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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황석영을 읽는다는 것 

 

  얼마 전 황석영은 <무릎팍 도사>란 프로그램에 출현한 적이 있다. 그가 나왔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해 보았다(정확히 이 행위가 불법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낮은 가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았다). 60을 훌쩍 넘긴 나이의 황석영은 한국 문단의 원로답지 않게 젊은이 못지않은 패기와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이전에 출현했던 이외수와는 격이 한층 높았다고 생각된다. 이외수와 황석영을 놓고 격 자체를 따지는 것은 나에게 있어 좀 어색하긴 하다. 같은 기준을 놓고 그 격을 따져야 하지만, 기인 이외수와 소설가 황석영이란 두 대상을 가르는 기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황석영이 <무릎팍 도사>에 출현한 것 자체로 내게는 다소 흥미롭고 관심 가는 일이었고, 그 흥미와 관심을 여하히 채울 수 있어서 기뻤다. 

  다 늙어서 애들처럼 왜 이런 프로그램에 출현했을까 황석영의 주변 여럿이 의아해하고 걱정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문단의 원로가 망신이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노파심이었겠지만, 또 하나의 이외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노심초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외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무래도 황석영과는 많이 다른 영역에서 기인 소설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에 영화 개봉이나 신작 드라마 출현, 가수의 경우 새 앨범 발매 즈음에 불이 낳게 출현하는 경우가 간혹 비판받아 왔다. 사실 좀 과한 감이 없지 않은 게, 연예가 소식을 전하는 프로그램이면 그럴 만도 하겠다 하는 것이겠으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출현해 지겹고, 자기 새 작품 홍보에 열을 내는 것 같은 모습이 조금 구역질나기도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과한 것이 문제이지, 어느 정도는 유용한 정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의 이 프로그램 출현은 고무적이라고 하겠다(이외수의 경우도 그러한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뜩이나 책 안 읽는 세상에서, 특히나 더 소외되고 있는 문학(소설, 시 등)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라도 많은 시인, 소설가들이 이런 대중적 프로그램에 출현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황석영의 <무릎팍 도사> 출현을 계기로 그의 신작 소설의 매출이 많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석영이란 이름만으로도 불황을 밥 먹듯 하는 출판사에게는 한줄기 빛이었고, 매출로 확실히 보상했겠지만, 좀 더 득을 보는 것을 마다할 것은 전혀 못 된다. 여러모로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지만, 특히나 나를 비롯한 황석영에 대해 관심가지고 있는 유력한 독자들이라면, 황석영의 이러한 일탈(그는 사실 일탈을 밥 먹듯 했지만)은 다분히 흥분되는 일이기도 하다. 황석영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백한 고민(지식인처럼 보이고 싶다고?)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그가 풀어낸 그의 살아온 인생역정은 자못 박진감 넘치고 우리를 열나게 하고, 울고 웃기는 것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무릎팍 도사>에서 황석영이란 소설가를 멋들어지게 읽었다고 하면 이상한 것일까? 1943년(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 몰라 하는 말이지만,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대한독립 만세의 날 1945년 8월 15일보다 2년이나 이른 시기다)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나 업둥이시절 독립을 맞고, 이어지는 전쟁, 고등학교 자퇴(혹은 중퇴?), 이런저런 방랑 혹은 방황, 소설가로서의 삶, 어머니에 대한 못난 아들의 사랑, 험난한 일탈 혹은 도전, 베트남 전쟁 참전, 북한 방문, 그야말로 역사의 곡절을 온몸으로 꺾고 꺾이어온 파란만장한 황석영이란 인간의 역사를 읽(듣)는 것은 참 값진 것이었다(그 점에서 약간의 다운로드 비용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남는 장사였던 것이 그 자체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4부작 중 절반에는 해당할 스펙터클 드라마틱 이야기들을 짧은 시간에 읽(들)었으니, 남기도 어지간히 남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신작은 미뤄오던 차에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프로그램 중에서도 간간히 그의 신작 이야기들을 내비치고, 거기에 담긴 자신의 삶의 역정도 풀어놓았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한번 읽어나 봐야겠군, 하는 생각을 더 가지게 한 듯하다. 사놓고는 시간을 조금 보내고, 엊그제야 하룻밤에 읽어내었던 것이다. 하룻밤에 읽었다는 것은 <무릎팍 도사>를 열 번 이상 볼 수 있는 시간이지만, 그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고 해두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원론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때론 그 허구적 삶에 울기도 하고, 공감도 해가면서, 한번쯤은 그러한 낭만적 삶을 꿈꾸기도 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모자란 경험들을 한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소설을 자주 즐기지는 못하지만, 애써 지루하게도 몇 편, 몇 권의 소설을 그래도 열심히 읽어내는 것은 소설이 주는 그러한 효용들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소설이 주는 효용”이라고 했지만, 무슨 교훈적 측면으로서의 효용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무협지를 읽어가듯이, 그렇게라도 시간 때우기 위해 읽을 때도 있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특징으로 첫째로 손꼽히는 것이 ‘허구성’이라는 것인데, 중고등학교에서는 이것을 무슨 공식이라도 되는 듯이 소설하면, ‘허구성’이란 단어가 이구동생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교육을 시켜서 첫째 손가락에 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가급적이면 이 허구라는 말을 소설이란 분야에서 제일 끝자리에나 앉히고 싶다. 왜냐하면, 문학이라는 것은 대체로 허구이기때문이고, 또한 모두가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수필과 경계 짓는 곳에 허구를 놓지만, 수필의 어느 곳에는 허구덩어리가 있지 않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소설 어느 곳에 허구 아닌 것이 있으리라고 나는 보장하지 못한다. 둘째손가락부터 꼽히는 소설의 다른 특징들로, 서사성, 개연성, 진실성, 갈등, 사건, 플롯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들을 다 합치면 소설이 된다고 말하기에도 좀 망설여진다. 그러니 그런 것들이라고는 우리 따지지 않는 것도 좋으리라. 서사, 곧 이야기라는 것은 소설 아닌 다른 것에도 존재하지만, 그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온전히 전하는 장르가 소설일 뿐이라고 말하면 잘못일까? 아닐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이야기를 듣(읽)는 것이면 족하리라고 본다. 이야기를 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듣다가, 잠에 들면 꿈속에서 재현하고 재창조해내는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한 장이라도 넘기는 것이 지겹도록 무거운 것이 있고, 그렇지만 그래도 그 무거운 것을 소중히 온 힘을 다해 넘겨 읽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로서의 소설도 있다. 또는 수십 장이 후루룩 넘어가면서도 허한 것도 있을 것이고, 푸근한 것도 있을 것이고, 재미난 것도 있을 것이며, 막막하기도, 아리기도, 씁쓸하기도, 하여간 다양할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은 소설이란, 잘 읽히면서 재미난, 그러면서도 무언가 찡하게 남는 그런 것이다. 이것이 좋은 소설을 가리는 보편적 기준은 아닌 것이, 또 다른 내 기준에서는 내가 읽지 않은 어떤 소설에 대해, 혹은 아주 힘겹게 읽어낸 어떤 소설에 대해, 나는 이 소설 좋은 소설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석영의 소설을 놓고 보자면, 어느 정도 전자에 해당된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재미있고, 어느 정도 가슴 울리는 무엇이 있는 소설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높은 것일 터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내가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니, 그의 소설 전반에 대한 나의 평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 중단편들 몇 편(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해 「삼포 가는 길」, 「객지」 등)을 읽었을 뿐이고, 그의 장편들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중단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절 그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 못 하였다고 어느 곳에서 고백한 바 있어, 씁쓸할 뿐이다. 요전에 그의 소설은 읽은 기억은 『바리데기』 뿐이고, 그러니까 그의 최근작인 2편의 장편소설을 읽었을 뿐이다. 문단의 평이 여러모로 갈리는 가운데, 그의 최근작에 대해 나는 확실히 다른 면을 발견한 듯하다.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최근작은 이전의 것들과는 분명 다른 데가 있었다. 우선 호흡이 가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읽히고 빨리 넘어가며, 잔잔히 흥미로운 데가 있어 좋았다. 

  내가 앞서 좋은 소설을 가리는 내 기준을 밝혔는데, 그에 따르면, 황석영의 최근작은 분명 전자, 그러니까 잘 읽히면서 재미있고, 무언가 남는 그런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바리데기』에서 2% 이상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에 대하여는 다른 리뷰에서 밝힌바 있어 재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의 최근 소설 경향을 내 나름대로 판단했을 경우, 이번의 작품도 그 경향을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내 기준으로서 좋은 소설에 해당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리기 별』을 읽는다는 것 

  ‘신비평’이라는 근대적 비평의 조류를 세운 I. A. 리처즈는 1929년에 『실제비평』이란 뛰어난 업적을 토해놓는다. 이 책은 “사 년 동안의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읽기이론과 이론의 적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리처즈는 저자를 밝히지 않고 시를 캠브리지 대학의 약 60명의 대학생들에게 나누어준 뒤 일 주일 후에 시를 읽은 횟수를 기입하고 시감상을 써오라는 과제물을 매번 제시”하는 실험(?)의 결과를 정리했다. 여기에 그의 장차 ‘신비평’이라고 불리는 이론이 실제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학생들의 감상 결과는 많이 달라졌다. 결국 이 실험을 통해 리처즈는 ‘신비평’의 다른 이름이랄 수 있는 내재적 비평이 중요함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리처즈의 신비평은 후대에 와서 비판 혹은 부정되지만, 현대 비평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문학 비평 이론사를 떠벌일 능력이 못 되어 절미하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가를 말하자면, 이런 가정을 제시해보기 위해서다. 황석영의 최근 소설에서 “저자 황석영”을 거세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황석영’이란 이름을 거세했을 때 지금보다는 저평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개밥바리기 별』은 어떨까? 

  황석영이 스스로 밝혔듯이(방송에 나와서까지) 자전적 소설에서 이 ‘자전’을 거세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자전적’을 거세했다고 해도 ‘소설’은 남는다. 그러니까 ‘황석영’이라는 ‘자전적’을 거세하고 『개밥바리기 별』이라는 소설만을 볼 때, 이 소설은 어떻게 평가될까?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 볼 때, 우선, 나는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읽었다고 보고 말하자면, 사실 조금 아닌 데가 있다. 

  『개밥바리기 별』에서는 ‘준’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친구들(‘영길, 인호, 상진, 정수, 선이, 미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칭 ‘성장소설’이다. ‘준’의 “베트남 파견이 결정”되고 며칠간의 휴가를 틈타 예전 여자 친구를 찾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런 시작에 이어서 회상 비슷한 형식으로 돌입한다. ‘준’이의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회상 형식의 작품과는 달리 특이한 것은 각 장에서 ‘준’의 시점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친구들의 시점이 교차되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그렇게 ‘준’의 사춘기 시절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홀어머니와 누이, 동생과 함께 어렵게 살아가는 ‘준’이는 그 즘의 시각이나 오늘날의 시각에서나 다소 삐딱한 아이, 그러나 책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아이였다. 학교를 때려치우기까지 그의 불우하다면 불우한 이야기가 끝나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다가, 어느 일용직 막노동자를 따라 몇 년을 전국을 떠돌며 산 이야기를 끝으로, 회상(?)은 끝난다. 끝끝내 옛 여자친구(‘미아’)를 만나지 못하고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부대로 복귀하는 열차에 오른다. 이게 대강의 줄거리다. 

  성장 소설은 인정하자. ‘준’이와 함께 그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서 이래저래 살아가며, ‘성장’한다. 그러나 초점은 ‘준’이에 맞춰져야 한다. 우선 그는 반쯤 문제아다. 가족으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그리고 진정 자신으로부터 방황하고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글을 잘 썼던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가족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다고 그가 열심히 어울리는 친구들은 그저 도우미 정도일 뿐이다(노래방 도우미를 연상하자!). 그래서 그는 혼자 열심히 이 모든 것을 떠나고자 방황하고 도망(?)친다. 그가 사랑을 살짝 느꼈던 것 같은 ‘미아’로부터도 말이다.(왜 갑자기 ‘미아’를 베트남 파병을 앞두고 찾은 것일까? 그저 회포라도 풀 작정이었을까? 이런 쯧쯧. 사랑이라도 진하게 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했으련만.) 

  그 방황의 과정에서 ‘준’은 무언가를 찾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다. 하긴 세상은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싶다. ‘대위’라는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를 만나서 말이다. 그를 만난 것은 이 작품의 후반부쯤이지 싶다. 작품을 끝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싶기도 한데, 그에게 친구들이 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부분에서 ‘준’의 어떤 깨달음을 보자.

 

대위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 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리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라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방황 끝에서, 글쓰기를 통해서도 아니고, 막노동꾼을 따라 유랑하며 노동하면서, 깨달은 것 치고는 좀 허하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뿐이다. ‘개밥바리기’를 보며 ‘준’이는 “쓸쓸하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희망 하나를 새기는 문구 “잘 나갈 때는 샛별”이 왜 이리 공허한지 모르겠다. ‘개밥바리기’가 ‘준’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언젠가는 ‘잘 나갈’ 것이라는 헤픈 희망이 새겨진다. 왜? 단지 ‘개밥바라기’는 ‘샛별’과 같은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게 다인가? 온갖 방황과 고생 끝에 얻어진 것 치고는, 밤새 놀음을 하고 나와 초승달을 보며 느끼는 그 싸늘한 희망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비단 나뿐인가? 아무튼 황석영을 거세하고 보자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황석영’을 첨가하자면, 읽는 재미는 한층 나아진다. 그가 <무릎팍 도사>에서 풀어낸 인생역정, 파란만장의 썰을 대비하며 읽는 재미는 엄청나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적’ 재미와는 다른 것이 아닐까?

 

국제극장 골목에 줄지어 있던 어느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두주전자쯤 마신 날, 둘이서 시청 쪽으로 걷다가 부민관 건물의 화단 뒤로 움푹 들어간 그늘 앞에서 선이가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나를 차가운 벽에 밀어붙이면서 입술을 댔다. 첫키스를 했는데 나는 처음에는 얼떨결의 일이라 두 팔을 낙지처럼 늘어뜨리고 섰다가, 나도 모르게 한 팔은 그녀의 등을 감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그러자 선이가 그냥 내버려둔 채로 입술을 떼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렸다.

작지?

  이런 뭔가 올 듯 말 듯 한 어린 시절의 첫 키스의 찝찔 짜릿한 추억의 재미가 재미라면 재미고 ‘준’의 어설픈 첫 여자경험의 그 못남의 어처구니없음이 웃음이라면 웃음이다. 그러나 할 건 다 하면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그래서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우리 소희의 키스보다는 찌릿함이 떨어지고, 널브러진 포르노보다는 그 노골함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석영’을 거세하고는 말이다. 

  ‘황석영’이 가세하면 상황은 보다 흥미로워진다. 가령 자살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본다거나, 어떻게 하다가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을 키웠다거나(이 대목은 확인이 어렵다), 혹은 학교를 무엇 하다가 관뒀다거나, 학교 관두고 무엇하고 놀았다거나, 하는 대목이 황석영과 매치시키지 않고는 별반 재미날 것은 없는 에피소드일 뿐이다. 혹은 이런 대목에서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는데,

 

담임은 황새라는 별명의 국어선생이었는데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길쭉하고 팔과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말씨는 느릿느릿했고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언행을 보이면 입 양편에 비웃는 주름살을 지으며 냉소적인 말로 상처를 주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도 일단은 가차 없이 씹고 나서 한 줄씩 짚어주는 식이었다.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가을을 슬픈 계절이라고 보는 게 어쩐지 통속적이지 않나? 낙엽 태우는 연기에서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는 대목도 겉멋이라구 보이는데, 정서는 생활과 연결이 되어야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귀에서 목덜미까지 소름이 돋아요. 어떤 글이든 남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려는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다. 감정을 아끼고 담담하게 냉정하게 쓰되, 문장과 문장 사이가 중요하지.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나머지를 채우고 글을 함께 완성해준다.

  여기서 ‘황새’는 혹여 황석영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 정말 ‘황새’가 황석영의 국어 선생님이었다면 황석영이 그에게 글쓰기에 대한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겠구나 하는 추측, 그러면서 여기서 남모르게 담아 놓은 황석영의 문학론을 살피는 것 등이 재미라면 재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씨발……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라는 ‘씨발’ 때문에 ‘맨숭맨숭하지’는 않은, 쓸데없어 보이는 아포리즘이 별다른 감동은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황석영이 이 말을 듣고 “거기 씨발은 왜 붙여요?” 물으면서 개운한 웃음을 웃었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더 재밌을 거란 생각, 나만 그런가? 

  황석영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에서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썼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사춘기 시절의 방황을 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사춘기 아이들에게 일말의 공감은 형성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걸 ‘소설’로서 잘 풀어냈느냐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이 소설로서 가지는 어떤 장점이라는 것은 앞서서 언급한 형식적인 면일 것이다. ‘준’이를 중심으로 번갈아 교체되는 여럿의 1인칭의 시점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춘기 모습을 그리면서, 한 인물의 사춘기 시절을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 ‘준’이라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삶의 모습들, 사춘기의 일상과 정서를 보다 깊고 넓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어느 정도 상승시켜 준다고 볼 수 있다. 독특한 면이지만, 이것이 ‘준’이의 회상 형식과 중복될 때, 다소 부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준’이라는 인물의 총체적 삶의 모습(성장)과 동시에 다양한 인물 군상의 또 다른 성장이 중첩되면서 그 폭이 넓어졌다고 할 때, 이것이 ‘준’을 중심으로 열리고, 다시 ‘준’에 의해서 닫힐 때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듯 한 허함이 남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 소설은 황석영이 소설이 아닌 일종의 자서전적 수필로 담아내었다면,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의 이러한 삶은 보다 사실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려냈다면, 보다 유효하과 적절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소설’이라는 장르는 일종의 금상첨화와 같은 만남이지만, 때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개밥바리기 별』이 주는 교훈일수도 있겠지만, 황석영의 입장에서 그 소재들을 버리기 아까웠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아무튼 황석영이 앞으로도 그의 “문학적 연대기의 기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 이 “작품이 하나의 새로운 표지석이 되”기는 될 것이다. 그의 남은 생애 건필을 빌며, 졸렬한 이 글을 마치지만, 아쉬움은 다시 ‘황석영’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실 분들에게 권하자면, <무릎팍 도사>를 먼저 보시고,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 역도 가능하지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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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CAT 2009-01-08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 쯤으로 기억한다. 대학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소개하셨다. 그 강의는 <한문교육>이라는 전공 과목이었다. 전공이 국어교육이지만 한자와 한문도 국어의 일부일 수 있다는 취지의 교과과정이었을 것이다. 이 강의는 딱딱한 한자 한문 강의가 아니다. 감명 깊은 옛 문장들을 간추려 엮고, 그것을 통해 한자와 한문, 나아가 교양과 감성까지를 기르도록하는 강의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일까 매 수업시간마다 좋은 책들을 추천해지셨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책 『나무를 심은 사람』이다.

오늘은 교내 우체국에 일을보러 갔다가 근처 구내서점에 들렀다. 진열된 책들을 돌아보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잊고 지냈던 옛 친구를 만난 느낌이랄까, 반가운 마음에 이 책을 집어들고 서점에서 나왔다. 생각보다는 얄팍하고 겉보기에 내용도 빈약해보였다. 한 번 훑어보니 한 2~30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듯 싶었다. 일을 보고 사무실에 들어와 내쳐 이 책을 펴들고 읽어내려갔다. 빠르게 읽히면서 손쉽게 넘어갔다. 정말 30분도 안되어서 다 읽게 되었다. 시집만큼 작은 책에 글자수도 보통책보다는 적게 된 이 책은 한장에 고작 11줄 정도밖에는 안 된다. 그렇게 70쪽이 이 소설의 다다. 책에는 편집자와 역자의 글이 수록되어 140여 쪽 분량이지만, 그것마저 읽기는 1시간도 남는다.

황폐한 마을, 그 마을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람나는 냄새를 풍기며 어울려 지내던 곳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황량해진 아무도 거하지 않는 비루한 곳일 뿐이다. 산이며 언덕이며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는 바람만이 싸늘하게 불어온다. 장 지오노는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 소설로 풀어내고 있다. 장 지오노가 분명해보이는 화자는 이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엘제아르 부피에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사람을 이 지역에 살면서 매일같이 황량한 들판과 언덕과 산에 나무를 심었다. 3년에 걸쳐 쉬임없이  나무를 심어 모두 10만 그루를 심었지만 자라는 것은 2만 그루에 지나지 않고 그마저도 끝내 곧은 나무로 성장하기까지는 1만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엘제아르 부피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땅은 변화해갔다. 황폐하던 마을에 싹이 돋고 나무가 자라고 "물이 다시 나타나"고 "버드나무와 갈대가, 풀밭과 기름진 땅이, 꽃들이" 살아났다. 그리고 이 땅은 이제 "삶의 이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아주 짧은 내용의 짧은 글이지만, 그 울림은 너무 크다. 장 지오노는 이 글에서 엘제아르 부피에를 한 고귀한 성자와 같은 경지로 생각하는 듯도 하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달리 생각해 보게 된다. 황폐한 사막같은 곳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란 사람은 성자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말이다. 장 지오노는 이 소설에서 이 마을이 왜 황폐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짝 언질을 준다. "견디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밀치며 이기심만 키워 갈 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욕심만 키워 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하고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루 다투었"던 것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부피에 같은 사람은 이상한 사람, 즉 광인이거나 혹은 성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피에는 정상적 시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을 했던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은 다만 세상일 뿐이다.

이 글을 통해 환경의 문제를 새삼 돌아보고 위기의식을 가지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이기적이 되어가는 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묵묵히 나무를 심어갔다. 그것은 황폐한 사회에 희망을 심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바꾸어 보기로 결심"한 후 그것을 묵묵히 실천했던 부피에는 결국 "사람이라고는 단 세 명만이 살고 있었"던 마을을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런 부피에에 대해 장 지오노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그는 행복해질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은 사람"이라고.

이 글이 환경 문제에 직면에 우리에게 던져주는 큰 문제의식도 있지만, 나는 내 입장에서 조금 다른 울림을 얻었다. 이 황폐한 사회를 바꾸는 방법, 이 사회에 희망을 심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사회에서 엘제아르 부피에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된 지난 강의의 교재를 찾아보았다. 메모를 해두었던 곳을 살펴보니 이 부분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 즉, "한 해의 계책은 곡식을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십 년의 계책은 나무를 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평생의 계책은 사람을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란 유명한 문장이다.

아 이거다. 나는 사람을 심는 엘제아르 부피에가 되는 것이다. 나무를 심은 엘제아르 부피에가 결국에는 온 마을에 희망을 꽃피웠던 것처럼, 나는 이 땅에 사람을 심고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엘제아르 부피에 같은 사람들을 길러낸다면 이 땅은 희망찬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나무를 심은 부피에처럼 묵묵히 이 땅의 미래를 길러내는 사람이 되기위해 나의 능력과 심성을 닦아 나가야겠다. 사람을 심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목표이다. 너무 거창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면, 이 땅에 복되고 희망찬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이 땅은 바다보다도 넓고 깊게 행복에 겨워 살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담담한 포부처럼 내 포부도 담담하게 거창하다.(이 소설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 인터넷에 많이 돌고 있으니 찾아보시면 또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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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때 선생님의 권유로 본 작품이에요- 저는 애니메이션으로 봤었죠, 애니메이션도 짧지만 울림이 깊었고요~

멜기세덱 2007-11-07 20:25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찾아봤는데, 또 색다른 맛이 있더군요. 요즘 애들 취향은 아닌것도 같지만...ㅎㅎ

Jade 2007-11-07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꼭 12월에 시험 합격하셔서 제대로 된 사람을 기르셔요 ㅎㅎ

멜기세덱 2007-11-07 20:25   좋아요 0 | URL
내년 12월을 기대해 주세요....ㅎㅎ;;

딸기 2007-11-0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지요, 이 책! 애니메이션도 정말 좋았어요.
이 책 읽은 뒤로 장 지오노 좋아져서 막 사다 읽고 그랬는데...
벌써 그것도 오래전 일이네요. 십년도 더 지난...
울나라에서 아주 잠시, 붐...은 아니었고, ^^;;
장지오노 탄생 100주년인가 해가지고 여러권 나온 적 있었거든요.
저는 지붕위의 기병도 좋았고, 또... 암튼 다 좋았는데
'폴란드의 풍차'는 넘 다른 느낌이어서 놀랐었어요. 그것도 함 보세요.
애니메이션도 마음에 들어서 프레데릭 바크(캐나다 감독) 작품 구해다 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멜기세덱님 언제 선생님 되시나요. 꼭 좋은 선생님 되세요! ^^

멜기세덱 2007-11-07 20:27   좋아요 0 | URL
딸기님께서 그렇게 부추기시면 어떡해요...ㅋㅋ
장 지오노에 대한 관심까지 확 높이는 책이에요...ㅎㅎ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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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근작 『바리데기』를 읽었다. 잘 알다시피 서사무가 <바리공주> 이야기를 차용한 소설이다. 황석영의 그간의 글쓰기의 맥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다. 『손님』이라든가 『심청』이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바리(데기)공주> 이야기를 많은 이들은 한두번쯤은 들었을 법한 설화다. 어쩌면 듣지 않았어도 그 내용 쯤은 여하히 추측해 내고도 남을 만큼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설화다. 이 이야기는 현재 7차교육과정 중등 국어 2학년 2학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널리 알려진 설화가 어떻게 변용되고 차용되는지 황석영이 내어 놓은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겠다.

헌데, 이 책을 읽은 것은 이달 초다. 읽어내기까지 근 보름이 걸렸다. 잘 읽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니며, 별반 재미가 처져서도 아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럭저럭' 혹은 '그저그런' 정도라고 해야할까?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황석영이란 이름이 가지는 소설적 재미의 보증상표를 가지고 태어난 이 소설의 기본적 재미를 느낄 수는 있다는 점에서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겠고, 그 외에는 별반 얻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저그런'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황석영을 꾸준히 읽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는 소설가로서의 지위와 권위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어서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틈틈히 지켜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일찍이 황석영에 대한 어떤 외상外傷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그의 초기 단편들, 그러니까 그의 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한 「삼포 가는 길」등의 작품을 읽고 심심찮은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의 작품의도 등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은 영 지루한 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그의 장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외상의 공포을 떨올리지 않을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작품 『바리데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그런 외상의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이번 작품이 앞서 말한대로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여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이 작품은 보름이 넘게 걸려 마침내 읽어 내었다. 왜일까? 김훈의 『남한산성』도 하룻밤을 지새우며 다 읽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석영의 이번 소설도 하루만에 읽어내기에 충분한 이야기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별반 어렵지 않은 필치로 짜여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하루쯤 손에도 놓아도 좋을 만큼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석영은 내가 기대하기에는 그의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현대적(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떨떠름하지만)인 변주를 읽는 약간의 재미도 찾아 볼 수 있지만, 북한과 중국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제법 잘 구성한 요소들(이를테면 9·11테러라든가, 아프간 전쟁 등)을 짜맞춘 소설가의 재능에 탄복하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책 말미에 작가의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제가 19세기를 배경으로 『심청』을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바리데기』를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19세기의 제국주의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것은 <바리공주>이야기의 그 익숙함 만큼이나 상투적인 신자유주의의 면면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비참함과 폭력성 등의 폭로들 말이다. 이것은 현실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소설가가 그걸 작품으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뭔가 다른 깨달음(혹은 해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이 작품에 물었을 때 여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바리공주> 설화에서의 그 바리데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서사무가에서의 바리데기는 하나의 영웅의 일대기 구조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이 구시대적 영웅설화의 모티브까지도 있는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 즉 바리는 서사무가의 그 바리데기와 그 모든 것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바리데기』에서 바리는 영웅인가? 또한 그렇다면 작가가 신자유주의의 비참함을 폭로하고 그것을 분쇄하는 데에 얼마만큼 이 바리가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결국 아쉬움은 그거다. "분열과 증오와 죽임의 21세기 지구촌에서 생명의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란 물음에 황석영은 '숨은그림찾기'라며 어디 한 번 니들이 찾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숨은그림찾기에는 분명 '숨은 그림'이 있다. 하지만 여기 『바리데기』에는 숨은 그림은 없고 뻔한 그림만 있다. 이것이 못내 아쉬운 점이다. 바리가 신비하고 영험한 어떤 무속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마치 이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어떤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사무가에서 보이는 영웅의 구조처럼 이 사회에서도 그런 영웅의 존재가 출현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애써 옛날 옛적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차용하여 새로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뭔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변주하고 변용하였어야 했다. 새로운 모색이랄까? 그런 것이 없다. 이번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말이다.

황석영은 소설을 시작하기 전 진도아리랑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네". 바리의 일생이 그렇다는 것일테다. 우리 인생도 무수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수심이 가득할 것이다. 같은 노래에 이런 구절도 있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구부야 구부가 눈물이고나". 바리도 그렇고 우리네들도 험하고 험한 고개를 넘고 넘어 눈물의 세월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 『바리데기』가 애잔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진도아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며 그 많은 수심과 고개들을 흥겹게 넘어가고 있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저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라며 흥을 돋우기도 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치부를 들어내며 농을 떨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에는 그렇게 해학도 있고 재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마저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진한 아쉬움은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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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조용히 추천하고 가요.
 
눈물 1 세계신화총서 6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눈물'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이런 아주 단순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한다. 당황한다기 보다는 어이없어 한다고 말해야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학에서도 1에 1을 더하면 왜 2가 되는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은 고난도의 문제이듯이, 이런 단순한 것을 정색을 하고 물어오면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너무 단순한 질문이어서 질문 만큼이나 단순하게, "눈에서 나오는 물이지 뭐긴 뭐야!"라고 대답해 버리면 자신이 왠지 무식해지는 것 같고, 질문자의 농간에 놀아난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질문은 우리의 예상대로 그리 단순한 대답으로 해결되는 것들이 아니다. 너무나 어렵고 길고 끝이 없는, 결국은 무어라 딱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우리는 애써 그러한 어려움들을 피하고자 암묵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아예 단순화해 버렸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는 '눈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일단 '눈물'이라는 것은 '눈에서 나오는 물"이라는 생체 현상의 하나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것은 '눈물'의 기본적, 중심적 의미인데, 두루뭉술한 설명말고, 좀 고지식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생리학에서 말하는 눈물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생리학) [tear] 눈의 바깥쪽, 위쪽에 있는 눈물샘[淚腺]에서 나오는 분비액.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눈물은 각막표면을 광학적으로 균일하게 유지하고, 각막과 결막 표면으로부터 세포의 노폐물이나 이물을 물리적으로 세척해내며, 각막에 영양을 공급해주고, 항균작용을 하므로 눈의 광학적 특성과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정상적으로 안검(眼瞼)이 깜박 거리는 것에 따라 눈물막의 일부인 점액층을 각막과 결막의 상피표면에 도포하게 된다.

이는 아주 일차적인 '눈물'에 대한 설명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이러한 '눈물'의 정의에 대해 우리는 대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겠지만, 결코 이것이 '눈물'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러니까 "눈에서 흐르는 물이 눈물이지 눈물이 별 거냐" 하기에는 우리 인간에게 '눈물'이 갖는 무언가 다른 것들이 있다는 얘기다. 백과사전에서의 위와 같은 정의를 우리가 '눈물'의 완전한 설명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면 우리는 이제 국어사전으로 넘어가 보아야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의외로 '눈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눈-물 「명」눈알 바깥 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데,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

다른 국어사전을 하나 더 보자. 두산동아에서 나온 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눈-물 「명」①눈알 위쪽에 있는 누선(淚腺)에서 나와 눈알을 축이는 투명한 액체. 여러 가지 자극이나 정신적인 감동에 의하여 흘러 나옴. ②'동정'이나 '인정'의 비유.

이들 국어사전에서는 생리학에서 정의하는 눈물의 의미와 더불어 정신적 자극에 의한 '눈물'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국어사전의 설명들도 무엇인가 확실한 '눈물'의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하나의 생리학적 현상으로서의 눈물과 정신적인 감동에 의한 눈물을 우리는 조금 구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흘린다."고 할 때, 어떤 정신적 감동이나 자극에 의한 눈물을 의미할 때가 많다. 생리적으로 우리는 항상 눈물을 머금지만 그것을 잘 흘리지는 않는다. 눈물을 '흘릴' 때에는 무언가 다른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눈물'의 대체적인 의미는 거반 '흘린다'는 행위를 동반해야 할 때 비로소 정의된다. 그러니까 생리학적 의미로서의 '눈물'의 정의와는 몇 걸음의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눈물'은 흔히 비유적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 "눈물 없이는 못 볼 장면"이라거나, "눈물 흘릴 줄을 번연히 알면서 내 어이 찾아왔던고." 등에서 처럼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정이나 슬픔은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한 곧잘 사용되곤 한다. '눈물'은 문학을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의미를 취득하게 된다. 그 일례로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위의 시는 김현승 시인의 「눈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도 실려있어, 한번쯤 배웠을 만한 것이다. 여기서의 '눈물'은 동정이나 슬픔의 차원을 넘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의미를 취득하기도 한다. 이것 말고도 눈물에 대한 언급들은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그리고 예술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중문화에서도 '눈물'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이 '눈물'을 빼놓고는 극 진행 자체가 어려운 것들도 태반이다. 영화에서도 '눈물'은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을 정도이다. 예전에 '신파극'이라는 것도 엄연히 '눈물'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눈물'은 상업화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눈물은 각계각소에 내재해 있는 거대한 어떤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눈물'은 그 자체로 생리적 현상과 더불어 정신적 현상이 되었고, 나아가 문학적, 예술적, 사회적, 상업적 의미들을 취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총체적 의미의 '눈물'을 간단히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라 대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눈물'에 대한 성찰도 이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한 편의 현대화된 고대의 설화는 그러한 '눈물'의 뛰어난 성찰의 하나로 기록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중국 고대의 <맹강녀 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장편소설 『눈물』이다.

이 소설의 저자 쑤퉁은 "중국 진나라 때에, 만리장성의 역사(役事)에 얽힌 비극적인 전설의 여주인공"인 맹강녀에 얽힌 전설, 곧 "진시황의 장성 축조에 징발(徵發)된 남편의 겨울옷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벽에 쓰러져 우니, 갑자기 성벽이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골이 나타났다고 한다."는 설화를 각색했다. 여기에 저자는 제목을 '눈물'로 정했다. 이는 이 소설의 모태가 된 <맹강녀 설화>가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비극적 이야기라는 것과는 달리, 그 중심에 눈물이라는 소재를 부각함으로써, '눈물'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을 현대적으로 성찰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쑤퉁은 주인공 '맹강녀'를 '비누(碧奴)'라는 '눈물인간'으로 변신시킨다.

"비누(碧奴)는 도촌에서 태어났다. 꽃처럼 어여쁘고 맑고 단아한 그녀는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타고난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머리가 길고 숱이 많았다. 비누의 어머니는 살아생전 딸의 머리를 쓸어올려 빗겨주며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비법이 완전히 전수되지 않았다."(31쪽)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비누(碧奴)'라는 이름은 '눈물'과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碧(푸를 벽)'은 "눈동자가 칠흑처럼 새까맣고 커다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눈물을 달고 살 팔자"를 의미했다. 결국 '비누'는 눈물인간이 된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눈물을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야 하냐는 것이다. 그것을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에는 작가 쑤퉁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확실한 건 이 소설에서 '눈물'은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눈물'에 대한 금지를 보다 상징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눈물'이 생리적이면서도 정신적 작용인 것에 반해, 이에 대한 권력의 제재는 '눈물'이 가지는 인간으로서의 총체적 가치와 권리에 대한 착취와 폭력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있었던 비극"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행위인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한 금지는 인간에 대한 억압의 기제로서도 작용하지만, 더불어 인간 사회의 물신화, 기계화, 도구화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는 작가가 이 설화를 각색하면서 의도했던 하나의 주제의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사회, 나아가 비윤리화 비도덕화 되는 현 사회와 문화, 인간의 물신화와 도구화에 대한 우려 등이 이 '눈물'에 대한 성찰 속에 형상화 되고 있는 것이다.

눈물에 대한 금지는 애당초 '황족 간의 암투'에 비롯한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이는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에 대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착취로 읽혀진다. 이는 그 안에서의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피지배층의 의식변화는 '눈물이 금지된' 시대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폭압과 전횡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로서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가 그 원인이 된다. 나라의 온갖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죄다 끌고가 만리장성의 축조에 받쳐진다. 이러한 현실은 '금지된 눈물'과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모순을 만들어 내고, 급기야 인간 사회는 냉혹해지고 비인간화 되어진다. 아이를 때리면서 울지 못하게 하면, 그 아이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현실 인식은 그러한 미쳐버린 사회에 대한 형상화이자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인공 '비누'는 앞에서의 인용문에서도 보았듯이, 이 미쳐버린 사회에서 볼 때, 반쯤 모자라고 떨어진 인간으로 나타난다. 급기야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는 역설적으로 '비누'가 지극히 정상임을 의미하는데, 정신병원의 환자들 사이에서는 다만 의사와 간호사가 미쳐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비누'는 '눈물이 금지된' 이 사회에서 눈물을 제대로 감추지 못하는 사회의 미숙아다. 그것과 더불어 그녀는 "고아인 완치량(万豈梁)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 둘은 모두 이 소설 안에서는 모자란 인간들이다.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면서 그들은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아끼고 사랑했다. 어떻게 보면 눈물을 감출지 모르는 '비누'는 하나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나타낸다. 아이처럼 말이다. 어른들은 눈물을 감출 수 있는 가식이 있지만, 아이들은 울고 싶은 땐 울어야 하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순수함이 모자람으로 인식되는 사회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라도 이 소설에 형성된 상황 자체는 하나의 현대적 사회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아도 족하다.

이야기는 완치량이 사라지면서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만리장성 축조를 위해 어느날 갑자기 끌려간 것이다. 이렇다할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완차량 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모두다 끌려가고 만다. 그러나 남편들이 끌려간 아내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 '비누'와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비누'는 남편을 위해 겨울옷을 마련해서 만리길의 북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먹고 살기 바빠, 끌려간 남편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대비에서 우리는 '비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여자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비누'의 남편에 대한 그 헌신적 사랑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미쳐버린다. 급기야 인간은 도구화되고 기계화된다. 왜일까? 그것은 '눈물을 금지' 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눈물'이라는 인간의 육체적 기본 행위에 대한 억압과 더불어 그것은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억압이었기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제지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도구화로 이어진다.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기 힘들어진 세상, 그 세상을 작가는 '눈물'을 빼앗긴 세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글은 그 물신화 도구화 현상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행여 누가 됐든 우리를 사서 쟁기라도 끌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 큰 가축이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하지만 산지 여자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 가축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못 생겨 싫다 하고, 멍청하다고 마다하니 결국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아 여기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우."(111~2쪽)

또한 인간성의 비윤리화와 비상식화, 비도덕화를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비누'를 본 아이가 "저기 인간짐승 하나가 또 와요! 돌멩이 하나 주세요!" 하면서 '비누'에게 돌을 던진다. '비누'는 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그렇게 높은 곳에서 잘못하다 떨어지면 크게 다칠 테니 조심"하라며 아이를 걱정한다. 그런데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총에 맞고도 욕을 하기는커녕 내가 떨어져 다칠까봐 걱정을 하고 난리예요! 저 여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105쪽)

사회는 이렇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 속에서 '비누'는 "머리가 어떻게 된" 인간일 수 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이 '비누'에 대한 이 사회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네! 도촌에 웬 정신 나간 여자가 상사병에 걸려서 청개구리 한 마리 데리고 남편 찾으러 떠났다너니 바로 당신이군요!"(108쪽)

남편을 찾아 그 먼길을 떠난 '비누'는 그 사회에서는 정신나간 여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누'는 이런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내가 내 남편에게 입힐 겨울옷을 가져가는데, 상사병은 무슨 얼어죽을 상사병이야? 난 그런 병에 걸린 적 없어. 세상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나가 노역을 하며 겨울을 보낼 남편 걱정을 안 할 여자가 어디 있어? 있다면 그게 미친년이지!"(108~9쪽)

이러한 차이 가운데, 우리는 비누의 말과 위의 다른 여자들의 말 사이에 다른 차이를 감지할 수도 있다. 곧 표면적 어조에서 여자들의 말은 점잖은 반면, 비누의 말은 단호하고 격하다. 이것은 이 사회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순수함의 강변으로도 읽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결국 이런 비누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비누는 "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인간시장에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비누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녀의 눈물이 '특별한 눈물'이 된 것은. 이러한 '비누'에게 다가오는 것은 "발가락의 피 맺힌 물집 사이로 계곡물이 흐르듯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손바닥도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는 것 뿐인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는" 단 한사람 '비누'는 그렇게 '눈물인간'이 되가는 것이다.

세상은 '눈물인간'에게 어떠한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눈물이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말처럼 잘 뛰는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새처럼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리고, 일 년 내내 웃는 얼굴의 사람을 위해 다리를 내린 그들이 눈물을 를리는 사람에게는 다리를 내리지 않"(163쪽)는다. 이는 인간이 기계화된 사회에 대한 실날한 비판으로 읽히지 않는가? 눈물을 흘리는 인간의 순수함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비누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억압과 인간의 물신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순수한 사랑과 눈물은 부족하고 모자란 인간일 수 밖에 없게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비누'와 '완치량'이다. '비누'는 금지된 눈물을 '감추지 못 하는'는 어리석고 모자란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비누'를 모자라다고 인식하는 다른 인간들은 "눈물을 감추는 방법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이는 현대사회와 물질문명, 그리고 자본화 된 사회 속에 완벽히 적응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의 물신화를 야기하고  순수함을 잃어버린 인간 사회의 비판으로 이 소설을 읽어볼 수 있지는 않겠는가? 적어도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눈물'이라고 한 것은 '눈물'이 가지는 다양한 인간적 문맥들, 즉 인간의 생리적, 정신적, 문화적 전반에 대한 다양한 기본적인 권리와 욕구들이 어떻게 억압되고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망쳐놓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재밌는 것은 황제의 죽음을 두고 '비누'의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를 진쑤의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작은 눈, 생쥐 수염, 손목에 새겨진 도적이라는 두 글자". 황제의 죽음을 도적이었던 진쑤의 죽음과 "나란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닌 것이다. "손목에 황제라는 두 글자가 새겨 있을까?"하는 그 의문에서 서술자는 "그녀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황제'와 '도적'이 동의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 이 기나긴 리뷰를 여기서 불현듯 마감하기로 하자. 이야기의 줄기야 다들 짐작하고 있지만, 작가가 '눈물'을 보는 인식은 대개 이런 쪽으로 읽어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것이다. 그것이야 어쨌건 간에, 우리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눈물'을 잃어버린, 어쩌면 금지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고대의 전설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보다 리얼한 오늘날의 현실 인식을 찾아보기도 어렵지 않을까? 오늘날 '눈물'에 대한 인식과 다음과 같은 '사내아이들'의 입을 빌린 소설의 진술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나는 "다르지 않다."에 걸 수 밖에 없겠다.

"빗물이야 논밭을 비옥하게 하고, 강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도랑물은 들풀을 자라게 하고, 연못의 물은 물고기를 잘 자라게 한다지만 사람의 눈물은 대체 어디에 쓰느냐 이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값어치 없는 게 바로 눈물이라고!"(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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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27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도 여전히 새벽에 글을 쓰시는군요..ㅎㅎ

멜기세덱 2007-08-27 01:45   좋아요 0 | URL
오늘까지 써야하는 거라서요...부랴부랴....아 써놓긴 했는데,,,완전 뒤범벅이에요....ㅋㅋ

짱꿀라 2007-08-27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새롭게 다가 오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의억압, 인간의 물신화, 눈물이 막혀버린 세상..
뭐든 제대로 흘러나와야 바람직하다 생각해요. 554쪽 글귀는 반어법이라 믿어요^^
성실한 리뷰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감사^^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라스 에이브람스 지음, 홍성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돈 주앙, 그의 이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간혹 모르는 척하기도 하는 이 시대 '부끄러운' 욕망의 고유 명사다. 흔히 "플레이보이의 대명사로" 카사노바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그는, 카사노바와는 또 다른 특색들을 지니면서 보다 음험한 호색한으로 카사노바와 차별성을 가져왔다. 카사노바가 역사적 실존 인물임이 확실시되는 반면, 돈 주앙의 실존성 여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실존 인물 돈 주앙 테노리오가 이 돈 주앙의 모델이라는 설이 있지만, 돈 주앙이 실존했던 인물이건 아니건, 오늘날 우리에게 돈 주앙은 그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차를 내재한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돈 주앙 문학의 시효로 여겨지는 스페인의 극작가 몰리나의 『세비야의 호색한과 석상의 초대』(1630) 이후 다양한 장르로 각색되고 재탄생한 '돈 주앙'이 곧 오늘날 우리 인식 가운데 존재하는 '돈 주앙'의 가장 진실된 모습일 뿐이다.

몰리나의 작품 이후 근 500여년간 수많은 돈 주앙이 공식 혹은 비공식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 작품들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바(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뒷 편에 <옮긴이의 말>에서 그 대표작들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http://blog.naver.com/donjuandiary에서 돈 주앙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것들의 목록을 여기서 늘어놓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비공식적 돈 주앙 이야기들의 목록을 가늠해보는 것은 거반 불가능하리라 여겨지지만, 내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공식적 이야기 중 하나일 수 있는 일종의 돈 주앙 야설을 접해 본 경험이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등학교 때 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아이들이 어떻게들 구했는지 요상스런 이야기책들을 여러 명이 돌려보곤 했다. 대부분이 무협지 비슷한 것들이고, 간혹 성교육 교재 그 이상의 것들도 돌았다. 그 중 하나가 돈 주앙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 밝혀두지만, 나는 당시 이른바 대표적 모범색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책을 서로 돌려보던 가운데 나도 잠깐 구경할 수 있었던 기회가 생겼고 몇 쪽 넘겨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그 후 그 책을 틈틈히, 그러나 은근슬쩍 정독했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돈 주앙과 뭇 여성들의 성애의 묘사가 무척이나 리얼하면서도(나는 아직 그것이 진정 리얼한 것인지 의문이지만) 선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을 나는 알지 못 했다.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리즈의 중간의 어디 쯤이었으니까.

돈 주앙이 등장하는 작품이 다양한 만큼, 그 다양함의 각각들을 접해본 독자(또는 관객)들에게 동 주앙의 모습은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다. 그 당시 이후 나의 돈 주앙은 일종의 섹스머신 혹은 섹스의 제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각양각색의 돈 주앙의 모습에(어느 정도 공통 분모를 가지고는 있겠지만) 맞고 틀림이 있을 수 없다. 돈 주앙 테노리오의 실사(實事)를 대조해가면서 따지고 볶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돈 주앙은 그만큼 역사로부터 멀어졌고, 그 멀어짐으로부터 다양한 모습의 실체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이 책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이하 『잃어버린 일기』)는 또 하나의 돈 주앙을 그리려고 했다. <옮긴이의 말>에서처럼 "동양적 세계관으로 새롭게 조명"했다거나, BBC에서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거나, 이 책의 홍보물 등에서 말하듯이 돈 주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돈 주앙의 재해석이라며 이 책을 곳곳에 알리고 있다. 이것은 돈 주앙이란 이름을 알 만한 사람에게 매우 관심을 끌게 만드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이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의 돈 주앙에 대한 호기심에 비례한 만큼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재해석의 신빙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잃어버린 일기'에 바탕을 둔 팩션이라는 전략을 택하고 있어 관심을 배가시킨다.

또한 이 책은 『다빈치코드』를 펴낸 출판사에서 발굴한 것으로, 그 출판사가 대대적으로 투자한 만큼 그 재미와 흥미에 대한 의심할 여지를 줄이게 만든다. 띠지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25개국에 판권이 팔린 화제의 소설"이라는 문구라든가, 이 책의 공식블로그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전 세계 20여개 언론사를 초청한 프레스 투어"라는 문구에서 이 책을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전략과 이 책이 얼마만큼이나 상부할지는 사서 읽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고, 나도 읽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확실했다.

사실 『다빈치코드』로 재미를 본 출판사의 안목은 그리 좋은 것은 못 된다. 『다빈치코드』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이것이 다루는 제재의 민감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소설로서의 완성도와 작품성은 그리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성공의 이유는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의 반증으로 소설『다빈치코드』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상대적으로 별반 성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만큼 원작의 단순한 추리적 이야기성이 영화로 시각화되었을 때 극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좋지 못 한 안목의 출판사에서 펼치는 상업 전략을 우리는 조금 의심해 보아야 하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책 『잃어버린 일기』가 출판사의 상업 전략과 얼마나 합치되고 불일치되는지를 따져 보도록 하자. 우선,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표지에는 "400년 만에 발견된 돈 주앙의 일기를 소재로 한 역사 팩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원본 일기의 서지사항 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책의 공식 블로그를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다. <편집자 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이 일기의 우연한 입수 과정 또한 하나의 허구일 뿐이란 의문이 간다. 설혹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픽션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또한 이 돈 주앙이 '역사 팩션'이 될 때의 그 문화적, 문학적 가치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재적 의미에서의 다양한 돈 주앙의 모습이 제각기 진실일 따름이다. 그렇게 볼 때 '일기'를 들먹이며 '역사 팩션'임을 주장하는 것은 소설적 전략이면서 홍보 전략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어 보인다. 먼저 소설적 전략으로써의 '일기'의 틀은 작중 화자의 내면에 독자가 깊숙히 침전하면서 동일시를 이룰 수 있어,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있게끔 기능한다. 이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흥미를 내재하고 있다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읽는 재미를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기본적 이야기의 흥미로움을 갖추고 있을 때 얘기다.

다음으로 이 책이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재해석"을 보여주고 있는지의 여부를 가려보자. 기존의 돈 주앙에 대한 해석이 호색한으로서의 악한의 이미지로 돈 주앙이 묘사되고, 그런 돈 주앙의 행위에 대한 권선징악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공통분모를 뽑아 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와 다른 묘사, 그와 다른 결과, 그와 다른 어떤 해석의 여지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나의 내공의 부족에서 오는 것일까? 눈을 씻고 찾아보아야 하겠지는 나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이 책의 전반적 줄거리는 짧게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출생의 비극을 가지고 태어나 버려진 고아 돈 주앙, 그가 여성 편력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삶의 여정, 이 소설의 악의적 인물에 의한 일종의 양육, 그로 인해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악에 대한 동조, 주인공의 내적 외적 갈등, 돈 주앙을 각성케하고 변화시키는 구원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돈 주앙의 진정한 사랑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고전 영웅 소설에서 보이는 '영웅의 일대기적 구성'의 약간의 변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만큼 그 구도는 고전틱하다. 진부하다는 얘기다.

주인공 돈 주앙의 여성 편력의 행각은 그간의 여타 작품들과 대동소이하다. 다양한 여성을 상대하는 점에서 대동(大同)이라면, 성애의 묘사 등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는 점에서 소이(小異)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읽을 수 있었던 야설보다도 흥미는 절대적으로 반감될 뿐이다. 대동에서의 진부함과 소이에서의 흥미의 반감, 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 이유다. 이미 말 했듯이 '일기'라는 기술 전략은 이 흥미의 반감과 함께 기법적 전략의 성공을 저해시킨다.

주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돈 주앙 문학이 인과응보적, 악에 대한 처벌적 주제로 이루어졌다면, 이 소설은 그 점에서 정반대로 포장되어 있다. 돈 주앙의 죽음을 강하게 암시하며 이 소설은 끝나고 있지만, 돈 주앙은 여성을 농락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일종의 반성을 경험하며 진정한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성취하는 반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개과천선이다. 이것이 다른 해석, 곧 이전의 진부한 해석과의 차별성이라면, 동전의 양면으로 우릴 우롱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과응보라는 진부한 주제의 결말의 한쪽면에 죄에 대한 처벌이라면, 그 다른 면은 천선에 대한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다섯살짜리 어린아이도 몸소 체감하는 너무나도 쉬운 논리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재해석이라는 홍보성 멘트는 기존의 진부한 해석이 당연히 내재하고 있었던 주제의 동전을 살짝 뒤집어 놓고 "이것은 다른 동전"이라고 당당히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 소설의 마무리를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마무리 또한 작가의 의도적 전략이 숨어 있다. 돈 주앙이 마무지 짓지 못한 일기, 곧 이 소설의 결말을 돈 주앙의 마부였던 크리스토발의 회고로 대신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열린 결말'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래 간직했던 돈 주앙의 일기를 자신의 임종 직전에 알마에게 전하며 쓴 이 크리스토발의 회고는 돈 주앙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 한 일종의 풍문으로 전하며, 돈 주앙의 생존 가능성을 살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행복한 돈 주앙의 후일담을 상상하게 만드는 전략인 것이다. 자체로 하나의 해피엔딩인 셈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 일종의 희미한 해피엔딩 전략이 보다 더 이 소설을 기존의 진부한 결말과 더욱 동질성을 갖게 되는 데에 있다. 개과천선하면 자손만대 행복해야 하는 것이 고전의 절대 공식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이 책 『잃어버린 일기』의 리뷰를 때리기식으로 매도한 것에도 불구하고 별 세 개를 준 이유는 "풍부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에 찬찬을 금할 수 없다."는 프랭크 매코트의 찬사나 "16세기의 도시 세비야. 이 신비한 도시"의 배경을 세밀히 묘사한 것, 그리고 "베껴 쓰고 싶을 만큼 멋진 사랑의 경구들이 가득하다."는 로버트 오시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밑줄 거둘 만한 구절들을 간략히 옮기면서 잔혹한 리뷰를 마치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는 부실하겠지만, 심심풀이로 읽기에는 이 책이 그만큼에 값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읽을 이는 읽을 것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간에 말이다.

"비밀 하나 이야기해줄게, 크리스토발.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16쪽)

"여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조금이라도 노력해본 남자들은 그 보상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지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잔인한 시대에 여자를 이해하려는 남자들은 거의 없고, 가장 하찮은 사랑의 손길을 갈구하는 여자들은 수없이 많다."(38쪽)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이 가진 뛰어난 능력 중 하나이다. 그 능력은 남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47쪽)

"결투에서 절대 질 수 없는 사람은.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117쪽)

"욕망은 인간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신은 여섯째 날 동물들과 함께 욕망을 창조했다. 욕망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166쪽)

"모든 여자에게 신경 쓰는 건 곧 어떤 여자에게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178쪽)

"여자의 욕망의 강이 비금속을 황금으로 만드는 연금약액(練金藥液)이 아닐까? 여자의 문을 통해 영원한 삶을 찾을 수 없다면 조물주의 창조 행위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아닐까?"(190쪽)

"죽음과 삶은 끊임없이 얽히고, 불길한 죽음의 징조는 종종 열정을 부추긴다. 생명은 항상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길 바란다. 알마가 그렇게 말한 것도 그러한 욕구 혹은 몸에서 들리는 생명의 외침 때문일 것이다. 시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모든 여자에게 찾아온다."(309쪽)

"'내가 말했지….' … '어떤 검술에서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서…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건 거짓말이었어.…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 '그건….' … '사랑에 빠진… 남자겠군요.'"(355쪽)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혼의 비밀은.' … '한 여자를 통해 모든 여자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군요.' … '맞아, 모든 여자의 모습은 각각의 한 여자 안에 들어 있고, 모든 남자의 모습도 각각의 한 남자 안에 들어 있지.'"(361쪽)

"사랑 없는 쾌락은 고기 없는 양념, 음식 없는 미각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 쾌락 없는 사랑은 양념 없는 고기, 맛없는 식사와 마찬가지다. … 진정한 열정적인 사랑은 매일 새로워지는 연회일 것이다."(3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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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멜기님 ^^
성애의 묘사가 부실하다니 쳇!
그렇다면 돈주앙을 읽는 아무 의미가 앖자나욧!

:) 추천~~!

멜기세덱 2007-07-05 23:08   좋아요 0 | URL
체셔고양이님의 페이퍼가 훨씬 재밌다고 알차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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