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나지?" 라프토가 물었다. "당신이 최고니까. 난 최고만 상대하거든." "미쳤군." 라프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바로 후회했다. "그건," 상대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하지만 형씨도 미쳤잖아. 우리 모두 미쳤지. 다들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 불안한 영혼들이야. 영혼들은 늘 그렇지. 인디언들이 왜 이걸 만들었는지 알아?" 라프토의 앞에 선 사람이 장갑 낀 손의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토템폴을 톡톡 두드렸다. 토템폴 속에 조각된 인물들은 서로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서, 앞이 보이지 않는 커다른 검은 눈동자로 피오르 맞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야." 상대방이 말을 이었다. "그래야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으니까. 하지만 토템폴의 문제는 썩는다는 거지. 썩어야만 해. 그게 바로 토템폴을 만든 이유이기도 하니까. 토템폴이 사라지면 영혼은 새 집을 찾아야 하지. 가면 속이 될 수도 있고, 거울 속이 될 수도 있어. 새로 태어난 아이의 몸속이 될 수도 있고." -80~1쪽
라켈은 깡마른 해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그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줄어든 것처럼, 그도 줄어들어 있었다. 한때 그토록 가까웠던 누군가가 희미해지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한때 늘 붙어 다녔던 사람과 멀어지면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그 시간들은 마치 머릿속에서만 일어났기 때문에 금방 잊히는 꿈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를 다시 보는 일이 그토록 충격적이었으리라. 그를 껴안고, 그의 냄새를 맡고, 그 냉정하고 주름살이 늘어난 얼굴과 대조적으로 이상하게 부드러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음성을 전화기 너머로가 아니라 직접 듣는 일이 그토록 충격적이었으리라. 예전처럼 말하는 동안 강도가 변하는 광채를 내뿜는 그 푸른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일도 그토록 충격적이었으리라. -91쪽
올레그는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이 아이가 언제 벌써 연할 살이 돼서 죽음의 다양한 단계며 소외감, 말세에 관한 음악을 좋아하게 됐을까? 어쩌면 이런 올레그를 걱정해야 할지 모르지만 해리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반드시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 맞는지 입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옷들이 생기는 시작점인 것이다. 이제 다른 것들도 따라올 것이다. 더 좋은 것들. 더 나쁜 것들. -118~9쪽
둥그런 불빛 속에 들어가 어둠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전혀 안도감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숲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물체가 된 탓에 벌거벗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나뭇가지가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낯선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더듬거리는 장님의 손가락 같았다. -134쪽
꿈에 그녀가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무의식이란 워낙 예측 불가능하니까. -139쪽
해리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범인의 냄새를 처음으로 맡을 때 늘 느끼는 전율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위대한 강박증이 뒤따른다. 그것은 모든 것이 공존하는 상태다. 사랑인 동시에 취기이며, 맹목적인 동시에 명료하고, 의미심장한 동시에 미친 짓이다. 다른 형사들도 수사를 하다가 가끔 짜릿한 흥분을 느낀다고 들었지만, 이건 흥분과는 다르다. 뭔가 특별하다. 그는 누구에게도 이런 강박증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고, 이를 분석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감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사실은 이 강박증이 그를 도와주고 몰아붙이며,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된다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164쪽
사실 엘리는 실제로 수다를 떠는 것보다 수다에 대한 생각이 더 좋았다. 대화는 늘 어딘가에서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서. -201쪽
"과학자들이 경험이 많은 권투선수들의 뇌 활동을 측정한 적이 있어. 권투선수들이 시합 도중에 꽤 여러 번 의식을 잃는 거 알아?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여기서 잠깐, 저기서 잠깐 의식을 잃는다지. 그런데 몸은 마치 그게 일시적이라는 걸 아는 듯이, 통제력을 발휘해서 다시 의식이 들 때까지 버틴다는 거야." 해리는 담배 끝을 톡톡 쳤다. "그 오두막에서 나도 넋이 나갔어. 단지 차이점이라면 오랜 경험상 그게 일시적이라는 걸 내 몸이 알았을 뿐이야." "하지만 첫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카트리네가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말했다. "권투선수들처럼 맞는 대로 휘청거려야지. 저항하지 마. 일의 어떤 부분이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린다면, 건드리게 내버려둬. 어차피 막아낸다 해도 오래가지 못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받아들인 다음 댐처럼 풀어놔. 벽에 금이 갈 때까지 담아두지 말라는 말이야." -263~4쪽
해리는 체념이 꿈틀대는 걸 느꼈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FBI에서 범인을 잡는 데 10년 이상 걸린 사건들을 분석한 적이 있다. 대개 사건을 해결한 것은 아주 사소한 단서였다. 그러나 사실 사건 해결의 열쇠는 포기를 몰랐던 그들의 집념이었다. 15라운드를 다 뛰고도, 상대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면 다시 싸우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근성이었다.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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