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에 <100인의 책마을>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뭐 그냥 간단한 소개이고, 이게 뭐 큰일도 아닌데,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건. 단순히 책소개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쓴 글에 대해 한 줄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요 부분. 

   
  환경단체 활동가가 새만금 4공구 기습 시위의 기억을 되짚으며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C. 더글러스 러미스)를 소개하며,  
   

이 앞에는 김수정님(필명 아그네스)이 쓴 에쿠니 가오리에 대한 글을 언급했고, 바로 뒤에는 자본주의 복음의 불편함을 말하는 짙은잿빛구름님(알라딘 필명은 노란가방)의 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아주 짧은 한 줄이지만, 언론에서 내가 쓴 글에 대한 언급했다는 것만은 기념할만한 듯하여 이렇게 남겨본다. 

사실 며칠전에 이 책에 대한 서평들을 쭉 살펴보다가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김이준수님(알라딘 필명은 스윙보이)이 쓰신 서평을 읽고 깜짝놀랐다. 우선 본인이 참여한 책에 대해 아주 냉정하게 평가했다는 것이 참 멋있고 대단해보였다. 책을 읽을 때에도 가장 재밌게 읽었던 글중에 하나가 김이준수님의 글이었기에 서평을 읽는 내내 좋았다. (또 좋았던 글은 김보일 선생님의 글 그리고 은이후니님의 글이었다.) 그런데 김이준수님의 서평에도 내 글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깜짝 놀랐던 것이다. 

내 형편없는 글에 대한 너무도 과분한 평가에,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막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처럼 부끄러웠다. 그래서 댓글도 달지 못하고 그냥 조용히 페이지를 닫았다.(여기서라도 감사인사는 전해야겠지. 김이준수님 고맙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웠던 기억이 또 있었다. 바로 내 글에 적었던 새만금 4공구 시위 직후의 일이다. 어느날 함께 고생했던 선배 활동가들과의 술자리에서 어느 형이 내 사진이 실린 기사에 대해 언급했다. 정작 나는 그 기사를 보지도 못했는데, 그런 기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사진이 엄청 크게 실렸다는 거였다. 중앙일보 기사였는데, 큰 사진 한 가운데에(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내 모습이 실렸다고 한다. 그 형에 의하면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 혼자 일을 다 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정말 사회면 톱 기사에 내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있었다. 마치 혼자서 일을 다 한 것처럼 지친 모습이 참 보기 안쓰러웠다. 어쨌거나 쟁쟁한 선배들 다 제치고 내 사진이 덜렁 실린 것에 대해서는 좀 많이 부끄러웠다.(그게 내 책임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곡괭이질은 좀 열심히 했다!) 혼자 다 한 것처럼 느껴진다니, 선배들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환경 운동을 할 당시에는 간혹 지역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이 나가거나, 이름이 나가는 경우는 있었는데, 전국구 언론에 실린 건 그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 그 사진도 기념으로 남겨뒀으면 좋았을 걸, 지금은 검색해도 찾을 수도 없네. 

※ 아, 서평들을 다시 보니, 스테라님과 양철나무꾼님의 서평에도 내 글에 대한 짧은 감상이 있었다! 워낙 좋은 글들이 많은데, 모자란 글에 대해서도 신경써주셔서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스텔라님, 양철나무꾼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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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0-07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독서마라톤 교육청 사이트에 올린 600자평에 감은빛님 이야기 했어요.
추천하신 환경도서도 보관함에 담아뒀고요.^^

날짜대로 읽은 부분에 대한 짧은 단상만 적어서 아직 알라딘 리뷰는 못 올렸지만...사실 아는 분들 글이라 성실하게 써야겠다는 부담도 있고요.ㅋㅋ

감은빛 2010-10-08 12:00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뭐라고 쓰셨을지 궁금합니다!
뭐 단상이면 어때요. 서재에도 올려주세요! ^^

그렇죠. 그 부담감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합니다.
저도 그래서 서평을 못쓰는 책이 몇 권 있거든요. ^^

마녀고양이 2010-10-0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에 실린거 축하드려여, 시사인 참 좋아하는 잡지인데.
정기구독했다가... 너무 바빠서, 재 정기구독은 못 했어요. ㅠㅠ

그리고 고백하자면,,
스텔라님이 보내주신 <100인의 책마을>도 스텔라님 편만 읽고 못 읽었어요. 이그이그.

stella.K 2010-10-07 18:31   좋아요 0 | URL
리더스 가이드 사이트 들어가 보니 리뷰대회 기간 연장 한다던데
등록하고 대회 참여해 보면 어때요?ㅋ

감은빛 2010-10-08 13:1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천천히 읽으시는게 더 좋을 책인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워낙 다양한 주제의 많은 책들을 다루고 있고,
또 워낙 많은 사람들의 글을 엮었기 때문에,
천천히 쉬엄쉬엄 읽기에 딱 좋은 책이 아닐까 싶어요.

양철나무꾼 2010-10-0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괭이질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죠.
저는 시댁 내려가면 한번씩 텃밭에 일이라도 거들고 싶은데...
제가 뭘 좀 거들었다 하면 며칠을 아프고 일상생활이 안 돼서,몸 사리게 돼요.

좋은 글들은 참 많죠.
울림을 주는 좋은 글들을 만나기 힘들어서 그렇죠.
울림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요?~^^

감은빛 2010-10-08 13:17   좋아요 0 | URL
제가 군대있을때부터 곡괭이질만큼은 좀 잘합니다.
그날 새만금에서 제 곡괭이질이 다른 활동가들 보기에도 좀 눈에 띄었나봐요.
나중에 술자리에서 종종 그 얘길 듣긴 했습니다! ^^

좋은 글과 울림을 주는 글.
그렇죠. 뭔가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만 울림이 있을텐데,
그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 같아요.

stella.K 2010-10-0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내가 그랬었나요?ㅎㅎ 그렇게 오래 전 일은 기억 못한답니다.ㅜ

감은빛 2010-10-08 13:18   좋아요 0 | URL
흠 엄밀히 말하면 감상을 말했다기 보다는 그냥 언급을 하신 거였지만,
어쨌든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

2010-10-17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9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10-21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전 감은빛님 글 읽었어요. 환경운동하셨단 얘기에 ㅎㅎ 감은빛님께 반했지요.^^

감은빛 2010-10-22 18:1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
 

언제부턴가 아내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몸매 보고 결혼했는데, 이제보니 속았던 것 같다!' 아마도 예전에 '어떻게해서 결혼하게 되었냐'는 누군가(짐작하건데 내 일터와 관련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의 질문에 이렇게 한번 대답한 이후부터였다. 

몸매를 보고 결혼했다는 말은 과장이긴 하지만 조금은 우쭐해지게 만드는 말이다. 결혼 전 내 몸매는 나름 괜찮았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속았다는 표현은 좀 지나치다. 기분이 나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기 결정적 증거(결혼 후 완전히 망가진 몸매)가 있으니까 말이다. 

결혼 후 제대로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터의 노동과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아내를 위한)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를 위한 시간(책읽기, 글쓰기, 운동하기 등)은 쉽게 가질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여기에 육아라는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하는 새로운 노동에 매진해야 했다. 

아무리 조각처럼 멋진 몸매라도 관리해주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망가지는 법이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천천히 진행되는 이 망가짐이 스스로에게는 별로 큰 변화가 아닌 것 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내가 뽈록 나온 내 배를 보고 '몸매보고 결혼했는데, 속았다!'는 말을 아무리 자주해도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대꾸했다. 나중에 운동해서 빼면 된다고!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마음을 바꾸고, 둘째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아내의 배가 커져갈 수록, 내 배도 커져만 가는 것이다! 급기야 아내는 소리 쳤다! '니가 임신했냐?' 이 말은 좀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늘 날씬하다, 말랐다는 소리만 들으며 살아왔던 나를 임산부에 비교하다니! 

둘째가 태어나고 아내의 배가 줄어드는 시점부터 내 배를 다시 예전처럼 돌려놓기로 결심했다. 다시 왕(王)자를 새기기까지는 시간이 오래걸리겠지만, 적어도 뽈록 나온 배를 좀 집어넣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관성의 법칙이란 것이 그토록 무서울 줄은 몰랐다. 조금씩 습관을 바꿔가면서 예전에 비해 먹는 양이 많이 줄었고, 운동량이 크게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배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조영구라는 분이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살을 빼고, 몸짱이 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단단한 복근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이번에는 그 조영구씨가 성형을 했다는 기사가 또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살을 빼서 생긴 얼굴 주름을 펴기위해 성형을 했다고 한다. 

조금 자극을 받았다. 운동 강도를 한층 더 높여보기로 했다.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티도 안 날만큼 조금씩 식사량을 줄이고(그러다 가끔 과음을 하거나, 폭식을 하기도 했지만) 조금씩 운동량을 늘려나갔는데, 스스로도 별로 재미도 없고, 몸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헬스클럽 같은델 끊어서 한 서너달 운동을 해보고 싶은데, 육아와 가사노동에 매인 몸으로 그런 호사를 누리는 건 꿈도 꾸기 어렵다. 시간을 좀 낼 수만 있다면 집에서도 다양한 운동을 병행하여 옛 몸매로의 복귀를 앞당길수도 있을텐데, 그만한 시간을 빼기도 쉽지 않았다. 

근육운동은 그래도 짬짬히 할 수 있는데, 가장 안 지켜지는 건 유산소운동이었다. 도무지 뜀박질을 할만한 틈을 낼 수 없으니 답답했다. 궁여지책으로 일상에서 걷는 시간을 늘리고, 계단 오르내리기를 많이 했는데, 조금 효과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때 육체노동을 한바탕 할 일이 생겼다!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책을 옮긴 날이었다. 드디어 내 몸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본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근육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몸이 뻐근하게 쑤시는 느낌이 좋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재워놓고 새벽 늦게까지 다양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몸이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상체 근육은 이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하체와 복근이었다. 여전히 부족한 유산소 운동을 어떻게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다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지금처럼 꾸준히만 한다면 내년 봄에는 예전 몸매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꾸준히라는 절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켜내야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아내가 아파서 한동안 내가 조금 일찍 퇴근하여 아이들을 모두 내가 데려오게 되었다. (평소에는 첫째는 내가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또 데려오고, 둘째는 아내가 데려가고 또 데려온다.) 둘째 담임선생님은 나의 등장에 조금 놀라고 당황한 눈치였다. 아기띠로 아기를 안고 일어서는데, 허리끈을 채워주려던 선생님이 '끈을 늘려야하지 않나요?'라고 작게 물었다. 내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허리끈을 딸깍 채운 선생님이 놀라서 감탄한다. '아버님, 정말 날씬하시네요!'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들려주었더니, 아내는 내 배를 흘낏 쳐다보고는 '흥!' 콧방귀를 뀐다. 아내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나보다. 기다려라! 내년 봄이 되면 그 콧방귀가 쏙 들어가게 해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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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9 0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09-2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이런 페이퍼엔 인증 샷이 필수란거 아시죠?
내년 봄이면 저희도 식스팩 복근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글이 참 경쾌해요,통!통!통!

감은빛 2010-09-29 16:24   좋아요 0 | URL
아, 인증샷! 제가 카메라랑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말이죠.
뭐 위에 비밀댓글에도 썼지만,
만약 내년 봄에 예전 몸매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간다면,
한번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

식스팩 복근은 TV와 웹에 온통 널려있지 않나요? ㅋㅋ

stella.K 2010-09-29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감은빛님 그렇게 살쪄 보이지 않는데...
하긴 옷속에 감췬 살을 제가 어찌 아누?
그게 정말 그렇다는군요. 운동해서 다른 살은 빠지는데 뱃살은
안 빠진다고. 갑자기 파란흙님이 감은빛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나요.
알흠답다고...ㅋㅋㅋ

감은빛 2010-09-29 16:22   좋아요 0 | URL
살은 하나도 안 찌고 뱃살만 자꾸 불어나더란 말이죠.
감추고 다니느라 애 많이 썼습니다. ^^
파란흙님께서 저를 예뻐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꿈꾸는섬 2010-09-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대단하세요....내년 봄이면 원상복귀....부럽긴 한데 도무지 따라하진 못하겠어요.ㅜㅜ

감은빛 2010-09-30 03:04   좋아요 0 | URL
아뇨!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한다면 내년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예전 몸매 비슷하게나마 돌아갈지도 모른다 뭐 이런 얘깁니다. 실제로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다는 얘기죠!
 
뻔뻔한 Happy birthday to me 이벤트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중고등학교때 날아올 주먹이 무서워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선배들. 학번은 깡패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운동권 선배들, 이런저런 일터들을 거치면서 제일 먼저 나이부터 물었던 일터(직장) 선배들을 떠올려보면 절대 공감하지 못할 말이다.  

그렇지만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그러니까 입에 풀칠하려고 학원에 몸 담았던 시절에) 어쩌다 친하게 지내던 수학선생님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얼굴과 외모로 보건데 분명히 마흔이 넘었어도 벌써 넘어서 쉰을 바라볼 나이일 것 같았는데, 그는 늘 자신을 스물아홉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말로만 스물아홉이라고 들으면 그냥 피식 웃고 말겠지만, 옆에서 잘 보고 있으면 이사람 진짜 이십대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혹시 벤자민 버튼과 같이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이었을까?) 그때 아직 스물아홉이 되지도 않았던 나보다 훨씬 더 이십대 같았던 그가 참 재밌어서 함께 종종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그는 어찌나 수다스러웠던지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온갖 티비 프로그램 얘기며, 드라마에 나오는 예쁜 여배우 이야기, 최신 유행곡들 이야기 등을 줄줄 읊어대곤 했다. 학원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술잔을 기울이던 새벽, 어김없이 이어지던 그의 수다를 듣다가 문득 진짜 그의 나이가 궁금하다고, 도대체 몇 살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정도 친해졌으면 가르쳐주겠지 싶었는데, 너무 성급했던 걸까. 끝내 나는 그의 나이를 듣지 못했다. 

학원을 정리하고, 더이상 그의 수다를 들을 일이 없게 되었을 때부터 나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스물아홉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뻔뻔스럽게도 작년까지 스물아홉이라고 말하고 다니다가, 작년 가을 누군가에게 스물일곱인줄 알았다는 말을 듣고 그때부턴 다시 스물일곱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

서른 이라는 숫자는 참 이상하다. 어떤 마력을 가진 것 같다. 스물아홉에서 더이상 나이들기를 거부한 그도 서른이라는 숫자가 가진 마력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서른을 앞두고 유난히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이도 있었다.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서 김건모는 서른이 되고서부터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먹을 때, 가장자리로 국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른이 대체 어떤 마력을 지녔기에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것일까?  

내 경우엔 어땠을까? 서른을 기준으로 뭔가 바뀌었을까? 글쎄 자동차보험을 들때 '30세 이상 한정 특약'에 들 수 있는 약간의 금전적 혜택말고는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를 기준으로 젊음과 (더이상)젊지않음을 나누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나이 '서른'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선배가 내 기타반주에 맞춰 불러주었던 <나이 서른에 우린>이란 노래도 생각나고(그 선배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서른'이 들어간 수많은 책들도 생각난다.(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서른살 경제학, 서른살 직장인 책읽기를 배우다 등)  

사실 '서른'하면  떠오르는 책은 딱 하나, <서른 살의 강>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서른이 되기 한참 전이었다. 관심을 가진 작가의 단편들을 모조리 찾아 읽던 시절이었고, 이 책을 쓴 아홉명의 저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보고 망설임없이 구입했던 책이다. '서른'이라는 나이를 주제를 담은 단편들을 모아놓았다. 

역시 서른이 되기 전에 읽어서였을까. 별로 재미도 없었고, 괜히 심각해지는 그 분위기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알던 작가들의 글은 읽을만 했고(간혹 재밌기도 했는데), 잘 모르던 작가의 글은 괜히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중에 '서른 살의 강'을 넘고 나서 다시 읽으면 뭔가 달라질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다시 떠올린 건, 서른 살의 강을 건너고 좀 지나서였다. 문득 어떤 이야기가 떠올랐는데, 도무지 어느 책에서 읽었던 건지 생각이 안나서 마구잡이로 책들을 뒤지다가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어느 구석에 있을까?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그럼 고향집 내 방 책꽂이에 있을까? 마침 명절이 가까웠던 때여서 내려가면 잊지 않고 꼭 찾아보리라 맘 먹었다. 그러나 고향집에도 없었다! 왜 없어졌을까? 어디서 잊어버린 기억은 없는데. 찾고 또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달이 흘러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떠올렸다. 얼른 책을 찾아 읽었다. 아, 이 책 내가 읽었던 책 맞아? 왜 이렇게 낯설지? 도무지 읽었던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십대에 읽었을 때는 그냥 좀 어둡고, 조금은 심각한 그런 느낌이었는데, 서른이 넘어 다시 읽으니 각 작가들의 고유한 문체와 특유의 정서가 하나하나 느껴졌다.  

역시 이 책은 서른의 강을 넘어야 참 맛을 알 수 있는 거였구나! 라는 결론을 남기며 웬디양님께 보내는 긴 축하글을 마칩니다!(생일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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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8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8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9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9-2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즈음에 말이죠,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잉게보르만의 <삼십세>을 읽고 나서
다시는 30세에 관한 책은 안 읽네요. 경험적으로
30은 쉽게 넘겼지만, 40은 어렵더라구요. 30 초반은 아직 젊다 싶었는데,
아 40이 넘어가네..... 하니 정말 청춘이 다 가버린 느낌이더군요. ^^

감은빛 2010-09-28 22:23   좋아요 0 | URL
이 글 쓰고나서 찾아보니 정말 서른을 겨냥한 책들이 참 많아요.
예전에 들었던 출판 마케팅 강좌에서 들었는데,
90년대에는 통계적으로 20대 여성이 가장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는군요.
그래서 20대 여성을 타겟독자로 겨냥한 책들이 쏟아졌는데,
90년대 후반에서 2천년대로 넘어오면서 그 20대 여성이 30대 여성으로 넘어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책들이 쏟아지는 거라구요.
뭐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유난히 '서른'에 대한 책이 많은 건 사실 인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0-10-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이 정성스런 글에 어떻게 답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오늘까지 미뤄버렸네요. 이렇게 먼 댓글로 정성스레 참여해주시니 감동이에요.

서른의 강. 저도 서른 넘으면 읽어야지. 생각해놓고 아직 읽지 못했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또 저에게 숙제를 던져주셨네요. 네.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상당한 동안이신가봐요. 저는 얼마전 모 얼굴인식 어플에서 19세 나왔는데 저도 열아홉이요. 하고 다녀볼까 하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뜬금없는 이벤트에 정성스레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감은빛 2010-10-06 12:07   좋아요 0 | URL
아, 사실 일하다 잠시 머리 식힐겸 알라딘 들어왔다가,
마침 웬디양님 글보고 갑자기 자판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글이 길어졌어요!

재미도 없는 긴 글 읽느라 오히려 힘드셨을 듯 싶어요.
제가 죄송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
 

요즘 채소값이 비싸다고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다. 며칠 전에 집에 손님이 와서 삼겹살을 구웠다. 고기와 깻잎은 미리 생협에 시켜놓았고, 상추는 미처 준비를 못해서 사러 나갔는데, 허! 상추 값이 평소의 거의 세배쯤 되는 것이다! 상추값을 보고 입술을 씹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느 분이 상추를 세 잎만 집어다가 저울에 달았다. 860원! 겨우 세 잎 집었을 뿐인데! 고기값보다 상추값이 더 비싸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당하고 보니 좀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냥 상추를 포기하고 깻잎만 먹기로 하고 돌아섰다. 

어느 게시판에서 파 한단에 4000원, 호박 하나에 2500원이란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엔 장을 안다보니 아무리 채소가 비싸다고 뉴스와 신문에서 떠들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다. 근데 어제 아내가 호박 하나에 3000원이라고 말을 꺼내며 미친 거 아니냐고 한마디 한다. 

중요한 건. 이렇게 비싸도 정작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 바로 그게 문제다! 아버지의 지인 중에 부산에서 농산물 경매 하시는 분이 계신데, 이분 돈을 엄청나게 쓸어담는다는 얘길 전해들은 적이 있다. 결국 산지에서 농민들에게는 헐 값에 사서, 경매업자와 도매상 그리고 중간 유통상 그리고 소매상까지 오면서 점차 불어난 가격에 중간 상인들만 배를 불리는 구조인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생협 이용을 종종 권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반응은 비싸고, 이용하기가 불편하기에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비싸고, 불편하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서 믿고 구매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비싼 가격과 불편함은 모두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먹거리의 경우가 그렇다! 나도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생협을 이용하지 않았다. 내가 몸담았던 환경 단체의 부설기관으로 생협이 있었음에도 별로 이용한 적은 없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모든 선택은 아이를 위주로 하게 되고, 먹거리는 대부분 생협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주 이용하다보니 생협이 아주 특별히 비싸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대형마트에 있는 친환경 먹거리들은 대부분 생협보다 더 비싸다! 그리고 시장에서 쉽게 구하지 못해 비싼 품목들 중 의외로 생협에서 비슷하거나 조금 더 싸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생협에서 취급하는 건 무조건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싸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집근처에서 호박 하나에 3000원 붙어 있는 걸 본 아내가 집에와서 생협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호박 하나에 1300원이었다. 물가가 비상식적으로 뛰어오르는동안 생협의 가격은 크게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농약을 쳤는지 안 쳤는지 어디서 길렀는지 알지도 못하는 3000원짜리 호박을 샀던 사람이 나중에 무농약(혹은 저농약)에 산지가 표기된 1300원짜리 호박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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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9-1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가가 올라 큰일이어요.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하게된다능.
당장 추석도 여유로운 마음이 아니어요.
그래도 감은빛님 모쪼록 해피한 추석되길 바래요.^^

감은빛 2010-09-18 01:16   좋아요 0 | URL
이번 한가위 제사음식 장만하기가 여간 손떨리는 일이 아닙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물가가 장난아니게 올랐지만,
올해는 너무 심하네요! 옛날처럼 차리려면 기둥뿌리 뽑아야 할 겁니다.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는 한가위가 되어 씁쓸하네요!

꿈꾸는섬 2010-09-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파 한단에 4000원 소리에 허걱 했어요. 생협이 비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도 않나보군요. 저도 홈페이지 찾아봐야겠네요.

감은빛 2010-09-18 01:1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재래시장은 좀 괜찮다고 하던데요. 대형마트와 동네에 있는 중소형마트들은 가격이 장난아디더라구요.

생협은 평소에도 비싼 품목들은 비싸지만, 잘 찾아보면 의외로 괜찮은 물건들이 종종 있습니다. 무엇보다 믿고 살 수 있잖아요! ^^

마녀고양이 2010-09-17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두 생협 이용하는데, 감은빛님께서도 이용하시네요?
전 추석 선물 세트로, 조기 작은거 세트 주문했어요...

생협은 일주일에 한번 배달해주는데다,
사이트 속도가 넘 늦어서 혼자 승질 내면서 잠시 끊었는데,
그동안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속도가 좋더라구요.
첨 사용할 때 출자금도 내야 하고, 한번 이용시마다 출자금 1,000원씩 빠지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제품이고 직거래라 중간에 엄한 곳으로 마진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 맘에 들어서 종종 이용합니다. 동지 만났네요~

감은빛 2010-09-18 01:22   좋아요 0 | URL
아! 동지란 말 참 좋아합니다! 마녀고양이 동지님. ^^
일주일에 한번 배송은 불편하죠.
그래도 각 생협들마다 배송요일이 다 다르기 때문에,
3곳을 다 이용하면 조금 낫다는 거 아시죠?

출자금 조금씩 내야하지만, 연말에 배당금이 돌아오잖아요.
(물론 워낙 액수가 작아서 간단한 선물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가까운 곳에 매장이 있으면 참 편하더라구요.
퇴근하면서 장보고, 간단한 반찬 만들어서 저녁 먹을 수 있으니까요.

양철나무꾼 2010-09-1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바로 며칠전 돼지고기 한근(600g)이 12000원이었는데,그때 상추 1근(400g)이 9000원이었어요.

저도 생협 알아봐야 겠어요.

감은빛 2010-09-18 01:26   좋아요 0 | URL
예전에 농사짓는 마을에서 빈집 고쳐서 살았을 때,
상추가 워낙 잘 자라서, 여름 한 철 내내 질리도록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상추를 고기보다 비싼 값에 사먹어야 하다니!
살다보니 참 별일이 다 생깁니다!

생협 한번 이용해보세요.
처음엔 좀 낯설겠지만, 계속 이용하다보면 왜 진작 안썼을까 후회하실지도 몰라요! ^^

책가방 2010-09-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어릴땐 생협 이용했었는뎅.. 크면서 귀찮아지더라구요.
계란도 생협이 훨씬 쌌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저 역시도 다시 생협 알아보고 싶어졌어욤..^^

감은빛 2010-09-24 14:24   좋아요 0 | URL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죠.
가까이에 매장이 있으면 그래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생협 매장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

2010-09-19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9-2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직접 키워먹을수도 없고, 옥상에서 고무다라이 파들이 날씨때문에 녹아내리고 있어요~ 대충 먹을만한 곳만 쑹덩쑹덩-_-;

감은빛 2010-09-24 14:27   좋아요 0 | URL
예전에 시골 마을에 잠깐 살았을 때, 저도 이것저것 키워먹고 싶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저도 스티로폼 상자에 파 키워서 필요할 때마다 잘라 썼는데.... ^^

2010-09-24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lo초우ve 2010-09-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물가가 장난 아녀요..... 텃밭을 꾸며야겠어요..ㅋ
내년 봄에는 텃밭을 꾸며 고추랑 가지랑 고구마랑 호박이랑 심어야겠어요
상추도. 깻잎도..ㅋ

감은빛 2010-09-27 11:29   좋아요 0 | URL
텃밭! 멋져요! 도시에서는 텃밭 갖고 싶어도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교외쪽에 어떻게 하나 장만한다해도, 주말마다 먼 거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내가 키운 신선한 야채로 반찬을 만들면 행복할 것 같아요! ^^
 

학창시절 교생선생님이나, 결혼 전의 선생님들에게 항상 졸라대던 게 있었다. 바로 '첫사랑'이야기였다. 조금 남는 시간이 생기거나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면 늘 '첫사랑' 타령이었다. 그럴때면 선생님들은 묘한 미소를 띄우며 다른 이야기로 주의를 돌리거나 아예 다시 수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나중에는 내가 그 처지를 고스란히 겪게 되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종종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곤 했는데, 조금 시간이 남아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을 주면 앞쪽에 앉은 여학생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딱히 옛날에 선생님들이 어떻게 했던가 기억을 떠올린 것도 아닌데, 나 역시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거나, 그래도 안통하면 아예 다시 책을 펼치며 수업을 이어가겠다고 해서 원성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래전에 '작가들의 첫사랑'이란 주제로 여러 작가들이 겪었던 짧막한 첫사랑 이야기들을 엮어서 낸 책이 있었다. 워낙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제목도 가물가물 한데 거기에 등장한 유명한 작가들의 첫사랑 이야기들이 참 인상적이어서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집에선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고향 집에 있는 것 같다.  

왜 갑자기 첫사랑 이야기냐고? 계기가 있다. 지난 주 목요일로 거슬러 간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아내가 홀로 외출을 했다. 아이들을 내게 맡긴채로 혼자 외출한 건, 둘째 태어나고 거의 4달만에 처음이었다. 아내가 간 곳은 '여성노동자 글쓰기모임'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이 있는데, 앞으로 달마다 나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둘째가 분유를 잘 먹는 편이 아니라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뭐 아내도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살아야 하니까,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가라고 했을 거다. 

아마 한 두어 달 쯤 전이었던 것 같다. 아내가 느닷없이 '여성노동자 글쓰기모임'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던 게. 아니 꽤 오래전에도 한번쯤 얘기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냥 말로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아마 해마다 가을쯤 강좌를 열었던 것 같은데, 그 강좌를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제일 무난할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아내는 직접 운영자인 박수정 선배의 블로그에 글을 남겼고,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며칠이 지나서 수정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엔 수정선배인 줄 몰랐다. 한참 얘길 하는데, 아내얘길 꺼내길래, 누군가 아내 친구이거나, 아내 일과 관련된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런데 글쓰기 모임 얘길 듣고서야 머리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수정선배였다. 나는 아내의 연락처를 알려줬고, 수정선배는 직접 아내에게 모임 일정을 알려줬다.

지난 주 첫 모임에 다녀온 아내는 그날의 주제가 '첫사랑'이었다고 전했다.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들이 클만큼 커서 어느정도 시간에 여유가 생긴 아줌마들이었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강좌 진행에 도움을 주기위해 두어번 참여해봐서 대충 주요멤버들은 알고 있었다. 아내의 얘길 들으며 몇 년 만에 그 사람들의 얼굴들을 머리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암튼 그날은 주제가 주제인지라 그 자리를 나서는 순간부터 그 시간에 들었던 말들은 절대비밀에 부쳐야 했다. 

단 한 명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였다. 수정선배는 현재의 남편인 경동선배가 첫사랑이었다고 하며 남편 자랑을 했다고 한다. 하긴 내 기억에도 수정선배가 경동선배를 위하는 마음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시인과 르포작가. 글쓰는 사람들끼리 부부가 되면 낭만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르포작가 박수정 선배와 시인 송경동 선배의 책들) 

아내는 절대비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수정선배의 이야기 외에 다른 사람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물론 본인의 첫사랑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았다. 그날의 분위기와 인상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내가 아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면 몇 마디 거들어주면서, 얘기해주지도 않을 남의 첫사랑 이야기에 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내 첫사랑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서투르고, 멍청하고, 바보같았던 내 모습과 따뜻한 웃음을 띄운 귀여운 그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도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실을 절대 숨기지 못하는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눈치챌만큼 그 사람에게 빠져드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차라리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하는 편이다.(고백이라기보다는 좋아한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정도랄까!) 

첫 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확실하게 호감을 느꼈다. 그리고 두번, 세번 만날때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녀는 정말 얄밉게도 내 마음을 살짝 흔들어놓을만큼만 내게 관심을 나타냈다. 아마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주변 친구들이 다 알게되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을텐데. 그래서였을까 만날 때마다 조금씩 더 잘해주는 그녀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많은 일들이 지나간 후에 조금은 잔인한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고,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군대가기 전에 나는 첫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한 편 썼다. 당시 동아리 회장을 맡은 후배 녀석이 동아리 회지에 실을 원고를 달라고 졸라서 입영열차를 타기 전날까지 열심히 연필로 적은 원고를 건네준 기억이 난다. 황당한 건 이 녀석이 결국 회지를 내지 못했고, 그 원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찾지도 못했다는 거였다.(휴가나왔을 때, 내 원고를 타이핑 했다는 새내기 여자후배를 만난 기억은 있다. 글을 읽고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 했다고..... 아마 시커먼 군인이 그 글의 주인공임을 알고 곧바로 궁금증이 사라져버렸겠지만!) 물론 노트에 적어놓은 초고는 갖고 있었다. 나중에 문학동호회에서 활동할 시절에 그 초고를 다시 손보곤 했다.  

한창 글을 열심히 끄적였던 시절에 썼던 단편소설이 여러 편 있다. 대부분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내 원고들을 꺼내놓았던 건, 한창 활동했던 문학동호회 게시판과 후배들의 등쌀에 못이겨 실었던 동아리 회지와 학회지 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첫사랑 이야기는 동호히 게시판에 한 번 올렸다가 단지 '표현방법이 신선하다' 정도의 평을 받고 낙심하여 아무 곳에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 후로 다시는 이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아주 오랫만에 그 글을 열어보았다. 지금 읽으니 왜이렇게 유치하고 조잡하기만 한지. 그 당시에는 그래도 스스로 만족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도저히 읽어주지 못하겠어서 그냥 다시 닫아버렸다. 역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그냥 추억으로 묻어두는게 가장 좋은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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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1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저는 왜 감은빛님이 여자분이라고 생각했을까요? ^^

첫사랑. 아름답게 했으면 참 좋았을건데... 라는 아쉬움이 조금 드는 주제입니다.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가는 기억 중 하나네요.

lo초우ve 2010-09-16 11:4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도 감은빛님이 여태껏 여자분인줄 알았어요 ㅋㅋ
첫사랑은 누구나 다 있는거라 생각되어요 ^^
아직도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되는데..
이름도..
신장도..
성격도..

그렇지만, 지금은 까마득한 옛 추억이 되었어요 ^^



감은빛 2010-09-17 07:0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하얀안개섬님

그랬군요. 저도 궁금하네요.
왜 제 글만보고 저를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까요?
예전에도 그런 분이 여럿 계셨거든요.

어느 게시판에서는 육아에 대한 글들을 종종 올리곤 했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저를 여성으로 생각하시더라구요.
심지어 글 내용에 늘 '아빠'라는 단어를 적어놓았음에도 말이죠.

첫사랑 참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였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다소 무덤덤해지는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9-1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도 감은빛님이 여자인줄 알았다가 위의 글들 읽다보니 남자셨군요.ㅎㅎ 아무래도 닉네임이 너무 예뻐 그런 착각을 한 것 같아요.^^

감은빛 2010-09-18 01:06   좋아요 0 | URL
필명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가요?
알라딘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셨다니 조금 예상밖이네요.
그래도 예쁘게 봐주신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0-09-1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정님과 송경동님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는 감은빛님이 왠지 멋져 보이는 걸요~^^

저도 첫사랑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술먹고 코가 삐뚤어졌을때나 한번씩 꺼내봐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수정님은 아주 조금 불행하시겠는걸요~^^

감은빛 2010-09-18 01:12   좋아요 0 | URL
경동선배와는 평택미군기지 투쟁때 인연을 맺었고, 한미FTA 투쟁, 기륭비정규직투쟁, 용산참사대책위 등등 다양한 곳에서 함께 활동했었어요. 수정선배와는 기륭비정규직투쟁때 알게되었고, 출판과 관련해서도 인연이 있었어요.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그 열정적인 삶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수정선배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