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리퍼 지음, 가시눈 그림 / 투영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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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그래픽노블을 만나고 싶을 때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추천 작품은 언제나 성공적입니다. 2018년 다양성만화지원사업 선정작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기록기와 치유기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성폭력의 일상성과 개인의 치유 과정을 기록한 리퍼 작가와 가시같은 눈으로 예술이란 바늘을 들어 감정의 심장을 찌르는 자라는 의미를 담은 가시눈 작가의 그림으로 탄생한 그래픽노블입니다. 


친척 오빠로부터 결혼 소식을 받은 날, 어린 날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는 주인공 '이제야'. 어린 시절 친척 오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주인공은 기이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친척 오빠 한 명만이 아니었습니다. 유치원 시절 이웃집 대학생으로부터,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유행처럼 번지며 못된 행동을 하던 학교 남자아이로부터, 등굣길 버스 안 치한으로부터... 


당시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뭐가 잘못된 건지 인지하지 못하던 시기엔 그저 비밀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고, 친척 오빠의 미안 한 마디에 그냥 넘어가기도 했고, 어떤 땐 엄마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그를 더욱더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잘못이 없어."라는 마법의 말을 엄마로부터 듣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몇 달 후 엄마가 가해자의 엄마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날, 엄마는 정말 다 잊을 수 있는 걸까라며 충격받는 장면에선 저도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 일들은 일상을 좀먹는 벌레처럼 자리 잡습니다. 악몽을 꾸고 우울증에 빠지고 연애와 결혼관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남성들이 호의를 가지고 접근할 때조차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이성적 접근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겁니다. "오빠 좋아하니?"라는 말도 그루밍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에게서 몸을 혼자 씻는 법을 배우던 날, 다른 사람이 만지면 큰일 난다는 말을 한 엄마에게 어떤 큰일이 나느냐고 기필코 대답을 받아내는 '이제야'. 이 장면에서 가정 성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인생은 그걸로 뒈지는 거라는 엄마의 대답. 이미 비밀이 있었던 '이제야'에게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치명타였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고, 아니면 잊히기라도 했으면 한다는 처절한 고백. 그저 묻어뒀을 뿐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입니다. 상실감, 무력감을 안긴 여러 사건들은 그렇게 비밀을 계속 지켜야 하는 아이로 살게 만듭니다. 


방어적인 태도는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평범한 여성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도 가졌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흉터의 기록기를 쓰면서 그동안 떠올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용서해버린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쁜 기억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개별 사건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치유기 편에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여정을 만나게 됩니다. 심리 상담도 해봤습니다. 첫 심리 상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생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를 자극하는 계기가 됩니다. 나쁜 기억들을 기억의 잔으로 표현한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기억의 뇌라는 컵에 상담이라는 빨대를 휘휘 저으니 나쁜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가라앉는 걸 기다려보지만, 평정심을 찾을 때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매번 흉터가 찾아와 책망하고 비난했던 시간들. 나쁜 경험을 말하고 그 감정을 이해받는 경험이 없었던 '이제야'는 비로소 감정의 억압을 터트려 풀어주는 경험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그 일이 인생을 휘두르게 둬선 안된다는 생각에 성폭력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에도 나가봅니다. 이곳에서 피해자다운 반응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성폭력에 대해 공부도 시작하고, 미투 관련 다큐에도 참여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개적으로 꺼내기로 결심합니다. 


슬프고 화나는 일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다행히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며 묘한 안심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기억 저 너머로 숨겨뒀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역시 지독한 그림자를 쉬 없앨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흉터를 무시하고 침묵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마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신당동 스토커 살인 사건처럼 여전히 이 세상은 도움을 청한 여성의 목소리를 무심하게 듣습니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책에서는 엄마에게 말하면 다 해결된다고 나오지만, '이제야'는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작가는 정작 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대처를 알고 있기는 한 건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게 엄마의 책임이기만 한건지도 묻습니다. 그저 일부 개인의 경험일 뿐이라며 무관심한 시선을 두지 않길 바라는 리퍼 작가의 마음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가 여성의 성폭력 경험을 듣고 "맘이 아프다"라며 깊은 공감을 하는 에피소드처럼 마음의 흉터를 더 나누며 대화를 해야 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었던 이들에게는 연대의 힘이 어떻게 흉터를 가진 이들에게 스며들면서 삶의 회복으로 작용하는지 생생하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때로는 은유적이지만 소름 끼치는 그림으로 충격을 안기고, 때로는 귀여운 그림으로 연민의 정을 안기며 리퍼 작가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가시눈 작가의 매력적인 그림이 인상 깊은 그래픽노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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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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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오 가쿠의 초공간과 유명한 사고실험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통해 설명하는 양자역학의 다세계.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이 더해져 이토록 매력적인 소설로 탄생했습니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SF 스릴러 소설 <30일의 밤>. 애플TV에서 조엘 에저튼 주연으로 드라마 제작 확정된 원작 소설입니다. 오랜만에 SF 소재에다가 액션 스릴러가 가미된 흥미진진한 흐름의 소설을 만나서 어깨춤이 절로 날 지경이에요. 

목요일 밤은 제이슨이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는 가족의 밤입니다. 15년 전 아내 다니엘라는 시카고 미술계 유망주였고, 제이슨은 연구자로서의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궤도를 이탈하게 된 건 아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바람에 미술계와 과학계가 손해를 본 셈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친구들이 그 분야에서 잘 나갈 때면 씁쓸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을 사랑합니다. 

제이슨이 잠시 외출한 목요일 밤, 이 삶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괴한으로부터 납치를 당한 제이슨. 이것저것 이상한 질문을 하는 괴한에게 약물을 주사 맞고 정신을 잃게 됩니다. 잠시 뒤 이상한 장소에서 깨어난 제이슨은 누군가로부터 대단히 영웅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한 것처럼 환영을 받습니다. 무려 14개월 만에 돌아왔다나요. 


미묘하게 낯선 세계. 직업, 결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습니다. 아내 다니엘라와는 15년 전 헤어진 상황이었고 자신은 어떤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상태였습니다. 


제이슨이 깨어난 곳은 바로 또 다른 세계의 제이슨이 (제이슨2라고 부릅니다) 살던 세계였습니다. 제이슨을 납치했던 괴한이 바로 제이슨2였던 겁니다. 제이슨2는 제이슨의 삶을 빼앗고 이곳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우리가 내릴 수도 있는 모든 선택이 새로운 세계로 분기하며 그 다른 현실들도 존재한다는 것, 다중우주론을 바탕으로 쓰인 <30일의 밤>. 닥터 스트레인지의 판타지적인 분위기나 테넷의 시간 역전보다 오히려 이쪽이 훨씬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이슨2는 과학자로서 연구를 이어나간 다른 버전의 제이슨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든 건 시공간상으로 동일한 지점의 다른 현실들과 연결해 주는 장치입니다. 제이슨2는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집착했고, 결국 이런 일을 벌인 겁니다. ​


아쉽게도 제이슨2의 장치는 랜덤템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세계를 상상하면 최대한 그 세계로 연결되지만 자신이 어느 제이슨의 세계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선택의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다른 버전의 제이슨 세계는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원래 세계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된 실패 속에서 제이슨에게 남은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이런 시도를 하면서 그 시점에서부터의 또 다른 제이슨들이 계속 생성되고 있다는 겁니다. 


드라마가 시즌제로 계속 이어진다면 제이슨이 들르는 다양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만으로도 풍성한 스토리가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버전의 나를 상상해 봅니다. 어떤 버전이든 그 속에서 나는 분명 후회를 할 겁니다. 삶은 불완전하니까요. 하지만 그 삶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는 분명 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세계의 나를 지탱해 주고 나의 정체성을 굳건히 해주지 않을까요. 


후회를 없앨 수 없는 장치를 만들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빼앗는 것으로 선택한 제이슨2. 당신은 이런 물건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선택을 후회하며 사느냐, 감수하고 사느냐를 다양한 버전의 캐릭터로 적나라하게 보여준 <30일의 밤>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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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크래프트, 전환의 기술
일레인 폭스 지음, 함현주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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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힘 <스위치크래프트, 전환의 기술>. 문제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타입이라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터닝포인트라고 말할만한 때는 바로 변화의 시점이었습니다. 어떨 땐 투지 있게 밀고 나가야 했고, 어떨 땐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서로 다른 접근법들 사이에서 언제, 어떻게 전환할지 아는 것이 행복과 성공을 결정하는 겁니다.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기민성이 바로 스위치크래프트의 핵심입니다. 


인지심리학자이자 정서신경과학자 일레인 폭스 저자는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지속적인 변화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번영을 누린다고 합니다. 이 적응 능력은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연습을 해야 하고 편안한 상태에서 자꾸 벗어난다면 말이죠. 이런 기민한 사고방식을 전환 기술 Swichcraft라고 부릅니다. 


생각, 감정, 행동을 유연하게 바꾸는 스위치크래프트, 전환의 기술. 역경과 변화에 적응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기민성과 유연성은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인생의 나침반이 되는 전환 기술에는 정신적 기민성, 자기 인식, 감정 인식, 상황 인식이라는 4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4가지 심리학적 재능이 강력한 정신 무기로 작용하는 방법을 심리학과 신경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알려줍니다. 


전환 기술은 현재의 접근법을 지속할지, 아니면 새로운 접근법으로 전환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 됩니다. 내가 적절한 결정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내 계획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스트레스에 직면합니다. 모든 상황에 효과가 있는 접근법이란 사실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잘 될 때도 있지만 잘못될 때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내면의 소리를 차단하고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기민한 사고를 통해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보유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유연한 접근법을 보유하는 게 바로 첫 번째 핵심 요소인 정신적 기민성이라고 합니다. 


전환 기술의 두 번째 핵심 요소인 자기 인식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정확하는 나를 알 수 있을까요. 생리학적으로 자신을 알 수 있고, 성격 유형 평가를 통해 심리학적으로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테스트를 통해 몸과 마음을 파악할 수 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핵심 요소인 감정 인식은 감정을 이해하고 능숙하게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감정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감정이 그동안 소중하게 지켜온 목표에서 벗어나 새로운 목표에 도전할 수 있게 돕기 때문입니다. 특정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결정할 때 감정은 우리를 훨씬 더 기민하게 만들어줍니다. 정교한 신경계의 부산물인 감정은 행동뿐만 아니라 타인의 행동까지 조절할 수 있게 돕습니다. 저자는 감정을 더 깊이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보여주며 감정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여러 방법을 알려줍니다. 


네 번째 핵심 요소인 상황 인식은 직감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 환경을 이해해 미세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우리가 제때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 책에서는 정황 민감도는 높여 상황 인식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훈련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일기 쓰는 습관을 들이라고 합니다. 더 유연해지고, 나에 대해 알고, 감정을 조절하고, 직감력을 키우는 데 도움 되도록 생각과 연습 내용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장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변화의 수동적 희생양이 되지 말고, 자기 행복을 책임지는 능동적 관리자로서 살아가기를 권하는 <스위치크래프트, 전환의 기술>. 인생 경험에 폭넓은 정신적 다양성을 선사하는, 살면서 따라야 할 전환 기술의 원칙을 만나보세요.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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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가드너 4
마일로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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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교양 식물 만화 <크레이지 가드너>. 카카오페이지 연재된 웹툰이 단행본으로 한 권씩 나오면서 저도 홈가드닝 기초를 배울 수 있었는데요. 드디어 4권 완결편이 나왔습니다. 극한견주와 여탕보고서를 낸 마일로 작가의 식물 키우기 도전기 <크레이지 가드너>. 식물과 벌레를 어쩜 그렇게 절묘하게 캐릭터로 승화시켰는지 식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만화 그 자체에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만화입니다. 


초보 가드너가 식물 생활에 점점 빠져드는 반려식물 집사의 모습을 모조리 보여주는 <크레이지 가드너>. 실패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이 안겨주는 힐링을 포기하지 못하는 식집사입니다. 프로 가드너인 엄마의 전원생활을 엿보는 재미도 있었고, 식테크가 되는 휘황찬란한 식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일로 작가가 다루는 식물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은 초보 가드너의 입맛을 딱 사로잡는다는 겁니다. 


크레이지 가드너 4권에서는 온실 만드는 법, 번식시키는 법, 구근식물 키우는 법을 포함해 반려식물이 주는 기쁨에 관한 고찰까지 실려있습니다. 아무리 신경 써도 픽 죽어버리는 마일로네 집과 달리 건조한 집에서도 고사리를 20년이나 죽이지 않고 잘 키우는 엄마처럼 진정한 금손은 확실히 있는 것 같더라고요. 굳이 배우지 않아도 터득하는 천재적인 재능은 없지만, 열심히 체험으로 배워나가는 마일로 집사의 모습은 그래서 더 공감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꽃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고 있다는 마일로 작가. 이번 4권에서는 절화와 꽃나무에 대한 에피소드도 등장합니다. 구근식물의 매력은 이 책을 보면서 저도 한껏 빠지게 되었어요. 구근에서 뾰족하게 뿔처럼 싹이 올라오는 모습이 왜 이리도 예뻐 보이지요? 아보카도를 먹고 씨를 버리지 않고 발아시켜보기도 합니다. 아보카도 씨앗이 반으로 갈라지며 뿌리가 내리는 모습이 진기하더라고요. 레몬, 체리, 망고, 멜론도 다 가능합니다. 제법 잘 키운 사진을 확인하고 나니 저도 과일 씨앗 도전해 보고 싶어집니다. 


키우는 재미, 모으는 재미를 보여준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 자연스럽게 녹색이 좋아져 초록 톤으로 도배된 방 분위기라든지,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어딜 가든 식물부터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식덕 생활의 즐거움을 드러냅니다. 완결 후 그동안 미뤄뒀던 식물들의 분갈이를 대대적으로 한 마일로 작가. 우람찬 몬스테라 분갈이까지 완료한 모습을 보니 제가 다 속이 후련하네요. 식물 집사가 된 지 이제 5년이 된 마일로 집사의 평생 식덕 생활을 응원합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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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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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처럼 이어령이 들려주는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 이야기가 꼬불꼬불 이어지는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이제껏 몰랐던 출생의 비밀로 시작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그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국인 이야기 완결편 <너 어디로 가니>.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이어령 저자의 경험이 듬뿍 담긴 책인 만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어령 저자의 앞세대는 서당 세대였지만 그는 소학교에 입학해 다음 해 국민학교로 바뀐 학교 세대입니다. 1930~40년대 시절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첫 붓글씨 연습으로 쓴 건 바로 입춘대길 한자였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인의 문화 유전자로서 작용해 온 한자. 소학교 입학 전 서당을 다닌 경험이 있는 그의 첫 수업은 <천자문>이었습니다. 이때 왜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에서부터 의문을 가진 이어령 선생님. 왜 하늘은 파란데도 서당에 가면 까맣다고 하는가가 지식에 대한 그의 첫 궁금증이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검다'라는 말 하나에 얽힌 동서양의 역사와 사상이 담긴 이야기 보따리로 이어집니다. 


1940년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1941년에 공포된 국민학교령에 의해 국민학생이 되었습니다. 국민이란 말도 일본인들이 근대에 만든 말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봉쇄된 서당 교육 대신 학교 교육으로 체제가 변했습니다. 국가란 황국으로, 아동은 소국민으로 교육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황국신민을 단련시키는 연성도장이 된 셈입니다. 나치의 커리큘럼과 명칭을 따라 한 교과목으로 배우며 당시 우리는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쓰게 됩니다. 광복 후 국민학교란 말을 버려야 했음에도 1996년에 이르러서야 초등학교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도 왜 바뀌어야 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학교 공부란 말의 어원과 의미를 짚어주면서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지,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진짜 공부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생각하는 배움이란 멘토와 멘티로 서로를 자극하며 함께 발전하는 관계라는 걸 짚어줍니다. 하지만 일제 36년을 거치며 우리의 교육은 교육 주체가 배우는 쪽에서 가르치는 쪽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국어는 일본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딱지를 열 장씩 주며 한국말을 쓰면 딱지를 빼앗는 딱지 전쟁을 시킵니다. 야! 대신 오이! 해야 맞는 말이 된 겁니다. 일본말이 서툰 아이들은 아예 입을 다물게 됩니다. 언어를 지배하여 사고방식까지 조작할 수 있다는 속셈으로 일제는 말과 글을 뺏었습니다. 교육만능론적 사고입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끼칩니다. 일본식 교복을 입고 책보 대신 책가방을 들면서 보자기 문화가 사라지게 됩니다. 보자기형 짚신문화도 사라집니다. 싸기 문화가 넣기 문화로 변질되어간 건 모든 사고체계에서 일어납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상을 분석하는 이어령 저자는 "역사는 블랙박스의 블랙박스다."라고 말합니다. 추리소설의 법칙처럼 죽음으로 덕을 보는 자가 곧 범인인 겁니다. 친일의 허구를 깨뜨리려면 일본 역사의 블랙박스를 깰 수 있는 추리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유년의 경험을 통해 식민지 아이들의 의식을 지배한 군국주의의 작동과 상징을 해부하는 이어령 선생님. 몸뻬 바지가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주장한 일본의 생존관을 반영한 물건이라는 것도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 


소년 이어령의 이야기는 세상을 뜬 할머니, 할아버지 대신 지금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값진 이야기들이 가득한 <너 어디로 가니>.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를 하나씩 끄집어낼수록 우리의 정체성도 선명해진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이어령 저자의 유작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에 이어 2부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더 이어질 예정이라니 여전히 이야기 보따리가 남아있다는 기대감에 즐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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