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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터 없이 - 선한 나, 악한 나, 아름다운 나에 대하여
폴리나 포리즈코바 지음, 김보람 옮김 / 북스톤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세계적 슈퍼모델이 되기까지의 여정과 함께, 화려한 외적 이미지 뒤에 숨겨진 내면의 갈등을 드러낸 폴리나 포리즈코바의 에세이 <필터 없이>.
아름다움을 단순한 외적 특성이 아닌 상태로 재해석하는 지혜, 30년을 함께한 뮤지션 남편의 사망 후 겪은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나이 듦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저자의 시각이 와닿은 책입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화려한 조명 아래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살아가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마는 아이러니.
<필터 없이>는 세계적인 슈퍼모델이자 배우로 활동하며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살아온 그가 마침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습니다.
"내 일은 상품이 팔리게 하는 것이었다. 내 사진과 영상은 상품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무분별하게 변형되었다." - p19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의해 어떻게 조각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실존적 딜레마의 극단적 사례를 겪은 겁니다.
포리즈코바의 삶은 냉전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어린 나이에 생이별하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이후 가족과 재회해 스웨덴으로 갑니다. 낯선 환경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열다섯 살에 모델로 데뷔하며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극적인 변화를 겪은 시간들을 담담히 풀어냅니다.
아름다움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겪은 극단적 경험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옵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가 됩니다.
저자는 아름다움을 단순한 외적 특성이 아닌 하나의 상태로 재정의합니다. 아름다움을 명사(소유할 수 있는 것)가 아닌 형용사(상태)로 인식하는 시각 전환이 흥미로웠습니다. 아름다움을 위계적이고 경쟁적인 가치가 아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경험으로 재해석하는 계기가 됩니다.
세계적인 명성이 가져다준 특권과 함께 그 이면에 숨겨진 고독과 소외감을 조명하기도 합니다. 1988년 에스티로더와의 역대급 계약으로 정점에 오른 그녀의 커리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했는지, 그 화려함 뒤에 얼마나 많은 타협과 자기 검열이 있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포리즈코바의 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록밴드 '더 카스'의 리드싱어 릭 오케이섹과의 결혼 생활과 상실의 경험입니다. 이혼 이야기가 오가던 시점에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고, 남편의 유언장에서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때의 복합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솔직하게 그려냅니다.
개인적 비극을 넘어 여성의 정체성과 독립성에 관한 더 깊은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그가 경험한 감정적 종속과 자기 회복의 과정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합니다.
<필터 없이>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나이 듦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반연령주의 활동가로 거듭난 저자는 젊음과 탄력을 지향하는 뷰티 산업의 협소한 아름다움 기준에 맞서, 시간의 흔적이 담긴 몸에 대한 경이로운 찬사를 보냅니다. 자기 위안이 아닌 여성의 몸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에 도전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기 수용의 전쟁에서 내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전쟁은 나를 지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감, 자기 확신, 자기 수용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다." - p301
포리즈코바가 자신의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의 결정체 <필터 없이>. 나이 듦을 쇠퇴나 상실이 아닌, 자기 해석과 선택의 깊이가 더해지는 풍요로운 과정으로 재구성합니다.
특히 용기에 대한 말이 와닿습니다. 그는 용기를 일생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자신의 취약함과 상처를 대중 앞에 드러내는 용기. 그녀의 여정은 타인의 기대에 갇혀 살던 많은 이들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