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 없이 - 선한 나, 악한 나, 아름다운 나에 대하여
폴리나 포리즈코바 지음, 김보람 옮김 / 북스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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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세계적 슈퍼모델이 되기까지의 여정과 함께, 화려한 외적 이미지 뒤에 숨겨진 내면의 갈등을 드러낸  폴리나 포리즈코바의 에세이 <필터 없이>.


아름다움을 단순한 외적 특성이 아닌 상태로 재해석하는 지혜, 30년을 함께한 뮤지션 남편의 사망 후 겪은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나이 듦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저자의 시각이 와닿은 책입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화려한 조명 아래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마는 아이러니.


<필터 없이>는 세계적인 슈퍼모델이자 배우로 활동하며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살아온 그가 마침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습니다.


"내 일은 상품이 팔리게 하는 것이었다. 내 사진과 영상은 상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무분별하게 변형되었다." - p19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의해 어떻게 조각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실존적 딜레마의 극단적 사례를 겪은 겁니다.


포리즈코바의 삶은 냉전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어린 나이에 생이별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이후 가족과 재회해 스웨덴으로 갑니다. 낯선 환경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열다섯 살에 모델로 데뷔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극적인 변화를 겪은 시간들을 담담히 풀어냅니다.


아름다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겪은 극단적 경험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저자는 아름다움을 단순한 외적 특성이 아닌 하나의 상태로 재정의합니다. 아름다움을 명사(소유할 수 있는 것)가 아닌 형용사(상태)로 인식하는 시각 전환이 흥미로웠습니다. 아름다움을 위계적이고 경쟁적인 가치가 아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경험으로 재해석하는 계기가 됩니다.


세계적인 명성이 가져다준 특권과 함께 그 이면에 숨겨진 고독과 소외감을 조명하기도 합니다. 1988년 에스티로더와의 역대급 계약으로 정점에 오른 그녀의 커리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했는지, 그 화려함 뒤에 얼마나 많은 타협과 자기 검열이 있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포리즈코바의 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록밴드 '더 카스'의 리드싱어 릭 오케이섹과의 결혼 생활과 상실의 경험입니다. 이혼 이야기가 오가던 시점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남편의 유언장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때의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솔직하게 그려냅니다.


개인적 비극을 넘어 여성의 정체성과 독립성에 관한 더 깊은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그가 경험한 감정적 종속과 자기 회복의 과정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합니다.


<필터 없이>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나이 듦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반연령주의 활동가로 거듭난 저자는 젊음과 탄력을 지향하는 뷰티 산업의 협소한 아름다움 기준에 맞서, 시간의 흔적이 담긴 몸에 대한 경이로운 찬사를 보냅니다. 자기 위안이 아닌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에 도전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기 수용의 전쟁에서 내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전쟁은 나를 지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감, 자기 확신, 자기 수용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다." - p301


포리즈코바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의 결정체 <필터 없이>. 나이 듦을 쇠퇴나 상실이 아닌, 자기 해석과 선택의 깊이가 더해지는 풍요로운 과정으로 재구성합니다.


특히 용기에 대한 말이 와닿습니다. 그는 용기를 일생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신의 취약함과 상처를 대중 앞에 드러내는 용기. 그녀의 여정은 타인의 기대에 갇혀 살던 많은 이들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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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픽사 베스트 컬렉션 : 코코 Coco - 국내 유일 전체 대본 수록! Disney, Pixar Best Collection 시리즈
라이언 박 해설 / 길벗이지톡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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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디즈니, 픽사 베스트 컬렉션 시리즈 신간은 극장에서 수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던 <코코(Coco)>입니다. 죽음과 기억, 가족과 용서를 다룬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의 감동을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영화의 대사를 옮기기만 한 게 아니라 영어 공부와 감성 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구성된 스크립트북입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코코>의 전체 대본을 수록했고, 원어민 성우의 오디오, 그리고 워크북까지 갖추어 영어 독학자와 애니메이션의 감동을 다시 찾고 싶은 모두를 충족시키는 책입니다.





초반에는 미구엘이 속한 가족의 배경과 음악에 대한 열망을 다룹니다. "No music! 음악은 안 돼!" 하며 가족은 음악을 금기시하고 있고, 미구엘은 그 안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이 파트에서는 영어 표현 중 가족 내 갈등, 금지 명령, 감정 표현을 익히기에 적절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스토리를 따라가며 맥락을 이해하게 되니 감정의 뉘앙스까지 파악할 수 있어 영어 회화에 생명력을 더해줍니다.


스크립트북은 대사(dialogue)와 지문(action descriptions)이 모두 수록된 걸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전체 대사를 영어와 한국어 모두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면의 전환, 인물의 행동, 배경의 묘사 등을 포함하는 비언어적 서술의 지문도 있어 좋아하는 장면의 비하인드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스크립트북은 영화의 자막 수준을 넘어서 한 편의 영화 전체를 책으로 옮긴 대본집입니다.


오른쪽 하단에는 단어장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영어 단어를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해석 페이지를 가리며 원문만 읽는 연습도 가능합니다.


픽사 특유의 스토리텔링 철학이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감정적 몰입도를 잃지 않는 문장들 덕분에 기계적인 암기나 문법 학습과는 다른 차원의 영어 공부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주제가 Remember me의 깊은 여운까지. 음악과 감정의 통로가 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실전 회화에 유용한 표현을 모은 워크북이 이 책의 장점입니다. <코코>의 전체 대사 중 실용적인 문장 100개를 선별했습니다. 각 표현이 어떤 장면에서 쓰였는지, 일상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예문을 함께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받은 감동을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살아있는 영어 표현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 원어민들이 쓰는 자연스러운 표현을 익히는 데 유용합니다.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면서도 문법 구조가 명확해 영어 초보자부터 추천합니다. 스크립트북 한 권으로 눈과 귀, 마음까지 채워지는 영어 공부를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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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겨울이 남긴 것들 - 암은 씨앗이고 꽃이고 열매였다
이경연 지음 / 나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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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겨울을 통과한 자만이 전할 수 있는 이야기 <인생의 겨울이 남긴 것들>. 이경연 저자는 2017년 유방암 진단 이후 항암치료 대신 자연치유법을 택했고 그 선택으로 8년을 건강하게 살아내며 깨달은 지혜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인생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겨울'을 어떻게 지혜롭게 통과하는지, 암이라는 시련을 겪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실존적 물음들과 그것을 통과한 자만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고통이 전혀 다른 얼굴로 변모할 수 있다는 기록입니다.


암이라는 병은 질병이기 이전에 세계관의 붕괴이자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병원의 표준 치료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믿음으로 길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의료적 결단이 아닌 삶의 태도를 전환하는 도약이었습니다.


암 진단 이후 오히려 특별한 힘을 느끼게 된 역설적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공포나 절망 대신 이 경험을 인생에 던져진 별일로 받아들인 저저의 모습이 놀라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는 미처 몰랐던 자신의 내면의 강인함을 발견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암이라는 위기가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힘을 일깨운 겁니다.


병을 마주한 자신이 삶을 더 섬세하고 깊게 살아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여행지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호기심과 개방적 태도로 이 새로운 경험을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평소 무시했던 몸의 미세한 변화들이 사실은 중요한 메시지였음을 깨닫습니다.


저자는 점차 환자에서 여행자로 그리고 치유자로 변모해 갑니다. 뉴스타트 자연치유법과 땅과 접하는 어싱, 명상 등 비의료적 요법들이 단순한 도구가 아닌 태도이자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후성유전학을 공부하며 저자의 선택이 감정적 믿음에만 의존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치유 과정에서 믿음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몸의 자연치유력에 대한 신뢰를 포함합니다. 정신과 신체의 연결, 특히 마음가짐이 신체적 회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들을 인용하며 설득력을 더합니다.


저자는 ‘감사’를 마중물로 삼습니다. 감사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며 그가 강조하는 치유의 힘이기도 합니다. 감사 100가지 리스트는 생존을 넘어서 삶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치유공동체 ‘따동’과 ‘꿈독’, 맨발걷기 모임 ‘오구맨발러즈’에서의 경험을 통해 고통이 결코 혼자의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선한 감시자들이라는 표현은 공동체가 단순한 위로 이상의 존재, 즉 삶을 함께 살아내는 공동 주체임을 말해줍니다.


고통 속에서 길어낸 통찰과 믿음이 어떻게 일상의 감각을 바꾸었는지를 조근조근 들려줍니다. 암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것들을 자산으로 명명합니다. 고통이 일시적인 고장이 아닌, 성장과 확장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합니다.


암을 겪고 이겨낸 여정은 고통의 극복으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정체성의 재구성이었습니다. 단 하나뿐인 유일하고 나다운 하나의 꿈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은 '단유나함 따꿈지기 이경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저자. 단순한 낙관이 아닌 시련을 통과한 이만이 발화할 수 있는 실천적 언어가 담겨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남긴 다양한 선물은 참 많았습니다. 삶의 우선순위 재정립, 깊어진 관계, 일상의 소소한 기쁨에 대한 감사, 자신의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암이라는 경험을 통해 얻은 선물들입니다.


고난이 어떻게 성장과 변화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인생의 겨울이 남긴 것들>. 암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인생의 겨울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위기를 마주하는 새로운 관점과 지혜를 선사합니다.


모든 겨울이 그렇듯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도 결국 지나가며, 그 겨울이 남긴 것들이 때로는 가장 값진 인생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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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괴물 사기극 (저자 친필 사인 수록) - 거짓말, 실수, 착각, 그리고 괴물 퇴치의 연대기
이산화 지음, 최재훈 일러스트 / 갈매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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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린나이우스가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며 자연의 질서를 확립한 18세기부터 베르나르 외벨망이 미지의 동물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한 20세기 중반까지. 220년에 걸친 이 장대한 여정에서 괴물들은 어떻게 생존해왔을까요?


이산화 작가의 <근대 괴물 사기극>은 사기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악의적인 속임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실수, 착각, 그리고 괴물 퇴치의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인간이 괴물을 상상하고, 믿고, 만들어내고, 또 부정해온 복잡다단한 과정을 탐구합니다.


띠지가 두툼해서 펼쳐보니 책 속 일러스트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SF, 공포 소설로 저도 몇 번 접했던 이산화 작가는 4년간의 자료 수집과 고증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괴물 연구를, 『파묘』의 아트디렉터 최재훈은 괴물의 시각적 재현을 멋지게 해낸 흑백 일러스트로 이 책을 빛나게 만듭니다.





존재하지 않음에도 언제나 존재해온 괴물. <근대 괴물 사기극>은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괴물들이 하나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재현합니다. 허무맹랑한 전설 파헤치기에 그치지 않고 괴물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인식, 욕망, 권력과 맞물렸는지를 분석하고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500쪽에 달하는 이 논픽션은 괴물의 해부를 통해 인간을 해부하는 책입니다.


괴물 연대기의 기점은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의 함부르크 히드라 퇴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괴물을 퇴치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물 분류 체계를 정립한 린나이우스는 신화적 괴물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거부합니다. 과거에는 종교적 권위나 도덕적 판단으로 괴물을 배척했다면, 드디어 과학적 분류법과 실증적 증거로 괴물의 존재 가능성을 검증하기 시작한 겁니다.


과학의 발전이 괴물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의 괴물들은 더욱 교묘해졌습니다. 동굴인간, 지옥분노벌레, 튀르크인 같은 존재들은 모두 당시의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맥락을 교묘히 활용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했습니다. "동굴인간이 자연의 체계 속 본래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과 아주 닮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존재'가 탄생하는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라며 괴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변신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산업혁명 이후의 호황과 대도시의 등장, 대중매체의 발달은 괴물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냈습니다. 1822년 바넘의 피지 인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바넘이 가짜 괴물을 만든 것을 넘어 과학적 권위까지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넘은 가짜 과학자를 내세워 언론을 속였고, 한때 괴물을 퇴치하는 데 쓰였던 과학의 언어는 오히려 괴물의 아군으로 뒤바뀌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짜 뉴스 현상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권위 있는 정보원을 가장하고 그럴듯한 과학적 용어를 남발하며 대중의 호기심과 편견을 자극하는 수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담배 상인 조지 헐이 성경의 골리앗 이야기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카디프 거인 사기극은 종교적 믿음과 상업적 욕망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신문의 등장으로 정보 전파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괴물 이야기는 더욱 확산됩니다. 1835년 뉴욕 《선》지의 달의 박쥐인간 보도가 대표 사례입니다.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태고의 생존자 패러다임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네스호의 괴물이나 콩고의 브론토사우루스 같은 괴물들입니다.


<근대 괴물 사기극>의 진짜 가치는 괴물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동굴인간 이야기 속에는 인종주의가, 필트다운인 사건 속에는 제국주의적 우월감이, 드 루아의 유인원 사진 속에는 편견과 혐오가 숨어 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코팅리 요정 사건도 인상 깊었습니다. 전쟁의 후폭풍 속에서 상처 입고 지친 어른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요정의 세계가 어린아이의 상상 속만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하리라고 필사적으로 믿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분석이 공감됩니다. 괴물에 대한 믿음이 절망적 현실에 대한 심리적 방어막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오랑우탄의 뼈를 인류 조상의 화석이라 조작하며 40년 간 속였던 필트다운인 사건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뻔한 거짓말조차 믿고 싶다면 수십 년 동안이나 굳게 믿어버릴 만큼 나약한 만물의 영장 인류의 본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저자는 1955년 현대 괴물 연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르나르 외벨망을 근대 괴물사의 종료점으로 설정합니다. 외벨망은 『미지의 동물을 찾아서』를 통해 괴물들의 존재 가능성을 재검토하며 가능성 있는 괴물을 과학적으로 구제하려 했습니다.


린나이우스의 히드라 퇴치가 근대 괴물 퇴치의 서곡이었다면, 외벨망의 로우 퇴치는 괴물 복권의 카운터파트였던 겁니다. 이 둘은 괴물이 과학과 어떻게 충돌하고 또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례라고 합니다. 결국 괴물이 사라진 게 아니라 시대마다 달리 재정의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짜 뉴스, 음모론, 딥페이크로 대변되는 디지털 환경은 과거 신문, 라디오 방송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과학적 권위를 가장한 허위 정보의 유통,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의 남용, 상업적 이익을 위한 대중 조작 같은 현상들은 모두 근대 괴물 사기극의 현대적 변주입니다. 진위 여부보다 화제성이 우선시되는 정보 생태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럴듯한 괴물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화의 시대에서 근대의 시대로 넘어오며 괴물은 더 이상 마법이나 신벌의 대행자가 아닌, 과학의 실험대 위에서 해명되어야 할 오류가 되었습니다. <근대 괴물 사기극>은 그 전환의 순간에서 거짓과 착각, 실수와 조작이 한데 엉킨 사기극의 무대를 생생히 복원해냅니다.


괴물은 실재하지 않지만 괴물에 대한 믿음은 실재했습니다. 괴물의 존재를 믿게 만드는 힘은 결국 인간의 심리적, 사회적 조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산화 작가는 이 믿음의 작동 방식까지 추적하며 괴물 이야기가 인류 인식의 오류 연대기임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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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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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탄금』으로 K-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다혜 작가가 이번엔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의학 서스펜스를 들고 왔습니다. 소설 <탁영>은 죽은 자를 묻는 매골자 출신 백섬과 금박을 새기는 금박장 희제와의 운명적 만남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판 CSI라 불릴 만한 의학 드라마와 애틋한 멜로, 특히 진저리쳤을 정도로 완벽한 서스펜스를 버무린 수작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림자를 맡긴다'는 뜻의 '탁영托影'이라는 단어는 낯설었지만, 조선이라는 익숙한 배경 속에서 사회의 음지와 의료의 어두운 이면, 인간 욕망의 끝을 극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입니다.


시체를 묻는 매골자로 살아왔던 백섬은 조선의 수어의 최승렬의 집 노비로 팔려가게 됩니다. 구곡재라 불리는 외딴 별채에서 지내게 된 백섬은 금박장 희제, 최대감 댁 차남 장헌과 동갑내기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탁영>은 아리따운 스토리는 아닙니다. 인간관계, 정치적 음모, 의술의 비윤리성까지 확장되는 과정이 휘몰아칩니다. 궁중 암투와 의학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배합해 장르적 쾌감이 치솟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하층민 직업들이 많이 묘사되어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탁영>에서 가장 복합적인 악인은 차남 장헌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의술의 길에 들어선 장헌은 백섬과 희제의 관계를 참지 못한 채 제대로 흑화하는 인물입니다. 조선 최고의 의관이 되기를 자명한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희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의라고 착각할 때 인간은 가장 잔인해지는 법이다." - p210


장헌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의술, 연모라는 이름 아래 벌이는 폭력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정당화된 폭력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그 광기의 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백섬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금박 장식이라는 고운 일을 하는 희제를 만나며 운명은 새로운 방향으로 향합니다. 무엇보다 희제의 여성상이 참 멋집니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길 거부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대적할 기세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평생 시체를 묻으며 살아온 백섬이 수어의 최대감 댁의 노비로 팔려가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필연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출생 조건 때문에 백섬이 최대감 댁의 인간 부적으로 들어왔다는 게 표면적 이유라면, 그 뒤에는 더욱더 무서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미신적 설정으로 생각하며 읽다가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읽는 내내 소름이 돋습니다. 구곡재에서 백섬이 받는 융숭한 대접의 이면에는 섬뜩한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탁영>은 사랑과 복수를 두 축으로 삼습니다. 희제는 연모를 두려워하고, 백섬은 욕망 없는 사랑을 선택하며, 장헌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삶의 본질, 인간의 그늘, 권력의 무게, 감정의 민낯을 정교하게 해부합니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재미와 함께 인물들 간의 복잡한 감정선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특히 칼두령이라는 캐릭터는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엉뚱미가 있어 매력적인데다가 백섬만큼이나 순정미 갖춘 인물입니다.


시대극이지만 대사가 어색하지 않고 찰져서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결말에 이르를수록 마음은 침잠해지지만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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