다른 무쉐트의 이야기'에선,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무쉐트와 달리, 순결에 대한 의식이 없는 가운데, 갑작스레 어느 날 숲 속에서 밀렵꾼에게 겁탈 당하게 되면서, 되려 그 동안 잠재되었던 무쉐트의 순결의 의식이 되살아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무쉐트는 다시 더럽혀 지지 않을 자신의 고귀한 순결을 위해, '사탄의 태양 아래서' 무쉐트가 미처 스스로 떨어지지 못한 마을 외곽 어느 우물가에서,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그로써 영혼의 쌍생아인 두 무쉐트 모두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처럼 보여 지고 있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자살처럼...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무쉐트를 구원하고, 겁탈로써 오히려 새롭게 피어난 자신의 순결을 영원불변하도록 간직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소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혹은 구원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소녀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자살이라는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너무나도 잔혹한 것 아닐까? 그리고 다시 나는 되물어 본다. 대체 무엇 때문에, 소녀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이토록 순결에 집착해야 한단 말인가?

 

 

 오늘날 이 시대에 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순결이란 족쇄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 또한, 감히 순결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금기와도 같이 느끼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우리에게 갈증처럼 되살아나는 순결의식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남자와 혹은 어떤 여자와 잤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순결이 끝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조금 더 정결한 사랑을, 조금 더 순수한 사랑을 꿈꾸면서, 자신에게 가시처럼 돋아난 순결의 보호막을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시금, 그 이전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닌,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된다. 아니, 매 순간 새롭게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그러한 순결에 대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다시 새로운 사랑을 꿈꿀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배신의 막다른 골목길로 몰아세우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어차피 불결해진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놓아 버리고, 포기해 버리는... 그래서 마치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그 잔혹한 원죄 의식에 놓인, 우리의 가련한 무쉐트와도 같이..

 

 

 아마 이쯤 되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사탄의 태양 아래서'를 접하면서 느꼈던 혼돈들을 그대로 느꼈으리라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순결이란 것이 이곳에선 너무나도 간단치 않고 복잡하게 엉켜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순결의식은 순결의식이고, 원죄의식은 원죄의식이라고 하면 매우 간단할 것을, 영화는 아니, 베르나노스는 그 둘 사이에 전혀 명확한 구분 없이 헝클어진 경계를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시금,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사탄의 태양 아래 놓인 은총이라고 결론짓고, 우리의 잃어버린 순결에 대한 집착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사탄의 태양이라는 뜨거운 불구덩이 가운데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 뜨거운 불구덩이 지옥 가운데서 정금처럼 정결하게 내어 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녕, 그 벗어나기 힘든 순결에 대해 아직 집착하는 이 있다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나방이 불길에 아스러지는 그 처참하면서도 황홀한 자태로..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런 이들에게 정말로 순결한 사랑의 입맞춤 있기를, 무력하게 바라며 글을 마친다.

 

 

 

 

 

 

 

 

P.S.

 

 글 서두에 '사탄의 태양 아래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고 했지만, 이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구해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읽어 보았습니다. 영화와 약간 구성이 다르지만, 맥락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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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뿌리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
김수영 지음 / 민음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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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1 -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의 자태

 

 

 근래 내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남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말 그대로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해도 200만원을 겨우 버는데, 나는 일주일에 그 정도 일하고 그 만큼을 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자유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 나는 대학로의 방송대 도서관으로 가서 공부를 하는 시늉을 한다. 실상, 공부보다는 주로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 전부지만, 그 만큼 여유롭고 한가하다. 말 그대로 일종의 선비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인지 다소 게을러져서 평소 10시 넘어서 일어나는 건 기본이고, 어쩔 때는 12시 넘어 2~3시까지 잠에 취해 있을 때가 있다. 물론, 늦게까지 잠을 안자는 부엉이 생활패턴이 그 주원인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다음 날 마뜩하게 할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나는 그 무언가를 상실했다. 10대 후반부터 지금껏 나를 지탱해 주던 그 무언가를.

 

  외로움, 그리움 혹은 공허함, 이런 것들은 사실 이제까지 줄곧 너무나 익숙하게 곁에 있어 와서인지 그리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때때로 이런 감정들에 휩싸일 때면 주체할 길이 없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나는 그런 주기들을 견디는 법들을 배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상실감은 무엇 때문일까? 오후 3시 늦게 일어나서, 5시께나 대학로 도서관에 당도하여 하릴없이 산책이나 하는 내 자신의 일과에 대한 무력감? 혹은 그럴 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이제 끝나버린 관계들의 아쉬움? 이 역시 모두 앞에서 말한 범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결정적으로 상실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내가 그 동안 그토록 두려워하며 경계했던 열정이다. 열정.......

 

  십대 후반부터 스무 살까지 품었던 신에 관한 열정, 그리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 스무 살 적, 한 여자에게 품었던 열정, 신과 여자 모두 잃고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방황에 품었던 열정, 이런 방황 가운데 훌쩍 서른이 되어 먹고살기 위해 영어에 매달렸던 열정, 끝으로 최근까지 가슴 속에 품었던 막연한 프랑스에 관한 열정 등등. 이제껏 나는 이런 열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었고,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신에 관한 열정 때문에 신을 잃었고, 한 여자에 관한 열정 때문에 그 여자를 잃었고, 방황에 대한 열정 때문에 종국엔 방황의 길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떤 열정을 상실했음을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의 하루의 일과 중에서 산책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루에 두 번 정도 하는데, 학교에 당도해서 한 번, 오후 저녁 식사를 하고나서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두 번 정도 한 번 할 때 마다 30분 이상 소요되는 산책을 즐기고 있다. 장소는 대학로 방송대와 가까운 낙산공원이다. 그리고 산책을 할 때면 나는 위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때론 무력해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어떤 영감을 받아 시를 쓰기도 하고, 소설에 대한 갈피를 잡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내 화두는 나의 이런 상실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이었다. 아니, 어떤 부름이었다. 산책 코스 중 내가 혼자서 명명한 ‘생각 벤치’라는 곳이 있다. 다른 곳의 벤치와 달리 대학로의 전망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라 무언가 탁 막혔던 가슴이 트이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즈넉해져서 그렇게 명명하였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이런 저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결국엔 숱한 상실감들에 지쳐 생각 벤치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그 때, 가슴 속에서 어떤 시 구절이 울렸다.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같고

    

 

  김수영의 유명한 ‘꽃잎1’의 마지막 시 구절이었다. 갑자기 왜 그 구절이 떠올랐던 것일까? 그 어떤 시보다도 혁명적인 그 시가 왜 나의 이런 삶 가운데에 문득 떠오른 것일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 어떤 위로가 되는 미지의 목소리처럼 가슴 속에 남아 글을 써보려 시도해 보았다. 이 또한 거의 10년만이었던 거 같다. 어떤 스터디에서 내준 숙제가 아닌 내 스스로 내밀한 고백을 담아 무언가 평론을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든 건. 그런데 좀처럼 글이 잘 이어져 나가지가 않았다. 지금의 내 상황과 이 혁명적인 시를 도무지 연결할 고리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쓸데없는 내 얘기 뿐. 어디에도 내밀한 고백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장 써내려간 글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며칠 째 그 부름에 응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에브리맨’을 읽게 되었다. 속도를 높여, 페이지를 넘겨갈 수록 확신이 들었다. 부름에 응해야한다는. 그러하기에 지금 이 평은 어쩌면 ‘에브리맨’에 관한 평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꽃잎1’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혹은 그저 쓸데없는 내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죽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이런 문제에 대해 나는 그다지 할 말이 있지가 않다. 신의 문제의 경우는 스스로 뿌리를 잘랐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할 것이 없고, 죽음의 경우엔 실제로 내 경험의 테두리를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작 30대 중반에 내가 감히 어떻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일도 안 되는 허방을 짚는 짓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최근까지는 분명이 그랬었다. 그런데 근 2년 사이 나는 죽음에 대해 이제는 조금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 버리게 되었다. 다만 벌써 그 이야기를 발설하는 것이 옳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단순히 대화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건 별 일 아니지만, 이렇게 글로 그 죽음에 대해 표현한다는 것은 사뭇 다른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때론 내밀한 글들이란 건 사장되지 않고 되살아나서 칼날을 들이밀기도 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한다.

 

  눈을 떴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한 친구의 모습이 어리었다. 모두 괜찮으냐며 알아보겠느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내가 하얀 병원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주일간 내가 혼수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 밤,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아버지가 문을 열어보니 내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더란다. 그래서 병원에 급하게 데려왔는데, 의사 말이 뇌종양이라고 했다. 뇌종양....... 이상하게 어떤 울림도 충격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나와 한통속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친근한 언어로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 의사 말에 따르면 태어날 때부터 난 뇌종양을 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술을 좋아하는 경우 30대 중반에 나와 같은 증세가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내 경우에는 빨리 발견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종양의 진행 속도 또한 급성이 아닌 만성이라 제거하면 바로 완치가능하다고 했다. 비록 8시간의 대수술과 약 1달간의 입원생활을 더 해야 했지만, 실제로 두 달 이후 나는 이 전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내 몸이 호전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의사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술을 몇 달 후엔 한두 잔씩 마시기 시작하였고, 1년쯤 지나서는 매일 같이 챙겨 먹어야 하는 약도 빼먹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한 3개월 전쯤 그 일이 발생했다.

 

  그 날은 사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날 스터디 모임이 있었는데 후배가 발제를 하는 날이었다. 그 당시 스터디의 경우 내 2~3명의 친한 후배와 외부에서 아는 사람의 경로로 들어온 3~4명의 사람들로 구성을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추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말은 문학 모임이었는데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은 둘, 셋 정도 됐고, 나머지는 대체 왜 그 모임을 참가했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여하튼 그러한 간극 때문인지 그 날도 문학이 아닌 영화로 스터디 주제를 삼아 이야기를 했는데, 외부에서 온 멤버들이 가관도 아니었다. 대체 영화는 보고 왔는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최소한의 예의로 글을 써오는 것조차 하질 않고서 마구 발제자를 공격해대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떤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 스스로의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무기로 삼아 허세를 떠는데, 그 때부터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닌 과민해진 나는 심한 두통을 느껴야 했다. 이제까지 평생 처음으로 느껴본 두통이었다. 사실, 난 뇌종양을 달고 태어났음에도 평생 두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 탓에 스터디가 끝나고서 돌아오는 전철에서까지 나는 그것이 기분 탓인지 두통 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언가 기분을 전환할 마음으로 후배의 기분도 풀어줄 겸해서, 발제했던 후배에게 술 한 잔을 제의했다. 안주는 석화였고, 술은 소주였다. 한 잔을 들이키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두통이 아닌 기분 탓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약 20분, 나의 기억은 소실되어 버렸다. 앰뷸런스 실리면서부터 드문드문 기억이 나기는 한다. 계속 구역질을 하고, 고통스러웠던.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후배와 함께 병원 침상에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두 시간쯤 잠이 든 모양이었다. 놀란 어머니와 아버지는 술을 왜 마셨냐고 다그치기도 하시고, 대체 약을 얼마나 안 먹었으면 약물 기준치가 떨어져서 그 모양이 된 거냐고 말씀하셨다. 그때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두려움이란 걸. 이제부터 내 몸은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약 3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 동안 작지만 나에게는 크다면 큰 변화가 생겼다. 먼저 프랑스에 대한 나의 동경을 접었다. 물론 앞으로 5년 정도 지나 완치 판정이 내려지면, 다시 나는 또 프랑스를 꿈꿀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 내가 프랑스를 꿈꾼다는 것은 그 막연함만큼 먼 이야기처럼만 느껴진다. 아니, 사실 내가 프랑스에 대한 꿈을 접은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이냐면, 더 이상 프랑스를 핑계로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염원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지금 쓰지 못하면, 나는 언제 쓸지 알 수가 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영 나는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난 프랑스라는 그 막연한 이름을 통해 얼마나 글쓰기를 미뤄왔던가?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내 눈 앞에, 내 손에,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을.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그 제목처럼 보통남자이다. 예술가이기엔 너무 안정 지향적이고, 그렇다고 안정만을 추구하지는 못하여, 3번의 실패한 결혼을 한. 그래서 말년을 외롭게 병과 싸우다 간 보통남자이다. 이 소설 속에서 죽음이란 건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무겁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까닭으로 죽음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저자는 말한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라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이제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우스워져버림을 깨닫는다. 은퇴 후 그림만 그리겠다는 그 꿈도, 망각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그 대단한 결심들도, 그가 한 평생 모아온 책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죽음 앞에서도 각자 주어진 악전고투를 치러간다. 그의 동료 중 어떤 이는 자서전을 쓰려하고, 어떤 이는 그림을 배우는데 열중을 해보고, 주인공은 죽음이란 의미와 맞닥뜨려 그 속에서 동시에 생의 의지를 되새겨 본다. 나는 감히 이렇게 직면한 죽음과 나의 죽음의 문제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나의 죽음의 문제는 이렇게 일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일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되레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하기에 생명으로 가닿기 위한 느린 걸음이어야만 한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같고

  혁명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같고

    

 

  대학 때 한 선배가 매 주 열리던 ‘낚시촌’이라는 시낭송 모임에서 이 시를 낭송한 적이 있었다. 평소 워낙 시인 같은 선배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가슴 속에서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뜨뜻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 전까지 단순하게 내게 교과서에 나오는 ‘풀잎’, ‘폭포’를 쓴 저항시인으로만 알아왔던 김수영 시인이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저항과 혁명정신은 내가 기존에 알던 저항과 혁명이 아니었다.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가 아닌,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은 느리고 부단하게 흔들리며, 떨리는 불안이었음을 그제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스스로 안위하듯 한 번 더 읊조린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같고

 

 

  이제 두서도 없고 복잡한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할 거 같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의 부름에 대한 내 대답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에브리맨’에서의 죽음의 일상화를 통해 깡그리 잃어버린 열정에 관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실, 처음부터 나는 그 답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마지막 구절이었다.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은 나락. 그런 느리고 유려한 흔들림. 많이는 아니고 그렇게 조금. 사실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 무언가를 못한다고 해서 그리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당장 엄청난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의 이 선비놀음으로 인해 앞으로 다소 궁색한 삶이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전혀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을 통해 나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 있다. 오랫동안 나의 화두의 하나였던 뿌리를 자른 꽃잎이 바람에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의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꽃잎이 어딘가로 날아오르는가와 그리고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는 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실 어차피 그 꽃잎은 어딘가에서 모르게 썩어질 것이고, 그 자양분을 바탕으로 다른 꽃을 피어낼 것이다. 그러하기에 꽃잎이 어딘가로 가거나 머무는 문제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이다.

 

  언젠가 몰래 담배를 피러 나온 학교 담벼락과 마주한 꽃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봄이면 매일 눈처럼 떨어지는 것이 꽃잎이지만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그만 두 눈을 적시고 말았다. 그리고 부끄러워 그 거리를 뛰어서 인적이 드문 놀이터로 가, 서럽게 울었다.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 아무리 눈물을 흘리려 발버둥 쳐도 한 방울도 흘려지지 않는 눈물이 왜 갑자기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는지. 몇 년이 지나고서 문득 그 일을 기억나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때 나는 그 떨어지는 꽃잎의 자태를 통해서 내 청춘의 절정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비록 그 순간은 짧았지만, 아직도 내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고 정지한 화면으로써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그 때 그 꽃잎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음을. 그러하기에 아직도 나중에 떨어지는 작은 꽃잎들이 내 가슴속에서 천천히 묵직하게, 그렇지만 절정이란 이름의 유려한 자태로 나락해가는 풍경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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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 (2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장 피에르 주네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아멜리에 - 가장 작은 일상에로의 그녀의 침투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머라는 것은 욕이라는 것이 들어가야 제 맛이다. 우리의 가장 간지러운 곳을 살살 긁어 주는 것처럼 욕이란 건 참 묘한 뉘앙스의 매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경우 세계에서 욕에 관한 어휘가 가장 많다고 하니, 우리 민족만큼 그 효용 가치에 대 해 절실히 고민해 본 민족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지 얼마 전 한 참 영화극장에서 개봉한 ‘공공의 적’은 그러한 우리의 뉘앙스의 틈새를 잘 파고들어, 통렬하고 시원한 유쾌함을 선사해 준 바가 있다. 사실 강석우식 개그라는 것이 원래 투캅스에서도 이미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졸렬함을 더티하지 않게 섞어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식이도 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말리에를 이야기하려는 찰나, 욕과 ‘공공의 적’을 들먹이면서 처음부터 삼천포로 빠지느냐 하면, 프랑스식 코미디인 아멜리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우린 가끔 프랑스식의 코미디를 접할 때 조금 어이가 없을 때가 많다. 이건 완전히 몽상적인 것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개그를 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같이 욕과 비린 인간군상의 리얼리즘이란 코미디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참으로 프랑스식 유머는 부르주아하고 느끼한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유머가 지닌 어처구니 없는 풍자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이라는 그 이유로 우리의 현실을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진 않게 다시 바라보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내 개인적으론 이 아멜리에라는 작품이 더욱 요즈음 내 상황과 엇물려 그러한 감성과 단상들을 제공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 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뭔가 유치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몇 시 몇 분에 몇 번의 날갯짓을 하는 쇠파리 얘기와 뜬금없는 사람들의 우연 속에 누군가의 정자가 누구가의 난자를 침투해 들어가는 이야기.. 그리고 아멜리에의 탄생.. 그것도 모질라 이제 아멜리에의 가족에 대한 인물 묘사는 다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물 묘사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히스테리투성의 어머니, 그리고 자기 세계에 옹골차게 빠져 있는 아버지... 특히, 이 집안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의사라는 아버지가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청지기를 대고서 진찰을 하는데, 아버지에게 안기길 원해 심하게 콩닥거리는 딸의 심장 박동 수에 딸을 심장병이라 착각하여, 딸을 일반학교로 보내지 않고 그냥 집안에서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황당한 설정도 얼마 안 가, 어느 성당에서 자살 기도를 하여 떨어지는 사람에 깔려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이제 아말리에는 완전한 외톨이가 되어버린다는 무리한 설정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쯤 되면 보통, 평범한 영화의 분위기라면 무언가 슬픈 사랑의 예감이라든가 인간내면의 깊은 상처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가정 속에서 이 영화는 되려, 고독한 아멜리에의 공상의 순수함과 천진함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여하튼 영화의 서론은 이쯤에서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 다 자란 아멜리에라는 처녀에 대한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

 

  23세살의 아멜리에는 어느 술집에서 서빙을 하며 혼자 살아간다. 그리고 주말엔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그밖에 달리 사람과의 접촉은 없어, 주로 사람을 관찰하거나 혼자 공상하기를 즐긴다. 사실 그녀의 이웃들 또한 괴팍하기 그지없어 각자 자신의 똬리 속에서 나오려 하질 않는 인간들이라 그녀가 호기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기도 하다. 예를 들면, 뼈가 약하여 ‘유리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맞은편 밑에 층 노인은 자신의 집안의 모든 물건들에 헝겊을 둘러싸고서 자신 또한 푹신한 헝겊으로 칭칭 감아 외부로 은둔한 채 평생 고독하게 그림만을 그리며 살고 있다든지, 집주인인 듯한 관리인 아주머니는 십 수 년 전 어떤 여자와 눈이 맞아 파나마로 달아난 남편에 대한 집착을 지우지 못하고 평생 자신의 젊을 적에 남편이 자신에게 보냈던 연애편지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고, 아멜리에가 항상 들리는 채소가게에 일하는 청년은 사람보다 채소를 사랑하는 약간은 아둔한 사람이며, 그 주인은 그런 청년을 맨날 못살게 구는 재미로 살고, 아멜리에가 일하는 술집의 단골들 중에는 한 여자를 스토킹 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이 있다든지, 평생 작가라 하여 실패한 자신의 삶에만 골몰하는 어처구니없는 소설가라든지, 심한 신경쇠약증이 있는 담배가판대의 아줌마라든가... 온통 비정상적이고 괴팍한 사람들만 가득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꼬이고 꼬인 인간군상의 모습 속에서 아주 우연히 아멜리에에게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 눈에 띄게 된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아파트의 한 귀퉁이 속에 십 수 년 전부터 숨겨져 있던, 이젠 다 늙은 중년 노인이 되어 있을 법한 사람의 장난감 상자였다. 그런데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일까? 일단, 이 답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어떻게 이 장난감 상자를 통해 엉켜진 인간군상의 매듭이 풀어져 가는 지를 먼저 지켜보기로 해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주 우연히 수 십 년 전 어느 소년의 장난감 상자를 아멜리에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이 장난감 상자를 만일 이제는 늙은 중년이 되었을 그 사람이 되찾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돌변하지 않을까? 너무나 천진한 아멜리에는 그리고서 바로 결심하게 된다. 이 보물 상자의 주인을 찾아주겠노라고.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기뻐한다면 자신은 평생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여주인공 아멜리에는 보물 상자의 주인을 수소문하기 위해 처음으로 닫힌 자신의 세계를 열고서 주위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 왜 자신의 이웃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닫혀 살고 있는 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장난감 상자의 주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는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은 주인공이다. 하여, 보물 상자의 주인에게 상자를 직접 건네주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발휘하여 보물 상자 주인을 감동시킨다.

 

  보물상자의 주인공 "브레또도"씨는 매주 화요일 닭을 사서 푹 삶아서 닭의 안쪽 허벅다리를 골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중년의 늙은이이다. 그런데 그 화요일엔 이상하게도 닭을 사지 못하고 어느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멈추게 된다. '따르릉.. 따르릉..' 난데없이 공중전화에서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브레또도씨는 다소 어이없는 상황에 얼떨떨해 하다 공중전화 박스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뚜- 뚜-", 전화는 바로 끊겨버린다. 이 게 무슨 상황일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 때, 공중전화 박스 위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조금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름이 써져 있고, 안에는 누군가의 사진과 조금한 장난감 자전거와 몇 개의 작은 장난감들이 담겨 있다. 순간, 브레또도씨는 과거의 모든 일을 기억해낸다. 자신이 사이클 대회에서 일등 했던 일, 숙모의 속치마, 그리고 자신의 딸과 어린 손자... 하염없는 눈물이 새어나오고.. 맞은 편 어느 술집에서 아멜리에는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뚜벅.. 뚜벅..' 까닭 없이 눈물을 참지 못하는 중년의 남자가 아멜리에가 몰래 숨어있는 술집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술을 시키면서 술집 주인에게 감격하여 혼잣말하듯 말한다.

      

  "여보게 술 한 잔 주게.. 참 이상하지.. 누군지 모를 나의 천사가 나의 보물 상자를 찾아 주었어.. 그런데.. 참 인생은 너무나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수 십 년간 살았는데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이 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말리에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지고, 이제 아멜리에 삶의 잔잔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다시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 잠깐 왜 하필 장난감 상자인지 생각해 보자. 어릴 적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중한 것들이 있게 마련일 게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 보면 아주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내 경우에는 어릴 적 조금한 고무 인형과 지우개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난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대개의 이름이라는 게 스포츠 선수 이름이거나 어디선가 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이었지만. 여하튼, 난 고무인형과 지우개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나의 큰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그 중학교 시절,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는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 어딘가로 버려져야만 했다. 물론, 몰래 동네 쓰레기장까지 뒤져 거의 고스란히 되찾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다시 발각되어 어딘가로 숨겨진 후, 난 그것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난 어떤 만화책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난 알아요.’라는 당시 유명 가수의 히트곡 이름을 제목을 갖다 붙인 해적판 만화책이었는데, 당시 거의 용돈을 타지 못했던 내가 꼬박꼬박 돈을 모아 전권을 다 산 다음 그 책을 얼마나 또 읽고 또 읽었던 지. 그렇지만 결국, 그 책들 또한 어딘가로 숨겨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 동생이 어딘가에서 그 만화의 애니메이션을 다운받아 놓아, 나는 다시 그 만화를 볼 수가 있었다. 내용의 수준을 떠나, 얼마나 재밌던지.. 나는 수 십 번 보았던 그 만화를 대사까지 외워가면서 자꾸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왜? 왜.......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너무나 많은 기준들과 책임들 속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 또한 그러한 기준과 책임들 따위에 얽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기준과 책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놓여 있지 않을 때는 정말 무가치 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릴 적 자신의 장난감 상자엔 그런 것들이 놓여 있을 리 만무하다. 그네들은 늘 그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이라는 외부적 요인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아무 가치 없는 것일지라도, 아직도 나의 고무인형과 지우개 그리고 만화책은 그 존재 자체로 나를 지탱하고 이루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즉, 실제로 나를 이루고 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이런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닐까? 그러나 그네들은 그 자체로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다. 그 어떤 이유나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 자체!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나중에 아주 나중에 돌이켜 보게 될 때, 혹 가장 생각나는 것은 이런 보잘 것 없고 자잘한 것들이 아닐까? 물론 너무나 오랫동안 묻혀 있어 빛바랜 그 색채를 되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여담은 이쯤 해두기로 하고, 다시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에게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는 브레또도씨의 보물 상자를 찾아 준 후 이제 삶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동안 공상의 나래 속에서만 인형과 더불어 살던 그녀의 생을 다소 헝클어진 자신의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성에 갇혀 있던 탓에 우리의 주인공 아멜리에가 주위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법은 소리 없이 다가가는 비상한 작전들로 시작된다. 먼저, 앞에서 이야기한 채소가게의 채소를 사람보다 사랑하는 청년과 그 못된 주인아저씨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아멜리아 같이 순박한 처녀에게는 늘 무언가 남다른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을 보는 시각 또한 매우 다른 것이 통례적이다. 예를 들면, 그 채소 청년의 경우 다소 아둔하기에 일반적인 처녀들의 시각에는 다소 피하고 싶은 존재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이 채소 청년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걸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해맑기 그지없는 주인공 아멜리에는 채소청년의 그 우둔함 속에서 순수함을 발견해 낸다. 하여, 그 못된 채소가게 주인을 골려주기 시작하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히다.

 

  어느 날 우연히 채소가게 주인의 집에 들를 일이 있어 들렸던 차에, 아멜리에는 채소 가게의 주인집 열쇠가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착한 마음에 채소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려 채소가게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채소가게 주인이 또 불쌍한 채소 청년을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멍청이가 어떻다는 둥 그렇다는 둥. 아주 개인적인 프라이버시까지 무시해가면서 채소 청년을 모욕하는데... 순간, 분노한 아멜리에는 그 길로 열쇠 집으로 달려가 버린다. 그리고 똑같은 열쇠를 복사하고선 아주 몰래 채소가게 주인집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채소가게 주인의 아주 사소한 일상들을 밉지 않고 귀엽게 망가뜨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계를 앞으로 빨리 앞당겨 채소가게 주인이 새벽에 일어나 일할 채비를 하게 한다든지, 포도주에 소금을 가득 뿌려 맛을 변질시킨다든지, 디자인은 똑같지만 작은 실내화로 바꿔치기를 한다든지.. 아주 사소하지만 삶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채소 가게 주인이 자기 자신이 무언가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게끔 한다. 더불어, 순박한 채소 청년을 교묘히 이웃에 옹골진 유리인간 노파와 맺어줌으로써 평생 고독하게 살아온 노파의 마음 문을 움직이게 만들고, 또 평생 자신을 배신한 사랑했던 남편 때문에 슬픔으로 살아가는 아파트 관리인에게 40년 만에 되돌아온 거짓편지를 찾아주어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다시금 행복을 되찾아준다든지...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하였던가? 이렇게 주위 이웃의 수호천사처럼 행복의 전령사가 된 아멜리에는 유독 심한 자신의 그 부끄러움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다. 아주 우연히 어느 즉석 사진기계에서 두 번 부딪친 남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재밌는 설정은 이 남자 또한 아멜리에 못지않은 공상가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의 취미는 즉석 사진기계에 사람들이 찢어버린 사진 조각들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스크랩북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를 쫓아가다 그것을 발견한 아멜리아가 습득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몽상가의 몽상적 사랑이 우연히 시작된다. 하지만 몽상가가 사랑한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몽상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몽상이란 건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면 몽상가라 함은 현실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늘 가 닿을 수 없는 이상에 목이 메어 있는 종류의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하여, 보통 이런 경우 사랑이란 것은 미지의 대상일 경우 가능할 뿐, 정작 현실에선 사랑을 못하는 것이 공식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또 다시 색다른 시각으로 이 두 몽상가의 사랑을 맺어주고 있다. 바로 처음부터 은근히 강조하였던 아멜리에의 몽상의 그 순수성 그 천진난만함이 되려,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멜리에의 그 순수성은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다. 이것은 순수하기에 오는 결과이다. 자신의 그 순수함을 지속적으로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것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된다. 그렇다면 역시 몽상가의 사랑은 다가서지 못하는 그 거리에서만이 존재하며 끝이 나야 하는가? 그렇지만 다행히도 영화 전반에 두드러지는 해피한 분위기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면, 남이 머리를 깎아주면 되는 것이다. 몰래 행복의 전령사 노릇을 하였지만 그것을 이미 그 이 전 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유리인간 노파는 자신의 빚을 아멜리에의 사랑을 맺어줌으로써 갚는다. 그리고 영화는 두 몽상적 연인의 사랑과 더불어 모든 것이 아멜리에의 공상처럼 아름답게 풀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기술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전개와 상관없이 유독 내 자신에게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반대로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영화 내내 난 우리나라의 코미디처럼 통렬하진 않지만 잔잔한 미소를 띨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감지하고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그러한 주제로 나는 보물 상자 이야기와 함께 아멜리에의 작은 일상으로의 침투가 가져다주는 소소한 행복에 대해 떠올려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의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 것 같다. 모든 것은 우연에 기인하고 있고, 또 설정 또한 괴팍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사람들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거대한 신념이라거나 혹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되려, 매우 하찮고 비현실적인 공상과 우연들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을 가능하게끔 하며, 우리는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모두가 부인하기 힘든 너무나 명료하고 자명한 사실이다!! 일단 영화라는 그 전반적인 분위기를 떠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찬찬히 아주 작지만 익숙하게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들을 살펴보자. 그다음 자신의 보물 상자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넣어 보자. 그리고 그런 달콤한 몽상들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오롯이 꺼내어 놓고서 남몰래 미소 지어볼 수 있다면, 그래도 삶은 살아볼만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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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초특가판]
울리 에델 감독, 제니퍼 제이슨 리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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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이 영화가 나온 지도 벌써 20년 정도가 지난 거 같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의 제목만으로 매료되어 이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도 어느덧 훌쩍 십년이 넘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 며칠 전에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몇 차례 시도가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 정작 비디오를 빌려 놓고서도 보지도 못한 채 갖다 주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10년이 넘은 오랜 기다림 끝에 이 영화를 본 지금, 나는 그 기다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느껴보며,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써야하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지금 여기에 옮겨보고자 한다.

 

 

  영화는 크게 세 구조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노조 총파업이라는 브룩클린의 상황 그리고 임시 노조 위원인 해리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창녀 트랄라의 이야기. 이 세 축을 중심으로 양념과 같이 게이와 건달들이 껴있다. 그리고 언뜻 이 정도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 우리는 이 영화가 "분노의 포도"와 같은 노동 영화 계열이거나 혹은 인권 영화, 아니면 새로운 시각의 동성애 영화? 뭐 이런 것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모든 것들을 역으로 뒤엎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강렬한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내 개인적 성향이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폭 좁은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탓이 클 게다. 그렇지만 어찌됐든 이 지면을 빌어 나는 나의 그러한 시각 하에 영화의 세 축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 구조를 새롭게 설정해 봄으로써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일단은 먼저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설정한 브룩클린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50년대 공장지대인 브룩클린 시는 노조가 완전히 총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매우 살벌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벌써 파업은 장장 6개월 간 지속되었으나, 경영자측은 묵묵부답이고, 모든 브룩클린 사람들은 노동을 포기한 채 노조가 주는 배급식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장기적 파업 상황에 지쳐 중도이탈을 하여 한두 명씩 공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들도 사실은 현 상황에 매우 지쳤으나, 이제까지 버텨온 6개월이란 시간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일 뿐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브룩클린이라는 상황이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스러운 분위기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노동자들의 절망 혹은 현실의 냉혹함 등에 전혀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 설정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것으로 나오며, 우리의 주인공 해리의 경우엔 이 상황으로 인해 신분적 상승을 맞이한 케이스로 등장한다. 즉, 영화는 분명 노동과 파업이라는 어떤 현실 보다는 그 현실 속에 감추어진 무언가에 관심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주인공 해리에게로 건너가 보자.

 

 

  주인공 해리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임시적으로 노조위에서 노동자들의 배급과 기타 상황들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임명한 임시 노조 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래 파업 전에는 일반 노동자와 같은 신분이었으나 이러한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급격한 신분상승을 체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을 통해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해리가 다소 단순무식한 과격분자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과 오히려 파업이라는 상황을 다소간 즐기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현듯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우리의 과거를 잠깐 기억해 보자. 아마 소설로써 우리는 그 상황들을 간접 체험 했겠지만, 6.25 당시 공산주의가 들어왔을 때,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에게 채워 주었던 완장의 힘과 공포를 우리는 잠깐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주인공 우리의 해리는 그 정도로 무식하거나 단순한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의 파업이라는 상황을 통해 쥐어진 신분을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하기에 영화 내내 다소 불안해 보이고, 약간은 초조한 듯한 기색을 띄운다. 사실 그 전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지만, 노조위원이 되면서 그는 건달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접하게 된 듯하다. 이를 통해 노동에 익숙해 있던 자신의 모습이 아닌 되려, 술과 유흥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동시에 그는 노조위원이라는 커다란 직책으로 인해 가정에는 매우 소홀해 지게 되는데, 이러한 소홀함은 아내 앞에서의 성적 무력함으로 표현되어지고, 게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 게이인가? 사실 영화는 여기서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왜냐면 기존의 게이가 놀림감의 양념처럼 등장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너무 생생이 표현되어져 있고, 그렇다고 게이를 위한 영화라 하기엔 게이라는 대상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써 영화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억지적인 설명을 부가해 보자면 노동을 잃은 노동자의 모습과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닌 게이의 모습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과, 이 영화가 남자인 해리 그리고 여자인 트랄라 중심의 축 속에 중성의 인간 게이라는 축을 숨겨두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여하튼, 해리는 같이 자주 몰려다니던 건달들과 함께 어울리던 게이들을 알게 되고, 그 중 한 게이와 친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은 어이없는 것은 이 해리가 좋아하게 된 게이의 경우 매우 호사스런 생활과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치 해리의 신분상승이 아니고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처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여기서의 게이의 이미지는 고급매춘부의 이미지이다. 그리고 바로 이 고급 매춘부인 게이에게 해리가 깊이 빠지게 됨으로써 이제 해리는 스스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게이의 호사스런 생활수준을 맞추어 주기 위해 해리가 공금을 마구 이용하게 되고, 노조 일에 소홀해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조위원회는 해리를 바로 해고시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노동을 잃은 노동자가 파업의 상황에서 상승한 신분마저도 잃게 됨으로써 가장 무력한 인간 실존의 상황의 모습으로 변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완벽한 무력함을 입증하는데 있어, 영화는 해리가 집착하였던 게이에게마저 철저히 버림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해리에겐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다. 그러나 해리는 그 전에도 가정에서 무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아무런 직위도 없는 그가 어떻게 가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쉴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게이라는 존재에 깊은 애착을 가진 그에게 아내의 존재가 눈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불행히도 해리는 술에 취해 자신이 좋아했던 게이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에서 방황을 한다. 그리고 거의 아무런 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길가에 엎드려져 있는 순간, 자신을 일으켜주는 한 미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욕정으로 불타올라 해리는 소년을 강간하려 한다. 그러나 소년은 해리를 뿌리치고 달아나, 바로 얼마 전까지 해리 자신 밑에서 자신을 돕던 건달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해리는 끔찍하게 얻어맞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이런 해리가 완전히 피투성이가 된 채 마치 십자가에 걸린 모습처럼 어느 철조망에 매달려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절규를 부르짖게 하며, 해리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해리의 이야기를 멈추고 트랄라의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영화는 단순히 해리라는 한 가지 축으로만 설정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또 기존의 방식인 해리와 트랄라라는 공동주연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서로를 알고 일정선상에서 연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둘은 전혀 다른 삶들을 통해 각기 무언가를 대변하고 있고, 그것은 브룩클린이라는 마지막 상황과 대치되어 부각되어 지는 것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쩌면 너무나 천박한 창녀 우리의 여주인공 트랄라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트랄라는 말 그대로 완전히 걸레 같은 창녀이다. 그녀에게 남자는 오직 돈이며,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남자를 유혹함으로써만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그녀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트랄라는 해리 밑에서 일했던 그 동네 건달들과 한편을 이루어, 보통 지역의 순진한 군인들을 유혹하여 부둣가로 데려온 다음, 군인들을 기절시킨 후, 동네 건달들과 함께 돈을 갈취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 당연 브룩클린에서 트랄라의 평판은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트랄라의 생김새는 어찌 그리도 천박한 창녀 모습 그 자체인지... 그럼에도 철없는 한 소년은 이런 트랄라를 매우 연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나 트랄라란 여인 속에선 낭만이라든가 사랑이란 감정은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조그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 건달들과 군인을 유혹하여 돈을 갈취할 때에 여자이기 때문에 건달들로부터 불평등하게 돈을 분배 받는 것에 못마땅해진 트랄라는, 이제 군인을 유혹하여 건달들에게 넘기는 것을 그만두고, 아예 군인들을 유혹하여 돈을 뜯는 방법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던 중 트랄라는 이제 갓 훈련소에서 나와 이제 곧 있으면 해외로 파견 나가게 될 한 젊은 군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매우 불안해 보이지만 순진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러니 우리의 트랄라의 레이더에 어찌 걸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트랄라는 평소처럼 군인을 유혹하여 군인과 자고 난 뒤, 군인이 잠 든 틈을 타 호주머니의 모든 돈을 털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순진한 이등병은 잠들어 있지 않았고, 트랄라가 자신의 옷에서 돈을 찾고 있는데도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녀 냄새 풀풀 나는 트랄라에게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자신이 해외로 떠나기 전까지 함께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트랄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붕 떠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트랄라가 그 정도에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껏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가? 그 거친 삶들을 생각해 볼 때, 트랄라는 이 젊은 군인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 더 돈도 많이 뜯어낼 수도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지금 하는 짓으로 봤을 때 이 순진한 녀석이 떠나기 전 자신에게 간이라도 빼줄 거 같아 보이기에,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함께 한다. 아니, 트랄라는 완전히 봉 잡았다 생각하고 며칠 동안 그오 함께 한다. 그렇지만 동상이몽이었을까? 군인이 떠나가는 날, 트랄라는 군인이 파송될 배까지 마중 나온다. 그리고 군인이 자신에게 지불할 화대를 기대하며 강한 눈초리로 군인을 바라다본다. 그런데 군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마치 자신의 애인을 두고 떠나는 양 쉬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아쉬워하다 트랄라에게 떠나기 바로 전 봉투 하나를 건넨다. 봉투에 두둑한 느낌이 돈이라고 생각한 트랄라 만면의 미소가 지어지고, 마지막 키스와 함께 트랄라는 군인을 떠나보는데, 웬 걸? 봉투 속엔 땡전 한 푼 들어가 있지 않고, 편지만 달랑 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군인 자기 자신을 위해 기다려 달라는 말, 자기도 트랄라를 위해 돌아오겠다는 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 그러니 우리의 창녀 트랄라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순진함도 유분수지 이게 어디 될 법한 말인가? 그러나 트랄라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말들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으며, 자신도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한 그것들을 모르게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앞으로도 창녀이어야 하고, 그것만이 자신의 살아갈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바로 여기서 트랄라는 심하게 갈등하게 된다. 영화는 트랄라가 가득 취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이러한 심경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마치 미친 듯이 술에 취한 트랄라는 수많은 남녀들이 춤추고 있는 술집에서 자신의 웃옷을 벗으며 당당히 소리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슴이다!!" 서글프게도 바로 이 말은 그 젊은 병사가 자신의 작은 가슴을 불평하자 해주었던 말이었다. 그리고서 트랄라는 수 십 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관계를 갖기 시작한다. 실신하여 정신을 잃어버릴 때까지....... 그녀는 모든 남자의 욕정을 위한 도구가 되어 찢겨진 채 바닥에 엎드려져 있고, 그럼에도 수많은 남자들은 마치 그녀가 그것을 원하는 양 착각하여 그녀를 농간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죽어가기 일보 직전, 이제까지 남몰래 트랄라를 연모하던 소년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서, 주위의 모든 남자들을 쫓아낸다. 그리고선 트랄라의 벗겨진 몸을 덮어주며 처절히 통곡한다. 마치 수 십 명에게 얻어터진 듯, 고통스러운 표정의 트랄라가 가까스로 일어나며, 소년을 가슴에 안고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어 준다.

 

 

 "울지 마.......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줘......."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 경영측이 모든 노조 측의 조건을 수락함으로써 승리한 노동자들의 의기양양한 출근의 모습을 담아내며 끝을 맺는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매우 복잡한 구조와 별 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 하려다 보니, 내용 전개가 너무 길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별개의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로 나아가고 있기에 매우 특별하다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에도 밝혔듯이 이 영화는 결코 노동자 영화이거나 인권 영화가 아니다. 마치 영화의 설정과 마지막은 그러한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것은 브룩클린으로 가는 출구가 아닌 비상구이다. 즉, 해리와 트랄라라는 파업에 있어 가장 소외되고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새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려가고 있음을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기존의 파업 영화였다면 우리는 여기서 파업이 가져다 준 절망과 더불어 그것을 겪고 일어난 인간성의 승리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되려, 영화는 파업의 희생양이며 산 제물이었던 해리와 트랄라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던 민주주의, 진보, 좋은 세상에서 감추어져 왔고 숨겨져 왔던 진실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나아가 여기에 어떤 종교적 의미까지 상정한다. 해리는 바로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트랄라는 우리시대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상이다. 우리는 늘 그들을 밟고, 그들을 짓이김으로 발전의 도상으로 나아가 왔고, 영화는 바로 그 밟히고 밟혀서 가장 닳고 닳은 우리 시대의 처참한 그리스도와 마리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겐 다소 억지성 해석이라 받아들여 질 수 있겠지만, 영화는 서두부터 이러한 종교성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I will get up now and go about the city, through its streets and squares;

 

  I will search for the one my heart loves."

 

-Song of Songs 3:2

 

 

  "내가 지금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서 일어나 나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를 찾을 것입니다."

      

  -아가서 3장 2절 중에서

 

  그리고 영화는 바로 현대라는 도시와 브룩클린이라는 거리에서 파업이라는 광장 속에서 우리의 마음의 사랑하는 자 해리와 트랄라를 진심으로 찾은 것이다. 더불어 영화 중간에 이와 함께 또 다른 축으로 해리가 거느렸던 건달을 사랑했던 한 게이의 죽음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다만, 감독으로써 그러한 게이에 대해 중심을 두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중성적 인간에 대한 감독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고, 단지포용대상으로써의 객체적 인식 속에서 자리매김 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는 우리 시대에 짓밟힌 그리스도와 어머니 마리아가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끝없는 탐욕은 파업의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며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현대성이라는 거대한 공장 속으로 발걸음 하고 있다.

 

 

  그러나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기를....... 정녕 그러하다면 오! 하나님!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영화 속 절실한 물음을 던져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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