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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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읽었다. 지난 번 린드그렌님께서 책여행으로 보내주신 4권의 책 중 한  권이다.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가장 먼저 출간되었고 얇은 두께의 이 책을 선택하였다. 더욱이 린드그렌님께서 성석제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언급하셨고 나 또한 평소 그의 걸죽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바 기대감이 남달랐다. 얇은 두께의 부담없는 분량과 코믹한 이야기들이 한달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은 소설집이다. 총 32편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다. 소설집이라고는 하나 에세이 같은 느낌이 강하다. 작가 자신의 소소한 일상가운데 한 순간 한 순간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포착한 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았다. 불법 사냥에서부터 군대 라면, 딸기 찬가, 술버릇 나쁜 사람, 동네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을 그리고 있다. 또한 각 단편의 분량도 굉장히 짧다. 저자 자신의 조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단편 『가지』의 경우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할 정도다. 공간적 배경의 경우도 도시보다 농촌과 외지를 주로 선택했다. 농촌민들의 소소한 일상과 구수한 입담들이 발견되면서 유쾌한 웃음을 불러 일으킨다. 32편의 단편 중에서 인상 깊은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자.

  『군대 라면』은 군대 취사반장과의 요상스런 만남가운데 얼떨결에 먹게 되는 라면을 회상한다. 당시 먹었던 라면이 사회에서 먹었던 어떤 라면보다 감동적이고, 기념비적이고, 호소력 그 자체였으며 그 라면 때문에라도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정도라 고백하는 저자의 말에 문득 공감이 형성된다.

  『딸기』도 흥미로운 단편이다. 세상에는 무조건 맛있는 과일이 두 종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딸기라고 언급하고 있다. 딸기라는 과일에 상당히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친구의 초등학교 동창 고모의 사촌동생의 아랫집에 살던 사람의 사돈이 딸기농장을 하는데 성공적인 장사수반 이면에 비양심적인 농약살포가 있음을 꼬집기도 한다. 시종일관 딸기에 대한 찬가가 이어진다.

  『소리』는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질과 비본질의 몰이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상을 소개하고 있다. 내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과 세상이 변했다고 믿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고난의 지름길일게다.

  『말과 말귀』 또한 교훈적이다. 가납사니 주인공과 당나귀의 일화는 말에 대한 깊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해서 모두 예언자가 될 수는 없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당나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찬양』은 매우 흥미있는 단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에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자라는 종족에게 당했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찬양한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들의 놀라운 적응을. 찬양한다, 여성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아기자기함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것인 지 조소가 섞인 표현인 지 알 바가 없다.

  『도선생네 개』는 유쾌하고 상쾌하다. 이웃들 간에 벌어진 애완견 싸움이 흥미롭다. 내력과 겉치레를 중시하는 부잣집 한씨의 풍산개, 그리고 세퍼트와 토종개의 잡종인 도선생의 애완견 두만이의 싸움은 내포적 힘과 외면적 겉치레와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듯하다. 

  사회풍자적인 내용도 적지 않은 편이다. 속도문화, 짝퉁문화, 경쟁의식, 학연과 지연, 음주문화, 운전문화, 불신과 비양심 등의 한국인의 다양한 습속들을 단편들에 녹여놓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 그리고 있고 작가 자신이 외적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절제미와 유머로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준다.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집에서의 제목은 단편 제목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다반사다. 하지만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의 단편 제목은 없다. 아마도 '번쩍, 하고 열리는 황홀한 세상!'이라는 책 표지의 수식어구가 말해주듯이 이 책의 특질을 대변하는 문구일게다. 사실 그렇다. 일상에 대한 관찰력과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 그곳에서 번쩍과 황홀을 목도하고, 거침없이 터지게 만드는 유쾌한 웃음체로 그린, 성석제의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은 바로 그런 책이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 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 '작가 후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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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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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단의 신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마 나나에의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읽었다. 「2007년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이라는 거대한 문구가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문학이 쓰나미처럼 한국 도서계를 강타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리 크게 부각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무라카미 류와 이시하라 신타로를 위시한 일본 문단의 거물들과 일본 평단, 독서꾼들의 찬연한 찬사의 평이 끊이지 않는 점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아오야마 나나에를 수식하는 이러한 이례적인 현재성이 내가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밖에 없는 의무를 결정짓게 만들었다. 

  200 페이지가 채 안되는 하드커버의 앞 표지에 고독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 담겨있다. 표지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마치 거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는 여인의 표정은 우울하면서도 목마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마치 누가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내면상태를 보여주려는 듯 양장본의 첫 표지를 넘기는 데 몇 분여의 시간을 소요케 한 묘한 비쥬얼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살다가 갑작스런 엄마의 중국 교환 유학으로 인하여 이별하게 되고 먼 친척 할머니 집에서 얹혀 살게되는 1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소 무뚝뚝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할머니 깅코 씨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스무 살 치즈의 만남, 더욱이 50년이 넘는 상이한 세대의 만남은 불편하고 쉽지 않은 것이었다. 일상의 관계에서 매번 상처를 겪어왔던 치즈는 타인에 대한 겁과 두려움의 각을 세우며 살아가는 아이다. 지하철 플랫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제한 후지타와의 만남도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두려움이 교차되면서 치즈를 압박한다. 우려했던 이별은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되고 매번 겪었던 일이지만 실연의 아픔은 크고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갖는 공력은 절대적인 것인가? 70세가 넘는 할머니 깅코 씨의 삶은 언제나 소소하고 평온하다. 사교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치즈의 일상이 불안정하고 두렵고 냄비 같은 젊은 날의 초상이라면 깅코 씨의 일상은 안정적이고 평온한 인생의 득도 수준이다. 치즈와 깅코 씨와의 소소한 대화는 많은 것을 얘기하지 않는 최대한의 절제미로 표현된다. 발렌타인 데이, 사교댄스, 크리스마스 등의 젊은 날의 소유물이라 여겼던 것에 대한 깅코 할머니의 적극적인 영위와 자기만족은 치즈에게 요상스러운 질투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작 치즈 자신에게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치즈의 소소한 도둑질은 관계의 한 방법으로 묘사된다. 치즈는 깅코 씨의 인형, 호스케 씨의 은단, 후지타의 담배 등 얌채스런 손버릇으로 모은 이것저것들을 자신 만의 신발상자에 보관한다. 신발상자 속의 자잘한 것들은 치즈의 일상을 함께 하는 자들과의 사회성을 간접적으로 충전할 수 있게 한 소중한 보물이자 안식처와 같은 것이다. 치즈는 마지막 깅코 씨의 집을 떠날 때 어떤 물건은 제자리에 돌려 놓고 어떤 것은 자신의 방을 두르고 있던 고양이 사진 액자 뒤로 숨겨 놓는다. 자신의 존재감이 죽지 않도록, 그리고 개성이 상실되지 않기를 원하는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관계가 주는 아픔과 상처에 번민하며 약한 자로 살아야 했던 치즈.. 깅코 씨의 집에서의 1년여의 관계에 대한 인생수업을 통해 혼자서 회사의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버젓한 어른으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삶의 기쁨이자 또 다른 도전이다. 데이트를 위해 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로 가던 중 건너편 어린 아이의 소소한 모습이 관찰된다. 신발을 벗고 지하철 창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를 엄마가 성가시게 나무라면서 돕고 있다. 간신히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아이의 포니테일을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는 치즈의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치즈는 어린 아이를 관조하면서 바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시간대를 현재에 통합하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소설의 각 장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설정하고 있다. 사계절의 풍경과 등장인물의 일상을 오묘한 담채화처럼 그린 묘사, 문체의 절제미, 뚜렷하고 분명한 표현, 인간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문구와 주옥같은 장면. 지하철역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1년간의 이야기는 한달음의 진도로 완독할 수 있는 집중력을 제공한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변화되는 것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인간의 절제된 내면을 담백하게 그려낸 이 작품에 나는 평점 4개 반을 부여하는 용단을 보였다. 미래가 없어도 끝이 보여도 어쨌든 시작하는 건 자유다, 라고 외치는 주인공 치즈의 관계에 대한 상처와 치유, 회복을 담담하게 그린 『혼자 있기 좋은 날』을 '혼자 있기 좋은 날'을 즐기는 이들에게 '혼자 있기 좋은 날'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은 뒤 얼마 전 당뇨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지난 주말 병문안으로 대전에 다녀왔는데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외손주를 쳐다보는 외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항상 나를 볼 때마다 10만원을 주셨다. 단 한 번도 거르시지 않았다. 설날이든 추석이든 그 외의 어떤 만남에서든지 언제나 10만원짜리 봉투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여느 친척 어르신들과는 달리 어떤 충고나 인생의 조언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 얘기를 들어주시고 철저히 거기에만 반응하셨다. 그러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시며 대견해하셨고 기뻐하셨다. 외할머니에게 나라는 존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쁘고 흐뭇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혜안이 부족하여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어떨 때는 수백 마디의 말과 위로보다는 한 번의 웅숭깊은 침묵과 기다림이 더욱 많은 것을 전해줄 때가 있다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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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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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인간은 불가분의 함수관계이다. 문학은 인간에 갈증하고 인간은 문학을 창조한다. 문학은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인 시대와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인 사회를 관찰하며 조명한다. 마치 X-Ray가 육체의 내부를 촬영하듯, 문학은 X-Ray로 인간의 감정과 이성을 감찰하고, 자기공명검사로 인간의 내면을 단층 단층 샅샅히 파헤친다. 문학의 존재목적이 종국에는 인간이라는 만물의 영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함수관계에서 문학은 인간에게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 여러가지 문학의 기능 중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 데,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서 문학은 인간에게 교훈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정이현의 신작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을 읽었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소설가이자, 최근 한국문단에서 부각받고 있는 여류작가이기때문에 그녀의 신작 소설집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출간 이후부터 첫 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온갖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점철되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제 1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고 『타인의 고독』으로 제 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 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한 이력은 그녀가 한국문학의 차세대 작가임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달콤한 나의 도시』는 나와 정이현의 첫만남이었다. 신문연재라는 연속성의 한계에서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뛰어난 현재적 감각과 도시적 삶의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날카롭고 경쾌한 필치는 꽤 인상적인 것이었다. 책 구입 시 미니북으로 증정되어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 다시 한번 읽어볼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그녀의 신작 소설집은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을 위시한 총 10개의 단편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현재성이라는 그녀만의 탁월한 시간감각을 녹여놓고 있다. 누구나 한 번 쯤 고민했을 내용들을 도시적이고 현재적인 배경으로 안내한다. 서사의 하나하나가 현실적이다. 마치 일기장을 넘기는 기분으로 도시민들의 일상을 만날 수 있다. 냉소적이고 싸늘하기도 하며, 유머러스한 그녀의 문체는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조합되어 읽는 이에게 한달음의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독서스피드를 지원하고 있다. 

 

  『삼풍백화점』은 가장 뛰어난 단편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그대로 소설 속에 재현해 놓고 있으며 그 시공간 속에 '나'와 친구 R의 일상을 결합시킨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친구 R의 죽음은 정작 필요할 때만 돌아보았던 친구에 대한 죄의식을 수면 위로 불러내었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하는 '나'의 마지막 고백은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을 마음 속의 친구 R의 존재감을 암시한다.

  『어두워지기 전에』는 독특하다. 정이현의 소설에서 낯설다 할 수 있는 반전의 반전(?)이 펼쳐지며 섹스리스 부부 사이의 미묘하고 특별한 긴장관계를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소설 속에서 끝내 침묵으로 봉인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부의 일상도 바뀐 것은 없다. 굳이 바뀐 것이 있다면 여자 화자의 사고방식 하나 뿐이다. 지난한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되며 완전한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하다, 는 노인들의 충고를 인정하며 반드시 임신을 해야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가정이라는 소중한 공동체의 파괴를 차단하고 있다.

  『익명의 당신에게』도 소재의 추출이나 접근방식의 독특함에서 『어두워지기 전에』와 맥을 같이 한다. '종합병원 항문외과 새벽 항문 촬영 사건'이라는 독특하고 자극적인 설정을 통해 연애하는 두 남녀의 심리를 그렸다. 남자가 괴로워할 때는 아무것도 캐묻지 말고 무조건 위로해주어라, 라는 남자의 두뇌구조를 꿰뚫는 진리에 가까운 연애법칙이 인용된다. 익명의 당신에게 보내는 연희의 편지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믿음에서 연유한 걸까?, 아님 관용에서 온 걸까? 병원장을 못 만난다면 부원장을, 병원의 모든 보직 교수들을, 아니면 B대학 총장이라도, 국무총리라도, 대통령이라도, 그 누구라도.. 그녀의 용기는 진정한 사랑일까?

  그 외의 단편소설들도 TV 시트콤과 같은 색상으로, 드라마 단막극과 같은 느낌으로 부담없이 읽혀진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정이현은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인물을 택한다. 또한 다분히 여성적이다. 여성을,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30대의 젊은 여성들이 그녀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도 이러한 정이현 소설의 물리적 특질에서 오는 당연한 인과관계일 것이다. 은희경과의 차이가 여기서 목도된다. 은희경은  남성화자를 많이 택하는 편이다. 은희경은 소설을 쓸 때 방해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남성화자를 통해 말하려 할 때 객관적인 거리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은희경의 무게감을 생각하면서 정이현의 소설에서 무언가의 결핍을 느낀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아쉬운 부분이다.

 

  모두가 모른 척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날카롭고 경쾌하게 그리는 것이 소설가 정이현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동시대인들의 초상을 전면에 배치하며 세태를 읽어가는 뛰어난 감각과 현재성은 당분간 정이현표 브랜드로 굳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평단과 대중들에게 정이현이라는 소설가는 작금의 한국문학의 위기에 단비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기업이 매년 매출을 증가하여 자기존재를 유지하며 보존하듯이 예술이라는 장르도 한 단계 한 단계씩 발전해야 장수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여기서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앞으로 펼쳐질 정이현 문학의 미래가 끊임없이 진보되고 진화되어 서두에서 언급한 문학의 교화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을 동시에 공급해줄 수 있는 힘 있는 문학으로 서나가길 기대하며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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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왕국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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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소설을 읽을 때에는 독서의 흥미가 배가된다. 바로 이 땅, 같은 공간을 차지했던 과거 선조들의 시계에 작가의 상상력을 불어넣은 한국역사소설은 우리것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와 역사의식을 잘 비춰주기 때문이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그랬고, 신경숙의 『리진』이 그랬으며,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그랬다. 한국을, 한국 소설가에 의한, 한국 독자들을 위한 한국의 역사소설은 언제나 굵직한 깊이로 내게 읽혀졌다.

 

  김경욱이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신작 장편소설 『천년의 왕국』을 읽었다. 책을 읽기 전 '천년의 왕국'이라는 제목에서 신라를 떠올렸으나 정작 소설의 배경은 380년 전의 조선이다.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가 표착되어 낯선 땅 조선에서 이방인으로 살다간 네덜란드인들의 이야기이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되었던 역사적 사실인 하멜표류기에서 소설의 소재를 삼았다. 하멜에 앞서 1627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들의 기록에 역사는 인색했고 작가는 이방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가난한 상상을 불어넣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김훈의 『남한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문장이 짧고 강렬하게 몰아치는 김훈의 문체와 비슷했고, 시대적 배경 또한 인조반정 이후 타타르(청나라)와의 긴장관계가 펼쳐지고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45일간의 남한산성에서의 수성을 그리고 있다면 김경욱의 『천년의 왕국』은 벨테브레라는 한 네덜란드인의 1인칭 주인공의 시점으로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을 거쳐 국왕이 교체(효종 즉위)되고 하멜 일행이 도착하기까지의 26년간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조선의 일상에 녹아드는 세 명의 중심인물에 내면적 상상력을 깊이 불어넣었다. 역사의 인색함에 의해 이방인의 내면을 발굴하지 못했기에 복원이 아닌 철저한 창조로 세 인물의 영혼을 완성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벨테브레의 내면에는 언제나 주님(기독교에서의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다. 조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지향하는 가치에서도 기독교적인 그의 사고는 중요한 기둥으로 서있다. 에보켄은 보다 여유가 넘치는 인물이다. 말하기 좋아하고 세상을 좋아하며 여자도 좋아하는 긍정 지향적인 인물이다. 또한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나 처음 생활하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문화와 언어, 사상과 법도를 넘어선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유머와 조소와 삶의 깊이가 뒤섞인 그의 말과 행동은 벨테브레와 더불어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청년 데니슨은 가장 심각한 인물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사랑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고독으로 일관한다. 그 고독과 번민의 최절정에서 사신으로 온 타타르 신하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용기를 보이지만 실패로 불발하여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명의 인물이 각기의 기질과 가치관과 시선을 갖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자 이교도의 나라인 조선을 각기의 방법대로 탐구하는 것이다.

 

  국왕 인조의 자상하고 자애로움이 많이 부각되는 것이 흥미롭다. 김훈의 『남한산성』에서의 인조는 고독과 번민에 빠진 무능력한 왕으로 묘사되었다면, 『천년의 왕국』에서는 자애롭고 관용 있는, 그리고 열정적인 인간미의 소유자로 그려졌다. 신식 대포의 개발에 대한 열정, 두 번의 탈출을 시도한 벨테브레에 대한 관용, 권위와 격식보다 따스한 인간애의 발동 등 김경욱이 묘사한 인조는 자애로운 왕이었다. 동일한 역사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통찰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즐겁고 흥미로움에 취해있는 내 자신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제목 '천년의 왕국'의 의미를 생각했다. 소설의 시대배경 기준, 건국된 지 150년도 되지 않았고, 종국엔 500년만에 생을 마감한 조선이라는 왕국을 생각하면 어찌 천년의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타르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에보켄의 마지막 유언은 "선장... 부디... 두려워..."의 완성되지 않은 세 단어였다. 에보켄이 남기려 했던 말은 완성되지 않은 채 영원한 침묵으로 봉인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벨테브레는 깨닫는다. 그리고 에보켄의 죽음을 자신의 영혼의 전쟁의 시작으로 교체한다. 남겨진 자, 즉 벨테브레 자신의 생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소설의 마지막은 대체 무엇을 얘기하는 걸까? 머리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여러가지 생각이 일렁인다. 소설 속에서 그의 영혼의 중심으로 일관되게 비춰졌던 주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건가.. 인류 최후 아마게돈의 혼란을 연상시키면서.. 그리고 천년왕국의 건설로 귀결되는 모호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한 희망과 몸부림처럼.. 온 세상을 덮는 적이 물러나도 나의 전투는 쉬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볼테브레의 마지막 강렬한 의지와 목적의식의 표출은 책을 덮은 내게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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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철학적인 오후
하인츠 쾨르너 외 지음, 이수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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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때는 자기계발서보다 아름다운 동화 한편이 보다 깊이 있는 지혜와 성찰을 비춰줄 때가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하세요', '이건 하지 말고 저건 이렇게 하세요' 등의 어투로 일관하는 자기계발서의 건조한 문체가 부담된다면 잔잔한 동화 속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더 강한 포스를 던져줄 때가 있다는 얘기다. 『아주 철학적인 오후』라는 책도 나에게 그런 무게감으로 읽혀졌다.

 

  이 아기자기한 소설집은 6명의 독일작가들의 단편동화 13편을 묶어 놓은 동화집이다. '삶에 두 번 일어나는 일은 없고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는다'라는 강렬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동화집은 표지로 흑백의 모노톤을 사용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양한 색상의 비쥬얼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라는 내용의 무게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고도의 계산에서 나온 디자인일까? 흥미있게 의문을 던져보며 양장본의 첫 장을 넘긴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은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아름다운 동화 속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무 이야기』, 『나무 이야기 2』, 『네 갈래 길』, 『새인지 몰랐던 새』, 『하루』, 『사랑은 선물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리는 조각낼 수 없다』, 『악수보다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손』, 『고래의 노래』, 『중심에서 사는 사람』, 『꿈에 대한 일곱 가지 질문』, 『관계』.. 이렇게 13가지의 동화 속으로 독자들을 침투시키고 있다. 어떤 것은 잘 읽히고 바로 머리속에서 정리되어 가슴으로 운반되는가 반면 어떤 것은 읽다가 다시 앞장을 넘겨가면서 읽는 등의 진도의 더딤을 경험키도 했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두뇌를 지나 가슴으로 오기까지 수없이 내용을 되새김질하며 내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었다.

 

  인간의 사랑의 에너지는 유한한 듯하다. 아니 유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막상 자기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사랑하고 싶은 것만 골라내서 사랑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상대방이라는 그 자체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린 사랑의 지도를 펼친 채 거기에 맞추는 작업이 비일비재하다. '인류는 사랑할 수 있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 인류에게 우선되어야 할 가치일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무런 꿈과 도전 없이 인생을 무료하고 드라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래는 꿈꾸고 상상하는 자의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꿈 사이의 폭과 거리를 합리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혜안 또한 중요하다. 꿈이 없이 사는 것도 문제지만 허황된 꿈과 몽상으로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화살같이 날라가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 그 후에 머뭇거리면서 오는 미래에 대한 꿈과 도전을 갖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성공과 행복이라는 기다림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1년마다 찾아오는 생일, 운동을 할 때 경험하는 러너스 하이의 희열, 마음 맞는 이와 함께 하는 소주 한잔의 시간 등등.. 소소한 일상가운데 지나치기 쉬운 소중한 인생의 조각들이 많이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은 무언가 크고 특별하고 유별난 것만을 지향하는 경향에 익숙하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기 바로 전의 시간 앞에 직면했을 때를 그려보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소소한 일상가운데 감사와 행복을 인식하지 못했던 후회가 엄습할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 것에서 감사할 줄 알고 소소한 것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은 유한하다. 과학이 빛의 속도로 발전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류의 공간은 지구 안에 묶여 있고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밖에 갈 수 없는 1차원의 시간을 초월하지 못한다. 1차원의 세상을 포함하는 2차원의 세상이 있고, 2차원의 세상을 포함하는 3차원의 세상이 있듯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을 훨씬 더 고차원적으로 포함하는 세상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영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과학자들은 우주가 최소한 11차원 이상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천착하고 있다. 머지 않아 이 또한 과학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유한하고 지엽적인 것임을 자각하여 주마간산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겸손함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깨달음과 지혜의 일렁임이 머리속에서 진행된다. 삶과 죽음, 행복과 사랑, 기쁨과 슬픔, 욕망과 꿈, 지혜와 어리석음 등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그리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동화는 「아주 철학적인 오후」의 제목의 의미를 넘어서 「매우 지혜로운 오후」로 내게 존재했다. 인간의 다양한 속성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동시에 인간의  관대함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제시하는 이 소중한 동화를 삶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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