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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말들 - 차별에서 고통까지, “어쩌라고”가 삼킨 것들
오찬호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7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팩트 폭격에 익숙한 시대, 우리 말은 왜 이토록 납작해졌을까. 우리 사회의 감춰진 구조를 집요하게 탐사해온 사회학자 오찬호 저자는 일상 속 ‘언어의 납작함’에 주목합니다.
<납작한 말들>은 말투나 표현의 문제를 다룬 책이 아닙니다. 무심코 주고받는 말들이 누군가를 눌러앉히고, 정당한 비판을 무력하게 만들며 결국 공론장 자체를 해체하는 현실을 성찰하는 사회적 보고서입니다.
젠더, 인권, 일상, 자기계발, 그리고 공공담론을 아우르는 다섯 개의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일상의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말이 무기화되고, 맥락을 지우며, 결국 사람을 지우는지 보여줍니다.
먼저 성차별을 이야기할 때 쏟아지는, 젠더 이슈에 얽힌 납작한 말들을 다룹니다. 여자도 군대 가라, 맘충 같은 말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언어는 논의를 단순화하고, 고통을 균등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억누르려 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남자가 국가로부터 차별받는다는 핵심은 사라지고, ‘여자는 왜 차별 안 받냐!’는 괴상한 불만을 원초적으로 만족시키고자 하는 고통의 평준화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러한 발언들이 왜곡된 평등의 틀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병역과 가사노동을 연결 짓는 정치인의 발언 또는 맘충이라는 단어의 사회적 확산 과정 등을 통해 보여줍니다. 진정한 평등은 고통을 나누는 데 있지 않고, 구조의 차이를 직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장애와 인권을 둘러싼 잔인한 일상이 이어집니다. 장애인에 대한 착함의 요구, 난민 혐오 발언, 인권 교육의 왜곡 등을 다룹니다. 무엇보다도 자유, 공정, 국민저항권 같은 단어들이 어떻게 본래의 뜻을 잃고 반인권적 주장에 동원되는지를 짚어줍니다.
“공정은 시험 성적에 무조건 승복하라는 뜻이 되어버렸다. 자유는 혐오할 자유가 되었고, 국민저항권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복으로 왜곡되었다.”라며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언어는 결국 차별을 정당화하고 제도적 불평등을 유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언어의 전복을 경계합니다.
공감 결핍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MBTI, 다정함, 지역 사투리, 참교육 등 일상적인 감정 표현 속에 숨겨진 자기중심성과 폭력성을 살핍니다.
저자가 특히 비판하는 것은 “그쪽이 잘못했으니 나는 때릴 수 있다는 정서를 정당한 복수라는 논리로 둔갑시키는 곳은, ‘정글’이지 사회가 아니다.”라며 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보복성 행동입니다.
공감 없는 감정 표출은 타인을 소외시키고, 사회문제를 논의하려는 시도마저 사회성 없는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다정한 말투 속에 숨은 무관심, 혹은 지역 사투리의 구수함이라는 언어적 소비가 어떻게 납작한 감수성을 만드는지를 읽다 보면, 우리가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말들이 얼마나 타인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능력주의라는 프레임 안에서 모든 걸 해석하는 데 익숙합니다. 건강도, 기회도, 자원도 개인의 역량으로 환원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면역력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태아일 때부터 축적되어 형성된다. 하지만 ‘능력주의 공화국’에선 아픈 것도 실력이라는 말이 명언처럼 부유한다.”라고 말합니다.
공정과 노력이라는 납작한 프레임으로부터 배제되는 이들을 조명합니다. 고학력 여성, 저소득층 학생, 장애인 등 구조적 제약을 받는 이들은 능력이 없음으로 간주되고, 시스템의 모순은 철저히 가려집니다. 유명 강사들의 팩트 폭격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납작한 서사에 중독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 언어와 공공 담론에서 벌어지는 언어의 왜곡을 다룹니다. 시험 공화국, 사교육, 자살률 그래프 같은 주요 키워드는 납작한 해석에 의해 철저히 오염되어 있습니다.
특히 “죽을 각오가 아니라 죽이겠다는 결의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용기가 아니라, 상대를 두렵게 하겠다는 폭력이다.”라며 국민저항권이라는 단어의 변질을 비판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MZ세대에 대한 마케팅적 고정관념, 교육에서 경쟁이 유일한 방식이라는 착각 등 납작한 언어는 사회를 단순화 시킨다고 합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복잡한 고통을 은폐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담론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고자 합니다.
<납작한 말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이 얼마나 맥락을 지우고 타인을 지우며, 비판을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말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구조를 유지합니다. 그러니 팩트보다 맥락, 사이다보다 사유. 생각을 만드는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이 말이 혹시 누군가를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질문을 품게 될 겁니다. <납작한 말들>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의심할 줄 아는 눈을 길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