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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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섬증에 가 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할 때가 있다. -12쪽

백 단위의 번지와 백 단위의 호수를 합하면 여섯 자리나 되는 무의미한 숫자를 어떻게 왼단 말인가. 물건을 세기 위해 하나, 둘, 셋, 넷은 백까지 셀 수 있었지만 일, 이, 삼, 사는 미처 못 배웠다. 배웠다고 해도 집을 번지수가 있어야 찾을 수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 집을 잘만 찾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 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21쪽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32쪽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32~3쪽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나 바꿔치기 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33쪽

형님, 참 묘한 기분이었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기억이 지워졌는데 어떻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나 요상하게 춤추는 불빛들이나 다들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환상이다 싶었어요. 건물이고 차들이고 형체는 지워지고 거기서 내뿜는 불빛만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게 마치 물체들의 혼령이 너울너울 자유롭게 교감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음이 편안하고도 슬펐어요. 세상을 하직하면서 한평생의 헛되고 헛됨을 돌아보는 기분이 그런 게 아닐까요. 편안한데도 이상하게 위로받고 싶었어요. -179쪽

형님, 우리가 참 모진 세상도 살아냈다 싶어요. 어찌 그리 모진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형님, 그나저나 그 모진 세상을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형님은 당연히 비웃으시겠지만 세상이 정말 달라져다면 그 달라지게 한 힘 중엔 우리 창환이 몫도 있다고 생각해요. -191쪽

젊어졌다는 소리도, 좋아졌다는 소리도 꼭 욕같이 들려요. 그렇다고 늙어 보인다거나 야위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도 아녜요.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힘들게 보내고 있는지 들킨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요.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나면 젊어졌다 좋아졌다, 아니면 어디 아팠느냐, 못쓰게 됐다는 식으로 남의 신체를 가지고 들먹이는 인사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197쪽

그이가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나를 보아주던 시절 우리 사이엔 말주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이와 나 사이에 말주변의 필요성을 다급하게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내 불안과 초조는 비롯됐다. 나는 어쩌다 남편에게 "여보, 요새 나 좀 이상해요. 괜히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러면 남편은 자못 냉담하게 "흥 노이로제로군, 누가 현대인 아니랄까봐" 했다. 남편은 척 하면 척 하고 빠르게 어떤 등식(等式)을 찾아내는 데 능했다. 그러나 이런 등식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237쪽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238~9쪽

셋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시간 죽이기'라고 부른다. 시간을 죽인다니, 그것은 유사 이래로 가능했던 적이 없는 일이다. 시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지 인간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멍청하고 진부한 소설을 읽으면서 다섯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은 시간이 다섯 시간만큼의 나를 죽이는 동안 어리석게도 이를 방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는 내가 시간을 살리고 시간이 나를 살리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 중의 하나다. -266쪽

결국 훌륭한 소설은 이 세상에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소설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그 줄기찬 입증의 과정이었고, 그 입증의 성공은 소설가로서 선생이 늘 품고 있었던 자부심의 근거였다. -277쪽

선생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면 모든 게 다 문학이 되었다. 그 손으로 선생은 지난 사십 년간 역사와 풍속과 인간을 장악해왔다. 그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살아온 날들을 부끄러워했고 살아갈 날들 앞에 겸허해졌다. 선생이 남긴 수십 권의 책들은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공유 자산으로 남아 우리들 마음공부의 교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원로 작가 한 분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당대의 가장 젊은 작가 하나를 잃었다.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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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절판


사람에게는 해묵은 욕망이 존재하고, 특별히 배우지 않고도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41쪽

그녀는 활자로 도배된 세상이 끔찍했다. 활자를 자신에게 닥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활자는 거리를 두고 피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녀에게 활자를 보여 주려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활자를 피하려는 버릇은 몸에 깊이 배어 있었다. 더 이상 의식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따뜻한 마음이나, 타인을 향한 애정, 인간적인 열정이 솟아나는 샘은 이러한 이유로 오래전에 말라 버렸다. 이제는 고립된 상태로 지내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이러한 자신의 상태가 인쇄물이나 책, 손으로 쓴 글자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61~2쪽

커버데일 가족은 참견꾼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선의를 품고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었다.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나쁜 것이 아니라면, 자일즈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자일즈가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62쪽

각자 속으로는 상대의 모습이 바보 같다고 여겼지만, 이 때문에 사이가 소원해지지는 않았다. 우정이란 때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할 때 가장 돈독해지곤 한다.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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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1-1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얘긴데요 이매지님(오래간만이에요!), 요즘 드라마 <셜록 홈즈>에 빠져 있어서 이매지님 생각 났어요. (그래서?)

이매지 2012-01-19 15:32   좋아요 0 | URL
으히히, 저도 셜록 너무 좋아요!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에 아껴보고 있어요 ㅎㅎ
그나저나 셜록을 보시면서 제 생각을 하셨다니 뭔가 감격스럽습니다. 네꼬님 쵝오! ㅎㅎㅎ
 
리틀 시스터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5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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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그 사무실에 앉아서 죽은 파리와 놀고 있는데, 이 캔자스 맨해튼에서 온 촌스러운 아가씨가 휙 들어와서는 고작 닳아빠진 이십 달러에 자기 오빠를 찾아달라며 나를 들볶았지. 오빠란 사람은 얘기로 들어서는 얼간이 같았지만, 동생은 찾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 대단한 돈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나는 베이시티로 내려간 거야. -5쪽

"당신의 무례함은 쉽게 잊게 될 것 같지 않군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세상에 누구도 이제껏 내게 당신처럼 말한 적은 없었어요."
나는 일어서서 책상 끝으로 돌아갔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아요. 그러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69쪽

그런 날들도 있는 법이다. 만나는 사람이 다 멍청이인 날. 그런 날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하게 된다.-81쪽

나는 그가 생각에 빠져들게 내버려두었다. 그 자신처럼 작고, 추하며 공포에 가득찬 생각일 테니.-114쪽

내가 아는 거라고는 뭔가 보이는 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늙어서 녹슬긴 했어도 항상 믿을 만한 육감에 따르면, 패가 돌아가는 대로 게임했다가는 엄한 사람이 엄청 판돈을 잃게 될 거라는 것이지. 그게 내가 상관할 일인가? 아니, 내가 상관할 일이라는 게 뭐지? 내가 알기는 아는 걸까? 알았던 적이라도 있었나? 그것까지는 따지지 말자고. 오늘밤 인간적이지 않으니까, 말로. 아마 한 번도 인간적인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지 몰라. 어쩌면 난 사립탐정 면허증을 가진 허깨비인지도 몰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는지도 모르지. 항상 잘못된 일들만 일어나고 결국 바로잡을 수도 없는 이 춥고 반쯤 불이 켜진 세상에서는. -138~9쪽

나는 전화가 울리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미 하루치 전화를 받을 만큼 받았다. 신경 쓰지 말자. 셀로판 잠옷을 입은, 아니면 벗은, 시바의 여왕에게서 걸려 온 전화라고 해도 너무 지쳐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머리가 젖은 모래를 담은 양동이처럼 느껴졌다.-156쪽

"나는 당신처럼 손톱을 길게 기르지 않는 여자애들한테만 강하다고. 마음속은 온갖 말랑말랑한 감상으로 가득 차 잇거든."-162쪽

"왜 사람들이 공갈범에게 돈을 주는지 항상 궁금했었지. 아무것도 살 수 없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돈을 주지. 어떤 때는 주고 또 주고 계속 주기도 하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오늘의 공포는."
그가 말했다.
"내일의 공포를 압도하지. 눈앞의 상황이 전체적 흐름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극적인 감정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실이야. 당신이라도 은막의 매력적인 스타가 커다란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를 걱정하겠지.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그녀는 영화 스타고 심각한 일은 그녀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알고 있다고 친대도 말이지. 긴장감과 협박이 논리를 이기지 못한다면, 드라마 같은 건 제작되지 않을 거야."-197쪽

"우리는 모두 글러먹은 사람들이죠.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미소지을 뿐, 그게 다예요. 쇼 비지니스죠. 이 업계에는 싸구려 같은 데가 있어요. 항상 그랬죠. 배우들이 뒷문으로 들어왔던 시절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배우들은 지금도 그래요. 엄청 긴장하고, 엄청 절박하고, 엄청 미워하죠, 그 메스꺼운 짧은 장면에서도 드러나잖아요. 그 사람들은 다 별 뜻 없이 내뱉는 것뿐이에요."-225쪽

베이시티는 대양에서부터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끝난다. 나는 마지막 편의점 앞에 차를 멈추었다. 경찰에 다시 한번 익명 제보를 할 시간이었다. 어이 친구들, 이리 와서 시체 좀 가져가라고. 내가 누구냐고? 그냥 어쩌다 운 좋게 자네들을 위해서 시체를 계속 찾아주는 남자라고 해둬. 게다가 겸손하기도 하지. 심지어 내 이름도 밝히지 않잖나.-266쪽

"사랑이란 너무나 멍청한 말이에요."
그녀가 깊이 생각하고 말했다.
"영어에 사랑의 시가 그렇게 많은데도 그 감정에 대해서 그런 약한 말을 받아들일 수 있다니 놀랄 일이죠. 그 말에는 삶도 없고, 울림도 없어요. 그 말을 들으면 팔랑거리는 여름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생각나요. 홍조 어린 미소를 살짝 띠고 수줍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옷을 받쳐입은 애들."-276~7쪽

"당신 아주 웃기는 역할을 하고 있군요, 아미고. 정말로요. 당신 같은 인물들이 계속 나오는지도 몰랐어요."
"전쟁 전에 찍어놓은 재고지." -278쪽

나는 먼지가 묻은 그대로 먼지털이를 치워버리고는 뒤로 기대서 담배도 피우지 않고, 심지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난 투명인간이었다. 얼굴도 없고, 의미도 없고, 개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도 당기지 않았다. 심지어 술조차 당기지 않았다. 나는 쓰레기통 바닥에 구겨져서 버려진, 철 지난 달력 종이였다.
그래서 나는 전화기를 내쪽으로 끌어당겨 메이비스 웰드의 번호를 돌렸다. 전화는 울리고 울리고 또 울렸다. 아홉 번. 이 정도면 많이 울렸어, 말로.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았다. 네가 전화하면 아무도 집에 없다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제 누구에게 전화할 거야? 어디 네 목소리 듣고 싶어하는 친구 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
전화야 제발 울려라. 내게 전화를 해서 다시 인류에 접속하도록 해줄 사람 없을까. 경찰이라도 좋아. 마글라샨이라도 좋아. 날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어. 단지 이 얼음별에서 떠나고 싶을 뿐이야.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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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8
이승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구판절판


1999년 봄부터 지금까지 가장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한 일은 100여 년 전과 식민지 시대의 신문과 잡지를 보고 또 보는 일이었다. 옛날 신문과 잡지 속에서 나는 문학을, 역사를, 사회를, 문화를, 일상을 본다. 옜날 자료들을 볼 때면 한없이 차분해지기도 하고 재미있는 기사와 마주쳤을 때는 심장이 쿵쾅거리기도 한다.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일 게다. 그러니 그동안 옛날 신문과 잡지를 보고 뒹굴면서 몇 권의 책을 냈을 게다. 만약 옛날 신문과 잡지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을 '공부'라 부를 수 있다면, 또한 '공부'가 '직업'이 될 수 있다면, 내 마지막 직업은 공부이고 싶다. 시간강사도, 연구원도, 교수도 아닌 '공부'가 직업이 될 수는 있는 것일까.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을 부리자면 '4대 보험'도 적용됐으면 더 좋겠다. -9쪽

직업의 변화야말로 근대성의 일부분이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의 배치와 경제적 메커니즘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직업이다.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직업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좀 더 세련되고 모던해진 직업으로 변화할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는 것이며, 무엇이 새롭게 생겨났을까. -15쪽

너희들보다 좀 더 민중의 친우란 말이다. 너희들 앞에서 내가 지사라고 떠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만 이렇게 남을 잡아먹고 더구나 동족끼리 피를 빨아먹는, 역사의 피를 받은 못된 버릇으로 남을 죽이려고 악을 쓰는 너희들 자신의 피부터 시험해보아라. 그 속에 누구에게든지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피가 몇 방울이나 나겠느냐. 왜 팔을 걷고 나와서 작품을 만들지 못하느냐. (……) 우리들은 우리들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동지들에게, 귀엽고 그리운 형제들에게 얼른 보이려고 제작한다. 그네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무식한 광견들아, 짖으려거든 짖어라. 우리는 누구보다도 조선 영화계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민중의 친우이다. /이필우, 「영화계를 논하는 망상배들에게-제작자로서의 일언」, 『중외일보』, 1930년 3월 23~24일.-61쪽

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 /발터 벤야민,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99.-91쪽

낭독의 특징은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묵독이 고립된 개인을 양산한다면 낭독은 공동체적 개인을 길어낸다. -107쪽

세헤라자데는 1001일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해갔다. 세헤라자데에게 이야기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다르게 말하면 죽음을 지속적으로 유예시키는 무기였다. 이야기는 인간의 가장 두려운 공포인 죽음을 망각하게 하고, 죽음을 유예시키고, 죽음과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죽지 않는 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살아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보고, 상상조차 못해본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112쪽

자연의 리듬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낳은 근대의 직업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등에 업고 등장한 모든 직업은 연금술사의 근대적 버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장장이나 연금술사가 활동했던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는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가 선택한 직업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기보다는 '교환가치'로서의 직업인 경우가 흔하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직업은 그 사회의 욕망의 배치가 바뀜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 개인의 욕망에 따라 어떤 직업을 선택한다기보다는 그 사회의 주된 욕망이 무엇인가에 따라 개인들이 선택하는 직업의 선호도는 달라진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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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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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세상은 저처럼 조용하게 책이나 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조그만 평화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죠."-54~5쪽

때로는 힘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도 너무 징징거리면 꼴 보기 싫어지는 법이다. -76쪽

언젠가 젊은 장 C.가 골치 아픈 사건 때문에 한 달 정도를 고생하다가 나에게 왔다. 그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게 공문서 한 장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사표였기 때문이다.
"이봐, 장. 이게 도대체 뭔가?"
나는 소리쳤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브리용 씨. 한 달 가까이의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잘못 짚었던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장, 이 친구야."
나는 근엄하게 말했다.
"이것이 내 대답일세."
나는 그의 눈앞에서 사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이렇게 훈계를 했다.
"다시 시작하게. 그리고 이 말을 가슴에 새기게. '옳은 것을 알기 전에 먼저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파리 경찰청장의 회고록>, 오귀스트 브리용-145쪽

훌륭한 탐정은 타고나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탐정은 잘 훈련된 경찰 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일반 사람들 속에서 나타난다. 내가 아는 탐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은, 자기가 사는 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던 못생긴 주술사였다. 그는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비상한 관찰력과 인간 심리에 관한 지식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이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탐정만이 가질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이다. -<탐정 입문>, 제임스 레딕스 2세-263쪽

"이야기를 차근차근 해나가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 주어진 방정식 안에서 하나를 빼고 온갖 가능성을 남김없이 다 조사했다면 남은 하나의 가정이야말로 올바른 해답이라는 거죠. 그것의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이 유일한 가정이 정답이라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335쪽

완전 범죄자는 초인이다. 완전 범죄를 하려면 외로운 늑대처럼 신중하게,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친구도 의존할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실수를 필히 주의해야 하며, 두뇌와 손발이 재빨라야 한다. (……)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수없이 많다. 또 다른 한 가지, 운명의 총아가 되어야 한다.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도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조건 가운데 다음의 것이 가장 어렵다. 즉 '자기 자신의 범죄', '자기 자신의 무기', '자기 자신의 동기'를 결코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 경찰로 사십 년 동안 일했지만, 완전 범죄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미국의 범죄와 수사법>, 리처드 퀸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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