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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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와 같이 작은 생명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그 광대함을 견뎌낼 수 있다."     - 칼 세이건

  
인간은 지극히 하찮은 종족이면서 더없이 위대한 종족이다. 작지만 크고, 악하지만 선하며, 무지하지만 지혜로운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완전히 개별적이다. 존재적 진폭이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가능성으로 하여금 항시 거대한 긴장상태에 놓인다. 결국 이를 가늠하는(규정하는) 건 사랑이다. 사랑은 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사랑이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만든다. 

   신(神)이 우주를 압도적으로 크게 만든 건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했기 때문이다. 먼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과학적 역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우주적 시공간을 고차원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인간에게 특별히 부여됐다는 뜻이다. 잡지 못해도 가질 수 있고 가지 못해도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발현한다.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했)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작고 작은 인간 주제에 감히 세상의 광대한 현존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오소희가 사랑을 말한다. 그의 신간 <내 눈앞의 한 사람>은 사랑에 관한 에세이다. 그가 지난 십수년간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면서 겪고 관찰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응집되었다.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울림있는 문장은 책 속에 담긴 여러 에피소드와 잘 호흡한다. 시와 산문이 지그재그로 배열되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언어의 운용적인 면에서 과함도 없고 족함도 없다. 여러 여행을 통해 추출된 가지각색의 글감들은 깊은 사유와 촉촉한 언어를 관통하며 단단한 네러티브가 되어 독자의 가슴속으로 침잠한다. 독자는 피로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작가가 준비한 푸른 초장에서 잠시 가슴을 적신다.

   책 속에는 여러 사랑이야기가 소개된다. 작가는 다채로운 모습의 이성간 사랑에서부터 자기애와 모성애, 그리고 동성애까지 여러 사랑의 테마를 들려준다. 요르단에서는 억제하고 발산하는 양극단의 대조적 사랑을 하는 남녀를 만났다. 필리핀에서는 자기애를 향해 첫발을 내딘 여인과 조우했다. 파리에서는 여행가방의 절반을 초콜릿으로 채운 젊은 여인을 통해 자기자신을 좀 더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끊임없이 표현하고 발산하는 중년 연인의 뜨거운 열정을 보았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인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탐구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게이 커플의 순수한 사랑을 목도하며 "여행의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임을 반추했다. 발리에서는 열일곱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각기 다른 포인트를 가진 스물세 편의 이야기는 총론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뻗어 나간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 책은 저자가 7년 전에 출간한 <사랑바보>의 개정판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초판의 첫 원고를 서른다섯에 썼다고 고백한다. 작가의 현재 나이에서 뺄셈을 하면 13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순수 텍스트적 관점에서만 보면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제목과 출판사가 바뀌었고 이야기 몇 편이 대체(추가-삭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초판을 읽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읽는 근육과 감상하는 온도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른 탓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에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서 내가 아빠가 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첫째 딸의 출산을 앞두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하며 초판을 읽어내려간 7년 전의 봄날을.

   갓 결혼해 신혼부부의 감정으로 읽을 때와 두 아이를 낳고 학부모가 된 현존으로 읽을 때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과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사랑에 대한 내 천착은 어느덧 애매한 천상에서 구체적 실재의 세계로 내려왔다. 이제는 크고 대단한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사랑의 디테일은 작고 낮고 가난한 곳에 더욱 숭고한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천국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사랑은 천상에 있는 게 아니라 지상의 영역, 즉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를 명징히 깨달았다. 

   책으로 돌아가자. 책의 제목을 주목한다. 책 제목 '내 눈앞의 한 사람'은 더없이 훌륭하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랑은 삶이고 현실이며 실재이다. 사랑을 애매하고 신비한 형태로 저 멀리 가두어 놓으려 하는 자들에 의해 세계는 피곤하고 끔찍해진다. 사랑을 판타지라는 모호함으로 각색하지 말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성실히 사랑하는 게 사랑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일한 죄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곧 사랑이다. 그래서 자신있게 추천하겠다. 오소희의 사랑 예찬론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이 세상 모든 사랑바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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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의 길 - 유럽의 교훈 석학인문강좌 69
박지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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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의 독립혁명(1776). 프랑스의 프랑스혁명(1789). 우리는 이 세 혁명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혁명은 의회를 중심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봉건적 체제와 중세적 관념을 타파하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 혁명은 공통점을 가진다. 

   나는 선술한 3대 시민혁명 중 2개만 긍정한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입헌군주제에 안착해 현재까지 이르게 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혁명이다. 비록 의회가 주도했지만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지금까지 큰 정치적 혼란 없이 입헌주의의 전통을 잘 지켜왔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국왕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군주, 귀족의 신분과 봉건적 토지 제도의 잔재를 일소하고 3권 분립에 의한 민주적 공화제를 인류 최초로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다르다. 혁명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소위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그 전개과정과 이후 프랑스의 역사를 조망하면 종국적으로 실패한 혁명으로 수렴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는 다원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많아지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다수 역사가들은 한 목소리로 프랑스혁명의 부정성을 논하고 있다. 나도 프랑스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영국과 미국은 올곧은 근대혁명을 통해 근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고 시민의 자유와 안정을 꽃피웠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요란하고 잔혹하고 참담한 대가를 치뤘지만 끝내 나폴레옹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 체제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유럽의 패권을 독일(프러시아)에게 넘겨줬다. 전통적으로 유럽이기를 거부해온 영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부정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공유할 생각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근대성(近代性, modernity)'의 원류이다. 근대라는 말이 오늘날 더 이상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탈근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근대는 낡고 식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비판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인류를 근대의 문으로 연 건 분명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럽의 근대를 논할 때 영국과 프랑스를 양축으로 언급한다. 이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함께 아우른다는 의미인데 영국과 프랑스가 각 키워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적인 전통과 프랑스적인 특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유럽으로 불리길 싫어하(했)고 프랑스는 유럽의 맹주이길 갈망한(했)다. 중세 말기의 100년 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지독한 긴장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근대성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간 <근대로의 길>을 통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최강국인 영국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눈부신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소유와 권력이 비교적 고르게 분산된 사회가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회"이며, 그런 "자유와 소유와 권력의 분산은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서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12월 한 달 동안 진행했던 한국연구재단의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기반으로 씌어졌다. '근대로의 길, 유럽의 교훈'은 평생 저자의 연구의 핵심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서술과 풍성한 자료 제시가 눈에 띈다.

   저자는 국내의 저명한 영국통이다. <영국사>, <제국주의>, <슬픈 아일랜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대처 스타일> 등이 그녀의 영국 관련 주요 저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경계와 탈(脫)근대 담론이 일고 있지만 인류가 지독한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난 데에 영국의 힘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일평생 영국사를 천착하면서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했다. 영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 소유, 권력의 분산을 빨리 확립한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個人)'이었다. 프랑스처럼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영국은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대변한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갔다. 개인에게 노동과 아이디어의 대가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영국의 제도적 장치는 기술자에게 동기부여를 했고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집단을 극복한 '개인의 발견'이 영국이 이끈 근대성의 초석이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은 결코 과거완료적 주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는 집단주의(collectivism)에 신음하고 있다. 내 돈은 우리 돈이 되었고 내 책임은 우리 책임이 되었다. 독립적인 개별 인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공동체'라는 말랑말랑한 용어로 뒤덮여지고 있다.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공동체의식이 유독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egoism)와 혼동할 정도로 개인에 대한 철학이 빈곤해 있다. 물론 공동체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모호한 것이다. 불분명한 것이다. 명징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건 개인이다. 자유로운 개별 인간(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즉 시선과 기준은 항시 개인에서 사회로 향하는 것이지 그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여러 지적 감흥을 제공한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지는 않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읽는 내내 공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곳곳마다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도 이를 대변한다. 저자의 욕심이 컷던 듯하다. 조금 더 쉽고 편안한 방식으로 딱딱한 강의를 유연하게 풀어서 기술했다면 책의 존재감은 달라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처 스타일>을 위시하여 과거 그의 저작들이 대부분 대중과 호흡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중하다. 근대성의 역사적 원류를 살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근대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무엇보다 개인에 관한 탐구가 빈곤해 있는 한국의 현재성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 독자로서 이런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유독 근현대사와 관련해 지난한 논쟁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이 책의 존재가치는 매우 높다. 전문적이고 딱딱하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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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심리학 - 아버지의 부재와 무신론 신앙
폴 비츠 지음, 김요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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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많다. 시간의 힘은 강하다.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독서는 항상 세월보다 앞선다. 인생은 짧지만 양서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다독가라 할지라도 거대한 책더미 앞에서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중에서 보석과 같은 책을 만날 때는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어딘가 구석에 숨어 있어 널리 읽히지 않은 책들 중에서 보물을 발견할 때만큼 큰 희열은 없다.

   폴 비츠의 <무신론의 심리학>은 보석과 같은 책이다. 인파가 없는 해변가 끝자락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진주 같은 책이다. 저자 폴 비츠는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로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해보니 공통적으로 아버지에게 결함이 있다는 놀라운 논증을 시도한다. 부정적인 아버지상이 무신론을 향하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는 것인데 저자의 여러 논거들을 훑는 과정은 상당히 재미있다. 출판사 새물결플러스에서 2012년에 번역·출간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와 '무신론' 사이의 연관성을 역사적 천착과정을 통해 논증한 데 있다. 니체, 흄, 쇼펜하우어, 러셀, 사르트르, 홉스, 포이어바흐, 프로이트 등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을 논증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책 속에는 대(大) 사상가들의 가정환경과 유년기의 기록과 증언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신과 종교에 대한 비존재와 불필요성을 역설한 열세 명의 무신론자들의 삶을 추적한다. 그들이 아버지와 어떤 부정적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사상과 철학에서 어떤 방식으로 신을 기각하게 됐는지 힘차게 논증한다.

   저자는 반대사례인 '유신론의 심리학'도 함께 다룬다. 이는 무신론 철학자의 삶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저자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한다. 저자는 파스칼, 페일리, 윌버포스, 슐라이어마하, 토크빌, 슈바이처, 바르트, 본회퍼 등 위대한 유신론자들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또한 '정치적 무신론자'를 별도로 추가했다. 희대의 독재자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의 어긋난 권력의지의 기저를 파헤치고 그 태동에 파괴된 아버지와의 관계가 놓여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 외에도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논리적 맥락 위에서 각기 다르게 반응한다는 점을 논증하기도 한다. 또한 예외사례(드니로)와 개인적 사례를 더해 논증의 넓이를 크게 확보했다.

   이 책의 주제는 간명하다. 신에 대한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심리학적 표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부정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파괴된 관계(부재, 결핍, 학대)가 유년기의 가정환경은 물론 훗날의 인격형성을 좌우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아 삶을 둥개고 인격이 고장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존재한다. 가정의 상처는 가정 외에서 치유받기가 대단히 힘들다. 현대 교육학과 사회학의 공통된 목소리다. 저자는 이를 무신론과 아버지의 상관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신(神)'이다. 커가면서 부모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어린 시절에 교제했던 부모에 대한 잔상은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는 절대적 전거이다. 아이의 내적 성품은 오롯이 가정에서 결정된다. 여기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으로 어머니는 자식과 모생애적 친밀성으로 긴밀하게 맺어져 있다. 반면 아버지는 보다 독특하고 난해한 위치를 점한다. 어머니는 존재만으로 친밀하지만 아버지는 꼭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대개 아들에게 더 그렇다. 유년 시절에 아버지의 부재 혹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로 자아가 굴곡된 이들을 나는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그들의 분노는 타자를 겨누고 사회를 향한다. 자신의 현존을 갉아먹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치유되지 않는다. 비극이다. 

   '다윗의 서재'에 자주 방문해온 이웃이라면 내가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녹록지 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가정학을 공부했고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해왔다.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고 주변 지인들과 여러 담론을 쌓아왔다. 나에게 있어 가정은 내 '양심'과 '신앙'과 '책임'을 하나로 집약시킨 단 하나의 천국이다. '가정 행복'이야말로 내 인생 성공의 절대 원칙이자 숭고한 증거이다. 이러한 나의 보수적 가정관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과 가정교육에 기인한 부분이 크다. 그러나 모호하거나 원론적인 선언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다. 이런 배경에서 이 한 권의책은 나에게 무척 소중하다.

   인간은 가정에서 만들어진다. 사회는 개별인간의 본성과 궁극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회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사회가 구원할 만한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사를 빛낸 여러 철학자들의 삶을 추적하여 여기에 대입해보는 연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 수고의 연장선상에 이 책의 존재성이 놓여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을 다루다보니 개괄적으로 짧게 훑고가는 방식으로 씌어진 점은 아쉽다. 제시한 거대담론에 비해 적은 분량도 아쉽다. 깊이와 디테일보다는 넓이와 개괄성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이를 감안하면 꽤 흥미롭게 읽을 만하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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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리커버 에디션)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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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유시민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가 리커버에디션으로 출간됐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커버 디자인만 바꾼 신장판이다. 정계를 떠나 작가가 본업이 된 후부터 유시민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끼치는 그의 영향력은 결코 녹록지 않다. 정치적 외연을 벗고 저술과 강연으로 자신의 본실력을 굴곡없이 전달한 게 소위 '유시민 현상'의 원동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여러 방송을 통해 그의 지력은 더욱 재조명받고 있다. 그간 정치성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지적 내공이 대중적으로 널리 공유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지식인도 연예인 못지않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든다는 점에서 유시민의 존재는 소중하다. 이에 2009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17만 권 이상 팔린 그의 스테디셀러 『청춘의 독서』를 재리뷰하고자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책은 항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책이 세계를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변혁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취한다. 인류사에 기록된 수많은 고전들을 보라. 그것들은 인간을 탐구하고 시대를 조명하며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왔다. 한 시대 공동체 구성원의 지적 화두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고전에는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없는 텍스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전은 뜨겁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인간의 당위적 가치와 그 시대의 고민에 직면할 수 있게 된다. 대작가(대저자)의 혼과 숨결은 텍스트 곳곳에서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진동시킨다. 고전은 입증된 텍스트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지난한 시간의 검증과정을 누적하며 그 입증을 단단히 쌓는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고전을 통해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교훈받고 도전받는다.

   '지식소매상'임을 자처하는 우리시대 대표 진보 지식인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를 통해 바로 고전을 얘기한다. 저자 자신이 청춘시절에 읽고 감동한 고전 중 14편을 선정하여 독자에게 소개한다. 저자가 전하는 14편의 고전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찬란한 명저들이다. 저자는 저작마다 담긴 웅숭깊은 가치와 다양한 시대성에 대해 수준높은 식견과 진지한 자세로 리뷰한다.

   유시민은 역시 진보다. 훌륭한 명저였지만 서슬퍼런 정권의 감시때문에 공개적으로 읽기가 힘들었던 희대의 금서들을 리스트 위에 올려놓았다.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불과 이십오 년 전만 해도 금서로 분류되어 제도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작품들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지금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좋은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만개한 세상이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전환시대의 논리』를 숨어서 읽고, 『공산당 선언』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남산에 끌려가는 시대는 종말했다. "젊은 시절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서 빛나는 금서들을 탐독했다"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진실이 역사를 어떻게 압도해왔는지를 새삼 반추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양성에 있다. 인간, 역사, 철학, 정치, 사회, 과학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다채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관류해온 여러 고전을 선택했다. 도스토옙스키에서 카(E. H. Carr)에 이르기까지 세기의 천재들이 뿜어낸 텍스트는 한결같이 역동적이고 찬란하다. 고전을 집필한 거인들은 항상 새로운 것으로써 기존 사상과 관습을 들추어보려고 했다. 용기가 있었고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깊이 통찰했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생산했고 재창조했다. 이러한 고전작품의 혁신적 정신은 항시 시대성의 전복과 맞물려 발생해왔다.

   고전이 지닌 태동적인 진보성은 저자의 성향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선술한 바와 같이 유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명징한 진보주의자다.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정치적 선탠과 신념은 기존의 것을 바꾸고자 하는 데에 많은 부분 닿아 있다. 이러한 그의 진보적 색채는 시대 안에서 시대를 혁신해온 고전의 특질과 일맥상통한다. 난 믿는다. 모든 고전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수주의자인 나에게 '고전의 진보'가 뿜어내는 생기(生氣)는 언제나 도전이다. 이념의 대립을 넘어선 '검증된 지적 대화'라는 점에서 고전을 관통하면서 보수와 진보는 화해한다.

   저자는 각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여러 맥락을 소개한다. 기존 해설서와는 다른 저자만의 시각과 사유로 추출해낸 해석이 인상적이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첫키스와 같은 책 《죄와 벌》을 통해 평범한 다수가 갖는 강력한 힘과 선한 수단과 목적 사이의 인과관계를 사유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배웠고, 《공산당 선언》을 읽으며 혁명의 가치와 매력에 경도되었다. 《맹자》에서 진정한 보수守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사기》를 통해 권력의 단면과 정치의 속성을 배웠다. 《진보와 빈곤》을 읽고 문명과 빈곤의 함수관계를 학습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眼)을 일으켰다. 물론 그의 주관과 해석에 내가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편이다. 이 소설은 개인과 언론 사이의 무서운 구조적 관계에 대해 묘파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카타리나와 신문사 '차이퉁'의 대립은 당시 독일에서 작가 자신과 일간지 <빌트>와의 대결구도를 그대로 상징한다. 판매부수 400만 부로 독일 내 1위 신문 <빌트>는 논조가 매우 보수적이며 때로는 극우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많이 팔린다고 해서 '일등 신문'이 되는 건 아니다. 비록 <빌트>보다 판매량이 많진 않지만 품격 있고 사회적 영향력을 갖춘 다른 신문들이 균형감 있고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한국적 현실을 대조한다. 1위부터 3위까지 모두 '빌트'로 점령당한, 다수가 '일등 신문'이라고 부르고 읽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빠져 있는 한국 언론시장의 세태에 한숨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급받는 정보와 진실은 일차적으로 미디어의 프레임을 통해 가공된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으로 종이신문의 권위가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언론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가진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유시민이 어떤 생각과 마음에서 읽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주지하다시피 그와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스탠스를 달리 한다. 엄밀히 말해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자유주의자(liberalist)'로 규정하는 것만 동일할 뿐 그는 상당히 왼쪽에, 나는 굉장히 오른쪽에 서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와 그의 텍스트를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식인으로서의 실력을 그가 갖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시민의 거의 모든 저작들을 탐독해왔다. 저자와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위 나는 '유빠'인 것이다. 그의 책(언어)은 한결같이 쉽고 시의적이며 재미있다. 어렵고 민감한 사안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지식인으로서 최고의 내공이다. 그의 책과 강연과 방송이 대중으로부터 환영받는 이유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찾는 분이라면 유시민에 대한 내 견해가 상당히 안온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정치적 견해와 사상적 맥락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까고 보자는 스탠스는 곤란하다. 예컨대 나는 꼴통보수이면서도 완전한 공산주의자 에릭 홉스봄을 좋아했다. 그의 내공(내용이 아닌 내공 그 자체)과 태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다. 지식인에 대한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한다. 유시민을 향한 내 따뜻한 시선은 바로 그 기준에 닿아 있다. 한국 보수에 유시민만한 지식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고전리뷰집 『청춘의 독서』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저작 중 최고로 꼽는다. 돈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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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이기주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가 또다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수십 주 째 베스트셀러에 우뚝 서 있다. 도무지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확대해간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홍수 속에서 말과 글의 범람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에게 이 한 권의 책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평소 자기계발서를 위시하여 소위 '힐링서적'에 거리를 두는 편이다. IMF 이후 국내 서점가는 위로와 멘토를 중심으로 한 힐링문학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서점 중앙에 군을 형성하여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정도다. 읽어 보면 대부분 내용과 얼개가 도긴개긴이다.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저자만의 기준과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합리주의로 쓰여진 말랑말랑한 얘기들뿐이다. <언어의 온도>는 그런 책들과 궤와 결을 달리 한다. 작가 이기주는 뜬구름 잡는 달콤한 소리에서 벗어나 언어의 일상성과 인문성을 대중적인 수준에서 잘 녹여냈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을까. 이에 대한 작가는 답은 단호하다. 분명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온도>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라는 명확한 선언으로 책 표지의 전면을 장식한다.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설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라는 명제에도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사회적 맥락은 대부분 언어를 통해 채워지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 상처와 번민, 기대와 실망 등 인간이 향유하는 거의 모든 정서적 소용돌이는 서로 간의 말과 글을 통해 발생한다. 따뜻한 언어가 사람 사이를 안온하게 하고 차가운 언어가 사람 사이를 냉랭하게 한다. 사회는 곧 언어인 것이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기독교는 신神이 세상을 언어(말씀)로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생겼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했더니 죽은 사람이 깨어났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신성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의 힘을 신으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렇기에 인간의 언어에도 신성적 힘과 능력이 내재해 있다. 언어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킨다. 반면 언어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주변을 어둡게도 한다. 즉 언어는 그 내밀성 속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으며 인간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수렴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은 호모로퀜스(Homo loquens)다.

   작가는 여러 지식과 경험을 통해 추출한 사유로 자신의 언어학을 풀이한다. 일상의 편린이나 한 편의 영화, 혹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소재로 해서 '언어'라는 매개로써 독자의 가슴을 관통한다. 아주 작은 일상의 순간, 좀 더 큰 시간의 흐름, 더 크게는 한 사람이 가진 삶의 폭과 같은 것들을 통해 보편적 이해와 공감대를 추출한다. 각론에서 뽑아내는 총론의 메시지가 가볍지 않고 각 장이 총체적으로 '언어의 격格'이라는 큰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통합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는 '언어의 온도'를 말하기 위해 적확한 '언어의 무게'를 찾았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다. 특유의 냄새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성이 강한 문장들도 아니다. 불필요하게 화려한 덧칠을 하지 않았다. 허세와 겉멋이 없는 진솔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무색무취의 공명적 힘이 있다. 과하지 않고 군더더기없는 문장을 이쁜 디자인으로 두른 작은 책에 담았다. 그렇기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책이 됐다. 힐링서적에도 '격格'이란 게 존재한다. 두서없이 마구 갈겨쓴 여느 에세이들과는 격을 달리 한다. 주제를 잡고 일관되게 쓴 작가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잘 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이례적인 호평 속에는 앞으로 비평의 시각을 변화하고자 하는 내 의지가 담겨 있다. 내 비평의 현존을 진지하게 탐색한다. 베스트셀러에 대해 보다 아량있는 스탠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기존에는 베스트셀러에 옥석을 구분하는 예리한 칼날을 먼저 들이댔다. 위대한 고전의 존재성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의 책들을 재단하려고 했다. 돌아보건대 불필요한 짓이었다. 요즈음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유시민의 말대로 "베스트셀러는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베스트셀러인 것"이다. 많이 팔리는 책은 이유가 있다. 동시대 대중으로부터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힘과 능력이다. 그래서 말하겠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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