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은 단지 오성, 즉 "스스로 생각하기"(Selbstdenken)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기"(<논쟁> A 32), 즉 결단, 스스로 책임지기, 모험심, 용기의 문제라는 점이다. 계몽은 그저 지성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성격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또 자신이 자연적인 성숙이나 법률적인 성숙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자신의 사고와 결단으로 실제로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개개인에 달려 있다. 계몽은 그러므로 지배적인 편견, 시대의 유행들, 불확실한 여론들, 선전 문구의 암시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흡인력 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조장하는 비겁함과 안락함에 의해서도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외부적 요인들보다 앞서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동시적으로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성향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다. 칸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행한 인간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아주 안락한 삶을 원한다면 그는 자신으 대신해서 기억해줄 어떤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고, 또 자신을 대신하여 지성을 사용해줄 또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하며, 자신을 대신하여 판단해줄 또 어떤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경우-펌주)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며, 자신의 모든 의무를 혼자 힘으로 행할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이성에 기댈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인간탐구> p.223)  

                             노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엽 김수배 역(이학사,2004) p.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덕적인 것 안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새로운 차원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신이 오로지 제약들과 우연들로 점철된 세계 속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과도 대면하고 있으며, 또 그가 어떻게든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가 무제약적으로 보증해야만 하는 그러한 어떤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되며, 한갓 가능성들(확률들-펌주)의 노리개이기를 멈추고, 그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0

도덕적 혹은 윤리적 차원에서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진정한 도덕적 통찰은, 개인 스스로가 무제약적이고 정언적인 요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아는 데에서 성립한다. 어떠한 전문가도 그로부터 이러한 통찰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또한 이 통찰은 변화하는 여론 추세에 따른 타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이 통찰은 논증을 통해 수정되거나 더 나은 도덕적 통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지만,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행위자는 도덕적인 것의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만 하며,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도덕적 차원 안에서야 비로소 정치적 행위자가 반격을 견뎌내고 패배를 감수하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위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를 또렸하게 인식한 사람으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굴락 군도>에서 왜 저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시대의 공개재판에서 그토록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는지, 또 그들이 "수수께기같은 판결에 복종"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 솔제니친은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도덕적인 통찰에 의해 비로소 눈뜨게 되는, 앞에서 말한 정체성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카린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가? 신뢰할 만한 소문에 의하면, 그는 당에서 축출당할까 봐, 즉 당을 잃게 될까 봐, 그러니까 목숨을 유지하되 국외자로 남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부카린(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은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반대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 스스로를 확립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투쟁을 위한 도덕적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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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6-0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에게선 약간 강고한 보수-자유주의의 뉘앙스가 풍기지만, 그가 칸트에게서 인용한 대로 "총체적 오류의 불가능성"을 고려하면, 그의 복지국가 비판에도 진리의 일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복지 국가가 국민을 "탈성숙화"(p.92)시킨다는 그의 주장은 일면 옳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가부장적 국가가 되지 않도록 복지정책에 대한 방법적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sweetmagic 2004-06-0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간달프님 ....정체가 뭡니까 ?

간달프 2004-06-1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장주의가 자유로울까 아니면 복지국가가 자유로울까? 현재 잠정적인 나의 대답은 시장주의는 자유와 상관 없지만 복지국가는 상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고전적 시장주의는 자신을 '자연'으로 참칭하며 개인들에게 일률적 적응, 충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개인이 사회/시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연에 대한 도전(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의 상실은 사고의 실패/포기와 연관된다. 주어진 것을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은 지배적 권력의 습관적 술수였다. 자본의 시장주의라고 다를 바 있으랴? 그런데 시장주의는 계산을 사고와 혼동하는 듯 하다. 계산은 자유없는 두뇌 작동의 대표다.
 

[...] 예술이란 아무리 호의적으로 보아도 긴장을 풀며 진행되는 퇴화이며, 성실함과 실질적인 것을 강조해야만 하는 의무로부터의 일시적 해방이다. 예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러면 순식간에 옛날의 감정들이 되살아나고 이미 오래전에 잊었던 박자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2, 142)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많이 뒤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일시적인 삶의 부담을 덜어주는 상태 요구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실제적으로 개선하는 을 게을리하게 된다. (2,143) 

[...] 니체는 당시의 예술적 욕구에 대해서 아주 날카로운 사회학적인 분석을 한다. 누가 예술을 요구하고, 그들은 예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우선 지식인들이 예술을 요구한다. 그들은 제단의 향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종교적 위로를 완전히 무시할 만큼 자유롭지는 않으며, 그들이 예술을 찾는 이유는 예술 속에서 사라져가는 종교를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을 찾는 또 다른 사람들은 우유부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다른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힘이 없으며, 그래서 그들은 예술에서 '다른 상태'를 찾는다. 다음에는 공상하는 삶들이 예술을 원한다. 그들은 헌신적인 노동을 피하려 하며 예술은 그들에게 빈둥거리며 쉬는 침대다. 영리하지만 할 일이 없는 명문가의 여자들이 예술을 원한다. 그들이 예술을 원하는 이유는 단지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나 상인, 그리고 공무원 등이 예술을 원한다. 이들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가슴속에 있어서 고상해 보이는 것을 곁눈질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술은 그들에게 잠시 동안 불쾌함, 지루함, 양심의 가책을 잊게 만들며, 그들은 또한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삶과 성격의 결점을 세계 운명의 결점으로 거창하게 포장한다. (2,447:MA) 여기에는 안락함과 건강이 넘치지 않는다. 대신에 결핍의 경험이 예술로 그들을 몰아간다. 이러한 예술 옹호자들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니체는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자기 불만(2,447)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2003) p.3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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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6-0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퍼갈게요.
 

"Betroffen" 이 단어는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이 '보통국가'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한다. 베트로벤하다는 것은 죄책감, 수치감 또는 당혹감을 함축한다. "

        p.33.  이안 부르마,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2000)

그들은(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에게는 천황숭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타리마에고토'(당연하다)라는 말과 '시젠'(자연스럽다)라는 말은 그들이 애용하는 단어들이다.

        p.311.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큰 불이 나서 땅 위에 쓰러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 몸위를 덥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불은 꺼졌으나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되어 있고 자신은 그 재의 보호 덕에 살아 있었다." 이 (카토 노리히코의) 알레고리에는 일본인 생존자인 '나'와 '나'를 구하고 죽은 일본군 병사가 있을 뿐이다. 불은 일본이 지른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발화'한 듯이 그려져 있으며, 이 불의 1차적 피해자인 아시아의 희생자는 빠져있다.

         p.348. 이안 부르마, 같은 책.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처럼 그들도 물질주의와 복지가 남긴 정신적 진공상태를 우려한다.) [...] (일본에서) 어쩌면 정신적 진공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은 교육받는 과정에서 주입된 종교를 역사에 의해 박탈당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p.31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한 민족은 그 정부 형태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진다.

          칼 야스퍼스

우리는 이제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책임을 군부와 경찰 또는 관료들에게 미루는 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다.

          일본 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주의 1946년 기고문 중에서 p.316

왜냐하면 '보통' 사회, 과거의 유령이 찾아와 괴롭히지 않는 사회에는 역사를 '정상화'함으로써 또는 십자가와 마늘을 휘두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한 사회가 충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져서 희생자나 범죄자의 관점이 아니라 비판자의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될 때, 그 때에만 유령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영면하게 될 것이다.

           p.302 -30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일본의 문제를 거꾸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특히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 없이는 과거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 먼저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심성은 거기에 따를 것이다. 개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는 개헌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부만이 그 뿌리가 여전히 전시체제에 물들어 있는 전후 질서와 단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무릅을 꿇는 것은 서독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된 후였지 그 전이 아니었다.

           p.32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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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념이 단지 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주된 기능은 그런 편협한 사리사욕을 고상하고 폭넓은 사회관에 결부시켜 그 본 모습을 적절히 은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하여 귀족파의 이념이 오늘날까지도 친숙한 느낌을 주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귀족파의 이념은 시대를 통틀어 유산계급의 지배를 미화시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과두세력은 특권층인 자기 계급의 이익을 민중의 이익과 같다고 내세운다. 키케로는 후대의 책략가들에게 이런 이론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공화정 사회 전체의 복지가 소수의 탁월한 지배층의 복지에 달려있고, 소수 지배층은 공적 문제를 현명하고 훌륭하게 관리하며 또 그들의 높은 지위는 그런 탁월한 능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둘째, 지배계급의 선전가는 이렇게 경고한다. 무상 양곡 배급, 집세의 한도 설정, 부채 탕감 등의 정책은 수혜자인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인 해이를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적 안정 계층을 희생시켜서 가난한 사람들의 낭비적 생활을 연명해주는 미봉적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 지배하는 소수는 재분배 정책이 사회 전체에 과중한 비용을 부담시킨다고 주장한다. 영세 농민에게 땅을 재분배하려 해도 그런 땅이 충분하지 않고, 또 양곡 무상 배급이나 어려운 평민의 고용을 위한 공공사업을 추진하려 해도 자금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돈이 없다는 얘기는 구실에 불과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 비용으로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과, 부유 계층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보조금은 무슨 돈으로 조달하는가.

넷째, 인신공격의 방식이다. 부자들의 지나친 탐욕을 억제하려는 대중적 개혁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할 수 없게 되자, 귀족파는 개혁가를 매도하면서 그들의 동기를 불순하다고 비난한다. 대중의 항의는 경제적 불공평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 할 수 없고, '계급투쟁' 즉 자기 지위를 강화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변덕스럽고도 파렴치한 민중 지도자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키케로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 지도자는 순진한 군중의 열정에 불을 지르기만 할 뿐' 일반 대중의 진정한 이익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런 지배계급의 이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암살자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들은 키케로의 그 밖의 '입헌주의자'들이 사심없는 미덕과 법률 위에 세워진 공화정을 크게 자랑스러워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를 역사가는 바로 그 '입헌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밥먹듯이 헌정을 중단시킨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영세 농민에게서 공공 토지를 사취하고, 해적처럼 마을을 약탈하고, 식민지 주민에게 중과세하여 가난으로 내몰고, 도시와 지방의 세입자들에게 지나친 임대료를 부과하고, 폭리의 고리 대금으로 채무자를 괴롭히고, 노예노동을 이용하여 자유노동을 위축시키고, 신탁의 점괘를 조작하여 평민의 의결을 방해하고, 최소한의 미약한 개혁조차 반대하고, 표를 매수하고, 끝없는 뇌물로 법정과 공직자들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평민과 그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행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결연한 공화주의자들의 참 모습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이다.

로마 귀족이 생각하는 '공화정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귀족을 위한 자유였다. 겉보기에만 공공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실은 귀족계급의 모든 특권을 지키는 자유, 어떤 비용도 부담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모든 특혜를 누리는 자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더욱더 부자가 되는 자유, 이런 것들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의 자유었다. 그 어떤 공화정의 겉치레를 달고 있든, 귀족제도의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소수 귀족 중심의 금권 정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부유충의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온건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차갑게 뿌리치고 있다.  

                                                      마이클 파렌티, 카이사르의 죽음, (무우수, 2004) p.200-202

 

 

 

 

 

 

<초점> 美 전성기속 위기론 대두
 
[연합뉴스 2004-06-08 09:57]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특파원 = 미국은 건국이래 최 전성기인가 아니면 위기인가.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성계에서 `미국의 위기'를 주장하는 경보가 잦아지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나오는 위기론은 미국의 교육, 과학 등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자유와 인권이라는 `미국적' 가치의 위기는 물론 불평등 심화로 인한 미국 체제 전반의 위기 조짐을 지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에는 미국 대선을 앞둔 정파적 논란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게 사실. 그런가하면 위기론은 실제 위기라기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라는 미국 사회의 자정.교정 기능이 조기 발동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최고 전성기의 미국에서 로마제국의 성쇠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정치학계의 지도급 학자 15명은 7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사회 내부의 경제.정치적 불평등이 심화함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며 `체제 전반의 혼돈'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 정치학회가 2년전 시더 스카치폴 전 회장 등 15명으로 구성한 `불평등과 미국 민주주의 특별연구팀'은 2년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보고서를 통해 "불평등으로 인해 정치에서 배제된 없는 자의 무력감이 민주주의의 심장 자체를 찢으려 하고 있다"며 "부익부와 빈익빈 심화에 따른 무력감이 깊어질 때 우리에겐 결코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체제 차원의 혼돈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빈자의 정치참여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고, 인터넷 같은 기술진보도 정치와 정책결정 과정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리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정보 격차로 도리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가진 자는 공직 선거에 출마를 통해 선출된 뒤 정부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에 대한 계량적 분석 결과 명목상은 1인 1표이지만 부자 유권자 표의 힘이 빈자 유권자보다 3배가까이 클 뿐 아니라 선거후 최저임금제, 시민권, 정부 지출 등의 주요 입법 과정에선 이 정치적 불평등이 더욱 커진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경제와 투표행위, 기타 정치참여 및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분석 결과 ▲미국엔 부자 시민과 빈자 시민 두 계급이 있고 ▲공화, 민주 양대 정당은 기존의 특권층 사이에서만 공직후보를 충원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원의 감소로 노동자의 정치참여 통로로서 노조의 기능이 쇠락했고 ▲공익 시민단체들의 등장도 체제의 가진자 편향을 별로 바로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빈곤층 소수만 부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상향 이동만으로는 다수의 경제적 불일치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라며 "경제적 격차는 보통의 화이트.블루 칼라 직장인과 특권적 전문직, 경영자, 사업가들도 갈라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 발표에 앞서 6일 뉴욕타임스는 미국 대학의 졸업시즌을 맞아 저명인사들의 졸업식 축사나 기념사에서도 미국 사회의 불평등 심화와 시민 자유와 기본권 위협 등의 현상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암허스트대 앤소니 마르크스 학장은 "미국 인구를 절반으로 나눠, 일류대학 학생가운데 못사는 절반 출신은 10분의 1에 불과하고, 아래로부터 4분의 1에 해당하는 빈곤층 출신 학생은 3%에 지나지 않는다"며 "대공황기 이래 전례없는 불평등 사회로 향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 해설가 테드 코플은 "미 본토에 대한 생화학 무기 테러 공격이 있을 경우 계엄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기본권및 자유의 구속은 직접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이 위협의 성격과 범위를 미리 꼼꼼히 따져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 3,4월 9.11테러 조사위의 조사 활동을 통해 정보기관들의 `정보 실패'론이 집중 조명받을 때, 엄격히 분리된 수사와 정보 업무를 테러 위협에 대한 효율적 대처를 위해 통합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전 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총수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청문회장과 언론 기고문 등에 분출했었다. 당시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장은 "후세에 미국이 안보를 위해 인권을 버렸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같은 목소리는 희미했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도 한 대학 졸업식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때만 해도 작동했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이제는 미디어 합병, 탐욕, 이념의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 무관심으로 인해 크게 훼손됐다"고 우려했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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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마 나기사, 御法度

 

그렇다면 정 또는 인정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겐지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겐지이야기]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일본 황실의 귀공자 겐지와 그의 아들이 2대에 걸쳐 여성편력을 벌이는 이야기를 감상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까닭은 겐지 부자의 일대기가 '타고난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일본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윤리나 도덕 대신 인정이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이들이 인정이나 욕망이야말로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씨의 이름은 등호(藤壺)였다. 과연 얼굴이며 자태가 이상하리 만치 죽은 동호와 비슷했다. .... 죽은 동호에 대한 임금의 그리움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 잊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애정은 자연히 등호에게로 옮아가서 각별한 위로를 받았다. 이것도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벗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겐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한눈에 보여준다.

  가는 길가에 그 여인의 집이 있었습니다. '거친 매축지(埋築地)의 허물어진 곳에서 달마저 쉬어가는 집에 내가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요'라고 하면서 그가 그 집 앞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전부터 정을 주고받는 사이여서일까 그 사람은 몹씨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문 근처의 덧문 밖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동안 달을 쳐다 보더군요. 빛이 바랜 국화가 퍽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에 다투듯 지는 단풍들이 과연 슬픔을 느끼게 하는 정경이었습니다.

이같은 정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의 정이나 인정에 다음 장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쓸쓸함이나 슬픔이 덧칠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풍경화 속의 인물이 풍경을 닮아가는 것처럼.

  두중장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겐지가 물었따. "그래서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거요. 별로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산에 사는 사람의 집담은 거칠어졌어도 때때로는 정이 담긴 이슬을 뿌려 주세요. 담 위에 피는 패랭이꽃 위에.' 이것을 보고 생각이 나서 여인의 접에 갔는데, 여느 때처럼 맺힌 감정이 없는 태도이긴 했으나,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집의 뜰 안에 내린 이슬을 보면서 벌레 우는 소리에 지지않으려는 듯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애처러운 모습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람 같았습니다."

일본 국학의 완성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처럼 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모노노아와레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가 모노노아와레의 전범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겐지 이야기]였다. 참고로 덧붙이면 모노노아와레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sadness of things'로 번역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바로 사람이 타고난 마고코로(眞心)에 들어맞는 것이며, 감동을 받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마치 나무와 돌맹이와도 같다."라고 한 것이야말로 노리나가의 주정주의(主情主義)이며, ... 노리나가의 문학론은 ...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므로, 누구나 그런 감정이 일게 될 것이다. 그런 정이 없다면 마치 바위나 나무와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때, 마치 어린 여자아이처럼 어쩔줄 몰라하며 맹한 부분이 많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마스라오 부리'(호쾌한 남성스러움)의 한층 더 깊은 곳에 있는 심정에서 우타모노가타리의 본질로서의 모노노아와레(sadness of things)를 찾아냈다. ...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 '모노노아와레'는 그대로 신토 그 자체의 본질로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간의 정이 이처럼 비애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중국의 작위 대신 일본적 자연을 내세운 국학의 자연주의가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는 초인격적인 神을 창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일본적인 삶이란 결국 신이 마련한 길(神道)에 순종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구하는 삶인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 같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정령적인 자연의 세계는 국학적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끝없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정령적인 자연은 신의 작위(作爲)를 상징하며,  그 속에서 유영하듯이 살아가는 동심의 인간은 인간의 무작위(無作爲)를 상징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치축 끼여드는 불순종(不順從)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신이 마련한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랄까.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대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에게 있어 거세된 순종을 의미하는 無作爲의 자연스러움과 달콤한 비애를 의미하는 모노노아와레는 하나인 것이며, 따라서 조선예술론의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도 하나인 것이다. 신을 정점으로 해서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로 이어지는 은총과 순종의 함수관계, 이같은 일본 국학의 핵심을 토대로 하여 피어오르는 미가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인데, 야나가 무네요시는 이같은 위계질서의 끄트머리에 한국인과 한국 예술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금빛 기쁨의 기억 - 한국인의 미의식,  (강영희, 일빛)  p.8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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