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원리 4:자유와 질서
에른스트 블로흐 / 솔출판사 / 1995년 3월
평점 :
절판


그에 따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의지는 굶주림과 사회적 억압을 깨닫는 데서 비롯됐다. 사유제산제로 인한 불만족한 현재는 '두려운 무엇과 바람직한 무엇으로 의식되는 미래' 가운데서 후자에 주목하게 한다. '인간이 지향하는 모든 것은 바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그러나 나중에 일치하게 되는) '낮꿈'이라는 토대에 의해 어어져 간다.

'낮꿈'은 현실의 변화를 이끄는 혁명적 의식의 실마리다. 굶주림이라는 주요한 충동, 더 낫게 소유하려는 욕구는 밤꿈과 다른 낮꿈을 낳고 낮꿈은 다시 감정의 자기 발전과 의식의 징검다리를 건너 휘망이라는 실천적이고 전투적인 '기대정서'에 다다른다. 문제는 그 정서 속에서 아직 현존하지 않는, 미래를 추구하는 의식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가 말하려는 미래는 결국 '인간이 착취로부터 벗어나 성취된 노동을 행하는 문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다. 블로흐의 유토피아는 계급이 없는 사회이고 그가 찾아낸 희망의 원리는 마르크시즘이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환상이 아니라 오로지 현실적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앞으로 다가올 어려운 진행과정들을 가급적 정확히 안내하며 무언가를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전 저작들에서 미래국가의 세밀한 묘사가 빠진 이유를 맑스가 미래상에 대해 고정된 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그는 이와 같이 열려있는 미래의 상이 경험만을 맹종하는(실증주의도 폐기해야할 형이상학이다!!) 무지한 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개탄하면서 맑시즘를 열린 미래에 대한 '희망의 원리'로 읽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가림 지음 / 월간미술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쟈코메티의 조각은 점점 야위어간다. 뼈에 거죽만 들러붙은 듯이 기분나쁘게 가늘고 누추해져 간다. 마치 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점유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듯이 말이다. 그의 끔찍한 인물상들은 홀연히, 그리고 그야말로 우연히 홀로 선 인간의 실존이었다. 언젠가 자코메티의 피골이 상접하여 썩은 나무처럼 되어버린입상 조각을 보다가 전시장 스폿 라이트로 인해 희디 흰 벽에 드리워진 희멀건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그림자는 울고 있다.

사르트르는 그의 '자코메티에 회화'에서 '인간 사이의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가 포로수용소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파리 카페의 경험으로 던져졌을 때 그는 '타자가 곧 지옥'이었다. 자유 시민사회의 불가피한 경험은 바로 이 타자가 지옥이 되는 실존적 상황이다. 그는 자코메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각자에게 자신의 출구없는 고독을 되돌려주려는 조작가이며, 인간과 사물을 세계의 중심에 다시 위치시키려고 하는 화가이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전시장에서 본 자코메티의 입상은 희멀건 그림자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공간 책세상총서 3
모리스 블랑쇼 / 책세상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두 방향으로 소멸한다. 나는 이미 다다를 수 없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소멸하며, 동시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것을 향해 무한하게 소멸한다. 블랑쇼가 본 심연은 그 한 방향이다. 그 두 무한한 점근선적 소멸은 이 세계의 바깥을 원한다. 이 바깥의 세계는 오직 이 세계가 사라질 때에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계 속에 있는 한 나는 오직 점근선적 운동으로만 존재하며, 그 운동은 결국 죽음과 침묵을 동반한다.

침묵은 과소인 동시에 과잉이다. 다시 말해 침묵은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너무 적거나 동시에 너무 많으며 결코 하나로의 일치에 이를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반응이다. 불가능에 대해 가능을 온몸으로 염원하는 것은 곧 죽음을 염원하는 것이다.

침묵은 때로 과소 또는 과잉의 수다다. 등가의 수다가 내적 합목적성을 유지한다면 과소와 과잉의 수다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수다는 말을 많이 할수록 더 애매해지고, 모순이 증폭되며, 말을 더 적게 할수록 교환할 수 있는 의미가 희박해진다. 이 때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추며, 그 감춤 그대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블량쇼가 말한대로 중성적인 것이다.

나는 바깥의 세계를 염원하지만 안쪽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밤을 염원하지만 낮의 빛에 던져져 있다. 그래서 나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곳에서 헤메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언어의, 시의 장인이다. 그리고 그 장인이 장인답기 위해서는 심연, 궁극을 보아야 한다. 저자 허만하의 일생은 이 장인적 구도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는 그가 일생동안 써온 잡문들을 자기 스스로 거르고 걸렀다. 그래서 70평생을 모은 글이 초라하게도 2백여 남짓의 자그마한 책으로 추려졌다. 글쎄 뭐랄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버려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어울릴까?

허만화란 작가는 나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강우방의 에세이집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라는 책에서 였다. 예술과 종교를 한 데 어우르는 시각과 궁극을 지향하는 순수한 혼과 열정이 느껴져 그의 시집과 새로 출간된 이 에세이집을 구입했다. 읽는 즉시 그 깊이있는 세계에 공명하고 싶었고 그의 삶의 태도를 따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깊이는 나에게 너무 깊고 그 태도는 너무 순도 높은 듯 했다.

이런 생각도 든다. 저자는 전업작가는 아니다. 의사였고, 의대교수였었다. 최근에 은퇴를 했고, 이제야 문학에 전념할 여유를 얻었는 듯 하다. 전업작가... 솔직히 나는 이 직업이 불운한 직업이라고 생각된다. 전업작가는 하기 싫어도, 혹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하는 직업이다. 물기없는 걸레를 쥐어짜는 일이다. 예술은 전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예술을 전유해서 생계도구로 쓰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예술은 삶의 경험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허만하는 말한다.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젊어서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시는 바로 경험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설익은 감정과 아이디어를 성마르게 무엇으로 만드는 일에 집착한다. 아마도 금새 유통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 시대의 집단 무의식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착상이 떠오르면 당장에 글로 옮기고 책으로 출판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국의 문화산업이 규모의 경제를 향해 나아간다고 즐거워해야 할까?

존경스런 인물의 항목에 또 한 분을 새겨넣을 수 있어서 기뻣다. 블량쇼, 오스터, 강우방, 그리고 허만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의 변모 눈빛시각예술선서 18
한정식 / 눈빛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의 속편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현대사진의 전모를 밝히는 본격적인 연구서는 아니다. 단지 근대사진과 현대사진의 차별성을 밝히고, 그 외형적 변모를 이끌어 온 내면적 필연성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고자하는 일종의 계몽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사진은 전통적인 언어문화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를 저자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문학의 시각화'였다고 말한다. 예를들어서 조지 스타이너의 기획에 의한 [인간가족]전이 20세기의 대표적인 문학적 사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현대는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해 깨닫던 시기였고, 동시에 언어의 족쇄에 매여진 이미지의 해방이 이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야기 혹은 설화성으로부터의 독립, 영상성의 확립이 사진에도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문학적 경향에 경도되어 온 대중들에게 난해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신세대로 분류되는 신인류들은 이마골로기적 사고를 한다고 하지만..) 또한 사진은 기록성과 재현성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했다. 사진예술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을 다시 보여줄 필요가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느냐(p.40, 에드워드 웨스턴의 언급)는 것이다.

그러자 사진은 너무 작아서, 혹은 너무 커서, 혹은 가시광선의 폭을 벗어나서, 혹은 우리의 상식과 도덕의 기준으로 정형화할 수 없어서, 혹은 우리의 에피스테메와 불일치해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성은 비단 사진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술과 영화의 초현실주의 등의 아방가르드 운동들과 괘를 같이 한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능가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의 실증세계의 한계를 벗어나는 탐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