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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제2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예쁜 색감의 표지와 판형으로 돌아온 <여행의 기술 (제2판)>. 20년 넘게 이 책이 사랑을 받아온 것은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알랭 드 보통의 글쓰기의 매력 때문일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스위스 출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일상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로 풀어내는 독창적인 글쓰기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철학의 위안』, 『일의 기쁨과 슬픔』 등 인간의 경험 전반을 통찰력 있게 탐구해왔습니다.
제목만으로는 여행 팁이나 짐 싸기 노하우가 나올 것만 같지만 <여행의 기술>은 일종의 철학적 여행 에세이입니다. 여행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내재한 의미와 역설,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유를 조명합니다.
여행에 담는 막연한 기대부터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 돌아온 일상에서 새로운 시선을 회복하는 법까지 알랭 드 보통은 지성과 감성, 미학과 유머를 조화롭게 엮어내며 여행의 본질을 탐색합니다.
여행의 첫 번째 단계는 기대입니다. 런던 해머스미스에서 바베이도스까지 J.K. 위스망스의 안내를 받아 이 기대의 심리학을 분석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시간이 때로는 더 강렬한 행복감을 준다고 합니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을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p17)라는 말은 여행이 단지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것만은 아님을 드러냅니다.
여행을 향한 우리의 기대는 종종 그 장소가 아닌, 그곳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상상에 의해 설계됩니다. J. K. 위스망스가 소설에서 보여주었듯 마음속 지도가 실제 지도보다 더 넓게 펼쳐져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생깁니다. 완벽한 휴양지를 상상했지만 막상 도착한 곳에서는 예상치 못한 현실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런 실망감은 여행의 필연적 요소입니다.
여행 중에 거치게 되는 통과 지점인 휴게소, 공항, 기차역 등에도 철학이 깃들어 있다는 걸 작가의 글에서 고스란히 느껴봅니다. 대부분 여행할 때 이 장소들은 배경처럼 다뤄질 뿐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장소들이야말로 사유의 본거지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휴게소에서 외로움을, 공항에서 경이로움을, 기차 안에서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일상의 거의 모든 지점에서 사유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p78)라는 표현은 이 책의 핵심과도 같습니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에서는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기도 하고, 평소보다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쓸쓸한 풍경, 보들레르의 도시적 감수성이 결합될 때 그곳은 사색의 장으로 탈바꿈합니다.
우리가 낯선 곳에 매혹되는 이유를 단순히 풍경의 다름에서 찾는 <여행의 기술>. 암스테르담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이국적인 것에 대한 갈망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본능적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p316)라는 고백처럼 낯선 곳이 주는 자유가 실은 사회적 관계의 소거로부터 비롯됨을 말해줍니다. 이국성은 외부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장치일 수 있습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목가적인 풍경에서 시나이 사막의 숭고한 장엄까지 <여행의 기술>은 풍경을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대상으로 설정합니다.
워즈워스의 시는 시골을 낭만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이 인간 감정에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주목합니다. 사막에서는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미 개념을 토대로 작아짐의 미학을 펼쳐 보입니다. 거대한 풍경은 우리를 압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사유를 확대시킵니다.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의미화됩니다.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의 사유적 조우를 통해 자기 내면을 탐색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사물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가치를 포착해내는 능력은 여행을 통해 단련될 수 있는 하나의 기술입니다. 프로방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안내를 받으며 예술이 우리의 시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반 고흐가 그린 프로방스의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는 평범한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고흐의 그림을 본 후 사람들은 같은 나무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방 주위의 여행』을 쓴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를 통해 익숙한 공간의 낯설게 보기를 이야기합니다. 먼 곳에 가지 않더라도 언제나 여행적인 시선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가장 일상적인 장소도 우리가 다르게 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새로운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익숙한 곳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일상의 무료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짚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생각하는 여행만이 우리를 낯선 아름다움으로 이끈다는 걸 보여준 여행에세이 <여행의 기술>입니다.
여행의 기술은 결국 삶의 기술과 다르지 않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일상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타인과 다른 문화에 대해 열린 마음 가지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일상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