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너머 한 시간
헤르만 헤세 지음, 신동화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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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밤의 문턱에서 깨어난 젊은 헤세를 만나는 시간 『자정 너머 한 시간 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 20세기 문학 거장의 탄생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가 담겼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주제인 자기 초월, 내면의 문, 젊은 영혼의 도약이 처음으로 온전한 형식을 갖추고 나타난 작품입니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 유희》 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헤르만 헤세 세계의 서막은 바로 1899년 첫 산문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정 너머 한 시간』은 젊은 헤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가 정신의 태동기 기록이자 세계관의 원형 저장소에 가깝습니다. 서점에서 도서 정리를 하며 시인의 꿈을 품던 청년이 밤의 고독과 환상 속에서 어떤 사유를 익히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총 아홉 편의 단편과 1941년 재간 시기에 덧붙인 머리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모두 밤이라는 시간대를 기반으로 하지만, 몽상이나 감상적 정조에 머물지 않습니다.


미묘하게 뒤틀린 시공간, 현실과 상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적 환상 그리고 인간 내면에 깃든 우수와 회귀 본능이 이야기마다 독자적인 색채를 띠며 펼쳐집니다. 릴케가 이 작품을 읽고 경건한 밤의 기도 같은 목소리라 찬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정 너머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내면의 이동을 의미하는 좌표입니다. 현실적 삶의 방향과는 다른, 영혼이 이동하는 길이자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아홉 편의 산문은 문 너머에서 체험한 것들입니다.


첫 번째 산문 「섬 꿈」. "삶의 역겨움이 나를 내몰았고, 도시들의 연무와 그 신전들의 소란스러운 쾌락이 나를 밀쳐냈어요… 당신의 숲을 지났어요." 낯선 섬에 도착하는 순간을 그리며, 헤세는 자아가 재생되는 찰나를 미학적으로 포착합니다. 


젊은 존재가 고통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보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헤세 본인 역시 신학교를 탈출하고 서점에서 일하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던 시기였으니 심정 기록처럼 느껴집니다.


섬은 고독을 통해 갱신되는 내면을 상징하며, 세속적 사회를 떠난 영혼의 생장을 보여줍니다. 헤세가 평생 추구한 자기 초월의 원형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섬은 피난처가 아니라 자기 발견의 공간입니다. 오염된 시선을 씻어내고 다시 보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상하게 하는 두 번째 이야기 「엘리제를 위한 알붐블라트」는 음악과 이미지가 뒤섞인 감각적 산문입니다. 헤세가 시도하는 건 시각과 청각, 형상과 리듬의 융합입니다. 평생 그림을 그렸던 헤세. 이 글은 내면 풍경화의 문학 버전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포착하는 시도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 「열병의 뮤즈」는 고통이 어떻게 새로운 사유를 탄생시키는지 보여줍니다. 헤세 역시 불안과 우울, 감정 기복을 겪으며 창작의 리듬을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열병은 자아의 외피를 벗겨내는 체험입니다. 고통 속에서 시각이 예민해지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사물과 감정의 구조가 드러납니다. 인간 내면이 어떻게 위기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회복과 재생의 서사입니다. "그날 밤 불가해한 존재가 내게로 친근하게 몸을 숙이는 걸 알아차렸을 때… 감사와 평온과 빛과 행복의 소용돌이가 나를 휩쌌다."라는 문장을 통해 불가해한 존재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더 큰 자아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데미안》의 참된 나를 깨우는 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왕의 축제」는 짧지만 인상적인 이미지로 구성됩니다. 헤세는 현실적 규율에서 벗어난 축제를 영혼의 해방으로 해석합니다. 중세적 제의와 몽환적 풍경, 청년 시인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어우러진 이 글은 이후 헤세 문학에서 반복되는 의례적 통과의 모티프를 보여줍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예술가 골드문트의 방황, 『황야의 이리』에서 하리 할러의 분열이 떠오릅니다.


「말 없는 이와의 대화」에서는 외부 인물과의 소통이라기보다, 자기 내적 분신과의 대화에 가깝습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간절히 원하는, 자기 고백이면서 동시에 타자를 향한 호소인 글쓰기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낮과 밤의 이분법을 확립하는 「게르트루트 부인에게」, 멜랑콜리하면서도 달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상곡」, 밤의 여행이 끝나고 난 뒤 영혼이 맞이하는 충만함과 일종의 영적 결실을 보여주는 「이삭 여문 들판 꿈」까지 헤세 문학의 모든 씨앗을 품고 있는 글이 펼쳐집니다.


『자정 너머 한 시간』은 헤르만 헤세 문학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밤, 고독, 환상, 예술, 내면성이라는 키워드는 훗날 그의 장편들에서 거대한 구조물로 완성됩니다. 거장의 출발점을 함께 목격하는 경험이자, 한 인간이 자기 영혼을 향해 나아가던 가장 첫 시간대를 엿보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깊은 감정과 은은한 고독을 품은 심야의 감성을 상징하는 표지 디자인이 멋집니다. 밤의 시적 공간을 미리 체험하는 느낌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본격적인 세계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밤의 고요 속에서 자신만의 사유를 찾고자 한다면 『자정 너머 한 시간』을 곁에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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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한눈에 가계부 미니 - 휴대하기 좋은 캘린더형 미니 가계부
솜씨연구소 지음 / 솜씨컴퍼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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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2026년의 재테크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필수템 『한눈에 가계부』. 휴대성 좋은 mini 미니 버전으로 만나봅니다.


스마트폰 앱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카드 사용 내역은 자동 분류되고, 계좌 잔액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됩니다. 그런데도 종이 가계부가 유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솜씨연구소가 내놓은 『한눈에 가계부 미니(2026)』는 책상에 모셔두는 결심의 증거가 아니라, 언제나 몸에 지니는 일상의 조력자로 가계부의 역할을 바꿉니다.


평소 영수증 받지 않고 현금으로 지출한 자잘한 금액이나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마이크로 소비는 누락되기 쉬운데요. 한눈에 가계부는 이런 지출뿐만 아니라 자산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줘 손안의 금융 비서를 들인 느낌입니다.


사용법 예시를 꼼꼼히 다루고 있어 도움됩니다. 가계부는 언제나 의지는 있는데 오래 못 가는 도구였습니다. 기록 항목이 너무 많고, 쓰기 시작하면 기계적이고, 생활 속 틈새 시간을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눈에 가계부 미니』는 일정을 기록하는 캘린더 배경에 지출을 기록하는 가계부 역할을 배치해 직관적입니다. 


복잡한 항목 분류에 대한 부담감이 없습니다. 예산을 세울 때 작성하는 계획 가계부와 실제 가계부 페이지로만 나뉘어 있어 메모하듯 끄적이면 됩니다.


월초 고정비를 적어두고, 매일 발생하는 소액 소비도 써두면 소비 패턴이 예상됩니다. 기록을 해나가다 보면 매주 무슨 요일에 외식비가 급증하는지, 습관적으로 무엇을 자꾸 사고 있는지, 각종 구독료 결제가 얼마나 많은지 소비 패턴도 단숨에 파악이 되겠더라고요.


날짜 아래에 짧게 지출 내용을 쓰는 것만으로도 월간 패턴이 드러납니다. 한눈에 가계부보다 미니 사이즈이지만 작아서 불편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취향에 맞게 사이즈 선택하면 됩니다.


우리는 가계부를 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쓰고 난 뒤의 통찰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한눈에 가계부 미니』는 자산, 고정 지출, 상하반기 계획, 품목별 지출 그래프 등 전체적으로 결산을 할 수 있는 페이지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보유한 자산 상태를 한눈에 정리하고, 지출 활동이 현재 자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막연한 불안감을 줄이고, 통제력을 높이는 첫걸음이 됩니다.


특히 고정 지출을 잘 정리해두는 것만으로도 도움 되더라고요. 매달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은 변동 지출의 마지노선을 결정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이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변동 지출은 언제나 과잉 지출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소비의 이유, 요일 편향, 충동구매 트리거 등을 패턴으로 분석해 보기도 하고, 나만의 지출 카테고리를 설정해 소비 감각을 재정렬해 보기도 하고요. 한 달 동안 예상하지 못했던 소비와 정말 만족했던 소비도 체크해 보려고 합니다.


매달 들어오는 돈은 정확히 기억하면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돈은 얼마인지, 어제 쓴 돈은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던 소비습관 때문에 모을 돈이 없다고 한탄하기만 했다면 한눈에 가계부를 만나보세요.


잡비로 뭉뚱그려지기 쉬운 여행 가계부와 차계부가 별도의 섹션으로 마련되어 있어 도움 됩니다. 여행처럼 예산을 크게 벗어날 수 있는 비정기적 지출은 일상 소비에 섞이면 전체를 왜곡시키기 쉽습니다. 더불어 유류비, 소모품 교체, 세금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이 많은 자동차 관련 비용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돈을 쓰는 모든 순간은 나의 시간과 노동의 대가입니다. 이 돈을 시급으로 따져보면, 나의 몇 시간이 빠지는 건지 뼈저리게 다가옵니다. 가계부를 쓴다는 것은 시간의 가치를 재정의하는 작업입니다.


돈에 대한 막연한 걱정 대신 『한눈에 가계부 미니』로 정확한 수입과 지출 패턴이라는 정보를 확보하면, 불안감은 구체적인 계획으로 대체될 겁니다. 2026년을 재정적으로 현명하게 보내기 위해 동반자로 삼을 가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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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도쿄 : 요코하마·가마쿠라·하코네·가와구치코·사와라·가와고에 2026-2027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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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일본 여행의 불안을 걷어내는 가장 아날로그적이면서도 가장 혁신적인 여행가이드북 『에이든 도쿄 2026-2027』.


유튜브 추천 코스, 인스타그램 맛집, 블로그 후기, 노션에 정리한 지도 등 인터넷 정보는 넘치는데 정작 내 여행을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가를 놓쳐버린 채, 탭을 오가다 출발 전부터 지치는 일이 흔합니다.


864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지도만 150장, 여행 스팟 2,500곳. 팀원 10명 이상이 1년 넘게 직접 발로 뛰어 만든 데이터. 이 정도의 가이드북이라면 든든하지 않을까요.


『에이든 도쿄 2026-2027』은 도쿄와 근교 도시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확신, 안도감, 여행적 상상력을 안겨줍니다.


지도로 시작해 지도로 끝나는 압도적 정보 체계를 갖춘 가이드북입니다. 에이든 시리즈의 핵심은 언제나 지도였습니다. 단순한 축척의 지도가 아니라, 여행자가 실제 거리에서 부딪히는 난점을 풀어주는 실용 우선형 지도입니다.


여행자는 두 가지에서 불안을 느낍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동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에이든은 이 문제를 지도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게 합니다. 도쿄는 시부야·신주쿠·긴자·우에노처럼 지역별 캐릭터가 확연히 다르고 역 내부도 복잡해, 지리 감각이 여행의 질을 결정합니다.


『에이든 도쿄 2026-2027』에서는 신주쿠역 출구 약도만 따로 수록, 시부야 스크램블 주변만 확대해 재배치, 하라주쿠는 다케시타·오모테산도·캣스트리트로 세분화, 아사쿠사와 스카이트리를 연결해 도보 가능한 루트까지 시각화... 종이지도는 한눈에 구조를 파악하게 합니다.


여기에 근교 여행지 요코하마·가마쿠라·하코네·가와구치코·사와라·가와고에까지 지도 파트를 동일한 기준으로 편집해 긴 일정도 손쉽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계절·문화·라이프스타일까지 도쿄의 모든 장면을 모은 데이터박스 테마 여행을 다룬 파트도 유용합니다. 도쿄는 이미 오감으로 소비되는 도시입니다. 그렇기에 여행자는 내 관심에 맞는 도쿄를 빠르게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쿄 벚꽃·단풍·겨울 일루미네이션, 건축 기행, 미술관·박물관 여행, 아이와 가기 좋은 스팟, SNS 핫스팟, 야경·전망대 비교, 100엔·300엔샵 / 드럭스토어 완전정복, 도쿄 음식·술·디저트·빵지순례, 가챠·플리마켓·전통시장 등 도쿄의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역별 파트는 가장 방대한 분량을 차지합니다. 도쿄 서부(이케부쿠로·신주쿠·하라주쿠·시부야), 동부(아사쿠사·우에노), 중부(긴자·도쿄역·롯폰기), 근교(요코하마·가마쿠라·하코네·가와구치코 등)는 모두 지도를 기반으로 구성됩니다.


한 지역을 중심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까지 확장해 소개합니다. 걸어갈지, 지하철을 타야 할지 미리 계획할 수 있습니다. 맛집의 경우 지나치게 유명해서 줄만 서다 하루를 쓰게 되는 곳은 제외하거나 대신 대안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여행자 불안의 1순위는 교통입니다. 공항 간 비교, 공항에서 도심까지의 이동 유형별 장단점은 물론이고 사용자 패턴과 여행 일정에 따라 최적 조합을 선택할 수 있는 교통패스 비교표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여행자는 여행 전에 정보를 정리합니다. 길에서는 휴대폰으로 지도만 확인하는 편입니다. 그렇기에 여행가이드북의 두꺼움은 단점이 아니라 내 여행을 완성해 줄 확실한 백업으로 작용합니다. 여행자의 불안을 줄이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전부 실어놓는 대담한 결정을 한, 에이든 여행가이드북 시리즈입니다.


한 권으로 도시의 결이 보입니다. 나카메구로의 골목의 젊은 감각, 사와라 같은 근교 도시에서 느끼는 전통의 멋, 교통 구조를 이해할수록 제대로 여행이 가능한 하코네 등 지도를 중심으로 계획하는 방식이 도시를 보는 눈도 키워줍니다.


지도 + 여행지 + 동선 + 먹거리 등 빠짐없이 다루는 풀스펙 구조의 에이든 해외여행 가이드북 시리즈. 오사카 간사이 편에 이어 도쿄까지 출간되었습니다. 다음 지역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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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 - 아이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길러내는 가족문화의 비밀
수전 도미너스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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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퓰리처상 작가가 10년 추적한 성공 가문의 비밀, 저녁 식탁에서 시작된 탁월함의 경로 『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 The Family Dynamic』. 저널리스트 수전 도미너스 저자는 가장 사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주제, 가족문화를 탐사합니다.


왜 특정 가문에서 대대로 의사나 예술가가 배출되는지, 어떻게 한 집안의 모든 자녀가 뛰어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문화적·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여섯 가족의 삶을 해부합니다.


『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은 가족 내에서 은밀하게 형성되고 작동하는 무형의 힘. 가치관, 기대치 그리고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개인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헤치는 인류학적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이 탐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출장길에 나섰다가 잠시 맡겨졌던 다른 집의 저녁 식탁 풍경은 인생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집은 매일 저녁 다양한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는 문화였지만, 저자의 집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TV를 보러 가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 극명한 대조는 평생의 화두를 낳았습니다. 만약 내가 매일 저녁식사 때마다 토론하는 집에서 자랐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단순히 더 나은 환경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가족이 공유하는 가치와 시간이 개인의 지적 호기심과 성취 욕구에 얼마나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저널리스트의 질문입니다. 부모의 기대나 능력 함양의 측면에서, 가족문화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런 요구는 아이에게 성장의 축복일까요, 아니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부담일까요? 이 질문이 바로 여섯 가족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의 시발점이 됩니다.





성공적인 가족문화의 흥미로운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아이를 돕지 않는 용기입니다. 자녀의 실패를 막기 위해 과도하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대다수 부모가 실패를 극도로 꺼리는 양육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통찰입니다.


그로프 가족의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4세 딸 세라 그로프가 14킬로미터의 호수를 수영으로 건너겠다는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보트를 타고 옆을 지켜주며 딸이 안전하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만 마련했습니다.


결국 세라는 마을 기록을 세웠고, 훗날 두 차례 올림픽에 출전하는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되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열망이 솟구치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뒤로 물러서서 지지하는 절제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유튜브 CEO 등을 배출한 워치츠키 자매의 어머니 에스터 워치츠키의 양육 방식은 이 원칙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딸들의 리포트에 피드백을 적어주며 "이대로 제출해서 C나 D를 받아도 되고, 다시 써도 돼"라고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강요 없이도 자녀들이 스스로 최고의 결과를 향해 수정하고 노력하게 만드는, 기대치를 조용하고 강력하게 암시하는 문화적 환경이 핵심입니다. 아이의 내면에 스스로 몰아붙이는 힘을 장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부모의 영향만큼이나 강력한 축은 형제자매의 상호작용입니다. 형제자매는 집 안에서 서로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이자, 가장 열렬한 조력자입니다. 그로프 가족의 세라가 수영을 시작한 동기는 다름 아닌 언니 로런을 이기고 싶어서였습니다. 단순한 질투를 넘어 열렬한 동경에서 나온 경쟁입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여자축구대표팀 선수 중 약 4분의 3이 형제자매 중 동생이었다는 사실은, 동생들이 손위 형제자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틈새시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단련하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집 안의 경쟁은 개인의 역량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무르기아 가족의 사례는 형제자매가 어떻게 서로의 사다리가 되어주는지 보여줍니다. 형 알프레드의 발자취를 좇던 동생 카를로스는 그 기대를 발판 삼아 가족 최초의 라틴계 학생회장, 졸업생 대표까지 오르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대가족의 일요일 저녁 식탁에서 그들은 서로의 경력과 인맥을 공유하며 야망을 함께 키웠습니다.


브론테 자매의 경우처럼 형제자매는 서로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세상에 나갈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형제자매간의 상호작용은 동일한 환경, 시간, 자원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모방하고 경쟁하는 동시에 깊은 연대를 쌓는 매우 독특한 가족 문화의 핵심 축입니다.


성공을 결정하는 것이 단순히 좋은 환경이 아니라 유전적 기질, 가족문화 그리고 우연(운)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일깨워 줍니다.


성공적인 가족들은 자녀의 유전적 기질을 억지로 통제하려 하지 않고, 그 기질이 사회적 기술이나 창의성, 집중력 등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일상을 설계합니다. 가족문화는 유전적 스위치를 켜는 촉진 환경인 셈입니다.


저자는 운의 역할도 놓치지 않습니다. 사회학자 돌턴 콘리의 비유처럼 일부 가족은 공정한 몫 이상의 큰 행운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취재의 종착점에서 위대함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높은 성취를 이룬 가족들의 삶에는 마음의 평화, 여유, 온전한 가족과의 시간 같은 일정 부분의 손실이 뒤따랐습니다. 성취란 결국 무엇인가를 얻는 여정인 동시에,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파울루스 가족의 어머니는 아무 조건도 흔들림도 없는 양질의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내적 자신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성공적인 가족은 단순히 체크 리스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의 타고난 역량을 최대로 펼칠 수 있도록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일상이라는 토대를 헌신적으로 설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은 그 토대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해독하는 청사진을 보여줍니다.


더 건강한 성장 환경을 만들고 싶은 부모라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가족 간 대화 방식, 형제자매의 관계, 부모의 역할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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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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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술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윌 곰퍼츠(Will Gompertz)는의 신작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베스트셀러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하게 여겨지던 현대미술을 대중의 눈높이로 끌어내린 저자입니다. 이번에는 예술가들의 가장 내밀한 본질,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탐구합니다.


이 책의 출발점은 우연이었습니다. 집필 중이던 윌 곰퍼츠가 강연 요청을 거절하자, 작가 톰 하비가 보내온 이메일 한 통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어린 시절 해변을 거닐던 사진과 함께 도착한 그 편지에는, 늘 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걸으며 조개껍질을 주웠지만 정작 가장 멋진 것을 발견하는 건 항상 뒤에서 '이것 봐!'라고 외치던 아버지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해 바로 그 순간을 살았다. 그는 아들에게 아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많은 예술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라며 윌 곰퍼츠는 이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가들이 지닌 경이로운 시선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미술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명화 앞에서 뭐가 대단한지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겁니다. BBC 예술 담당 편집장을 11년간 역임하고 영국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지낸 윌 곰퍼츠는 작품 해설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마치 예술가 본인이 되어 그들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체험하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총 서른한 명의 작가와 그들의 단 하나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해부합니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도록 이끄는 시선의 기술임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예술가는 보는 일의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그저 훑고 지나가는 대신, 사람과 장소, 사물을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캐묻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평범한 순간을 포착하여 예술로 끄집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영국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는 자연의 색을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시선의 대가입니다. 그의 대작인 〈봄의 도래 (The Arrival of Spring)〉를 보면 나무줄기가 갈색이나 회색이 아닌, 강렬한 보랏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나무의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빛의 미묘한 변화와 여러 시점들이 동시에 담기는 현실의 감각, 즉 시간을 품은 관찰의 결과입니다. 나무는 갈색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눈앞의 경이로운 현실을 놓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의 규모, 재료,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흔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거대한 공공 예술부터 가장 사적인 공간의 폭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폭넓습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부부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스펙터클을 보는 눈을 가진 작가들입니다. 〈포장된 국회의사당 (Wrapped Reichstag)〉은 독일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은빛 천으로 완전히 덮어버린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행위는 건물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잠시 유보시키고, 일시적인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원불멸할 것 같던 권위와 구조물이 천 한 조각에 의해 잠시 낯선 존재로 바뀌는 순간, 대중은 비로소 그 구조물과 그 주변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들의 예술은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력하게 존재를 경험하게 만드는 재정의의 기술입니다.


버려진 폐품을 통해 역사의 서사를 구축하는 엘 아나추이는 마음의 눈으로 보기를 실천합니다. 수많은 술병 뚜껑을 납작하게 펴고 구리선으로 엮어 거대한 직물 형태의 설치 작품인 〈지구의 피부 (Earth's Skin)〉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작품의 재료인 병뚜껑은 서양 열강과의 교역의 역사, 알코올 소비, 식민주의와 같은 아프리카의 깊은 서사를 내포합니다. 엘 아나추이는 버려진 재료에서 시간의 흔적 그리고 대안적인 가치를 발견하며 기념비적인 규모로 바꿔버렸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장 하찮은 것도 예술적 승화를 통해 장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연금술인 셈입니다.


감정의 미묘한 영역도 파고듭니다.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인 애그니스 마틴은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작품 〈우정 (Friendship)〉은 격자무늬나 희미한 선으로 채워진 캔버스를 통해 시각적인 압도 대신, 고요함과 평온함을 전달합니다.


애그니스 마틴에게 예술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명상에 가까운 깊은 사유와 감정을 향한 눈으로 포착된 섬세한 정서 그 자체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란함을 넘어 내면의 가장 은밀하고 순수한 상태인 우정, 행복, 고독과 같은 감정의 본질을 응시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영국의 개념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은 내밀한 시선의 대표 주자입니다. 논란적인 작품 〈나의 침대 (My Bed)〉는 실제로 그녀가 우울증으로 며칠을 보냈던, 어지럽혀진 침대와 그 주변의 쓰레기, 담배꽁초 등을 미술관에 그대로 전시한 것입니다.


가장 부끄럽고, 고독하며, 지저분한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사적인 공간을 공개한 겁니다. 충격과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과 취약함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트레이시 에민은 자신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영혼을 보여줄 기회로 삼은 용감한 예술가입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예술가의 작업이 고독한 충동이자 필연적 운명이라는 인식입니다. 경험 많은 예술가는 대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이 좌절과 실망이 끝없이 이어지는 비참한 반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독특한 방식을 멈출 수 없기에 작품을 창조한다고 합니다.


그 고된 여정 끝에 탄생한 서른한 명의 예술가들의 시선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를 눈먼 상태에서 구출하고 삶의 풍요를 더합니다. 보는 방식을 바꾸는 순간, 당신의 삶은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전하는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30여 점의 도판과 함께 각 예술가의 대표작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구성이 매력적입니다.


윌 곰퍼츠는 작품 하나를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줍니다. 호크니의 나무 앞에서, 칼로의 자화상 앞에서, 마틴의 선들 앞에서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술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예술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은 곧 나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임을 보여줍니다. 평범해 보이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띠고 나타납니다. 아침 출근길 풍경이, 사무실 책상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하늘이 달라 보입니다. 윌 곰퍼츠가 원하는 예술의 역할입니다. 미술관 안에 갇힌 예술이 아니라, 삶 속으로 스며드는 예술. 보는 방식의 변화가 결국 사는 방식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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