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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화비평가이자 역사학자 크리스틴 로젠이 기술과 인간 사이의 균열을 날카롭게 해부한 책 <경험의 멸종>.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직접 경험을 침식해가는지를 추적합니다.
기술 문명의 은밀한 폭력성을 고발하며, 인간 고유의 감각과 경험이 어떻게 디지털 시스템 속에서 무력화되는지를 탐사하는 도발적인 비판서입니다.
경험의 멸종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저는 의아했습니다. SNS에는 수많은 인증샷, 후기, 리뷰가 넘쳐납니다. 소비보다는 경험에 돈을 쓰라는 조언이 익숙합니다. 우리 사회는 마치 경험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우리의 경험이 점점 더 간접적이고 매개된 경험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직접 부딪히고, 느끼고, 실수하고, 감정을 겪는 살아 있는 경험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디지털 장치와 플랫폼이 만들어낸 표준화된 감각이 채우고 있다는 것. 겉으로는 경험이 넘치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몸과 마음이 개입된 진짜 경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경험의 멸종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회복해야 할 감각의 붕괴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경험의 멸종>은 인공지능, 소셜 미디어, 비대면 플랫폼 등 기술이 일상의 모든 면에 스며들며 '경험'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다양한 사회문화적 사례로 보여줍니다. 기술을 통한 삶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살아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요?
먼저 직접 경험이 어떻게 디지털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지 들려줍니다. 여행을 가서도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데 더 열중하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오늘날 경험이 더 이상 '겪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콘서트에서는 휴대폰 카메라로 녹화하는 데 집중하고, SNS에 업로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 경험의 깊이와 풍요로움은 얕은 디지털 재현으로 대체됩니다. "경험은 더 이상 겪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고 전시되는 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감각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경험은 육체 없는 감각으로 변형되고, 경험의 진정성은 광고와 마케팅의 전략으로 탈바꿈되고 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고 눈빛을 읽고 감정을 전하는 대면 소통은 인간관계의 기본입니다. 이를 대신한 비대면 소통은 인간의 사회성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팬데믹 이후 비대면 소통이 일상화되었지만 잃어버린 것들도 많습니다. 미묘한 표정 변화나 몸짓, 분위기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습니다. "기술은 투명 인간들의 사회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감정이 필터링되고 공감은 알고리즘으로 계산됩니다. 직접적인 접촉이 줄어들면서 우리는 사람을 읽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는 글쓰기조차 타이핑으로 대체했습니다. 저자는 손으로 쓰는 행위가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손으로 쓰는 행위는 뇌의 인지 기능, 감정, 창의력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의 학습에서 이 차이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들은 화면보다 교사의 표정, 손동작, 교실의 소음 등 감각을 통해 학습합니다. 손글씨와 그림 그리기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적 사고를 형성하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고, 영화를 보고, 음식을 주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기다림과 지루함이 사라진 세상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술은 '기다림'을 제거하려 합니다. 저자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성찰하고 상상하고 감정을 정제하는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지루함은 생각의 여백을 만드는 감정이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그 여백마저 메우려 합니다.
감정도 데이터화되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감정을 분석하고 예측하며 감정 표현은 이모지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기술이 인간 내부의 감정 체계를 단순화하고 외주화한다고 봅니다.
"감정을 느끼는 일조차 우리가 하지 않게 되면, 인간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봅니다. SNS에서의 감정 표출은 진짜 감정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코드에 맞춘 의례적 반응일까요? 감정이 기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감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여행, 좋아요를 위한 음식, 다시보기 가능한 라이브 콘서트. 저자는이를 픽셀화된 쾌락이라 부릅니다. 즉각적 만족은 늘었지만 쾌락의 진정성은 사라졌습니다.
공간은 기억과 감정이 깃드는 장소이지만 기술은 이마저도 개인화된 정보의 컨테이너로 만들고 있습니다. GPS, 앱 기반의 위치 추천, 맞춤형 광고는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획일화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동네나 광장을 잃고 필터 속의 장소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진짜 공간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담지만, 개인화된 디지털 공간은 고립을 확장시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을 겪을 수 있는 존재로 남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적으로 직접 경험을 선택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실제로 교류하는 경험을 쌓고, 기술 사용에 대한 의식적인 규칙을 세우는 등 다양하게 직접 경험의 가치를 되찾는 방법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경험의 멸종>은 기술로 인해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기술로 인해 무엇을 잃었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책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인간의 본질까지 지배하게 둘 것인지, 주체적으로 다룰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