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놓고도 아직 그 온전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뛰어난 시인이다. 월북한 시인들이나 이북의 시인들이 해금되면서는 누구보다 정지용이 가장 크게 조명되었다. 하지만 백석은 근래에 들어 그 연구가 전개되고 있으나, 아직도 백석의 시적 가치를 온전히 밝혀내기에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백석의 시중에서 <여승>이라던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를 교과서에서 배워 알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온전히 백석의 시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여승>에서 보이는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 시적 경향이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의 시적 자아의 고독의 편지와 같은 경향은 백석의 많은 절창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백석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일순위로 꼽히는 김소월과 같은 지역 출신이며, 김소월을 잇는, 그러면서도 가일층 변화된 발전을 보여주는 우리 시사의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왜 이런 평가를 단정하여 그에게 부여하는가?

    멧새 소리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위의 시를 나는 백석의 절창 중의 으뜸으로 꼽는다. 왜 그런가? 제목에 보이는 '멧새'는 시행 어디를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멧새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도 않다. 제목을 빼고 보면 이 시는 영락없는 명태타령이다. 시 제목을 명태라고 한들 이 시가 어디에 내 놓아도 기죽지 않음이 분명하다. 얼핏 제목을 잘못 지은 것만 같지만, 우리는 이 시를 더욱 뜻깊게 읽기 위해서는 행간 사이 사이 숨어있는 시인 백석의 위대성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제목이 '멧새 소리'다. 처음 읽을 때는 들을 수 없던 그 소리가, 두 번, 아니 세 번째 읽을 때는 강원도 어느 바닷가 해변에 길게 널린 명태 사이 사이에 손가락 만한 멧새 한 마리가 숨어 날아다니며 울음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소리의 음향을 상상하며 이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면, 곧 왜 제목이 명태가 아니고 멧새 소리인가를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명태는 시적 화자 '나'와 동일시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겠다. 즉 '나'는 추운 겨울 바닷 바람 싸늘히 불어오는 해변가에 '파리'하게 널린 '명태'인 것이다. 그 사이에 시인은 한 편 대조적이면서도, 가일층 쓸쓸하게 하는 음향을 첨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과연 멧새 소리는 이 시의 의미를 최고조로 강화시키는 훌륭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석의 위대함이다. 김소월의 운율적 감각에 못지 않는 리듬이 있다. 우리 옛 이야기가 녹아나는 전통과 애환 또한 그의 시에 담아낸다. 그러면서도 시가 한 개인의 고뇌의 산물임을 또한 드러내고 있다. 우리시의 근대성, 혹은 현대성을 또한 찾는다면, 그의 시는 훌륭한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이런 백석의 시집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살아 생전 내놓은 것은 단 한 권의 시집 뿐이다. 바로 <<사슴>>이라는 시집이다. 아직도 그는 우리에게 청년 백석으로 기억된다. 그는 우리에게 어쩌면 목이 길어 슬픈 '사슴'이었던 거싱 아닐까? 백석의 위대함이 진정으로 조명되고 우리에게 기억되기를 나는 바란다.

 

 

  참고로 백석의 시 전집을 몇 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중에 나는 가운데, 이동순 선생이 편한 <<백석시전집>>을 추천한다. 부록으로 산문을 포함하고, 더욱 좋은 것은 백석의 시어들을 친절히 풀어놓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백석의 생애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책은 이미지가 없지만, 건국대출판부에서 문학의 이해와 감상 시리즈로 출간한 백석에 대한 해설서다. 간단히, 하지만 충실히 백석의 생애를 중심으로 백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두번째 책은 백석의 애인 자야여사가 백석을 회고하며 쓴 책이다. 그리고 최근에 <<백석 시 바로 읽기>>라는 책이 나왔는데, 얼마나 바로 읽었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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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와 연우 2006-06-1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백석시전집...그의 시도 좋지만 편한이 이름도 반갑고..

멜기세덱 2006-06-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이란 이름은 참 멋진 이름이에요! 그 이름이 반가우실 정도이면...

김희중 2015-01-21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생각이 나서 <멧새 소리>를 검색하던 중 닉네임이 낯익어 유심히 다시 보니 역시 형이었네요. 전에 세미나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 명태처럼 삽니다. ㅜ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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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15쪽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17쪽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건설에 봉사한 것이다.-18쪽

"오리엔탈리즘은,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19세기초까지는 실제로 오직 인도와 성서관련국만을 의미한 동양 사이에서 경험된 특수한 근접관계 closeness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역학은 모두 서양(영국, 프랑스, 미국)의 동양에 대한 우월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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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와 오늘 이 책의 서문(pp.11-63)을 읽는 데 그쳤다.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을 언제 다 읽어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다.

 

   그 희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지름신 덕분이었다.

   지름신은 나에게 이 책을 과감히 장바구니에 담게 했고, 그대로 결제를 했더니 지금 나의 독서대 위에 자랑스럽게 놓여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나는 고민해야 했다.

  우선은 한번 쭉 읽어내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의 무게만큼이나 한 권을 대충 일독하는 데도, 많은 시일이 걸리 것만 같았다. 그것은 곧, 다시 한 번 읽어내기에는 커다란 인내, 또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난, 이 책을 꼼꼼히 읽기 방식을 택하여 읽기로 했다. 형광펜을 준비하고, 각주 및 후주까지 "꼼꼼히"읽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서문을 읽은 것이 이틀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읽더라도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서문을 읽는데 그쳤지만, 나는 앞으로 이 책을 더욱 꼼꼼히 읽어가기 위해, 몇몇의 귀중한 글귀들을 적어 남기고 싶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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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9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6-06-09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습니다. 간혹 이런 저런 책들(그나마 읽어내기 어렵지 않은 여러 해설서들이지요.)을 읽다보면,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이 눈에 띄면 항상 나중에 꼭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됩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마르크스가 그러하고, 푸코가 그러하고,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와 가타리 등이 그러합니다. 참 몇 년을 미루어 왔는지 모릅니다. 지름신이 강림하여 사놓은 책도 서가에 그냥 꽂아놓고는 몇 년을 삭혔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도 저의 그러한 목록에 있습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란 책이 제 서가 어딘가에서 지금 썩고 있지요. ㅎㅎ
 

  내 독서생활에서 큰 목표 중의 하나가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내는 것이다. 어떤 전집이 좋을까하고 고르던 중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이 제일 나은 것 같아 세계문학전집 읽기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현재까지(2006년 5월 29일 월요일 01:26분) 15권을 읽고 16권째 읽는 중이다.

  참 느릿느릿이다. 이렇게 읽다가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민음사판의 세계문학전집 권수를 따라가기가 어려울 것 갔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이니, 끝까지 해볼 작정이다. 몇 년이 걸릴지 그것도 참 궁금하긴 하다.

  지금까지 읽어온 세계문학전집을 정리해 보고싶어졌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이 책이다.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제 4권이다. 예전부터 카프카를 읽어보려고 했으나 미루던 차에 이 책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골라잡았다. 읽고 싶은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이 책은 카프카의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카프카의 대표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카프카의 많은 단편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또한 남는다. 이것이 내게 남겨진 과제다. 이렇게 세계문학전집을 읽어내는 것은 나에게 주어질 많은 과제들을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번째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하루아침에 읽어버렸다. 서평으로도 남겼는데,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읽어가면서 읽은 책들을 서평으로 남겨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었지만, 지금은 접은 지 오래다.

 

 

 

  세번째는 샤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 책이 세계문학전집에 속해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샤르트르의 문학에 대한 견해내지 주장등을 닮은 책이지, 넓은 의미의 문학의 개념으로 생각해 봐도 이 책은 문학이라 이름하기엔 어려울 성 싶다. 어려운 책이다. 일단은 완독했다는 보람은 있지만, 재독 삼독 해야할 책이긴 하다. 앞으로 문학 운운할 사람으로서 이 책은 기본 소양이어야 하는 바, 남은 과제로는 이 책을 완파해 내는 것으로 한다.

 

 

  네번째

  <<한국단편문학선 1>>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해 많이 아쉬운 책이다. 아마도 민음사의 상업전략이 농후하게 담겨있는 책이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 근대문학의 거인들의 작품들을 한 데 모아놓은 책이라, 나름대로의 의의는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내게 남겨진 과제는 한국문학을 또한 독파해 내는 것이리라.

 

 

  <<한국단편문학선 1>>에 이어서 <<한국단편문학선 2>>을 읽었다.

  <<한국단편문학선 1>>이 1930년대의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것에 이어 이 책은 1950~60년대 전후세대의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어쩌면 이 책이 좀더 신선한 듯 하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다. 특히 <암사지도>의 경우 무진장 공감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여섯번째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이다. 읽어나가는 데에 다소간의 지리함이 있긴 했지만, 남는 것은 나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나의 그 '핵심'을 발견하는데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으니, 재독이거나 혹은 我讀이거나!

 

 

 

  이어지는 나의 세계문학전집 읽기는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제11, 12 두 권으로 된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이다. 

  이 두 권의 책, 아니 이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는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필립'이라는 주인공은 '나'였고, 또한 '우리' 개개인이었다. '필립'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장애는 우리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떤 컴플렉스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해가는 것처럼도 보이고, 거기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설의 주인공 '필립'이 겪었던 어떤 면에서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우리에게 굴레지어진 보편적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할 것이 많은 그런 소설로 기억되고 오래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아홉번째가 되는데,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제18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다. 발자크라는 이름은 꽤나 유명하다. 그 유명세 덕이었는지, 아니면 유명세 탓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저그랬다고나 할까. 아니면, <<인간의 굴레에서>>의 감동이 너무 크게 남아있어서 였을까? 이것도 재독이어야만 하는가?

 

 

  이제 열번째다. 

  아니 열번째와 열한번째다. 왜냐하면 다소 무리가 있을법은 하지만 한권으로 엮어도 될 성 싶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를 2권으로 쪼개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이 한 권도 늘어났으니 감사해야 하나? 재밌으라고 한 소리다. 괴테는 문학한다는 사람들이 한번은 아니 그 이상 거쳐가야할 관문이라고 생각된다. 괴테의 작품들이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는 가장 먼저는 <<파우스트>>였고, 가장 나중도 이 <<파우스트>>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왜? 이 책 <<파우스트>>는 그의 처음이자 나중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 전반에서 끓어올린 대작이니까!

  열 두번째로 가자. <<파우스트>>를 읽고는 조금 뜸을 들였다. 약간은 지루한 감이 없지않다. 조금 휴식을 가졌다고나 할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읽기를 조금 보류하고 다른 책들을 읽어갔다. 참고로 알라딘 서평단에 뽑혀 서평을 쓰느라 그랬기도 했다. 하여간 다시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읽기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제1권과 2권으로 엮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다>>

  내가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시작하면서 왜 1권부터가 아닌지는 앞서 이야기 했지만, 어쩌면 첫 권이 그리스로마 신화여서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그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고, 그래서 대강대강 이상으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작가 이윤기가 크게 인기를 모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도 2권까지나 읽다만 경력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1권을 빨리 읽어야만 했다. 그것은 이 책의 역자 후기에서도 역자가 밝힌바와 같이 세계문학, 특히 유럽의 문학의 근간에는, 아니 그 문화의 전반에는 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각인되어 있기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해하는데는 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알지 못하고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미루어 두었던, 민음사가 제1권으로 내세운, 나에게도 제1권이었어야만 한 이 책을 열 두번째이지만은 새로운 시작은 첫번째로 장식했던 것일터. 관심이 있었던 만큼, 그리고 어느정도 아는 얘기였던 만큼, 재밌고 빠르고 좀더 확실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게되는 좋은 시간이었다.

  열 네번째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였다.

  수용소와 관련된 책중에서 나는 전에, 빅터 프랭클의 자서전적 심리연구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연구서라고 하기엔 전반부에는 수기와도 같이 감동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아니 수기라고 하고 싶다. 이 책은 인기가 많아서였는지 디자인 등이 새로워져 계속 출간되고 있다. 내가 읽은 책은 맨 우편의 가장 촌스러워 보이는 책이다. 언제고 한 번은 소개하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그냥 이참에 해보는 것이다. 이정도로만 하고 제대로 된 소개는 조만간 서평으로 하기로 하자. 그러려고 한 번은 더 봐야하는데! 이런! 아무튼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감동, 혹은 쓰라림을 새롭게 불러일으킨 소설이었다. '수용소'라는 비인간적 세계, 혹은 현실(구소련)의 축소판으로써, 어떻게 인간을 무력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사실적,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소설이다. 읽기에 어렵지 않으나, 다소간의 지루감을 참는다면 읽어내는데 큰 무리는 없다.

  열 다섯번째는 현재진행형이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현재 중간정도 읽고 있는 책이다. 요즘 일이 좀 생겨서 중단까지는 아니지만 도통 진도를 못내고 있다. 그렇다고 어려운 책은 아니니 걱정 마시길. 골딩의 소설은 우연찮게도 알라딘 서평단 모집에 걸려 받게된 <<첨탑>>이 처음이었다. 잊어먹고 있다가(나는 사실 이 책을 받아놓고도 왜 이 책이 나에게 왔나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왠걸 내가 서평단 신청을 해놓고도 잊고 있다가 서평 올리기로 한 몇 일 전에야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읽어대고 엉터리 서평을 써버린 것이다. 여기서 관계자 분들께 심히 죄송하다는 말 금치 못한다.) 읽게 된 것이다. 다소간의 무리가 있어서 이것도 재독으로 숙제를 남겨두었고,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파리대왕>>은 아직까지는 쉽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남는가 일 터, 다 읽고 그 남는 걸 찾으면, 그 때 또 이야기하자.

  아직 끝이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순서는 하나씩 뒤로 밀려야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내게 이 책

  <<이솝우화집>>이 있었기때문이다. 이 책은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 읽기와는 전혀 무관한 인연이다. 내가 대학시절(그래봐야 몇 년 안되었다.) 과제를 맡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언문학에 관련된 것이었다. 참고차 이 책을 읽었던 것인데, 사실 대충대충 읽었던 것이고, 또 대충대충 읽어야 할 책이었다. 그래서 넣기도 그렇고 빼기도 그래서 일단은 번외로 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현재 나의 세계문학읽기를 정리해 보았다. 참 갈길은 아직 멀다. 이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한꺼번에 구입하기에는 이래저래 불가능한바 한 번에 몇권씩 사서 보는 중인데, 현재 사두고 있는 것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다. 두 권 다 기대가 크다. 그래서인지 <<파리대왕>>을 빨리 끝내야 겠다. 끝내야겠다, 끝내야겠다 하다보면 이놈의 나라는 사람은 못 끝내고야마는 성격이라, 참 걱정이 크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책도 끝내고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도 끝나리라. 근데, 민음사에서는 언제까지 이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해 낼 것인지 참 궁금도 하다.

 

  나의 세계문학읽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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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이글턴과 '이론 이후'

재작년 5월에 띄운 모스크바 통신문 가운데 '이론 이후에 무엇인 오는가?'라는 게 있었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우편으로 받은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3월호)를 읽다가 해외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를 적은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텍스트>에서 ‘직업상’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해외서평란에 연재된 것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맑시스트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신작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256쪽)에 대한 매튜 프라이스란 사람의 서평이 번역/소개돼 있었다(*이글턴의 책은 번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제목은 ‘자기비판(The Self Critic)’이고, 부제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이 문학이론을 폐기하길 바라고 있다”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평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문학이론입문>(1983)의 이글턴이다. 이 책은 국내에 2종(창비, 1986/ 인간사랑, 2001)이 번역돼 있고, 내가 알기엔 원저도 최소한 2판 이상을 찍었다(나는 원저의 2판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건 창비에서 나온 <문학이론입문>인데,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인 학부 1학년 때 공대에 다니던 동창생의 하숙방에서였다. 물론 서점에서도 이 책을 봤지만, 비로소 이 책을 ‘알아’보고 흥미를 갖게 된 게 그때였던 것인데, 공대생도 읽는 문학이론서를 인문대생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묘한 경쟁/분발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 책을 최소한 서너 번은 읽었는데,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문학학회’의 이론 교재로서도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소개돼 있는 문학이론입문서는 이글턴의 것 말고도, 레이먼 셀던의 책이나 입슈/포케마의 책 등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개성이 강하면서도 권장할 만한 것은 이글턴의 책이다(셀던의 책도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고 많이 읽히지만, ‘교과서’적이어서 개성이 떨어진다). 약간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문학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인용하는 문학이론서로는 1위가 르네 웰렉과 펜 워렌의 <문학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2위가 미셸 제라파의 <소설의 사회사>였다). 요즘은 누가 웰렉/워렌을 읽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적절한 시기’에 <문학의 이론>을 대체했다.

그런데, 제목과는 다르게,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문학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공박하는 책이었다. 결론도 ‘정치적 비평’이 아니었나? 앞의 서평 부제는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로 이글턴을 지칭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이글턴은 그러한 ‘이론’의 정치성을 폭로하면서, 이론의 과학성/객관성이라는 ‘허상’을 예리하고 비판하는 ‘반골적인’ 이글턴이다(그의 재치있고 신랄한 문체는 사르트르에 견줄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문학이론입문> 시절부터 이글턴의 문제의식 속에 ‘이론 이후’가 함축돼 있었던 것인데, 신간은 웬 ‘뒷북’인가 싶기도 하다. “이론의 황금기가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다”고?

 

 

 



현재 맨체스터대학의 ‘문화이론’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이글턴은 신간에서 이론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진단/고발한다, 고 한다. 예컨대, “학계라는 거친 바닷가에서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혹적인 프렌치키스에 대한 관심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일부 문화연구 서클에서는 자위행위의 정치가 중동의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이글턴은 이것을 ‘정치적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론이 언제나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듯 이론(특별히 ‘포스트모던 이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이론은 ‘문턱’이지만, 비평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해방’ 혹은 ‘진리’는 이론 속에서 구해질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새로운 주장인가? 이글턴이 언제 이론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론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러한 입장이 과연 이글턴에게서 ‘변화된’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방점의 이동은 있을지언정(이론은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도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론관’이다), <이론 이후>에서 제기하고 있는 건 이미 20년전 <문학이론입문>에서도 충분히 암시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이 정말로 달라졌으며, 나는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었다. (2)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평자(혹은 어쩌면 이글턴 자신이)가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신간을 읽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글턴은 문학이론을 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폐기하길 바랄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이론의 오용/남용과 오염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오용/오염이 제거될 수 없는 거라면, 물론 이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후의 이론’, ‘이론 이후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글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이론이라는 ‘문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론은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이다). 비유컨대, 우리는 ‘언어’에 구속돼 있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어 ‘이전’이 아닌 ‘이후’에 얻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 또한 우리의 비천한 삶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밝혀두자면, 상당한 식견과 적절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이 해외서평을 번역하고 주를 단 역자에게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좋은 번역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글턴의 이 신간이 번역된다면, 그 적임자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궁금한 건, 역자의 주8)에서 이글턴의 ‘포스트모던 사상’을 공박하고 로티와 함께 지목하다는 스탠리 피쉬의 대표작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1980)가 <이런 기준의 텍스트는 있는 것인가?>로 번역된 점이다. 'Class'란 말이 여기서 중의적이긴 하지만, 보통은 ‘수업’이나 ‘교실’로 옮기기 때문인데,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Class'를 ‘기준’으로 옮긴 것은 특이해 보인다. 참고로, 피쉬의 이 책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 중에는 'Is There a Fish in This Text?'란 것도 있다...

06.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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