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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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버트로스,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불리는 이 새는 시 속에 많이 등장한다. 꾀꼬리만큼이나. 그 중 아마도 제일 유명한 시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航海)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海鳥)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蒼空)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可笑) 가련(可憐)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 (C.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ꡔ악의 꽃ꡕ, 김붕구 옮김, 민음사, 1991.)


  여기서 ‘알바트로스’는 속세에 사는 ‘저주받은 시인’을 상징한다. 이들은 ‘창공의 왕자’의 자태를 보여주지는 이제 그들은 ‘가소 가련’하기만 한 것이다. ‘지상에 유배’된 시인의 운명이란 뻔한 것. 이 세상은 이 ‘알바트로스’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모 코미디에서처럼 “아무도 우릴 이해 못해!”인 것이다. 그런 세상 사람들에게 시로써 아무리 떠들어 봐도 “우리가 이해시”키는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러니 시인은 고독하고 허무한 것.

  이야기가 빗나간 느낌이 들지만, 앨버트로스에는 이런 느낌이 담겨져 있다. 시인의 비극 같은 종류의. 그래서 그런지 이런 앨버트로스가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 그리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는다. 여기 앨버트로스가 만들었다는, 아니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졌다는 작은 나라가 있다. ‘나우루 공화국.’ 어쩜 이 나라도 앨버트로스의 시인과 같은 운명, 즉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 갇혀버릴 것만 같지 않은가?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 졌다는 나라가 있다? 동화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웃자고 지어낸 우스갯소리도 아니다. 여기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가 있다. 바로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의 한 점, 바로 나우루 공화국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나우루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동화속의 이야기인줄 만 알았더니, 진짜로 이 작은 섬이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유토피아’? 그렇게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있단다. ꡔ홍길동전ꡕ에나 나오는 이상국(理想國)일까?

  이 책을 읽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나의 씁쓸함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살짝 던져놓고 간다. 그 씁쓸함이라는 것은, 이 지구상에 ‘유토피아’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또 하나의 반증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근대의 제국주의와 야만적 폭력의 문명이 망가트려 놓은 한 평화롭던 작은 섬의 비극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일까? 근대문명이 가져다 준 ‘부’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일까? 그렇다면 여기 나우루 공화국은 한 때지만 이 유토피아를 경험했다.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섬을 이루고, 이것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인광석이 되어, 이 섬의 국민 모두를 부유하게(한 때에 불과하지만) 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한 행복한 나라였던 것이다. 부러운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지 않는다. 지금의 나우루 공화국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긴 하지만, 인광석의 고갈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나우루 공화국의 지금 현실은 흔한 유토피아의 붕괴를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전의 국민 모두가 부유했던 그 시기가 절대 유토피아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제국주의와 근대 문명이 가져다 준 하나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문명과 기계를 인광석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물질적 부를 미끼로 준 것이다. 어쩌면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기 이전의 이 섬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토피아에 더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었을 때부터가 이 나우루 공화국의 비극의 시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기, 아니 지금의 대책 없는 현실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에서 우리가 얻어낼 것은, 자원의 고갈을 대비해야 한다거나, 아무리 부유해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거나, 나우루 공화국의 국민들이 너무 무식해서 그 좋은 걸 가지고도 나라를 망쳐버렸으니 어의가 없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 문명이 가져온 이 지구의 비극의 축소판으로 나우루 공화국을 읽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이 근대 문명 속의 ‘알바트로스’와 같은 시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있게 만은 읽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런 씁쓸함을 무엇으로 대신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집을 읽어볼까! 어쩜 앨버트로스의 외침을 엿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이제 좀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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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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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近代)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중세라는 시대는 그대로인데, 근대는 자꾸만 길어진다. 상대적 불합리. 近代라는 설정 자체가 이런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는 “지나간 지 얼마 안 되는 가까운 시대”를 말한다. 우리 역사 구분에서는 현대를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현대는 없다. 왜 그런가? 역사는 과거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는 단 1분 1초도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이 근대이다. 어디까지를 ‘가까운 시대’라고 할 것인가?

 

  따지자면 대단히 골치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근대’를 받아들인다. 역사 연구자들이 던져준 근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진짜 골치 아프다. 역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시간을 쪼개어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어쩌면 신의 능력을 소유해서나 가능할 수 있는 가공할 상상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고, 따라서 신적 능력의 발휘자(發揮者)들이 던져준 근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도리 밖에 없다.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아니 근대적 사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는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 애매모호한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서 앞서 말했던 역사의 시대 구분의 위대성을 따지는 것은 자칫 불경죄에 해당하는 신격모독일 수 있으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타협을 하고 간다. 아하 이 ‘근대’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저자 고미숙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 연암 박지원의 역작 ꡔ열하일기ꡕ를 새롭게 읽어낸 ꡔ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ꡕ에서였다. ꡔ열하일기ꡕ라는 그 방대한 고전을 이처럼 재미나게 읽어내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ꡔ열하일기ꡕ를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 냈던지, 어지간한 전공자나 완독할 법한 이 방대한 분량의 ꡔ열하일기ꡕ가 일약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게 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겠다.

 

  ꡔ나비와 전사ꡕ는 그런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아니 고미숙 선생의 읽기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역작이다. 여기서는 이 ‘근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싶다. 근대라는 거대한 산에 바위나 칠 법도 못한 계란을 던지는 형국이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반란은 반란이다. 어쩌면 ‘근대’는 하나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전의 시대와는 단절된 근대를 주장한다. 즉,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은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좀더 확실히 하자면, 시대의 단절은 불가능하므로, 근대가 아닌 근대적 사유가 이전의 사유와는 완연한 단절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근대적 사유라는 것, 근대성이라는 것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복시켜야만 할 탈근대적 사유,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반란, 혹은 혁명.

 

  근대는 왜 ‘리바이어던’인가?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9장까지를 이 근대의 모순들을 파헤치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시간’, ‘인간’, ‘性’, ‘몸’, ‘앎’이라는 큰 테제들을 가지고 여기서 잠복해 있는 근대적 사유의 ‘괴물성’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p.22.) ‘단 하나의 척도’는 바로 ‘돈’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괴물성은 바로 시간, 속도의 균질화, 혹은 화폐화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일컬어 “속도의 파시즘”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인정해야할 근대의 모순이다. 저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어떻게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동질화될 수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 근대의 속도는 우리를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지금까지는 이 책의 1장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시간, 속도의 불합리성 혹은 모순들을 다양한 예에서 찾아내고 있다. 재미있던 것 중의 하나는 이 근대적 시간화, 속도화의 상징인 ‘기차’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를 평범하게, 혹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다양한 소재에서 이 근대적 사유의 맹목성과 파시즘적 성격을 찾아내고 있다. 유쾌, 상쾌, 통쾌, 그리고 쓰라린 웃음!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예민한 주제이다. ‘인간’을 테제로 한 장에서 ‘종교’를 논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근대’에 대한 규정만큼, 아니 그 이상이나 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매장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종교’ 안에도 근대의 괴물성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겉으로 뚜렷이 인식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 혹은 전복.

 

  3장과 4장은 ‘性’이라는 주제에서 역시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을 탐색하고 있다. ‘변강쇠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근대의 전형적 괴물성을 유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뜨거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9장까지의 내용은 이 근대의 리바이어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소월과 만해, 그리고 허준까지도 등장하니 말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볍게 다루어야 한 책 안에서 많은 소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으면서도, 단점이 될 여지가 많다. 그것은 근대라는 이 거대한 괴물을 그렇게 가벼이 다루어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닌 기암절벽 거대 산치기가 아닐 수 없다.

 

  끝의 2장에서는 이런 근대성, 혹은 근대적 사유의 리바이어던을 전복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탈근대의 비전을 탐색한다. 그 비전은 연암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 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18세기 중세의 문인이 21세기를 넘어 탈근대를 추구하는 한 지식인에게 그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니! 오 놀라움! 그 놀라움으로 그 비전을 읽다보면, 에휴,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 거대한 괴물과 맞선 나비, 혹은 나비의 꿈.

 

  이 책 제목 “나비와 전사”에서 나비는 바로 박지원이다. 그럼 ‘전사’는? 다름 아닌 푸코이다. 이 책 각 장의 시작은 나비와 전사의 공통된 사유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절단과 채취를 통해! 그런데, 근대적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서는 정작 전사는 숨어버리고 나비만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라니! 이것은 어쩌면 저자가 근대에 대한 맞섬에서 살짝 꼬리를 내리는 기미로 보일 수도 있으려니와, 다정한 애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반란은 하되,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읽으면서, 나는 근대적 사유의 모순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에 가장 큰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그 거대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가벼운 터치는 다분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곧 이것은 약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그 깊이를 줄이고 있는 것은, 다분히 체계적이지 못한 서술이기 십상이다. 그만큼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체계라는 것 또한 근대적 사유에 다름 아닐 수 있기에 뭐라 딱부러지게 말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후의 보람은 크다. 저자 고미숙씨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탐구, 곧 근대에 대한 반란, 탈근대에 대한 비전 찾기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하지만 근대와 싸우는 나비만 있고 전사를 어디를 갔는지? 진정한 싸움은 전사의 등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나비와 단짝을 이룰 전사를 찾아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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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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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그저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며 때우는 것을 전부로 한다면, 그 삶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를 근근(僅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야 하루하루의 육체적 삶이 눈앞에 놓인 불똥과도 같겠지만, 그들에게 또한 이상(理想)이 있고,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소중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과 지루함, 그리고 고통들까지고 감수(甘受)하며 살아간다. 과연 우리가 의도하고 목적했던 바 그 목표를 완벽히 이루어 내는 사람이 많지 않다손 치더라도, 아니 그 가능성이 희박함을 여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인간들의 그것에 목숨을 건 인생의 승부를 건다. 과연 그것은 타당한가? 과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승부인가?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버리고 희생시킨 그 모든 것들의 가치를 그 목표가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인가?

 

  소설 ꡔ첨탑ꡕ은 본질적으로 이런 물음들을 끄집어낸다. 여기서의 그 목표란 ‘첨탑’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고, 그 첨탑에 대한 어쩌면 돈키호테적 무모함의 돌진으로 비추어지는 인생의 승부를 건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erald Golding은 우리 일반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작가이다. 나도 부끄러운 고백일지는 모르지만 골딩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윌리엄 골딩은 무엇보다 ꡔ파리 대왕ꡕ으로 유명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1983년)한 뛰어난 작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은 민망스러울 따름인 것이지, 이 소설을 읽는 데에는 크게 방해를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떤 편견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도 해야겠다. 과연 ‘첨탑’은 무엇일까를 좇아가면서 읽어낸 인간 본연에 내재한 문제의식들이 스스럼없이 솟구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 이전의 골딩이라는 작가를 내가 알지 못하였기에 오히려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및 강조 필자)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소설의 제목이 ‘첨탑’인 것에 윤동주 시인의 위에 인용한 시가 오버랩이 되면서, 과연 이 ‘첨탑’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매우 궁금해지면서 책장을 하나둘 조심스럽게 넘겼다. 읽고 난 후의 생각은 위의 시에 나오는 ‘첨탑’이, 이 소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첨탑’이라고 하는 상징적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재삼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요 지향점이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욕망이요, 목표이며, 타락하고 세속적인 세상과는 다른,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켜주는 하나의 이상적 공간이다. 이 ‘첨탑’에 도달하는 것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성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에의 도달에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수반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사실임과 동시에 비극이다. 비극이라 한 것은 그러한 희생을 완벽히 감당해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평범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첨탑’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소설 ꡔ첨탑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 조슬린에게 있어 ‘첨탑’ 건설은 하나의 이상이며, 지향점이고, 도달해야만 하는 사명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대단히 복잡한 상징체계를 결합시켜 ꡔ파리 대왕ꡕ 이래 작가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주제 의식을 제시하는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다.”(역자 후기, 「윌리엄 골딩의 소설 세계와 ꡔ첨탑ꡕ의 의미」, 282쪽) “영국의 중세를 시대 배경으로 주인공 조슬린이 대성당에 첨탑을 건설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내용 속에 작가 골딩은 심층적 내면을 서술해 내면서, 다양한 상징적 구조물들을 곳곳에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단순한 내용을 전혀 단순하게 읽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구조화시켜 놓고 있다. 이것이 작가 골딩의 위대성이라 한다면 누구나 인정 가능한 위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작가적 역량의 위대성 때문에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재독’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여러 비평가들의 이구동성(異口同聲)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독(一讀)이건 재독이건 간에 이 소설을 통해 상징적 표현들을 술술이 풀어내고, 이 안에 담긴 작가의 암호와 전략들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것에 이 소설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는 하나의 읽기 방법일 터이지만, 그 상징적, 암호적 서술방식을 넘어서, 혹은 그 이전에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우리 내면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근본적 주제의식이며 작가 골딩이 우리에게 내어놓은 소설 ꡔ첨탑ꡕ의 뛰어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첨탑’이라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도달에의 지향은 “꽃처럼 피어나는 피”같은 희생을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희생은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가 골딩은 그것은 단순한 비극으로 마무리 짓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

 

  과연 이상에의 추구를 통해 가져와 그 희생들을 감내해내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작가의 물음이 곧 이 소설의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작가는 조슬린의 ‘첨탑’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피해를 주면서까지 건설해내고 만 조슬린의 돈키호테적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 희생된 제물들의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또한 여운으로, 혹은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로 울려나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소설의 재독을 권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골딩이라는 작가의 물음에 이제는 답을 찾아보시라는 소리가 아닐까한다. 이제 재독을 남겨진 책임으로 하고, 답을 찾기 이전에 나라는 인생의 ‘첨탑’은 무엇이며,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조슬린이었던 적은 없는 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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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美국방부 "北은 WMD 추구 잠재적 적대국"(종합)
출처: 연합뉴스 2006.02.04 08:41

 
  美國. 아름다운 나라. 박노자 교수가 노르웨이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학생들에게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를 미국이라 부르고,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그랬더니,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지않더란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라는 얘기겠는데, 언뜻 생각해봐도 노르웨이 대학생들의 반응이 그리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결코 아름다운 나라는 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 국방부가 북한을 '잠재적 적대국'이라 칭한 것은 새삼 놀랄일은 아니다. 그들은 항상 표현을 달리 했을 뿐 북한을 언제나 그들의 적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악의 축'과 '잠재적 적대국'이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나라 국방부에는 '주적'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의 '주요한 적'이라는 뜻인데, 다름아닌 북한을 가리킨다. 북한은 우리가 두 손을 잡고 통일을 이루어야 할 한 민족임과 동시에, 우리나라 60만 대군이 총뿌리를 겨누고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되는 중대한 적이라는 얘기인데, 가슴 아픈 노릇이다. 어쨌거나 북한은 미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적으로서 존재한다.
 
  미국이 북한을 잠재적 적대국이라 칭한 이유는, 그들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보유하려하고 있고, 그러한 대량살상무기를 직접적으로 미국에 대항하여 사용할지도 모르며, 테러단체와 연계하여 9.11 참사와 같은 위험을 발생시킬 대단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잠재적'이라는 수식을 붙인 것인데, 이 말이 소용없는 것이, '잠재적'으로 적이 아닌 나라가 없을 것이며, 언제나 북한은 미국에 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악의 축'이라는 표현또한 이 '잠재적 적대국'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논리에 따른다면, 즉 대량살상무기의 보유 및 보유가능성을 가지고 잠재적 적대국을 가려낸다면, 전세계에 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무기판매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나라가 어디인가를 생각볼 때, 미국은 전세계 모든 나라의 잠재적(혹은 직접적) 적대국이 되고도 남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나라가(미국을 제외한) 미국을 잠재적 적대국으로 선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미국이 우리나라의 적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미국이 북한을 적으로 규정했다고 해서,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나라가 북한을 주적으로 보아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 슬플따름이다. 또한 여기서 미국의 그러한 처사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서두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노르웨이 학생들과 같은 미국에 대한 보다 비판적 시각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미국이 과연 美國인가? 이런 의문하나 가져보기 바라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부국에서 주도하고 있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 물결 가운데 놓여있는 우리의 현실,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우리는 이 신자유주의의 체제로 급속히 편입하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 없이 미국의 세계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미국의 신개념 식민지화에 불과하다.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식민지.
 
  이 식민지화는 이전의 그것보다 더욱 잔인하다. 이라크를 보라. 아프간을 보라. 대량살상무기를 그들은 뿌려대고 있다. 이란이 어느 하늘 아래 이 미국과 같이 대량살상무기를 뿌려댄 적이 있는가? 또한 북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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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천자문을 읽는다.

천자문에 대해 세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선입견은 어느 정도 타당하면서도 부당한 것이 있는 듯 하다.

우선, 부당한 오해를 들면, 천자문은 아이들 책이라는 선입견이다.

천자문이 과연 아이들이 학습하기에 적당한가? 한문이 그 사회의 필수요소였던 옛 조선시대의 양반의 자제들에게는 그러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결코 쉬운 관문이 아니었다. 요즘의 우리 어린이들이 익히기에는 매우 철학적이며 사상적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천자문이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크게 무리다. 천자문이라고 해서 1000자의 한자를 익히면 된다는 간단한 생각으로는 천자문을 배운다고 할 수 없다. 옛 선인들이 천자문을 익힐 때에는 늘상, 눈으로 읽고, 입으로는 읊으면서, 귀로는 그 읊는 소리는 듣고, 머리로는 그 뜻을 새기었다. 그렇게 몇 날 몇 달을 읊고 또 읊으면서, 천자문에 담긴 철학적 세계를 되새긴 끝에 한 권의 천자문을 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천자문은 그리 만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두번째 오해는 천자문이 중화사상의 핵심적 요약집에 불과하며, 편협한 사대주의의 강조와 낡은 유교사상의 전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오해만은 아니다. 그러한 측면이 없지 않은데, 천자문 자체가 중화주의와 유교주의의 강한 이데올로기적 유물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쳐, 천자문을 용도폐기 시킬 이유는 없다. 아니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현대인들에게 천자문은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이 가능하고, 그 안에 담긴 하늘과 땅과 자연과 사람의 이치와 철학적 사유를 우리 시대에 맞게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것은 이 <천자문 읽기>의 하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천자문 읽기>를 시작한다. 천자문 텍스트와 해설집들이 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여기서는 다음의 두 권을 참고하기로 한다.

 <김성동 천자문>

얼마전 많은 인기를 얻은 책이다. 보급판도 함께 나와 있고, 천자문 쓰기 책도 나와 있다. 여기에서는 김성동의 천자문에 대한 해설이 잘 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책의 본문 해석과 해설을 대부분 참고하기로 한다.

 

 <욕망하는 천자문>

천자문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해석과 풀이가 돋보인다. 천자문의 글자 한 자 한 자에 담긴 상형적, 형성적 원리와 거기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자세히 풀어 놓고 있으면, 현대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지를 탐구하고 있는 역작이다. 여기서는 천자문에 대한 다양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을 선별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천자문 읽기>는 다음과 같은 체제로 진행한다.

1. 천자문 원문과 해석 제시(김성동 천자문 주로 참조)

2. 각 한자별 음과 뜻을 알아본다.

3. 기존의 천자문에 대한 해석과 관련 내용들을 알아본다.

4. 현대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러한 작업이 천자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 가치의 입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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