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 - 케이팝 러버, 고경력 오타쿠, 트위터 NPC 쑨디가 140자로는 부족해 14만 자나 주절거린 한풀이
쑨디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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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최애를 향한 순정, 자아를 찾는 여정. 16만 팔로워 트위터 인플루언서 쑨디의 오타쿠 생존기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 트위터에서 140자로 압축해 표현해온 팬심을 14만 자로 풀어낸, 오타쿠 문화에 대한 고찰서입니다.


케이팝 러버, 고경력 오타쿠, 트위터 NPC를 자처하는 쑨디 저자. 팬심의 온갖 스펙트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오타쿠 문화의 내밀한 역학과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풀어냅니다.


가볍게 시작한 덕질이 어떻게 인생의 중심축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경험한 기쁨과 슬픔, 궁극적으로 나다움을 발견하는 여정을 사이버 인류학 보고서처럼 담아냈습니다.


아이돌 팬 자아의 목소리를 통해 덕질의 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고백합니다. "팬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존중'일 것이다. (…) 애정을 기반으로 한 특이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감정이 단순 소비 심리로 치부되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쑨디의 발언은 팬 문화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서게 합니다.


팬덤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와 규범, 세대 간 갈등도 분석합니다. 특히 기업의 소비자(팬) 기만행위에 대한 비판은 날카롭고도 정당합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돌려 말하느라 이제야 밝히는 사실이지만 제정신이면 그 가격 주고는 절대 안 살 물건들을 판매하면 이 정도는 좀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디 달고 다니지도 못할 아크릴 키링을 2만 원에 판다든지 하는 소비자 기만행위 말이다)"라는 표현은 기업과 팬 사이의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꿰뚫고 있습니다.


입덕과 탈덕의 아픔, 팬덤 내부의 갈등, 기업의 기만행위 등 오타쿠로 살아가며 경험한 다양한 굴곡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 팬 활동은 흔히 즐겁고 설레는 일로 치부되곤 하지만, 쑨디 저자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덕질 대상의 배신으로 인한 상실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논란에 의한 '탈덕'의] 고통은 실제 이별의 고통과 매우 유사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좋았던 기억들, 습관적으로 찾게 되는 관련 콘텐츠들, 그 사람의 생년월일로 지정해뒀던 비밀번호." 이런 묘사는 팬심의 상실이 가져오는 실존적 고통을 평범한 감정의 범주로 끌어올려, 그동안 사소하게 치부되던 팬의 감정에 무게를 부여합니다.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에서는 쑨디 저자가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과정을 추적합니다. 쑨디의 덕질 일대기는 다양한 덕질 경험이 어떻게 하나의 일관된 정체성으로 수렴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불필요해 보이는 취향과 정체성의 탐색이 사실은 자아 발견의 필수적인 여정임을 일깨워 줍니다. 자신이 왜 쑨디가 되었는지에 비하인드 스토리를 최초로 공개하며 온라인 페르소나의 형성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정신 건강 유지 방법에 관한 실용적 가이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트롤링, 논란, 갑작스러운 취향 변화 등 온라인 활동의 다양한 위험 요소에 대처하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합니다.


오타쿠의 삶을 미화하지도 조롱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현실적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냅니다. 덕질이란 로맨스, 미스터리, 휴먼드라마가 다 담긴 복합장르이며, 이 감정의 총체를 감당할 준비가 된 이들만이 비로소 오타쿠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쑨디의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덕질은 감정노동이자 정서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기쁨과 환멸을 반복하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훈련하는 과정. 쑨디는 이를 통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라는 능력을 익혔다고 말합니다.


온라인 활동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이 실제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쑨디 저자는 우리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소셜미디어를 사랑하는 N가지 이유'에서는 디지털 공간이 가진 긍정적 측면을 보여줍니다. "나는 여전히 소셜미디어가 좋다.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생각, 기록으로 남은 나의 흔적. 이 모든 것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라고 말입니다.


"누군가의 순수한 열정이나 깊은 애정을 굳이 결핍이라는 틀에 가두려는 시도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라며 오타쿠 문화를 병리화하는 시선에 대한 반박도 드러냅니다. 쑨디 저자는 오타쿠의 열정을 결핍이 아닌 풍요로 재해석합니다.


<너무 오래 오타쿠로 살아서>는 팬 문화 에세이를 넘어 현대인의 정체성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타쿠 문화를 입덕과 탈덕의 순환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 경험인 만남과 이별의 틀로 승화시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오타쿠 문화를 향한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는 데 있습니다. 오타쿠를 철없고 가벼운 존재가 아닌, 깊은 열정과 사유를 가진 주체로 재정의합니다. 덕질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여정임을 짚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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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칭찬하지 마라 - 심리학이 밝혀낸 아이를 성장시키는 칭찬과 꾸중의 원칙
김영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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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마음은 모든 부모의 공통된 소망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칭찬하고, 더 긍정적으로 말하고, 때론 상을 줘가며 아이를 북돋아줍니다. 그런데 이런 칭찬이 우리 아이의 동기를 오히려 꺾고 있다면?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김영훈 교수의 <함부로 칭찬하지 마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육아 상식에 대해 과학적 실험을 바탕으로 그 함정을 조목조목 짚어냅니다.


칭찬과 꾸중,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보상 시스템이 아이들의 성과에 미치는 진짜 영향을 파헤칩니다. 그 결과는 기존 상식을 뒤엎는 충격적인 내용들입니다.





피아노 치는 것도,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주 좋아했던 아이가 핑곗거리를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학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둔 사례를 저자가 해석한 장면부터 놀라움이 펼쳐집니다.


저자는 자기 불구화 현상 때문이라고 짚어줍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불구화 현상이란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느낄 때 미리 변명거리를 만들어두는 방어 기제입니다. 아이들이 "공부 재미없어", "관심 없어"라고 먼저 선언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겁니다. 과도한 칭찬과 기대가 부담스러워서 아예 포기하는 쪽을 택하는 겁니다.


칭찬을 많이 하는 미국식 교육과 꾸중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한국식 교육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까요? 실험 결과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을,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꾸중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습니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현실에서는 이게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미국 부모들은 못해도 칭찬하고, 한국 부모들은 잘해도 더 잘할 수 있다며 채찍질을 하거든요. 잘한 아이에게는 잘했다고 칭찬하고, 잘못한 아이에게는 잘못했다고 꾸중해야 하는 이 기본적인 원리를 우리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핵심은 진실성입니다. 거짓된 칭찬은 아이를 자기합리화에 빠뜨리고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실에 기반한 정직한 피드백은 아이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개선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고 합니다.


더 충격적인 진실은 긍정도 독이 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할 수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너무 긍정적인 아이들도, 너무 부정적인 아이들도 모두 공부를 못한다고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메타인지 능력이라고 합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의 인지 과정을 인지하는 능력, 즉 생각에 대한 생각을 말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방법으로 공부해야 효과적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항상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보다 못 봤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더 나은 성과를 보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아이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효과적인 학습 전략을 찾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투명 안경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을 뜻합니다. 장밋빛 안경도, 어둠 속 안경도 아닌 투명한 안경 말입니다.


긍정적인 아이가 멘탈도 좋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합니다. 무조건적인 긍정 사고는 오히려 현실 도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해결책도 찾을 수 없습니다.


"숙제 먼저 끝내면 놀게 해줄게"라는 말, 익숙합니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이런 보상 시스템이 오히려 아이의 내재적 동기를 해친다고 경고합니다.


보상이 주어지는 순간 아이들은 그 일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위해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은 더 이상 재미있는 활동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상을 동기부여라고 부른다. 멋진 표현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보상은 조작이다." - p199


보상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점점 수동적이 되고 창의성과 주도성을 잃게 됩니다.


저자는 두 가지 경우에만 보상이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이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때 초기 동기를 제공하는 경우. 둘째, 이미 충분한 내재적 동기가 있는 상태에서 성취를 인정해주는 의미의 보상인 경우입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자율성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를 주세요. 선택의 기회를 주세요. 실패할 권리도 주세요. 그래야 아이는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꾸중을 두려워합니다. 아이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아이의 자존감이 상할까 봐 걱정합니다. <함부로 칭찬하지 마라>는 오히려 진실한 꾸중이야말로 아이를 지켜주는 진짜 사랑이라는 걸 일깨워줍니다.


칭찬하지 말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지, 꾸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꾸중해야 하는지를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거짓 위로나 과장된 칭찬이 아니라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사실 기반의 진실한 피드백이야말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함부로 칭찬하지 마라>.


성취동기를 끌어올리는 칭찬, 긍정, 보상의 3가지 훈육 원칙을 바탕으로 육아에서 적용할 방법을 배워보세요. 혹시 내가 아이에게 독이 되는 칭찬을 하고 있었나라는 깨달음을 통해 진짜 성장을 위한 변화를 끌어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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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자비의 시간 1~2 세트 - 전2권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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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의 <자비의 시간 원제 A Time for Mercy> (전2권). HBO 시리즈 제작 결정된 이 소설은 《타임 투 킬》, 《속죄 나무》에 이어 '제이크 브리건스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존 그리샴이 창조한 캐릭터이자 페르소나인 제이크 브리건스는 불의에 맞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의로운 변호사입니다. 이번에는 의붓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인 열여섯 살 소년 드루의 변호를 맡습니다.


<자비의 시간>은 가정 폭력이라는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다룹니다. 드루가 자신과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를 학대하던 의붓아버지 스튜어트 코퍼를 총으로 쏘는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문제는 스튜어트가 경찰관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살해된 경찰관은 공동체의 상징이자 공권력의 대표였으며, 피의자가 된 드루는 미성년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살인범이자 폭력의 피해자라는 딜레마 속에서 변호사 제이크는 법의 정의와 도덕적 정의 사이에서 고뇌합니다.


1권은 드루의 체포와 기소 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밝혀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드루가 경찰관을 총으로 쏘기까지의 맥락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제이크가 이 사건을 맡으며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무게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존 그리샴 작가는 가정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그것이 얼마나 은밀하게 지속되는지, 피해자들이 왜 침묵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드루, 여동생 키이라, 어머니 조시는 경제적 자립이 어렵고 도움을 청할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상황에서 스튜어트의 지속적인 폭력을 견뎌야 했습니다.


스튜어트의 동료 경찰관들은 그의 도박 전력과 폭력성을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습니다. 작가는 가정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결함으로 인해 지속되는 문제임을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어합니다. 드루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어른들에 의해 방치되었고, 이제 사회는 그에게 법의 칼날을 겨눕니다.


읽는 내내 변호사 제이크와 함께 분노하게 됩니다. 제이크는 지역 사회의 보수적인 시선 속에서 고립감을 느끼고 가족의 불안까지 감내해야 합니다. 드루의 변호를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년의 생명을 위해 자비라는 가치를 붙들고 버팁니다.


법과 도덕, 정의와 자비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어떤 ‘선’이 진정한 선인가를 되묻습니다. <자비의 시간>은 법의 유연성 혹은 경직성에 대해 고민할 거리를 안겨줍니다. 한 명의 생사가 배심원 12인의 감정과 지역 사회 분위기에 좌우되는 현실. 법이 과연 인간의 복잡성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2권에 이르면 이 소설의 백미인 법정 장면이 펼쳐집니다. 실제 변호사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법정 분위기와 법적 쟁점들을 실감나게 그려냅니다. 증언과 반박, 법적 전략이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하는지를 세밀하게 그립니다. 조금씩 밝혀지는 새로운 비밀들은 법정을 긴장으로 휘감습니다.


소설은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를 허물고 선택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규정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정당화할 수 있는 살인이라는 모순적 개념을 통해 법의 경직성과 현실 세계의 복잡성 사이에서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변호사 제이크는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닙니다. 경제적 위기, 가족의 안정, 커리어의 지속 가능성 속에서 갈등하는 동시에 소년 드루에게 법의 이름으로 최소한의 자비를 보장하려 애씁니다.


때로는 전략적 침묵을 선택하고, 때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합니다. 존 그리샴이 만들어낸 제이크라는 캐릭터는 도덕적 직관과 법적 한계 사이에서 고민하며 단순히 법조계의 이상형이 아닌 시대와 맞서는 현실적 인물로서 성장합니다.


<자비의 시간>은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법이 보장하지 못하는 정의, 윤리적 판단이 법적 판단을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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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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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 크리스틴 로젠이 기술과 인간 사이의 균열을 날카롭게 해부한 책 <경험의 멸종>.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직접 경험을 침식해가는지를 추적합니다.


기술 문명의 은밀한 폭력성을 고발하며, 인간 고유의 감각과 경험이 어떻게 디지털 시스템 속에서 무력화되는지를 탐사하는 도발적인 비판서입니다.


경험의 멸종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저는 의아했습니다. SNS에는 수많은 인증샷, 후기, 리뷰가 넘쳐납니다. 소비보다는 경험에 돈을 쓰라는 조언이 익숙합니다. 우리 사회는 마치 경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우리의 경험이 점점 더 간접적이고 매개된 경험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부딪히고, 느끼고, 실수하고, 감정을 겪는 살아 있는 경험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디지털 장치와 플랫폼이 만들어낸 표준화된 감각이 채우고 있다는 것. 겉으로는 경험이 넘치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과 마음이 개입된 진짜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경험의 멸종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회복해야 할 감각의 붕괴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경험의 멸종>은 인공지능, 소셜 미디어, 비대면 플랫폼 등 기술이 일상의 모든 면에 스며들며 '경험'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다양한 사회문화적 사례로 보여줍니다. 기술을 통한 삶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살아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요?


먼저 직접 경험이 어떻게 디지털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지 들려줍니다. 여행을 가서도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데 더 열중하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 경험이 더 이상 '겪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콘서트에서는 휴대폰 카메라로 녹화하는 데 집중하고, SNS에 업로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 경험의 깊이와 풍요로움은 얕은 디지털 재현으로 대체됩니다. "경험은 더 이상 겪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고 전시되는 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감각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경험은 육체 없는 감각으로 변형되고, 경험의 진정성은 광고와 마케팅의 전략으로 탈바꿈되고 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고 눈빛을 읽고 감정을 전하는 대면 소통은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이를 대신한 비대면 소통은 인간의 사회성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팬데믹 이후 비대면 소통이 일상화되었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많습니다. 미묘한 표정 변화나 몸짓, 분위기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습니다. "기술은 투명 인간들의 사회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감정이 필터링되고 공감은 알고리즘으로 계산됩니다. 직접적인 접촉이 줄어들면서 우리는 사람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는 글쓰기조차 타이핑으로 대체했습니다. 저자는 손으로 쓰는 행위가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손으로 쓰는 행위는 뇌의 인지 기능, 감정, 창의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의 학습에서 이 차이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들은 화면보다 교사의 표정, 손동작, 교실의 소음 등 감각을 통해 학습합니다. 손글씨와 그림 그리기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적 사고를 형성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고, 영화를 보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기다림과 지루함이 사라진 세상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술은 '기다림'을 제거하려 합니다. 저자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성찰하고 상상하고 감정을 정제하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지루함은 생각의 여백을 만드는 감정이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그 여백마저 메우려 합니다.


감정도 데이터화되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분석하고 예측하며 감정 표현은 이모지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기술이 인간 내부의 감정 체계를 단순화하고 외주화한다고 봅니다.


"감정을 느끼는 일조차 우리가 하지 않게 되면, 인간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봅니다. SNS에서의 감정 표출은 진짜 감정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코드에 맞춘 의례적 반응일까요? 감정이 기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감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 좋아요를 위한 음식, 다시보기 가능한 라이브 콘서트. 저자는이를 픽셀화된 쾌락이라 부릅니다. 즉각적 만족은 늘었지만 쾌락의 진정성은 사라졌습니다.


공간은 기억과 감정이 깃드는 장소이지만 기술은 이마저도 개인화된 정보의 컨테이너로 만들고 있습니다. GPS, 앱 기반의 위치 추천, 맞춤형 광고는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획일화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동네나 광장을 잃고 필터 속의 장소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진짜 공간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담지만, 개인화된 디지털 공간은 고립을 확장시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을 겪을 수 있는 존재로 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직접 경험을 선택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실제로 교류하는 경험을 쌓고, 기술 사용에 대한 의식적인 규칙을 세우는 등 다양하게 직접 경험의 가치를 되찾는 방법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경험의 멸종>은 기술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기술로 인해 무엇을 잃었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책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인간의 본질까지 지배하게 둘 것인지, 주체적으로 다룰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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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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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항상 있어 익숙해져버린 존재, 숲. 익숙하다고 해서 우리가 숲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숲의 철학자로 불리는 김용규 저자는 20여 년간 숲을 스승으로 삼아 철학과 삶의 본질을 탐색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숲이 단지 풍경이 아니라 말 없는 스승이자 우리 존재의 거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는 우리가 늘 곁에 두고 있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숲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무자천서(無字天書)'라 불리는 숲으로의 여정을 안내합니다. '무자천서'란 '하늘이 쓴 글자 없는 책'이란 뜻으로 인간의 언어가 아닌 자연의 언어로 기록된 지혜의 책을 의미합니다.


숲에는 바르고 윤택한 삶의 지혜가 새겨져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가 흐르고 있음에도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저자는 생명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단지 효용성이나 심미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타자의 대상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국을 그저 차나 술을 담그는 재료로 또는 화병에 꽂아둘 관상용품으로만 인식합니다. 이런 시선은 그 꽃의 존재 가치와 삶의 방식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산국은 왜 서리를 맞으면서도 피어나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저자는 타자의 사연을 헤아리는 마음을 짚어줍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숲을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이는 사물의 겉모습 너머, 존재의 이유를 묻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굴곡 없이 찾아오는 계절이 어디 있던가요. … 겪어내야 할 것들 다 겪으며 겨우 붙들어낸 것들만이 농익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처럼 삶의 진실 중 하나가 바로 온갖 풍상을 견디고 나서야 평화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냉이의 생존 전략 역시 이를 잘 보여줍니다. 키 큰 풀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이는 가을에 발아해 겨울을 견딘 후 꽃을 피우는 전략을 택합니다. 그 과정은 가혹하지만 절실합니다. 삶의 숙제는 그렇게 생겨납니다. 모든 생명은 불완전한 서식지에서 버티며 자라납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너무 쉽게 ‘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 익숙함이 정말 앎이 맞는지 묻습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각자의 이유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다채로운 사연에 귀 기울이는 일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 경청의 행위입니다.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눈부시게 피는 여름꽃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합니다. 오동나무는 태풍이 잦은 환경에 맞서 살아가는 법을 진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사연은 결국 삶의 방식을 묻는 질문이자 우리가 놓치고 사는 삶의 깊이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는 숲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존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곧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입니다. “산다는 건 자신에게 부여된 그 숙제를 차곡차곡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불안과 흔들림 속에서도 기어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에게서 중요한 특징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가해자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의 가해자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억울, 원망, 비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억울한 일이 없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방 안으로 가해자가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 p170


왜 이 세상에는 삶의 숙제가 존재할까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 자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풀어내야 할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양분이 풍부한 곳에는 햇빛이 모자라거나 바람을 맞기 어렵고, 햇빛을 넉넉히 받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양분이 부족하거나 물을 얻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곳은 없으며 설령 그런 곳이 있다 해도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특정 생명에게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든 생명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경에 적응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대나무는 속을 비움으로써, 또 다른 생명은 부드러움을 갖춤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발을 맞춥니다.


저자는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다정한 인사말이 사실은 가장 허무한 인사말이라고 말합니다. "꽃길만 걸을 수 있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삶이 그렇듯,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난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이죠. 오히려 오동나무처럼 역경을 다루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2025년 여의도의 166배에 달하는 면적이 사라진 경북 일대 대형 산불을 언급하며 자연 파괴의 비극을 환기합니다. 실제로 파괴되고 있는 자연환경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생명력을 잃고 피폐해진 인간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황폐해진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숲에서 찾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인 질서, 먹고사는 일을 넘어서는 숭고하고 초월적인 삶의 모범, 더불어 사는 비결 등이 모두 숲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천천히 숲의 심부를 향해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의미가 소실되어가는 시대에 숲 생명들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삶을 돌아보는 것은 생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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