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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 읽고 쓰는 사람을 길러내는 아주 특별한 세계에 관하여
이용훈 외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도서관의 위상이 갈수록 흔들리고 있는 요즘입니다. 울산대학교가 27만 권의 장서를 폐기했고, 고양시는 공립작은도서관 5곳을 줄줄이 폐관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네 명의 지식인이 모여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는 도서관의 현재 위기 상황에서 출발해 도서관의 새로운 가능성을 분석합니다. 책과 도서관의 진짜 쓸모를 풀어낸 대화록입니다.
초대 서울도서관장을 역임한 도서관 전문가 이용훈, 《출판저널》 편집장을 거쳐 도서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권우, '과학책방 갈다'를 운영하는 천문학자 이명현, 15년간 과학관장을 지내며 과학의 대중화에 힘써온 이정모 저자까지 지식인 4인방이 전하는 책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네 사람은 학문과 분야는 서로 달라도 인생을 가로지르는 중요한 축으로 도서관을 꼽습니다. 이명현 저자는 "도서관은 인류 문명 전체에 걸쳐 굉장한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임계 국면을 넘어선 진화적 대사건의 산물"이라며 도서관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가 아닌 인류 문명을 이어가는 중간 기지로 묘사합니다.
이정모 관장은 독일 본시립도서관의 사서가 중세 장식체로 된 책을 타이핑까지 해주며 정보를 건넨 덕에 첫 책을 집필했습니다. "달력에 관한 책을 몇 번 빌렸더니, 사서들 사이에서 저에 대한 소문이 돌았나 봐요 … 그 책을 읽었으면 이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요." 이 작은 친절이 결국 한 사람의 작가적 정체성을 만들어낸 셈입니다.
이처럼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우연한 발견을 통해 삶을 바꿔 놓는 곳임을 보여줍니다.
도서관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이권우 저자는 무상의 독자에서 유상의 독자로 전환시키는 과정이야말로 도서관의 숨은 쓸모라고 말합니다. 독서를 통해 성장한 시민이 결국 책을 사고 출판 생태계를 지탱한다는 겁니다.
이명현 저자는 도서관을 DNA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지식을 축적하는 아카이빙 공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리적 장소 그 이상, 인류 문화가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동력원이라는 겁니다.
이용훈 저자는 도서관의 공간적 가치에 주목합니다. 보스턴공립도서관이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 지점 역할도 한다는 사례를 들며 '큰' 도서관보다 '가까운' 도서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시민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공간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서관의 쓸모는 이처럼 사회적, 개인적, 문화적 차원에서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서 관리와 수서 정책에 대한 논의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곳에 모든 책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도서관 간 네트워크를 통한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강조합니다.
최근 각종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장서 폐기 사태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기도 합니다. 우리 지역 도서관들도 지역 내 도서관끼리 시스템을 연결해 가까운 도서관에 책이 없어도 상호대차 방식으로 타 도서관 책을 대출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책 vs 도서관에 필요한 책이라는 딜레마를 다루면서 저자들은 도서관이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필요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도서관의 공공성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AI 시대에 과연 도서관이 여전히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논의합니다. 이정모 저자는 "챗GPT나 유튜브 콘텐츠는 짧은 시간에 포인트만 딱 짚어요. 변두리 이야기들이 없죠. 반면에 책은 상당히 많은 변두리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라고 답합니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책이 제공하는 변두리 이야기들, 즉 핵심 정보 주변의 맥락과 부가 정보들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덥니다. 이런 변두리 이야기들이야말로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식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이용훈 저자는 서경식 선생의 '도서관적 시간' 개념을 인용합니다. "간단히 답을 얻을 수는 없는 질문(대체로 인간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러하다)에 침잠하면서 끝없는 문답에 몰두한다. 그 사고 과정 자체가 풍요와 기쁨에 차 있는 시간"이라는 겁니다. 즉답을 추구하는 AI 시대에 도서관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가치입니다.
사서의 역할 변화에 대한 논의도 흥미롭습니다. 저자들은 AI가 정보 검색을 대신해 줄 수 있지만, 사서의 참고정보서비스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정모 저자의 독일 경험담처럼 사서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의 잠재적 관심사를 발견하고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독서 인구 감소라는 현실적 위기 앞에서 도서관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자들은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이권우 저자는 민주주의와 도서관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지식과 교양에 바탕을 두지 못한 민주주의는 허약할 수밖에 없다며 도서관의 가치를 재조명합니다. 도서관은 단순한 독서 공간이 아니라 민주 시민의 양성소입니다.
라이프러리(lifrary)라는 새로운 개념도 등장합니다. 도서관(library)과 삶(life)을 결합해 도서관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책과의 느슨한 연결을 지향합니다.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응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도서관을 찾는 노인 이용자들이 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독자층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도서관이 전통적인 젊은 독자층 중심에서 벗어나 더 포용적인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도서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네 명의 저자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펼치는 대화는 때로는 학술적이고 때로는 일상적이며 흥미롭습니다. 도서관이 단순한 책 보관소가 아니라 지식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만나는 살아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