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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연인 심청 사랑으로 죽다
저자 방민호 | 다산책방 | 2015.01.12 | 페이지 400 | ISBN 9791130604510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심청전. 그때 심봉사를 엄청나게 싫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아버지란 사람이 자기 눈 뜨고 싶은 마음에 어린 심청이 앞에서 주절주절 그런 뉘앙스를 내뱉을 수 있을까? 진저리쳤었거든요. 심청이가 인당수 제물로 나서지 않았더라도 그 어린아이 앞에서 그렇게 한탄을 할 수 있느냔 말이지요. 그때부터 심청전은 저한테서 아웃이었어요.

서울대 국문학과 방민호 교수님이 새롭게 현대소설로 재해석한 <연인 심청>은 '연인'이란 단어가 솔깃합니다. 효녀 심청이는 지금 세대에게는 공감력이 떨어질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만고불변의 진리인 사랑 이야기는 어떨까요. 그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재해석해 새로운 인물도 등장시켜 살을 붙인 <연인 심청>은 확실히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연대, 작자 미상인 심청전은 경판본과 완판본 외 수많은 판본이 있는 한국 고전소설입니다. 주 흐름은 같아요.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용궁 세계에 갔다 연꽃에 싸여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왕비가 되어 아비를 찾느라 맹인잔치를 벌이고. 하지만 경판본은 유교적, 숙명론적이라면 완판본은 다양한 판본을 중재한 느낌에다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더 많다 합니다. 완판본이 우리가 아는 뺑덕어미도 나오고 등장인물이 경판본보다 더 다양하다네요. 어쨌든 우리는 '효녀 심청'에 대해서만 익히 들어왔습니다.
방민호 교수님의 <연인 심청>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는데 '윤상'이라는 인물입니다. 비중이 참 큽니다. 심청이의 정인이지만 결국 연을 맺지 못한 윤상은 그 사랑의 깊이가 심청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습니다. <연인 심청>의 부제가 '사랑으로 죽다'인데 저는 윤상이를 먼저 떠올릴 정도였거든요.

심봉사는 역시나 무능력자에다가 욕망이 과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투전방에 놀러 다니고 식탐 많고 여색까지. 타고난 천성이 야망이 큰 인물이어서 눈이 멀게 되자 그 절망이 그에게는 엄청난 독이 되어버렸지요. 딸 심청이가 없으면 무엇 하나 제 손으로 해낼 수 없는 심봉사. 그러면서도 그 고마움을 모릅니다. 딸이 제물로 팔려나가며 받은 재물을 노름과 여색 잡기에 탕진해버리고 몸까지 엉망이 되고맙니다. 주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눈멀고 마음마저 먼 애어른입니다.
심청전은 판타지에서 볼 수 있을법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요. 용궁도 있고, 옥황상제가 있기도 하고. 하이라이트는 심청이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긴 하지만요. 어쨌든 현실적이되 현실이 아닌, 그럴 법한 일이 아닌 믿지 못할 법한 이야기.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매력이 담겨 있는 소설입니다.

<연인 심청>에서는 기막힌 전생이야기가 나와요. 심청이와 심봉사의 관계가 전생에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때문에 심청이의 지고지순한 행동들이 이해됩니다. 오히려 좀 과할 정도다 싶을 때는 솔직히 얘는 자존감이 어쩜 이리도 낮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다 이유가 있긴 하더라고요. 전생에서도 난봉꾼 기질이 있던 심봉사는 그 욕망을 현세에까지 붙잡고 있던 것이었고요.
심청이는 이번 생애에서 인간의 원죄를 구원하는 이타적 사랑을 보여준 셈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한 생애를 걸고서야 이룰 수 있었지요. 심청이는 심봉사를, 윤상이는 심청이를.......
『 서로의 슬픔이 커서, 서로가 상대방이 안고 있는, 제 것보다 더 큰 슬픔을 동정해서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다. 』 - p43
비뚤어진 마음에 갇힌 심봉사에게 마음의 눈을 떠야하는 이유를 알려준, 맹인잔치 가는 길에 동행한 황봉사의 말이 기억 남습니다. '마음이 눈 뜨면 어떤 괴로움도 내 것 아닌 게 된다. 한 줌의 기쁨이지만 그것은 내 손안에 있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보람'이라고요.
심청전을 재해석한 <연인 심청>의 청이는 그래도 전통적인 효녀 심청보다는 훨씬 더 이유다운 이유로 살긴 한 것 같아요. 어찌됐든 여전히 심봉사는 좋아할 이유가 없네요. 나쁜 남자에게 끌린 심청이가 불쌍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심하게 자기희생하는 심청이의 삶이 못마땅합니다. 게다가 윤상이라는 인물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던 것 같아요. 전생의 연인이었던 아비를 살릴 것인가, 이생의 정인을 살릴 것인가 갈림길에서 특히 불편했네요. 심봉사의 운명은 청이가 개척해 준 셈이지만, 전생의 연을 끌고 와 이생에서 풀어내려는 청이의 사랑만큼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심봉사의 행동거지때문에 화가 나기도, 지고지순한 청이의 사랑을 보며 나쁜 남자는 집어치워! 소리가 나오기도, 한결같은 윤상이를 보며 바보같은 녀석! 이라며 감정 폭발을 일으켰던 <연인 심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요, 아름다웠어요. 오히려 이런 방식의 사랑은 못하는 나이기에 청이에게 시샘을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