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닛 비보이 - Planet B-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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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춤 잘 추는 사람을 보면 감탄하지만, 동경하지는 않는다. 음악을 몸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를 잘 읽어내지 못해서, 몸으로 표현되는 장르를 즐겨본 적이 없다. 이런 개인적인 취향을 굳이 먼저 밝히는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한 내 호감도가 결코 '취향'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을 알려두기 위해서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바로 <플래닛 비보이>이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인 감독 벤슨 리에 의해 영상에 담긴 비보이들의 꿈은 독일에서 열리는 '배틀 오브 더 이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배틀 오브 더 이어'는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선별된 대표팀이 모여 실력을 겨뤄서 세계 최고의 비보이 팀을 가리는, 비보이에게 있어 꿈의 무대라 할 수 있다. 감독의 카메라는 프랑스의 '페이스-T', 미국의 '너클헤드 주', 일본의 '이치게키', 그리고 한국의 '라스트 포 원'과 '겜블러스'의 꿈을 쫓는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관심을 두며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치게키'와 우리나라의 두 팀이었다. '(역사를)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는 그들의 말처럼, 일본과 우리나라의 대결을 기대하면서 지켜봤고 그 대결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누구보다 손에 땀을 쥐고 있는 것은 역시 나였다.  

 한국의 비보이들이 이렇게 뛰어나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었다. 세계 대회에서 1위를 했다는 소문을 간혹 듣기는 했으나, 그 세계 대회란 것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 1위가 값진 것인지도 몰랐다(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그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라스트 포 원'의 '비보이조'의 아버지는 아들이 추는 춤을 '탭댄스'라고 말한다. 또다른 멤버는 '청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더라고 말한다). 하지만 2005년, <플래닛 비보이>에 영상을 담기위해 카메라가 돌고 있는 그 순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그리고 그 이후에도-2002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은 우승과 준우승을 반복하며 대회를 재패했다), 비보이계에 '한국'이란 나라는 최강을 뽐내고 있었다. 누구도 한국의 테크닉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영화 속의 '겜블러스'는 이미 2004년 우승을 거머쥔 팀이었고, '라스트 포 원'까지 합세해 또다시 세계에 우리의 이름을 떨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 영화가 매력적이고, 가슴 뛰고, 눈물 나고,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나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처럼 '우리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이 '세계' 무대에 나가면 생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지켜보는 나와는 달리, 비보이들에게 '배틀 오브 더 이어'라는 세계 대회는 단지 나라 이름만이 걸린 대회가 아니다. 자신의 춤에 대한 인정,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보장,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준비된 무대. 그들에겐 현재이자 미래였다. 그래서 춤,만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플래닛 비보이>였다. 우리나라는,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하는 '군대' 때문에 끝까지 춤을 출 수 없는 현실과 춤은 돈벌이가 될 수 없다는 배고픈 현실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동화되었다. 앉아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기는 처음이었다. 어떤 매력적인 가수가 나와서 멋진 춤을 선보여도 나는 그저 시큰둥할 뿐이었는데, 다리를 까딱거리는 소극적인 몸짓에서 벗어나, 정말 몸이 움찔거렸다. 나도 모르게 박수도 치고 있었다(혼자 봐서 다행이다,란 생각을 하다가, 극장에서 봤으면 모두들 보다가 벌떡 일어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잠깐 했다). 일본팀은 반드시 져야해, 라는 마음을 먹고 있다가 '이치게키'의 1차전 무대를 보고 나도 모르게 경탄하고 말았다. 음악과 춤의 완벽한 조화가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춤으로 음악을 표현하는 일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품고 있던 내게 '이치게키'의 무대는 환상 그 자체였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돌려보고 또 돌려봐도 멋졌다.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국적 따위는 없다. <플래닛 비보이>를 통해 내가 겨우 공감하게 된 사실이다. 무대에 오르면 적이 되어 싸워야 하지만, 그들은 '즐겁게' 싸우고, 그 싸움으로 인해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오랜 앙금도, 그들의 멋진 무대 앞에서, 일어나 박수치는 것으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가족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자신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그들의 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신의 꿈을 펼칠 그 무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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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6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7 0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줄리 & 줄리아 - Julie &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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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애프런 식의 영화는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스타일이겠지만, 매번 보기에 조금은 지겨운, 지나치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볍고, 여성적이고,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영화는 이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줄리&줄리아>라는 노라 애프런의 영화를 선택한 것은, 단지 메릴 스트립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화는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기대없이 시작한 영화는 15분쯤 지나자 사랑스러운 대사로 나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들었다. TV로 요리 강습 중인 줄리아는 (요리사들이 솜씨를 발휘할 때 많이 보여주곤 하는, 프라이팬에 든 음식을 뒤집는) 뒤집기에 실패하고 떨어진 음식들을 프라이팬에 다시 주워담으면서 말한다. "다시 담으면 돼요. 주방에 혼자 있는데 그걸 누가 알겠어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줄리아, 특이한 말투와 시원시원한 웃음을 가진 거대한 여인 줄리아를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인상에 강하게 남았던 에이미 애덤스는 니콜 키드먼과 흡사한 스타일로 변모해 이 영화에 출연한다.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다시피 이 영화는 사실 '줄리아(혹은 메릴 스트립!)'를 위한 영화다. '줄리'는 줄리아를 지나치게 흠모하며 요리 뿐 아니라 삶까지 닮고 싶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영화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 주인공이 자신의 개성을 내세우기 보다 자신의 인생이 줄리아처럼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짜증만 내고 있으니, 나처럼 메릴 스트립을 좋아해서 영화를 선택한 사람은 '줄리아'만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줄리아'의 인생은  열정과 웃음, 사랑으로 가득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강하게 추진해가는 줄리아의 인생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남편의 사랑을 당연히 여기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애쓰는 줄리의 인생보다 훨씬 빛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줄리의 인생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 위대한 사람인 줄리아는, 이미 우리와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좌절하고 노력하고 울고 짜증내고 기뻐하고 방방 뛰는 줄리도 사랑스럽다.  

 전형적인 노란 애프런의 작품이다. 줄리와 같은 여성들, 특히 자신의 인생이 생각처럼 잘 굴러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면서 자신의 꿈을 찾았던 줄리아를 인생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실제로 줄리 역시 '줄리아'를 완벽한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고,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도 하에 진행되는 이야기므로 따뜻하고 유쾌하고 결국엔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가 완성되었다. 크나큰 역경없이 진행되므로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영화가 진짜 따뜻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줄리&줄리아>를 쓴 줄리의 시선이 아닌, 혹은 영화를 만든 노라 애프런의 시선을 거치지 않은, 온전한 '줄리아'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 조금은 아쉬운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그 이쉬움을 달래기 위해, 실제 주인공인 줄리아 차일드가 쓴 책을 좀 찾아봐야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무지하게,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더불어, 누군가와 요리의 과정을 나누며 같이 먹고 싶어졌다. 본 에퍼티(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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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속삭임 - Red Like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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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봤던 <블랙>과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사실 눈물을 잔뜩 흘릴 준비를 하고 시작한 영화였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이 영화, <천국의 속삭임>은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그런' 영화라 함은 장애를 소재로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힘든 영화를 말한다). 주인공 미르코, 따뜻한 친구 펠리체, 첫사랑 프란체스카,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한바탕 벌이는 그들의 축제 이야기를 다룬 행복한 영화다. 그러니 미르코나 펠리체가 가진 시각장애인이라는 불편함은, 키가 큰 사람이 농구를 잘하고 다리가 긴 사람이 달리는 것에 유리한 것처럼, 오히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이점을 가져다 준 축복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우리는,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우리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을 대할 때에 '그래도' 얼마 동안은 보았으니 다행이다,는 반응을 보인다. 미르코가 그렇게 시각을 잃었다. 어린이의 호기심이 불러온 우연한 사고였다. 목숨을 건진 것도 다행이라고들 하지만, 책에 대한 욕심도 많고 영화를 좋아하고 TV도 보고 싶은 미르코에게 그것은 큰 불행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였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 정든 고향 친구들과 헤어지고 울타리같은 가족과 헤어져, 머나먼 곳, 타향에서 살아야하는 외로움. 어른들 모두는 미르코를 환자 취급하고, 장애인을 대하듯 '특별하게' 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펠리체는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색깔도 모르고, 모양도 모른다. 그의 세계는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 생각처럼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소리의 세계-. 자신들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어린이'로서의 순수함을 만끽할 수 있는 소리의 세계 말이다. 연극을 한들 재미가 없고, 볼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단지 소리를 듣고 즐기기 위해 학교를 탈출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즐기기 위해 새로운 소리들을 끝없이 만들어 녹음하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그들의 세계는 반짝,하고 빛났다. 잊고 있었던 꿈이 되살아났다. 잊고 있었던 웃음도, 즐거움도, 자신감도. 보통의 세계에서 그들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하는 존재,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워야하는 존재였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어린아이들이었다.  

 누구든 그런 시절이 있다. 어른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어보지 않던 시절, 말이 통하고 같이 놀면 즐거운 친구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란체스카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르코에게 자전거 운전을 맡기고 자신은 뒷자리에 타기도 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혹은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울린다. 어른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친구들은 미르코를 놀리지도 않고, "보고 싶었어"라며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사람을 만날 때, 직업이 뭔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따지고 재는 어른과는 아주 많이 다른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그리웠다.  

 미르코와 친구들이 만든 소리의 세계를, 눈가리고 경청하던 어른들이 감동한 것은 결국은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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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의 계곡 - In the Valley of 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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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영화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즐거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좀더 어린시절의 나는, 모든 상황이 끝나고 '영웅주의'가 승리하는 그 순간에(한때 전쟁 영화의 대부분은 '미국'이 정의의 편이었으니까) 감정 이입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전쟁 영화가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으로만 보이지 않게 되었고 전쟁 영화라는 장르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참혹하기만한 현실을 '영화'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엘라의 계곡>은 본격적인 전투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를 담은 '반전영화'라길래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지 싶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 영화의 중반에 이르렀을 무렵까지는 괜찮았다. 전쟁에 관련된 영화라기 보다는, '군인'이었던 아들의 살인사건을 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마이크는 그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와 같은 질문을 끝없이 되뇌이며 영화를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역시, 중반 이후부터 이 영화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보는 내내 힘겨웠다.   

 아버지 행크는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집을 떠나 모텔에 머물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헌병대 출신의 퇴역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아들인 마이크 역시 그러한 집안 분위기에 떠밀려 자원입대한 것으로 표현된다. 행크는 모텔에서도 신발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침대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아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간 술집에서도 예의를 차리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런 그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되뇌이며 후회하고, 자책한다. 그런 그에게 낡디 낡은 성조기는, 거꾸로 매달린 성조기는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낡아가며 자신에게는 잊혀지길 바라는, 나라에 대한 '쓸데없고 뒤틀린' 애국심 말이다. 

 아들인 마이크는 밝고 착하며 유머러스한 아이였다. 하지만 가혹한 전쟁의 현실에서 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이고 비참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 마이크는 자신을 버리고, 전쟁에서의 상황을 즐기는 유쾌한 '덕'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자괴감 뿐이었고, 너무나 다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는 영화에서, 행크가 보는 사진과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전하기 전의 마이크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며 눈물짓던 마이크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너무나 그리웠다.   

 <엘라의 계곡>이란 제목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던 장소를 의미한다.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꼬마 다윗.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느냐는 행크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전쟁, 그것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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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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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은 비밀로 지켜질 때에만 매력적이다. 혹시 비밀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내가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것 역시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 <시크릿>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여러가지의 비밀을 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아는 비밀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이끌어가기 시작한다.  

 사실 한국 영화에서 스릴러 장르라는 것은 왠만큼 이야기가 탄탄하지 않고서야, 영화로 만들어지면 일단 혹평부터 들을 것을 감수해야 한다. 외국의 탄탄한 스릴러 영화를 보며 눈이 한껏 높아진 관객들은 일단은 단점부터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단점이 생각보다 적을 때,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윤재구 감독의 전작(물론 각본가로서의 전작이었지만) <세븐데이즈>는 의외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가도를 달렸다. 김윤진의 안정된 연기력도 물론이거니와, 탄탄한 시나리오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연출이 삼박자를 고루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시크릿> 역시 감독의 이름을 듣고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 역시 <모범시민>과 <시크릿> 두 스릴러 영화를 저울질하다 그래도 윤재구 감독의 데뷔작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크릿>을 선택했으니까.    

 상업성을 지닌 데뷔작으로는 훌륭하다. 관객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면서도 적절한 때에 긴장을 늦추게 하는 여유를 보인다. 긴장감의 핵심은 '아내를 지키고자 하는 형사의 비밀'이 언제 탄로나느냐와 '살인사건이 있던 날 아내는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동생의 죽음에 복수를 하려는 남자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인지 비밀을 미끼로 협박하는 남자와 얽혀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러한 긴장감은 반복될 수록 식상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시크릿>은 캐릭터의 힘을 빌어 그 긴장을 이완시킨다. 김성렬(차승원)의 동료인 최형사(박원상)는 굉장히 호쾌한 타입의 남자로 시원시원한 언행이 웃음을 주고, 악인으로 등장하지만 특이한 말투와 행동으로 웃음을 주는 재칼(류승룡)은 극의 흐름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차승원 역시 날카로운 눈빛과 매서운 얼굴로, 혹은 간절하고 애절한 얼굴로 관객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아내 지연 역을 맡은 송윤아의 연기(혹은 지연이란 캐릭터 자체)는 아쉽다.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이라, 비밀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등장해도 전혀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등장할 때면 극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대본을 그대로 읽는 것 같았다. 이제껏 송윤아의 연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에 더욱 아쉬웠다.   

 등장하는 인물이 한정되어 있어 범인의 정체를 눈치채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마지막에 가서 범인의 입으로 밝혀지는 이야기는 그래서 놀랍지 않다(어쩌면 옆사람의 추리 덕분에 일찍 깨달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조폭들에게 둘러싸인 위험한 상황에서 둘만 존재한다는 듯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성렬과 지연의 모습도 뜬금없었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에 밝혀지는 또 하나의 비밀도 뜬금없었지만, 이 영화, 나쁘지는 않았다. 비밀 자체는 그다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친밀한 부부 사이에 숨겨진 '비밀'이라는 것이 문제. 각자 다른 것을 지키려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믿지 못해 소통의 부재가 생기고, 겨우 이어져왔던 균형은 깨지며,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쫓고 쫓기는 '비밀'의 긴장감이 아니라, 친밀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비밀'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전반부의 그 몰입감이 후반부로 가면서 급속도로 약해지는 것이 아쉽지만 그 전반부만으로도 꽤 기억에 남을 영화인 듯 하다. 윤재구 감독의, 더 발전된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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