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달걀 샘터어린이문고 6
벼릿줄 지음, 안은진.노석미.이주윤.정지윤 그림 / 샘터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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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이리 적고 보니 너무 거창하다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안의 편견이 모여 만든 야만적(?)인 차별 또는 소외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어린이 책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시작합니다.

장면1) 이제 막 봄볕이 든 도심의 공원에 영화에서 보았던 인형처럼 생긴 백인아이 셋이 비둘기를 쫒으며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대여섯걸음 뒤에서 그들을 보며 때로는 사진기의 셔터를 눌러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 마음엔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적인 환상을 직접 본 설레임이 함께 합니다.

장면2)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다른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럽습니다. 자세히 들으니 우리나라 말이 아니고 OO어(직접언급하는 건 실례일거 같아서 우리나라보다 못사는 나라라고만 해 둡니다)입니다, 계속 들리는 소음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결국은 짜증을 일으킵니다. 그 나라 사람에 대한 비난과 함께 말입니다.

장면3) 텔리비젼에 미국에서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도 마다하고, 조국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왔다며, 한국에 와서 영어강사를 하고자 했던 교포2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어도 유창하고 영어도 유창한 그래서 어느 학원, 어느 학생에게나 최고의 강사가 될수 있을 듯한 그가 한달 40-60만원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전화영어회화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학원에서 그리고 학생들이 원하는 강사는 금발의 피부색이 하얀 백마들이고, 전화영어회화를 할때 상대방들 대부분은 그가 백인 원어민인걸로 알고 있고, 회사에서도 그런척하란다고 그가 씁쓸하게 말하며 웃습니다. 그래도 내 부모의 나라고 내 조국이라고...

 문득 이 책을 읽으며 내 기억속에 잠들었다가 슬며시 깨어난 것들입니다. 백인에 대한 동경, 유색인종이나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사람에 대한 무시, 일본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 등. 이 책은 우리안에 있는 이 편견, 그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 섞여 있는 혼혈인들에 대한 우리의 야만적인 소외와 차별이 우리의 거울이랄 수 있는 아이들을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결국 그러한 현실을 눈물이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죄어오던 좌절을 겨우 잠재우고 다시 희망을 찾아나서는, 우리사회에서 차별받는 이들의 모습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필리핀인 어머니를 둔 '사르해 사르해'의 아랑이, 흑인혼혈인 아버지로 인해 그대로 외모를 물려받은 '까만 달걀'의 재현이, 라이따이한이라는 차별과 비난의 30년을 뒤로하고 아버지를 찾아 한국에 온 '너희 나라로 가라'의 경주, 태국인 엄마를 둔 토종 한국소년 '내 이름은 유경민이야'의 경민이, 그리고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의 과거를 몸으로 반성하고 사는 양심적인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후데쓰까'의 달이. 이들 삶의  이야기는 우리사회의 부조리나 어려움 등으로 인해 발생한, 어찌보면 피해자로서의 삶을 사는 이들이지만, 우리 사회가 그들을 부를때는 코시안, 튀기, 검둥이, 라이따이한, 쪽발이 등으로 부르며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아이들도 우리사회의 가르침을 아무 거리낌없이 따라합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죄책감도 없이.....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더 미안해 하고, 때로는 고개숙여 감사해야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앞의 네 이야기는 소리없는 눈물, 목놓아 하는 통곡, 눈물젖은 외침으로 마무리됩니다. 여기까지 읽으며 결국 아직까지는 우리사회가 이들의 아픔을 껴안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한계가 이정도까지 밖에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와 다른 이들이 함께 웃고 일하고 공부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그런 모습까지 발전하지 못하는 동화속의 모습이 고스란히 우리사회의 한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마지막 달이의 이야기에서 달이를 그리 못살게 굴던 운철이란 아이가 달이에게 다가와 살며시 화해의 손을 맞잡는 모습에서 아직 진행중인 우리사회의 성숙과 저들에게 더 나아질 수 있는 희망의 싹을 보여준게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해 줍니다.

 이 책이 다룬 이야기는 대단히 현실참여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스스로 변하지 아니하고 아이들에게 말로만, 이런 글로만 바른 자세를 강요한다고 혼혈인들에게 드리워진 소외와 차별의 그늘이 눈녹듯 사그라들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을 감히 해봅니다. 먼저는 내안의, 우리 어른들 안의 편견이 부스러지고 우리안의 야만이 계몽되어야만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편견과 야만이 사라질거라는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치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와 다른 문화, 민족, 종교에 속하거나 신앙, 능력, 성별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의 기회를 의식적으로 허락한다면 훨씬 쉽게 그 그늘은 거두어 질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오늘도 나의 아이들에게 이 책을 덮으며 메아리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속삭임을 들려줍니다. 삶의 어느 순간엔가 이 메아리가 그들의 마음을 깨닫고 열리게 해서 자신들과 다른 피부색깔, 얼굴모양, 신체적 결함을 가진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손잡고 놀고, 함께 공부하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애들아 서로 다르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은 아니란다. 일곱빛깔 제각각이 모여 조화를 이루면 아름다운 무지개가 되듯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렇게 새롭게 조화된 세상을 위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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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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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았다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보자마자 영화속의 나무 정령들을 생각했을 듯 합니다. 모양새며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입니다. 다른 점이라면 이 책속의 나무인간은 정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그래서 사람의 감정과 삶에 훨씬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사람과 교류하며 생활하고 있다는 면이 확연한 차이 일듯 하구요.

 죽은 마르그리트의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에 깨어나 움직이게 된 나무인간은, 정체된 나무에서 손과 발을 가지고 움직이고, 눈과 코와 입을 만들어 소통할 수 있게 되고, 음악과 독서-실제로는 상품 카탈로그를 더 좋아하지만-와 목공으로 가구를 제작해 주변에 나눠주며 숲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현명한 친구 엘리아우는 나무인간에게 글을 가르친 유대마법에 관심이 많은 현자이고, 유대마법으로 그가 만든 진흙인간 골렘 - 인간이라기 보다는 만든 사람의 부분적인 형상 정도라고 하는게 옳을지도 모르겠는데- 은 엘리아우의 분신이나 피조물이랄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이 모인 숲속에서 시작합니다.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 떡갈나무을 없애려는 알리트바라이-북극성의 공기와 불의 정령-족의 음모가 진행되면서 조용하던 숲속에 갈등이 일고 결국에는 아틀라스 떡갈나무의 쓰러짐과 알리트바라이왕국의 파국, 거친 땅의 정령들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상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야기속에서 나무인간은 정의감이 넘치고, 우정이 돈독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마법이나 힘을 소유하여 친구들을 구하고 적을 물리치는 그런 영웅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차라리 아틀라스 떡갈나무의 수호 정령이었던 카카가 더 영웅적으로 싸우고 죽음-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헛된 죽음이지만-을 맞이하는 모습이 비극적이고 허망(?)하지만, 그런 영웅적인 삶의 불사름보다는 괴물들앞에서 멈칫거리기도 하고 눈앞의 불의한 현실에 맞서 자유와 존엄과 평호를 지키려고 나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더 인간의 체취가 풍기는 모습이고 작가가 들려주려는 인간본연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야기를 읽으며 나름대로 생각했던 구도는, 북극성이 솟아있는 알리트바라이  왕국으로 대표되는 차갑고 문명화된 사람들의 세계와 아틀라스 떡갈나무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보전된 자연,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나무인간과 그의 친구들의 중간지대입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높게 자랐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아틀라스 떡갈나무를 공격하는 알리트바라이 왕국의 왕과 그의 백성, 그리고 왕국이 무너지고 나서야 무덤을 떠돌며 왕을 비난하는 알리트바라이 사람들의 모습은 도시 생활을 하며 자연을 자신들의 잣대와 편의에 의해서 재단하고 태연스럽게 파괴해 가는 문명화된 인간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런 무자비한 공격에 결국 떡갈나무는 쓰러지지만 그 나무에 의해 왕국은 무너지고 -이건 자연과 인간세계의 균형상실이 가져올 파국에 대한 숨은 경고는 아닐지- 자연도 새로운 괴물들-아틀라스 나무안에 숨겨져 있던 땅의 정령들-에 의해 점령당하는데 그 모습이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알리트바라이 인들을 먹고사는 괴물들은 인간의 멸종뒤에 올지도 모를 새로운 지배자들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는데 인간의 눈으로 본 그들은 썩 유쾌한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자연의 파괴로 닥치는 인간의 파멸,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불쾌한 질서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이런 상태에서의 해결책은 중간지대의 나무인간과 현자 엘리아우의 존재일 듯합니다. 하지만 책은 그에 대해서는 더 진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버린 그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북극성은 사라지고 아틀라스 떡갈나무는 쓰러지고 알지도 못하던 난폭한 정령들이 지배해가는 세상에서의 나무인간과 엘리아우와 골렘의 일상. 작가의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기에 나의 나름대로의 구도설정에 의한 책읽기는, 이 이후의 일은 나무인간이나 현자 엘리아우의 몫이 아닌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변명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인위적인 이해로 끝나 버렸습니다.

 책소개 어디선가 몽환적이라고 표현했듯이 이야기의 내용에 굳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꿈속을 헤매듯 따라가다 보면 지나온 길이 안개속으로 사그라들고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으니 이리라도 이야기를 해석하며 읽어 보았습니다. 재미있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고 나름 진땀이 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마도 같이 가볍게 웃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색을 하며 반박하거나 대답하는 그런 엉뚱한 진지함으로 인한 어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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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 실천편
남인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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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2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 는 말을 모토로 '이제는 실천하라'는 주문을 하는 이 책을 20대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내가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책을 읽지는 않아서 약간은 편견에 사로 잡힌 상태라, '고급한 속물', '건강한 이기주의자', '후천적 귀족' 등의 말에 호감보다는 삐딱한 시선의 의심스런, 각종 처세서들의 지혜를 가장한 말의 유희에 동참하고 있는건 아닌지 하는 그런 의심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이 책을 읽는 본 목적은 여성들에 대한 나름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고,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나 목적하는 삶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고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건강한 이기주의자가 되고 싶은 똑똑한 20대 여자들을 위한 실천지침서> 20대 여성들을 불러 모으는 책의 부제입니다. 미디어 문화의 범람 등으로 획일화된 가치관과 거기에 편승한 대중 문화적 흐름으로 인해 우리사회의 20대 여성 -여기에는 미래의 20대인 10대후반이나 미혼인 30대를 아우르는 젊은 여성이란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는데- 의 세상을 보는 눈은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서 보는 그들의 세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책을 읽으며 든 느낌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며 20대 여성들이 운명을 마주하는 자세, 고쳐야 할 병적인 모습들, 익히기를 바라는 행복해지기 위한 기술, 그리고 자기발전을 위한 자세, 꿈과 결혼에 대한 준비, 타인에 대한 자세 등은 현재 우리사회의 신세대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당돌함이나 똑똑함을 반사하여 비춰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읍니다. 다른게 있다면 책속의 내용은 보석처럼 잘 다듬고, 나침반을 가지고 지도보며 가는 길을 찾아가는 듯한 세련됨과 정연함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미디어나 삶에서 만난 이들은 열정이나 젊음은 있지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고, 불안한 구석이 여전하다는 사실일것 같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궤매야 보배라고 그런 사실들을 잘 궤매 이리 보석을 만들어낸 저자에게 새삼 박수를 보냅니다. 내 딸이 자랐을 때 한번쯤 읽고 숙고하라고 권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물론 그때는 또 다른 세상이 되어 지금 이 이야기들중 상당수는 곰팡이나는 생각이 될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진리는 항상 살아있을 테니까요.

 책의 내용중 많은 부분이 남자인 나도 공감이 가는데, 특히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라, 책을 함부로 읽어라,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는 꿈을 세가지 정도는 가져라, 항상 준비하는 자세-그것이 일이든, 꿈이든, 결혼이든-로 살아라,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라,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실천하라 등의 말은 20대 여성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수 있는 조언들인것 같습니다. 잘 받아들여 꾸준히 생활속에서 갈고 닦는다면 분명 훌륭한 인생의 여정 하나가 그려질 듯 합니다. 상상만 해도 뿌듯해지는 그런 삶의 모습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책을 함부로 읽어라는 부분입니다. 한정된 공간과 지식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 울타리를 넘어 인생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는 너무도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항상 새롭게 써야 되는 말이기도 한 독서에 대한 강조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도 카페에서 철학책을 읽게 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수 있는 그날까지, 아니 그날 이후로도 영원토록 강조되고 권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리뷰의 제목을 "딸에게 권하고 싶은 20대"라고 썼다가 얼른 고쳤습니다. 한번쯤 읽혀보고 싶은 20대로..... 이유는 내 딸이 자라서 한번쯤 읽어보고 자신의 삶을 숙고 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겠다 싶어서지만 책을 읽는 내내 말로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운 전적으로 권하기에는 2% 부족함이 가슴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도 잘 표현 못하는 별것 아닌 것으로 <깊이에의 강요>를 은연중에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 책이 말하는 여자의 인생의 모습이나 삶의 질이라는 것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이건 경제적인 의미의 풍요가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의 풍요를 말합니다- 것이 아닌 어떤 획일화된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가지는 2% 부족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98% 만으로도 훌륭한 인생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하시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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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싱크! - 위대한 결단으로 이끄는 힘 Business Insight 2
마이클 르고 지음, 임옥희 옮김 / 리더스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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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처음 나오고 여러 책소개에서 언급하는 주된 포인트가 블링크와의 비교였습니다. 책의 띠지에도 '블링크가 아니라 싱크였다'고 큼직막히 씌여 있으니, 나 역시도 그런 대립되는 주제로 진행되는 책인걸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미 <블링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서 한바탕 휩쓸고 간 뒤라 그에 동승하려는 불순한(?) 책일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기도 하였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결국 홍보를 한다는 측면에서 출판사가 책의 포인트를 약간 비튼거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싱크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결국 출판사도 블링크에 호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자가 말한 현대사회의 블링크 친화적인 모습의 한 예입니다. 

 저자는 현대 우리사회의 싱크 -이성적이고 비판적이고 종합적인 사고와 추론- 의 부족 및 소멸과 블링크 -즉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이나 행동양식- 의 과다에 대한 염려와 비교로부터 글을 시작합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블링크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싱크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우리 사회가 블링크를 선호하는 문화로 흘러가게 된, 우리 생각의 힘을 마비시키는 여러가지 문화현상 및 사회적인 경향을 지적하고, 생각하는 힘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사상을 이룬 인물들에 대한 고찰을 통한 싱크의 중요성 강조와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예, 그리고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의견제시로 이어지는데, '싱크'에 블링크 친화적인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저자의 확신이 들어찬, 싱크에 대한 예찬서 같은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촛점은 블링크와 싱크의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비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흐름이 되어버린 싱크의 저하와 블링크적인 문화의 일반화에 대한 원인분석, 반성 및 싱크의 회복을 위한 제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사족을 붙이자면 미국사회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들이란 점이 우리와 조금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런 부분은 머지않아 우리사회의 일면이 되어 있을게고, 그런의미에서는 미리보는 우리사회의 일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회를 보고 진보하였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적 올바름 -소수자 우대정책, 인종적 차별의 인위적인 개선 등-, 텔리비젼등의 미디어 중심의 사회, 컴퓨터를 통한 지식의 습득 및 소통, 그리고 과다한 정보, 아이들의 학습장애 등을 개인의 책임보다는 과행동증후군이나 기타 신경증 등의 생물학적인 문제로 객관화시켜 다른것에 책임을 회피하고 약물에 더 의존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고의 틀의 제한, 스트레스에 대한 보편화를 통한 책임의 회피 등 어찌보면 우리가 자랑스럽게 발전하였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저자는 결국 그것들이 생각하는 습관이나 힘을 약화시키고 현대사회를 블링크적인 사회로 진행시키는 것들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싱크의 힘으로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나 제도들이 이제는 싱크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내는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는 처음 만들어져 이리 보급되기까지 다양한 사람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싱크의 산물이지만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습은 그런 사고력과 창조성을 약화시키고, 과다한 정보와 그로 인한 시간낭비, 쓰레기 정보, 책과 비교했을 때  인터넷을 통한 정보교환 방식의 단점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욱더 블링크적인 양식으로 반응하고 생활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지적입니다. 

   그럼, 주관성과 직관, 감정에 의존하는 행동양식을 대신하는 객관성과 비판적 사고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떻게 하면 감정, 이데올로기,정치적 편의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로부터 이성과 논리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로 변화할수 있을까요? 저자는 적극적인 부모노릇으로 돌아가기, 사람의 마음을 확장하는 수단으로서의 변화와 위기의 수용, 성취의 추구, 비판적인 사고에 대한 연구,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유일한 진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최대의 변화는 철학적인 변화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교육에서 학문의 목적이 국가의 수도를 외우거나 원둘레를 단순히 계산해 내는 것 이상의 요구, 즉 학문은 그런 표면적인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비판적 사고와 논리를 수용하여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차원의 철학적인 목표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감정과 직관이, 그리고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가치가 더 중요시 되고 당연시 되는 사회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그렇고, TV 프로그램들이 그렇고, IT의 발전에 의한 각종 기기의 발전하는 모습, 그리고 인터넷에 나타나는 각종 블로그나 카페 등의 출현, 광고가 추구하는 이미지의 조작, 얼짱문화 등 셀수도 없이 많은것들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진보요 발전이라고 자랑하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사회를 비효율적인 시스템과 조직들에 묶어버리고,  분열을 낳고 문명을 쇠퇴기로 접어들게 하는 틈일수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한 번 깊이 새겨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넓게 논하다 보면 문명의 진보와 쇠퇴, 사회의 진보와 퇴보등에 대한 거대 담론이 되어버리는 면이 있으므로, 논의의 범위를 우리 주위로 국한하여 다시 이야기 한다면, 결국 우리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훌륭하게 일을 해내도록 해 주는 것은 분명 감정, 관찰, 비판적 추론 모두가 포함되어 이루어지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비판적 추론을 뛰어넘는 -그래서 블링크가 우월하다는 증거로 사용되기도 하는- 직관적이고 창조적인 도약도 -결국 그런 결과에 이른 사건이나 인물들을 살펴보면- 어떤 주제에 대한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조사와 비판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 진 것이라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만큼 진보를 이루어낸 발판은 싱크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는데, 그리고 우리가 학습을 하는 단순한(?) 문제에서도 블링크적인 해결책보다는 싱크를 추구하는 연습과 노력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꼭 필요한 진지한 자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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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상을 훔치다 - 우리시대 프로메테우스 18인의 행복한 책 이야기
반칠환 지음, 홍승진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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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과 연두색으로 이뤄진 책표지에 들어간 스무컷의 사진속 인물들이 나를 보고 웃고 있습니다. 만나게 되어서 반갑다는 듯이... 다른 몇명은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책을 보고 있거나 그것과 관계된 생각을 하며 뭔가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나도 이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래서 크게 미소를 한번 짓고 책장을 넘깁니다. 내용도 글도 그리고 정성들인 사진에서도 절제와 간결함, 정갈함이 묻어납니다. 

 책은 그 깔끔함과 절제된 미덕을 유지하며, 책과 독서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 대해 18인과의 간결한 인터뷰와 정갈한 사진들로 이어지고 단락지어지고 다시 이어지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책이 내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독서란 네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이 책의 인물들처럼 네 마음을 훔쳤던 책은 어떤 것들인가?' 한동안 열심히 책을 읽고, 때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이런 질문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일견 낯선 그 질문을 한참동안 내 머릿속에 굴리다가 다시금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 봅니다.  이젠 내가 내 마음속에 물음을 던집니다. "독서란 내게 어떤 의미일까? 내 마음을 훔쳤던 책은 지금 어디에 있나?"

 독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이는 '대리경험이에요'라고 하고, 어떤이는 '밥과 똑같아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른이는 '훌륭한 스승을 대신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한마디로 산소입니다'라고도 합니다. 독서는 '내면세계와 상상력을 확장시켜주는 것'이고, '보물을 발견해내는 즐거움'이며, '제 영화의 자양분'이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독서는 삶 자체입니다.'라는 철학적인(?) 대답을 내놓는 이도 있습니다. 모든이의 말이 다 맞습니다. 세상의 사람수 만큼이나 다양한 독서의 의미에 대한 답이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굳이 내게 답을 하라고 한다면 저도 '독서는 삶입니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종이 위에 씌여진 글을 읽으며 자란이가 어떤이는 화가가, 어떤이는 가수가, 어떤이는 평론가가, 영화감독이, 긴급구호 팀장이, 시인이......되어있으니 결국 우리 사는 삶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더 넓게 생각하여, 책장속의 책을 읽는 것도 독서이겠지만, 바람이 들려주는 시를 읽고, 사람들 틈에 끼여 사람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뭇잎과 산과 들이 보여주는 자연의 사계절의 일기를 보고, 하늘을 떠가는 흰구름의 여행기를 읽는데까지 독서의 의미를 확장한다면 아마도 '독서는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당신의 마음을 훔친 책은 무엇입니까? '책속의 인물들이 자신에게 기억되는 책으로 꼽는 책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꼼꼼히 기록하여 서로 비교를 해 보았지만 아무 공통분모도 찾아지질 않습니다. 제 시도가 너무 단세포적인 거였겠지요. 삶의 모티브나 동력을 책에서 얻었던 이들이 자신이 자라면서 영향을 받고, 길을 찾고, 지식을 얻는데 일조한 책으로 꼽은 책들의 일면을 보면 아동잡지의 연재만화로부터 <백경>이나 <돈키호테> 같은 소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은 철학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시집, <토지>, <도덕경>, <성경>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책들이 언급됩니다. 일반적으로 좋은책, 권장도서 등의 구분으로 양서를 골라내려는 노력들이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잡지속의 연재만화도, 그리고 간단한 소책자도 사람의 마음을 훔칠수 있는 숨겨진 힘이 있다는 사실은 책에 대한 나의 태도를 새삼 돌아보게 합니다. 아이들이 만화보면 핀잔을 주었던 것에 대해서도 반성(?)을 좀 해야하나요! <토지>, 청하의 <니체전집>, <시지프스의 신화>, <열린사회와 그 적들>, <역사란 무엇인가>, 원서로 읽었던 카아슨 맥컬러즈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성경>.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겨진 책들입니다. 내 마음을 훔치고 삶의 순간순간 내게 말을 건네는 책들입니다. 아마도 더 덧붙일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러다 보면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언급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전쟁이 나서 지금 당장 책 세권만 골라서 떠나야 한다면?  참 얄궂은 질문입니다. 저자가 책속의 인물들에게 한 질문중에 제일 얄궂은 질문이라고 생각된 겁니다. 질문을 받은 이들은 태연하게 자신이 원하는 책들을 꺼내 놓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저는 결국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첫번째로는 <성경>을 꼽았는데 그 다음에 챙겨야 할 책에 대해서는 아직도 순서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남은 인생의 독서여행이 아마 나머지 두권의 책을 찾는 여행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내가 좀더 성숙해지거나, 아니면 책욕심이 사그러 든다면 지금 이대로도 고를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서가에서 세권만 골라낼 수 있으신가요?

 사람이 책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리 빚어진 사람이 또 다시 책을 만듭니다. 세상이 사람에게 책에 쓸거리 안겨 줍니다. 그리고 책에 쓰여진 그 세상이 사람을 빚습니다. 그리 빚어진 사람은 또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그건 다시 책이 되고, 어디선가 그걸 집어 든 사람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책이 있는 풍경은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책속에 세상이 있고, 세상속에 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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