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은 나를 비춰 아름답고 오래도록 빛나게 한다
한미숙 지음 / 쿤스트포르센 / 2025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2006년부터 2024년까지의 내면 여정, 시각 예술가 한미숙 작가의 <세상은 나를 비춰 아름답고 오래도록 빛나게 한다>는 삶과 예술이 녹아든 살아있는 기록과 함께 51점의 드로잉을 담은 책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예술적 자아 탐색의 여정을 담아 예술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상상 속 미래를 오가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써내려간 글과 독특한 드로잉 덕분에 전시장을 걷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작가 한미숙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유기적인 드로잉과도 같습니다. 첫 번째 장 「세상은 나를 비춰」에서는 2006년부터 2024년까지 겪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과 삶의 궤적을 드로잉과 짧은 산문으로 기록해 나갑니다.

특별한 줄거리도 명확한 결론도 없습니다. 그저 그 안엔 나로 존재하기 위한 중심 잡기라는 절실한 주제가 흐릅니다. 이 중심은 어떤 강한 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자신에게 부딪쳐오는 세상의 장면들을 회피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에 특별합니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해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외부 세계의 영향력과 그것을 내면화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삶의 질문을 그림으로, 문장으로 치환한 존재 탐색의 다이어리 <세상은 나를 비춰 아름답고 오래도록 빛나게 한다>. 두 번째 장 「아름답고 오래도록 빛나게 한다.」에서는 불확실한 시간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의식적 태도이자 작가로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꾸준하게 나의 것을 나답게 그려내는 일”(p180)이라는 문장처럼 자신을 밀어붙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매 순간 흔들렸지만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중심을 향한 일상의 반복된 몸짓 말입니다. 때로는 시처럼 감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문장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감성에만 기대지 않아 담백한 느낌입니다.
세 번째 장 ‘아무것도 있다, 잇다’는 철학적 사유의 밀도가 높습니다. 2015년부터 2018년의 기간은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들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희박한 가능성 속에서 꿈틀대는 개인의 삶과 희망 그리고 떠다니는 꿈들의 향연 / 모든 것이 이토록 허무할지라도 하나의 빛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p140)라는 말처럼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빛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흔들리고 서툰 자신조차 하나의 빛으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위로를 건네는 듯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드로잉의 구조입니다. 겹겹이 쌓인 선들, 붓자국의 리듬, 마치 유기체처럼 꿈틀대는 추상적 형상들은 정해진 결론이나 해석은 없지만 자신만의 이야기와 감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가의 예술 세계를 통찰하는 데 힌트를 안겨주는 문장들도 엿볼 수 있습니다. “변화하거나 사라지는 존재들에 관하여 근본적인 존재의 물음과 이해는 반복적인 선 긋기와 면의 형태로 이상적인 패턴을 만들어 나간다. 불분명하면서도 분명한 형태와 의미는 정신의 시각화로 재인식되고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 새롭게 생성되는 무리 속에 홀로 피어나는 모순적인 상황이다.”(p.162)에서 정신의 시각화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한미숙 작가의 드로잉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적 움직임을 투사한 시도인 겁니다. 예술가의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실마리가 된다고나 할까요.
<세상은 나를 비춰 아름답고 오래도록 빛나게 한다>는 삶과 예술의 흐름이 맞닿는 한미숙 작가의 시간의 자서전과도 같습니다. 동시에 고정된 메시지 대신 열린 감각을 선물하는 책입니다.
작가의 18년간의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 서사를 이룹니다. 삶은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가는 이 모순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해 내는 예술적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다"라는 작가의 신념은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