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파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회조건이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갖가지 전제를 묻고 해석하는 일을 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길을 보여주는 일이겠지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의 일은 사람들에게 도달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줄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이겠지요. 장애물을 부순 뒤 어느 길로 갈 것인지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에는 지금까지 닫힌 집단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집단이나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포함합니다.  [...]  "여기저기에 길이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언제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일지라도 다음 순간을 모른다. 인간은 기존의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목적은 잿더미가 아니라 잿더미 속을 누비고 다니는 일이다." ("파괴적 성격", <폭력비판론>)

 사까이 나오끼,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창작과비평,2003) 중 대담 부분에서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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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를 공부할수록 동시에 두 가지의 상반되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 하나는, 국가가 한 나라의 주민들에게 일체의 대안적 의식들을 어릴 때부터 마비시키는 근대만큼 대중들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심한 시대는 역사상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경우 '자유로의 도피'는 대개 군사주의적 광기의 형태를 띠었다. 100년 전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나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은 1848년 혁명의 시절부터 급진적 수사를 이어받고 5월 1일의 노동절이면 '제국주의 타도'를 외쳐댔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국주의의 깃발 밑에서 서로를 죽이려고 광적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 살인적 열광보다는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식의 냉소주의적 형태를 띤다. 세계 인구의 15% 정도밖에 안 되는 미국, 서유럽, 일본이 세계 자원의 약 85%를 독식한다는 사실 등이 이미 노르웨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원 약탈을 바탕으로 삼는 세계 체제를 바꾸려는 노르웨이 젊은이들이 다수일까? 천만에. 우리가 약탈자라 해도 우리의 소비 수준에는 손을 대면 절대로 안 된다는 집착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서방인들의 집단 의식이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 몸 바칠 자유와 나의 도덕적 이상을 실천할 자유로부터 집단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약탈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집단적 여유와 소속감에 안주하는 것이 개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집단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근대인데도 '다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급진적 운동이 주목을 끈다. 개인마다 자기 나름의 우주를 이루는 만큼 한 개인은 천편일률적인 '국민'이나 체제의 부속물이 아니라 약탈적 체제와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방의 의미를 지닌다. 저항의 정신을 살려 후손들에게 인간이 홀로 서는 도리를 가르쳐준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한용운, 나혜석,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등을 익히 안다. 역사를 제도권 위주로만 배운 우리에게는 그들의 이름이 낯설다.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 (한겨레신문사,2003) p.113-114

노예정신의 동양과 대조를 이루는 '자유정신의 서양'이라는 담론의 구조는 비서구 지역 지식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 체화한 서구 지배층의 자만에 찬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뜨끔!) '자유'란 무엇인가? 실존주의적 시각에서 본 존재론적 의미의 자유는 '나의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선택권'을 뜻한다. 그러나 대다수 서구인들은 그들이 생활방식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제도권 교육을 받고 취직하고 생산, 소비의 순환에 빨려드는 자본주의적 생활방식 이외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지구자원을 고갈시키고 인류를 집단 자살로 이끌고 있는 오늘의 소비주의 사회가 역사의 목적이자 지상낙원으로 보일 뿐이다. 현실을 절대시하는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서구, 소비중심주의적 서구인과 북한 사회를 '조선 역사의 당연한 목적'으로 보는 북한의 '순진한 시민'은 어쩌면 무척 비슷하다. 오히려 자신을 모르고 북한사람들을 '자유없는 불쌍한 노예'로 보는 서구인이 당하는 세뇌가 한층 더 교묘하고 철저하다.

[...]

사회주의 계통의 국회의원들마저 전쟁 히스테리에 휩쓸려 전쟁을 지지한 1914년 7월의 유럽보다 오늘의 유럽은 전체를 위한 희생을 덜 강요한다. 그러나 "남을 속박하는 자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명언대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착취가 중단되지 않는 한, 서구인들의 '자유'를 논하기는 힘들다. 유럽의 진보적 투쟁의 역사를 유심히 연구할 필요는 있지만, '옥시덴트'를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설정해 서구 지배층이 만든 함정에 빠질 필요는 없다. 서구 중심의 세계는 우리가 지나가게 된 하나의 단계일 뿐 인류 역사의 종점도 목적도 아니다. '이상적인 서양'이라는 그림을 말끔히 지워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 평등의 길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Ibid., p.29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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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and Imperialism

    As we look back at the cultural archives, we begin to reread it not univocally but contrapuntallywith a simultaneous awareness both of the metropolitan history that is narrated and of those histories against which (and together with which) the dominating discourse acts. In the counterpoint of Western classical music, various themes play off one another, with only a provisional privilege being given to any particular one; yet in the resulting polyphony there is concert and order, an organized interplay that derives from the themes, not from a rigorous melodic or formal principle outside the work. In the same way, I believe, we can read and interpret English novels, for example, whose engagement (usually suppressed for the most part) with the West Indies or India, say, is shaped and perhaps even determined by the specific history of colonization, resistance and finally native nationalism. At this point alternative or new narratives emerge, and they become institutionalized or discursively stable entities.

 Edward W. Said, Culture and Imperialism (New York: Random House, 1993)  p.51

[...] Yet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liberation as an intellectual mission, born in the resistance and opposition to the confinements and ravages of imperialism, has now shifted from the settled, established, and domesticated dynamics of culture to its unhoused, decentered, and exilic energies, energies whose incarnation today is the migrant, and whose consciousness is that of the intellectual and artists in exile, the political figure between domains, between forms, between homes, and between languages. From this perspective also, one can see "the complete consort dancing together" contrapuntally. 

 Ibid., p.332

No one today is purely one thing. [...] Survival in fact is about the connections between things; in Eliot's phrase, reality cannot be deprived of the "other echoes [that] inhabits the garden." It is more rewarding - and more difficult - to think concretely and symphathectically, contrapuntally, about others than only about "us." But this also means not trying to rule others, not trying to classify them or put them in hierarches, above all not constantly reiterating how "our" culture or country is number one (or not number one, for that matter). For the intellectual there is quite enough of value to do without that.  

 Ibid.,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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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네덜란드 회화에서 위상의 전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전복을 야기한 당사자들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 붓의 힘 덕택에 그들은 사물들이 미학적 찬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재현을 가능케 했던 애초의 도덕적 명분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상적 미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들은 이제 그 미덕을 규정하는 입법자가 된다. 회화는 이제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주는 빛의 원천이 된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 이은진 역 (뿌리와이파리,2003),  p.167

이렇게 네델란드 일상생활의 회화를 일정한 시기 속에 가두어 살펴보는 것은 그 회화를 평가절하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 예외적인 것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과 그 현상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에 의한 창작의 역사, 즉 예술, 문학 또는 사상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유난히 축복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에 인류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더욱 풍요로워지고, 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런 유형의 순간들을 외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평균적인 재능을 가진 화가들마저 걸작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가 그 두 가지 예고, 17세기 네델란드 회화가 또 다른 예다. 이 시기에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거기서 생겨나는 창작물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지고 형태와 의미 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진다. 화가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이런 등식을 활용하게 된다.(그리고 이 등식은 또, 나타날 때만큼이나 묘연하게 사라져버린다.) 그저 배우기만 하면 얻어지는 순수한 기교나 비결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시기에는 무언가 좀더 본질적인 것, 세계와 삶에 대한 해석 자체와 연관이 있는 그 어떤 것이 작용한다. 이 현상은 거장다운 예술적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지혜의 문제다. 비록 인간적 지혜가 예술적 형태를 통해서만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적어도 그 비밀을 건드려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순간들은 언제나 인류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p.215-216

 Hooch,Pieter de <어머니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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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1-1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도로프가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를 "예외적인" "순간"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그것은 일관된 발전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순간적인 각성이 아닐까? 그것은 영구적 완성이 아니라 이행의 순간이다. 시대와 인간과 예술이 한 데 모여 순간 스파크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눈 뜬 자 볼 것이고 눈 감은 자 지나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어떻게 해서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기는지 이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비록 의무라는 개념 아래서 법칙에 굴종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의무라는 개념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는 인격에 대해 어떤 숭고함과 존엄성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말이다. 인격이 도덕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인격에 아무런 숭고함이 없지만, 동시에 인격이 바로 그 '법칙을 주고' 있으며 오직 그 때문에[스스로 법칙을 주고 있기 때문에]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분명 숭고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보여주었듯이, 공포나 경향성이 아니라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심만이 행위의 도덕적인 가치를 줄 수 있는 동기이다. 우리 자신의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을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지킬 때에만, 우리에게 이념으로서 가능한 의지가 존경심의 원래 대상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으로 법칙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만 그 자신도 그 '법칙주기'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임마뉴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 이원봉 옮김(책세상, 2002)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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