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1주
사실 포스터가 조금 바뀌어야 하지 않았을까.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으로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김교위(박인환)와 차교사(조재현)다. 김교위는 사형수와 친구가 되고 여러 명의 사형수를 자신의 손으로 보내면서 '사형제도'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사형수와 장기를 두며 담소를 나누고, 음식을 싸다주는 김교위는 관객에게 감동과 눈물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선(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차교사는 사형수는 사람을 죽인 범죄자이므로 처리해야 할 쓰레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교도관이다. 그는 죄수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불로 죄수의 입을 틀어막고 곤봉을 휘두르는 인물로, '분노'외에는 죄수에게 보여주는 감정이 없으므로 인간적인 면에서 악(惡)을 상징한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자신이 맡은 책임의 무게를 그대로 짊어지려는 사람이 누군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누가 선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인물이 될 것인가. 사형수가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해서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인지, 과거에 그가 저지른 죄는 용서가 되는 것인지. 도대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집행자>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은 <집행자>보다는 좀더 명확한 대립구조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미 평가를 받은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일당은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단지 '위대한 독일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나치 일당은 분명 '악'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란다(크로스토프 왈츠)일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속이는 비열함도 감수하고,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도 하고, 명예를 거짓으로 꾸며내려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한스 란다와 대립하는 인물이 엘도 레인(브래드 피트)이나, 쇼사나(멜라니 로랑)일 텐데, 엘도 레인은 단지 한스 란다와 반대쪽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한스 란다에게 부모님을 잃은 쇼사나의 복수와 달리, 엘도 레인의 행동은 어찌 보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의나 선의 실현이라는 거창한 목표보다 단지 나치가 싫어서, 자신들의 명성에 명성을 더하기 위해, 그들을 죽이고 머릿가죽을 벗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결국, 이런 전쟁에서 선과 악이란 '내가 누구 편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은 우리편의 승리라는 통쾌함은 주지만, 선과 악의 겅계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은 잃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저녁의 게임>은,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영화가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져 온 아버지의 폭행으로 인해 청력을 상실하게 된 딸의 이야기다. 치매 증세가 온 늙은 아버지(정재진)는 자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 딸(하희경)을 보살피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다. 딸을 여자로 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애쓰고, 자신의 수족처럼 거느리는, 어떤 면을 보아도 좋은 아버지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관객은 철저히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며 증오하기도 하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한 사람'인 것이다.
딸 성재는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오히려 절망한 듯 하다.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간다. 도피할 곳을 찾지 못해 자신의 생각 속으로 도피하는 그녀는,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다. 그러고보면 <저녁의 게임>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결코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선이 악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직시해야 할 오늘날의 슬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